석류가 붉어지는 시간
가을이 제 속을 열어 보인다. 푸른 잎 사이로 붉은 석류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누가 건드린 것도 아닌데 단단하던 껍질이 갈라졌다. 그 틈으로 붉은 알갱이들이 얼굴을 내민다. 작은 보석들을 한 움큼 품은 듯 눈부시다. 얼마나 오래 저 속을 채워 왔을까. 열매는 아무 말이 없는데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이나 발을 떼지 못한다.
석류는 참 이상한 열매다. 다른 과일들은 익을수록 껍질이 고와지는데 석류는 익을 만큼 익으면 제 몸에 금을 낸다. 매끈하던 얼굴이 거칠어지고, 팽팽하던 살갗이 벌어져 속을 드러낸다.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저토록 단단한 껍질 안에 저토록 여린 것들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알맹이마다 빛깔이 조금씩 다르다. 햇살을 오래 받은 것은 진홍빛이고, 그늘에 묻힌 것은 연분홍빛이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색을 잃지 않았다. 마치 한집에서 살아온 가족 같다. 같은 바람을 맞고 같은 계절을 지나왔어도 마음의 빛깔은 모두 다른 법이다.
어릴 적 뒤뜰에도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면 어머니는 잘 익은 석류를 따서 반으로 갈라 주셨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붉은 알갱이를 하나씩 집어 먹으면 새콤한 물기가 입안에서 터졌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작은 열매 하나를 익히기 위해 나무가 봄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견뎌야 하는지.
어머니의 손도 석류를 닮아 있었다. 젊은 날에는 희고 고왔을 손등에 세월이 지나며 잔주름이 늘었다. 손마디는 굵어지고 손바닥에는 거친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그 손으로 지어 주신 밥은 언제나 따뜻했다. 겉은 늙어 가는데 속은 더욱 깊어지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석류나무에 바람이 분다. 벌어진 열매가 가지 끝에서 가볍게 흔들린다. 금이 간 껍질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붉은 알갱이들이 잠시 반짝이다 다시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도 저렇게 익어 가는 것일까. 젊은 날에는 마음을 감추는 일이 익숙했다. 슬퍼도 웃어야 했고, 아파도 괜찮은 척했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는 단단한 껍질 속에 묻어 두었다. 세상이 나를 흔들지 못하도록 마음의 문을 꼭 닫아 두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니 조금씩 달라진다. 오래 품었던 슬픔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게 되고, 부끄럽게 여겼던 눈물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에 생긴 금이 반드시 불행의 흔적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틈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때로는 타인의 아픔도 보인다.
가을은 이상하다. 무언가를 잃어 가는 계절인데 오히려 충만하다. 나무는 잎을 내려놓고 들판은 곡식을 거두어들이지만, 그 빈자리마다 지나온 시간의 향기가 남는다. 석류 역시 제 속을 내보이며 가을을 완성한다.
문득 석류를 한 알 떼어 입안에 넣어 보고 싶어진다. 달콤함 끝에 찾아오는 시큼한 맛. 어쩌면 그것이 살아온 날들의 맛일 것이다. 기쁨만으로 채워진 인생이 어디 있으랴. 환하게 웃었던 날도 있었지만 남몰래 눈물을 삼킨 밤도 많았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시간이 내 안에서 하나의 열매를 익히고 있었다.
석류의 붉은빛을 바라보다가 내 가슴속에도 작은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 날 심어 놓은 꿈들이 아직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어떤 것은 이미 익어 세상에 내놓았고, 어떤 것은 여전히 푸른 껍질 속에서 계절을 기다린다.
글을 쓰는 일도 다르지 않다. 한 편의 글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많은 기억이 속에서 익어야 한다.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어느 날 문득 문장이 되어 흘러나온다. 때로는 마음의 오래된 상처를 건드려야 비로소 한 줄의 글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잘 쓴 문장보다 오래 익은 문장을 좋아한다. 말이 화려하지 않아도 그 안에 살아온 시간이 고여 있는 글.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아 한참 동안 머무는 글을 쓰고 싶다. 석류나무 아래 서 있는 동안 바람이 몇 번이나 지나갔다. 잎 하나가 발치에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벌어진 석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제 안의 붉은 생명을 세상에 보여 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도 저렇게 늙어 가고 싶다. 겉모습이 예전 같지 않아도 괜찮다.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에 흰빛이 내려앉아도 좋다. 다만 마음만은 오래 익은 석류처럼 붉었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건넬 따뜻한 말 한마디, 힘겨운 사람의 손을 잡아 줄 작은 사랑 하나쯤은 끝까지 품고 살고 싶다.
가을 햇살이 기울자 석류의 붉은빛도 조금씩 깊어진다. 벌어진 껍질은 상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기가 고여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전 어머니의 손을 떠올린다. 석류를 갈라 내 손에 쥐여 주시던 그 따뜻한 손. 이제는 다시 만질 수 없는 손이지만 그 온기만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어쩌면 사랑도 석류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오래 품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때 비로소 제 빛깔을 드러내는 것. 석류나무를 떠나며 다시 한번 돌아본다. 갈라진 열매 하나가 저녁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난다.
가을이 깊어간다. 내 삶도 저렇게 익어 가고 있을까. 아직은 다 열어 보이지 못한 마음이 있다. 오래 품어 온 그리움도 있고, 끝내 건네지 못한 말도 있다. 서둘러 꺼내 놓지는 않으련다. 익을 만큼 익으면 언젠가 저절로 열릴 테니. 석류는 제 몸이 갈라져야 비로소 속에 품은 붉은 사랑을 보여 준다. 가을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그것이었다. 사람도 오래 익어야 제 안의 사랑을 꺼내 놓을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