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을 쫓아내고 보위에 올라 맏아들 장(暲)을 세자로 책봉한 뒤 18세의 맏며느
리 한씨도 세자빈인 수빈에 책봉했다. 수빈은 혼담이 오갈 때부터 시아버지의 야심을 읽고 있었다.
수빈의 집안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수빈의 고모를 후궁(강혜장숙여비)으로 들였을 만큼 조선 제일
의 명문가였다. 수빈의 부친 한확은 광록시소경이라는 명나라 벼슬을 하사받았지만, 권세를 부리지
않는 품격 있는 인물이었다. 영락제가 죽자 여비도 따라 죽었는데, 영락제의 아들 선종은 그 정절을
높이 사서 여비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였다.
수양이 수빈을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은 찬탈을 위한 사전공작이었다. 단종 즉위년 10월, 수양이 자청
하여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것도 명나라 조정에 미리 얼굴도장을 찍어두기 위한 보험 성격이었
다. 수양이 보위를 찬탈하자 한확은 명나라로 가서 단종이 선위했다고 설득하여 황제의 고명을 받아
냈다. 역신(逆臣) 수양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긴 고마운 행보였다. 한확은 귀국길에 급서했
는데,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수양의 찬탈에 협력한 일에 심한 가책을 느낀 나머지 그 스트레스로
심정지가 일어났던 게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수빈은 부친보다 수양의 찬탈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장차 국모가 되겠다는 야심이 컸던 것이다.
부친이 급서했어도 국모가 되겠다는 수빈의 야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수양 3년(1457) 남편 의
경세자가 18세로 요절했다. 수빈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수빈은 8세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의 세
자 책봉의식을 지켜보며 쓸쓸히 국모의 꿈을 접어야 했다.
수빈의 시동생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훙서(薨逝)하자 다시 한 번 권력의 향방이 요동쳤다. 예종
에게는 세 살 된 원자 제안대군이 있었다. 법도대로라면 제안대군을 보위에 올리고 수양 비 정희대왕
대비가 수렴청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안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인데다 너무 어리다는 이
유로 일단 옹립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음 순위는 요절한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의 두 아들이었다.
한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씨는 15세인 장남 월산대군을 과감히 버리고 한명회의 사위인 차
남 자을산군을 옹립하기로 결심했다. 궁중의 최고 어른이자 왕위 결정권자인 정희대왕대비도 맏며느
리인 한씨와 한명회의 뜻을 받아들여 자을산군을 후사로 선포했다. 한씨는 결국 국모보다 권한이 막
강한 모후가 된 것이다.
1469년 자을산군이 12세에 보위에 올랐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다. 성종은 모후인 한씨를 인수대
비에 봉했다. 명목상 권한은 수렴청정을 하는 시어머니 정희대왕대비에게 있었지만, 실권은 자연스
럽게 인수대비의 손에 들어왔다. 성종 6년(1475) 인수대비는 『內訓』(전 3권)을 펴내 널리 보급함으
로써 대비의 권위에 지식인의 품격까지 더했다. 『內訓』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부녀자들이 지
녀야 할 바른 마음가짐과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중종의 첫째 부인인 공혜왕후가 왕비에 간택된 지 5년 만인 1474년 후사 없이 죽자 인수대비는 새로
며느리를 간택하지 않고 후궁 윤씨를 왕비에 책봉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 왕자 융(㦕. 연산군)을 낳
은 윤비는 질투가 심하여 『內訓』에서 요구하는 순종하는 아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차에 걸친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훈계도 흘려들었다. 게다가 성종은 희대의 호색한이었다. 부부싸움이 잦을 날
이 없었다. 투기가 심한 윤비는 성종과 한창 교접 중인 엄귀인이나 정귀인의 방에 뛰어드는 작태까지
벌였다. 성종이 먼저 윤비 폐출 얘기를 꺼내자 인수대비도 즉각 찬동했다. 세자의 생모라며 삼정승과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모자의 주장은 완강했다. 인수대비는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인 정희대왕대비에
게 상주하니, 그녀 역시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성종 10년(1479) 6월 2일, 윤비는 폐위되어 대궐
에서 쫓겨났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한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신하들은 윤씨에게 동정
적이었다. 윤씨의 질투보다 성종의 호색기질이 더 문제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수대비가 폐비 윤
씨에게 양식도 못 주게 하자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인수대비는 조정에 여러 차례 글을 내려 여론
을 무마하려 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자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재위 13년(1482) 8월 16일, 성종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주장을 받아들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윤씨 나이 28세 때였다. 윤씨는
죽기 직전 피가 묻은 금삼(錦衫. 비단 적삼)을 친정어머니에게 주면서, ‘세자가 보위에 오르거든 꼭
전해주세요’ 하는 유언을 남겼다.
생모 윤씨가 사사될 때 연산군은 세 살이었다. 뒤를 이은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자식처
럼 애지중지 키웠다. 재위 25년(1494) 성종이 죽고 18세의 연산군이 즉위할 때, 그는 어머니가 억울
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1년(1495) 9월, 아무 죄도 없이 13년째 전라도 장
흥에 유배되어 있는 외할머니와 외삼촌 윤구를 해배하고 해마다 양식을 넉넉하게 하사하기 시작했
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산군은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몇 번 시도하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무
산되었을 뿐 보복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갑자사화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가 아니라 사실은 임사
홍 등 신진세력인 궁중파가 의정부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기득권층 부중파(府中派)를 타도하기 위한
정쟁에서 비롯되었다. 연산군은 다만 이 정쟁을 어머니의 신원(伸寃)에 이용하여 재위 10년1504) 3
월, 모후에게 제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후의 무덤인 회묘를 회릉이라고 추숭했다. 이에 대해 반발
이 일자 연산군도 더는 무시당하고 지낼 수 없어 어머니를 억울한 죽음으로 내몬 무리들에게 무자비
한 보복을 가했다.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 폐출에 앞장섰던 엄귀인과 정귀인을 때려죽이고 정귀인의
두 소생도 유배했다가 사사했다. 어머니 폐출에 앞장섰거나 신원에 반대했던 신하들도 모두 죽이고,
한명회 등 이미 죽은 자들은 부관참시했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발길질에 가슴을 얻어맞고
화병으로 죽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이른 아침은 구름이 뒤덮혀 흐린날씨를 예고 하지만 한나절은 맑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그대로 입니다. 아파트단지내 조경도 그러하고 도심 가로수의 단풍역시도 짙게 물들고 있습니다. 전철보다는 버스를 이용하는게 가을 풍경을 더 가까이 접할수 있습니다. 많이 걸으시며 좋은계절과 더불어 곱게 물들어 가는 우리네 일상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