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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10월 3일 이곳을 축성한 이후에 첫 번째로 미사를 드리시는 분들입니다.
충청방, 대구∙경북방, 그리고 강원방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축성식 날 90이 넘은 제 모친이 이 자리에 참석하셨었어요.
다들 보고 깜짝 놀랐죠. 60대로밖에 안 보이니까.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어머니한테 ‘어머니, 어쩌면 이렇게 피부가 깨끗하고 젊어 보이세요?’ 하니
우리 어머니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껍데기만 그래요.’ 하셨대요.
저한테도 많은 교우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은퇴하신 다음에는 오히려 더 젊어지실 것 같습니다.
그런 얘기할 때마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껍데기만 그래요.’ 합니다.
이것저것 속에 있는 병들이 많죠.
그중에서 사실 제일 힘든 게 이 눈이에요.
녹내장과 황반 변성이 오니 책은 거의 포기했습니다.
몇 줄을 읽지를 못해요.
밤에 운전하는 것도 거의 할 수가 없고요.
진행 안 되게 하는 보조제 약 같은 걸 먹고 있는데, 그래도 다행히 저는 닫히는 속도가 아주 느리데요.
이 황반 변성은 빛에 제일 약해서 햇빛 같은 것에 통증이 와요.
그래서 색이 바뀌는 안경을 써야 해요.
그런데 지난 10월 3일 미사가 동영상으로 나갔는데, 댓글에 ‘신부님, 건방지게 왜 선글라스를 끼고 미사 하십니까?’가 있었어요.
왜 남의 사생활에 이리도 관심이 많으신지, 설령 선글라스를 끼고 한다 한들!
그건 마치 뭐 같으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말은 듣지 않고 ‘저, 요셉의 아들 아니야? 저 목수의 아들 아니야?’
내가 이런 것까지 해명해야 하나 싶으나 이 자리 빌어서 공개적으로 얘기합니다.
‘이거 선글라스 아니에요.’
10월 3일 비록 동영상으로도 축복이 내려가잖아요.
그것을 생각해야지 그냥 엉뚱한 얘기를 댓글로 달고.
선글라스 썼냐고 나한테 댓글 단 양반은 앞으로 말조심하십시오.
물론 사제의 일거수일투족에도 관심이 많죠.
난 이것 안 써도 멋있어요.
아무튼 여담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참 이상한 데 있다는 것을 제가 느낄 때가 있어요.
오늘 말씀의 주제는 ‘잔치’입니다.
여러분들 신앙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대답)
여러분들이 박해 시대에 살았다면 지금 그 말이 나올까요?
지금 어려운 건 그때 비하면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그때는 목숨을 걸고 천주교 신자로 살았잖아요.
그렇지만 아무튼 우리 어려워요, 어렵다고 생각해요.
성당에만 가면 하느님 뜻대로 살려고 하라고 그러는데 힘들죠.
또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 억울할 때도 너무 많아.
그냥 성질대로 해버리고 싶을 때도 많은데, 천주교 신자 때문에 참아야 할 때도 많고 속상하고 약 오르고 서럽고
천주교를 포기하고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끝까지 항구하게 내 십자가 내 고통 버리지 않고 죽음의 순간까지 쥐고 갈 때 어디에 초대받는다고요?
‘하늘나라 축제’
그 축제에는 어떤 것이 있냐? 오늘 1독서에 나와요.
하느님께서 연한 살코기에 잘 익은 술을 준비해서 그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 잔칫상에서 이 세상을 살면서 흘렸던 눈물을 하느님이 직접 닦아주실 것이고 어두웠던 너울을 거둬주실 것이고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다.
너울이라는 게 뭐예요? 가리는 거예요.
그것도 거둬주실 것이다.
그리고 억울하게 살았던 사람에게 ‘내가 다 알고 있었단다. 그러니까 마음 풀어, 내가 다 알고 있잖아.’ 억울함도 풀어주신다.
이러한 천국 잔치가 없다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고 신앙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맞죠? 우리 천국 가기 위해 살잖아요.
지옥 가기 위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없죠,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오늘 복음에 초청된 인간들은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중에서 특별히 열심히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였어요?
율법학자랑 바리사이파들.
그런데 그들을 초대했는데 잔치에 왔어요, 안 왔어요? 거절했어요.
오라고 해도 안 오고 먹으라고 해도 안 먹었어요.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엉뚱한 사람들을 불러들이죠.
길거리에 나가서 하늘나라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이 됐던 죄인들, 이방인들, 길거리의 여인들, 세리들을 불러들이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응하질 않고 다른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주 돈이 많은 부자 영감님이 사셨대요.
아버지가 부자니까 자식 며느리가 얼마나 잘했을까요?
뭐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서 이 아버지가 어느 날 의심이 들기 시작하더래.
내가 과연 돈이 없어도 이놈들이 나한테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앞을 다퉈서 찾아오고 할까?
그래서 어떤 소문을 냈냐? 망했다고, 쫄딱 망했다고 소문을 냈죠.
소문을 내고 난 다음에 생일날 자녀들을 불렀어요.
그랬더니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다 바쁘다고 안 왔어.
한마디로 돈이 바닥난 것을 알고 자식들은 전화 한 통을 걸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감님은 그 많은 돈을 자식들한테 1원도 안 주고 사회단체에 다 기증하고 죽었대요.
오늘 이 잔치의 성격은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 번째 ‘기쁨이 넘치는 초대받은 잔치’예요.
여러분들, 글쎄요. 마지못해 끌려온 분이 몇 명일지 모르나 얼굴 보면 쓰여 있어요.
시계만 보고 ‘저 신분 강론도 더럽게 길다.’ 하면서 앉아 있는 사람,
하느님이 여러분들 초대하셨죠.
이 초대는 제일 첫 번째 ‘기쁨의 초대’예요.
오늘 미사 여러분들 기쁘게 오셨죠?
청와대에서 초청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그 전날 잠 올까요, 안 올까요? 안 오죠.
구두도 몇 번 닦고 옷도 이것저것 수십 번 갈아 입어보고.
그런데 여러분들 주일 미사 가기 전날 잠 못 주무시는 분 있어요?
아마 어제는 있었을 것 같아. 그렇죠?
유튜브로만 보던 신부님 오늘의 드디어 보는구나.
유튜브로만 듣던 신부님이 고생해서 만든 치유의 정원을 오늘날 드디어 가는구나.
다락방에서 미사 드릴 때는 예약자가 밀려 있다 보니 1년이 돼야 올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눈 올 때까지는 여기서 미사 하기에 이제 그것은 해제가 됐어.
우리는 분명히 미사 때 하느님 만나러 옵니다.
그분이 초대하셔서 그런 겁니다.
그렇기에 발걸음은 기쁘고 가벼워야 하죠.
그리고 행복해야 해요.
그런데 하느님이 초대하지만, 이런저런 핑계 대고 오지 않았던 적 우리 있었죠.
솔직히 그저 가기 싫어서.
억지로 끌려오는 그런 마음의 주일 미사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주일 미사를 왜 오냐?’고 물었을 때 많은 사람이 뭐라 그랬냐?
‘고해성사 보기 귀찮아서 온다.’ 그랬대요.
과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미사의 은혜를 받고 돌아갈 수가 있을까?
청와대에 가고 대통령의 초대와 비교도 안 되는 초대인데,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갖고 올 수 있을까?
여러분은 분명히 기쁘게, 행복하게 살려고 오늘 이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아멘.
그래서 저는 늘 미사 후에 기쁘게 살자고 그래요.
일반 신부님들은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기쁨을 전합시다.’ 하시죠.
그래서 난 껍데기 벗겨버리고 알맹이를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기쁘게 삽시다.’
오늘 받은 은혜,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죠? 기뻐야 복음 선포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기쁘게 못 살까? 두 가지 이유예요.
첫 번째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어요.
살아계신 하느님을 못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나는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활자화된 하느님이 아니라
너의 살아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려주세요.
피정 때 눈물 펑펑 흘리잖아요. 하다못해 유튜브를 듣고도요.
정말 신부님 강론이 하루 종일 내 마음을 헤집어 놓고 나를 회개시켜요.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첫 번째는 말씀이에요.
두 번째는 성사예요.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시킨 다음 합당한 영성체를 할 때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세요.
그래서 늘 얘기했잖아요.
‘영성체한 다음 이 손은 내 손이 아니다. 2천 년 전 환자들을 만졌던 예수님의 손이요, 마귀한테 불을 줬던 예수님의 손,
나병 환자의 상처를 만졌던 그 손이기 때문에 영성체한 직후에는 성가 부를 때가 아니라
자리에 앉아서 내 손을 가지고 스스로 치유를 시작해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세 번째는 체험이에요.
그런데 체험도 기쁨의 체험보다는 고통의 체험 속에 하느님을 더 쉽게 만나요.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죠.
여러분들, 가슴, 심장 쪽에 한 번 손대보세요.
그리고 따라 해보세요.
‘심장님, 오늘 이 순간까지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팔딱팔딱하며 피를 보내고 뛰었죠.
그런데 우리 살아가면서 내 심장한테 정말 눈물나게 감사해 본 적 몇 번이나 돼요?
거의 없어요.
고통스러운 체험이 올 때, 몸이 아픈 체험이 올 때, 내 몸이 건강했다고 하는 것에 왜 감사하지 않고 살았을까 후회하죠.
꽃동네 입구에 가면은 큰 돌에 뭐라고 새겨져 있어요?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으로는 부족해요.
내가 내 손으로 묵주알을 굴릴 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죠.
나병 환자들은 손가락이 없어 팔꿈치에 고무줄 묶어 나무때기 하나 끼고 묵주를 바닥에다 펼치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기도해요.
두 다리가 다 떨어져 나갔어요.
배에 타이어 붙이고 지렁이처럼 기어서 공소까지 찾아 올라간단 말입니다.
내가 내 두 다리로 성당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만 해도 주님의 은총이고,
아침에 눈을 떠서 ‘주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하느님 찬미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주님의 은총이죠.
우리는 뭐든지 풍요롭고 남아 흐를 때는 감사할 줄 몰라요.
다 자기가 노력해서 된 줄 알고 건강도 다 자기가 챙겨서 된 줄 알죠.
여러분들 시한부 인생이에요, 아니에요?
지금 2023년인데 앞으로 50년 후면, 2073년 되죠.
그때까지 숨 쉬고 살아있을 자신 있는 사람?
내가 볼 때 30년 안에 이 중에 반은 병풍 뒤에서 향내 맡을 분이죠.
나도 마찬가지죠.
교도소에만 사형수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다 사형수예요.
하루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살날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날이 가까워져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할 줄 모르고, 용서할 줄 모르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줄 모르죠.
제가 힐링피스가든 축성 기도문에 그리고 2024년 나올 달력에 기도문 중에 있죠.
‘이곳이 용서하는 장소가 되게 하시고,
이곳이 치유되는 장소가 되게 하시고,
이곳이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과 통교하는 장소가 되게 해주시고,
이곳이 어둠으로부터 해방되는 장소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저는 그런 마음으로 이곳을 만든 거예요.
은퇴하면 ‘원로 사목자’라는 말이 같이 따라옵니다.
난 은퇴하면 실컷 놀 줄 알았더니, ‘원로 사목’이라는 말이 또 붙어요.
그럼 죽을 때까지 사목하라는 말이구나.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어떻게 사목을 해야 하는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예요.
첫 번째 주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가 말씀 선포야.
그래 말씀 선포하죠. 피정 다니고 유튜브 통해서라도 교우들을 가르치고 변화시키죠.
두 번째 소임은 환난의 시대에 상처받은 사람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어디 갈 데가 없어.
기도하면서 치유하는 장소를 만들어주자.
그것이 바로 원로 사목자의 마지막 소임이다.
은퇴하고 나서도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계속 일을 했어요.
‘이곳에 와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고해성사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고해성사를 드리고, 면담이 필요한 사람은 면담해주고,
들어올 때는 죄인의 얼굴이 나갈 때는 의로운 죄인이 돼서 나가게 해주어야 하고,
들어올 때는 영과 육이 찌들어서 들어왔지만, 이곳에 머물다 나갈 때는 영과 육이 치유되어 나가게 되는 그런 거룩한 장소.
아, 40년 동안 그 많은 성인 성녀들이 나한테 오신 이유가 그거구나!
전구해주기 위해서.
‘김 신부야, 너는 그 장소만 만들어둬. 우리 성인 성녀들이 해결해 줄 것이야.’
기쁘게 못 사는 첫 번째 이유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그랬죠.
살아계신 하느님은 어디서 만난다고?
첫 번째 말씀을 통해서, 두 번째 성사를 통해서, 세 번째 체험을 통해서.
기쁘게 못 사는 두 번째 이유는 부서지지 못했기 때문에 기뻐지질 않아요.
깨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저 억울해요. 너무 사는 거 너무 억울해요.’
예수님은 어떤 취급당하고 사셨는지 아시죠?
예수님은 죄인 취급 당했어요.
또 예수님만큼 배반을 처절하게 당한 분은 어디 계셔요?
또 예수님은 필요도 없는 오해를 받아들이고 사셨어요.
손가락질은 얼마나 당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받을 필요 없는 고통까지 받으셨잖아요.
내가 믿는 하느님이 그렇게 사셨다면 내가 살면서 죄인 취급당한다고 해도 억울해할 필요 없어.
왜? 원래부터 죄인이니까.
그분은 죄인도 아닌데 죄인 취급 당했지만 나는 죄인인데요.
당연히 누가 나 죄인 취급해도 ‘그래, 나 죄인이야. 얼굴도 못 들은 죄인이야.’
억울해할 필요가 없죠.
우리 살면서 알게 모르게 마음적으로나 실제로 배반하며 산 적 얼마나 많아요.
하느님도 배반하고요.
누가 나를 배반하더라도 길길이 날뛸 필요 없어요.
나를 배반한 저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나도 얼마든지 저 인간보다 더 모질게 다른 사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얘기예요.
예수님은 오해 받아들이셨어요.
예수님은 고통 받아들이셨죠.
그래서 우리가 기쁘게 못 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 못 했기 때문에, 두 번째는 부서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평생 피정하면서 크리스천 영성은 세 가지라고 그랬죠, 기억하세요?
바보의 영성, 걸레의 영성, 연탄불의 영성.
이 세 가지만 붙들고 살면 우리 천국 간다고 그랬어요. 그죠?
그런데 그걸 못하죠,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만큼 기적이 일어나요.
기쁨의 기적을 원하면 욕심의 한 조각을 포기해야 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내놓아야 해요. 그러면 그때부터 기쁨의 기적이 일어나요.
몸 안에 있는 암이 치유되길 원한다면 암까지도 여러분 몸의 일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그럼 암이 떠나요. 치유돼요.
오늘 복음은 만일 우리가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면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주기보다
우리가 그 초대를 거절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려주고 계세요.
즉,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 덜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들이 내 초대에 응하지 않을 때
얼마나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는지를 깨닫길 바란다 그 의미죠.
유대인들 대신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초대받았지만, 오늘 복음에 보면 그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골라서 쫓아냈어.
아니 길거리에 있다가 끌려와서 잔칫상에 앉았는데 예복을 입을 시간이 어디 있고?
난 옛날 신학생 때 이걸 공부하면서 ‘이거 조금 말이 안 된다. 길거리에 있다가 초대받아 무슨 예복 입을 시간이 있어?
그런데 그럼 다른 사람은 다 예복을 입었단 말인가?’
그러다 아, 이것은 눈에 보이는 옷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렇죠? 눈에 보이는 양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야.
과연 이 예복은 무엇을 뜻하는 건가?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있는 것처럼 길거리에 있는 사람 다 데리고 왔어요.
다 열려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 교회예요.
그렇지만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는 은혜받은 것에 맞는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은혜, 다른 말로 은총은 선물인 동시에 책임도 따르는 귀중한 보물입니다.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받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만큼 책임이 있다는 뜻이지요.
초대받은 것만큼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영적인 예복을 의미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절대로 전과 같은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순결과 새로운 선으로 새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죠.
교회에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죄인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들어온 후에는 그냥 죄인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는 거룩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예복 안 입은 사람을 쫓아냈다 할 때’
그 예복은 눈에 보이는 천 쪼가리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의 정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앞에 나갈 때 내가 어떤 정신으로 나가느냐.
정신병자는 자기 옷을 제대로 못 입죠, 맞죠?
내면의 세계가 자기 외모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 보면 늘 단정한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늘 풀어헤치고 사는 사람이 있어요.
겉을 보면 속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복은 뭐라고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정신’을 의미한다고 그랬어요.
여러분들 본당에서 평일 미사든 주일 미사든지 간에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미리 그날 독서와 복음을 읽고 나가십니까?
훌륭하십니다.
또 주일날 헌금할 돈 정성껏 준비하고 헌금하십니까? 여덟 사람밖에 없네.
어느 할머니가 시장에서 행상하는 할머니예요.
그 할머니는 일요일 되기 전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화폐 가운데서 제일 깨끗한 돈을 골라서 정성껏 다리미질해요.
내가 있던 본당에 그런 할머니가 있었어.
빳빳하게 해서 항상 깨끗한 봉투에 넣어 봉헌하셨죠.
그것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입니다.
신약과 구약에 흐르는 하느님께 올바로 바쳐지는 제물이 되려면 조건 세 가지가 있다고 제가 참 많이 얘기했어요.
첫 번째 바치는 제물이 살아있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은 비둘기 안 받았어요.
신약에서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건 뭘 뜻합니까?
깨어 있는 것!
미사 시간 1시간 앉아 있어도 몸뚱아리는 여기 있고 얼굴은 이쪽을 바라보고, 머릿속은 오만 동네에 다 돌아다녀.
‘가다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들어갈까?’
걔 또 내일 날짜가 며칠 안 남거든.
의학용으로 ‘뇌사’라는 말 있습니다.
심장은 뛰는데 뇌에는 딴 데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미사죠.
죽은 묵주기도도 있죠.
손가락에 잘 굴러 돌아가.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잘 돌아가, 하지만 머릿속을 다른 곳에 있어.
사도신경까지는 잘하다, 환희의 신비 들어가면 환희스럽게 온 동네 훨훨 다녀요.
두 번째는 흠집이 난 제물은 구약과 신약에서 하느님은 안 받으신다고 그랬어요.
흠집이 났다는 얘기 뭐예요?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영혼에 흠집이 생기죠.
그래서 사제들은 늘 미사 전에 어디서 기다려요? 고해소.
영혼에 나 있는 흠집을 제거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게끔 도와줘요.
구약의 제사장들은 비둘기 깃이 빠져 있거나 염소 뿔에 금이 가 있으면 ‘퇴짜! 하느님께 못 바쳐.’
또 세 번째로는 뭐예요?
본인이 직접 제단 앞에 제물을 들고나와야 해요.
냉담하는 남편이 그래도 꼴에 양심은 있어서 성당 가는 자기 와이프한테 ‘나 대신 헌금 내줘’
하느님은 그 돈 안 받으세요.
그런데 나는 받아, 돈을 주는데 왜 안 받아요. (웃음)
본인이 제주 노릇해서 앞에 나와야 해요.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이 흐르고 있는 하느님에게 올바른 봉헌 방법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야 하고, 흠집 없는 제물을 바쳐야 하고, 마지막 본인이 직접 나와야 해요.
물론 환자인 경우는 예외죠.
입원해 있는데 나올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입고 나가야 할 의복은 두 가지.
첫 번째 회개의 예복을 입어야 해요.
두 번째는 믿음의 예복을 입어야 해요.
취미생활로 성당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 구원하실 분,
오늘 그분 만나러 간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야지요.
회개의 예복.
‘주님 제가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못 살았습니다. 이번 주 내내 돈이 첫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한 달 내내 그 미운 놈, 그 분노가 첫째 자리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성찰 거리 1번이 뭐냐?
‘오로지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았는가?’
주님, 요즘 내 자식새끼가 늘 저의 첫째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한테 축복 주는 분은 누구예요?
축복 주실 분을 자식 밑으로 끌어내리면?
은총의 비는 위에서 밑으로 내리지, 땅에서 거꾸로 올라가는 비는 없어요.
하느님께서 당신 자리인 첫째 자리에 딱 좌정하고 앉아 계실 때 그 밑에 모든 청원은 은총의 비를 맞아요.
하느님은 제쳐 놓고 머릿속 첫째 자리에 내 아픈 몸뚱아리 어떻게 하면 나을까, 내 자식새끼 어떻게 하면 잘 될까.
딴 것이 기복이 아니죠.
하느님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그것이 우상숭배예요.
그래서 성사 볼 때 제일 중요한 성찰 거리 1번이 그거예요.
내가 주님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가?
회개의 예복과 믿음의 예복은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입고 나가야 할 예복이지요.
오늘 분명히 복음에서 예복 안 입은 사람을 끄집어냈다고 나오죠.
이제 예복의 의미를 알아들으셨죠?
우리는 하느님 앞에 전혀 준비 없이 나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말 미사 갈 때는 제일 깨끗한 옷, 제일 정성껏 된 옷을 입고 나가야 해요.
대통령까지는 아니어도 하다못해 시장이나 동제 이장에게 상 받으러 갈 때도, 제일 좋은 옷 입잖아요.
하느님의 초대를 거기에 비합니까?
미사 하는 날이면 조금 일찍 나와 기도하고, 또 묵상하고, 자기반성을 하는 순간을 잠시라도 거친 후에
미사에 임한다면 미사의 초대를 통해서 얼마나 큰 은혜가 내리겠는가!
시편 81장 10절(구약성경 시편 81장 11절)의 말씀을 끝으로 전합니다.
‘입을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
아멘.
♣2023년 연중 제28주일 (10/15)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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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