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편지 104 : 기억력과 암기력
1. 시험의 나라
한국은 온갖 시험으로 가득 찬 나라이다. 초등학교의 단원평가, 성취도평가에서 시작하여 중고생들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모의고사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수능시험이다. 물론 그 밖에도 사법고시를 비롯한 각종 국가시험, 공무원시험들이 있고 자격시험과 토플이니 토익이니 하는 영어 인증시험도 수십 가지가 있다. 요즘은 대학생들도 취직이 안 되어 각종 자격증 혹은 영어능력시험 증서를 갖추어야 한다. 초등생들도 컴퓨터 실력 인증시험을 비롯하여 영어능력 시험 혹은 한자 국가공인자격검정 시험을 통해서 그들의 역량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는 그런 공인검정시험 혹은 입학시험 자체가 엄청난 규모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
대학생들의 취업준비로서의 각종 시험 준비나 자격증은 그들의 독자적인 판단과 노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가 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장기의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무거운 시험의 압박은 결코 좌시될 수 없다. 특히 최근 10월 8일에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국가수준기초학력진단평가’를 보았고 또 10월 14일-15일 이틀간 초6, 중3, 고1학생들이 ‘국가수준학성성취도평가’라는 이름의 시험을 보았다. 그리고 12월 23에는 그 밖의 학년들에 대한 일제고사를 치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전국규모의 시험에 반대하는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이 많이 있었고 일부교사들은 일제고사를 거부하도록 학생들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6학년 4반 학생들이 15일 아침 교문 앞에서 담임 선생님 해임에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박재찬기자> 경향신문 08-12-16
필자 역시 이런 전국규모의 시험에 반대한다. 이는 학생들을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고 그런 만큼 시험에 대한 압박과 경쟁의식은 강화된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에 대한 경쟁의식이나 우열의식은 그 자신이나 국가와 사회의 존립을 위해서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사회에 생존경쟁이 심하고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생존경쟁, 평가경쟁에 내몰리는 것은 진정한 개인적-사회적 경쟁력의 향상에 도움이 안 된다. 어린 시절에 경쟁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친구와의 학습경쟁이 아니라 협동저인을 길러야하며 취미와 개성을 개발하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인격의 성장이 필요하다.
2. 시험과 암기력
필자가 일제고사를 비롯한 온갖 경쟁적인 시험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런 시험들이 학생들의 학문적이고 지적인 탐구력을 증대시키기 보다는 암기력과 요령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경쟁적인 시험을 위해서 사교육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필자도 현재 작은 학원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지속하고 있다. 정말 사교육의 일선에서 경험하는 시험의 압박과 그 무의미성은 절실하다. 쓸데없는 일로 아이들은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시행되는 학기말 시험을 보자. 시험 준비를 위해 필요한 수학과 과학 등 그 지식의 양이 보통이 아니다. 약 2-3개월 배운 분량의 학습량이지만 그 범위가 장난이 아니다. 우리 딸은 수학은 잘하고 사회는 잘못한다. 그러나 그런 개성의 차이에 관련 없이 학기말에는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한문, 도덕, 음악, 미술, 체육, 기술-가정, 컴퓨터 등 총 12과목이나 암기를 해야 한다. 실로 엄청난 양의 학습량이다. 학생뿐 아니라 학원선생에게 가해지는 압박도 대단하다. 특히 필자는 거의 혼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기에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한다. (나이 50이 넘도록 중학교공부를 하는 필자의 신세가 행복한지? 공부하는 것이 정말 지겹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입시 수능시험의 경우를 생각하면 하늘이 노랗게 될 지경의 엄청난 학습량이 연상된다. 그 시험은 고등학교 3년간의 학습범위를 대상으로 시행되는 시험이다. 상식적으로 보아 이런 거대한 범위의 시험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3년 혹은 6년 동안 계속 시험범위를 공부하고 또 하여야 한다. 이런 공부를 수험공부라고 한다. 수험공부는 오직 반복 또 반복 외에 무슨 일이 더 필요하겠는가? 전국 60만의 대학입학수험생들과 300만의 예비 수험생들이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고는 공부, 또 공부이다. 정말 이 나라는 공부로 미친 나라이다. 그리고 이런 공부는 사고능력이나 탐구능력이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습이며 출제유형 분석이며 정답 찍는 요령이며 결국 암기이다. 이런 것을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장기적으로 잘하는 곳이 강남과 분당이다. 그 곳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벌써 고등학교 과정을 다 배운다. 이른바 선행학습, 반복학습이다. 그런데 강북의 학교에서는 정해진 교과과정을 따라 가느라 고 3이 될 때까지 수학의 전 범위를 다 배우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한국은 공부기계를 만드는 나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성품, 기성세대들이 만든 나라꼴이 바로 오늘의 경제적, 도덕적 파탄이라는 현상이다. 부모들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녀들을 공부기계로 만들기 위해서 흔히 그런 말들을 한다: “대학가서 마음껏 놀아라. 대학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그러나 입시기계, 공부기계가 된 사람들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별로 자유로워지거나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 취업난과 학점 경쟁으로 인해서 그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의 생활을 그대로 연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청년들은 체제에 순응하는 것만을 배운다. 현상을 타파하고 독립적으로 사업을 기획할 용기와 능력을 가질 수가 없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어떤 애들은 재수, 삼수를 한다. 고교 3년 과정 및 기타 지식을 익히고 또 익힌다. 정말 시간이 그렇게 남아돈다는 것인가? 사람의 일순간 일순간은 다른 순간과 결코 대체가 안 되는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인생의 출발점이나 황금기이다. 그 시절의 추억은 평생을 간다.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 날들을 3년 혹은 6년 아니 12년 동안 오직 명문대 입학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위하여 선행학습, 반복학습, 영어 공부만을 한다는 것은 상식의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다. 거대한 악몽, 단색조의 공부기계들의 거대한 악몽을 끝내야 한다.
3. 기억력과 사고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근대 철학, 근대 인간 그리고 근대 사회의 원리를 발견했다. 우리나라는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하는 존재한다”라는 원리가 통한다. 데카르트의 사고는 인간의 정신작용 전체를 말한다. 여기에는 상상이나 기억 같은 주관적인 사고능력도 포함된다. 인간의 사고 능력은 기억력을 전제로 한다. 특히나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기억력의 필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역사적으로 크게 번창,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기억력 때문이었다. 즉 어제의 실수를 기억하고 분석하면서 인간의 지능과 사건해결능력은 증대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통치자의 중요한 덕목으로서 기억력을 강조한다.
학생들의 수험능력의 하나인 암기력은 일종의 기억력이다. 그러나 암기는 기억과 크게 다르다. 암기는 교과서 내용을 순간적으로 많이 외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나면 암기한 것들을 전부 잊어버린다. 이런 기억 혹은 암기는 시험 볼 때 외에는 거의 필요가 없는 작용이다. 이와 달리 기억은 오히려 어떤 사건이 지나고 나서 추후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필요한 일이다. 암기는 사건이나 시간이 지나면 불필요하다. 여기에 암기와 기억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암기와 기억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암기가 기억으로 확장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외국어 학습에 있어서 단어 외우기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암기력과 기억력이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밖에는 양자 간에 기은적인 차이가 있다.
암기와 기억에 관한 또 다른 문제는 암기된 것 혹은 기억된 것은 그 자체로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암기된 것, 기억된 것은 항상 어떤 다른 정신작용, 가령 개념형성이나 판단이나 추론 ,비교, 분석, 종합 같은 작용의 기본 자료로서 필요한 것이 기억이요 암기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암기는 위의 다른 작용들과는 전혀 연결이 안 된다. 그 이유는 시험 준비라는 단순한 목표 때문이다. 즉 암기는 시험문제 풀이 이외에는 거의 다른 정신작용하고 연결이 안 된다. 시험도 사고능력, 추리능력을 본다고 하지만 이는 삶의 문맥과 분리된 추상적인 모델이기에 실제 삶과 연결이 안 된다. 특히 사법고시같이 암기사항이 엄청난 경우 다른 정신의 요소들은 거의 암기에 종속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위에서 삶의 맥락과 연결된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을 구별했다. 후자를 암기라고 규정한다. 이는 주로 학습과정, 시험에 필요한 기능이다.
한국의 과도한 성적 경쟁, 시험지옥에서는 단기적인 암기력과 집중력이 당락을 좌우한다. 그런 과정에서 기억력은 후퇴한다. 이런 집단적인 기억력의 결핍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은행들의 되풀이되는 경영 실패 혹은 최근 연거푸 발생하는 대형 창고 화재 등이다.
경기 이천시 서이천물류센터에서 5일 발생한 화재는 지난 1월7일 40여명의 사망자를 낸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사건과 꼭 닮은 꼴이어서 1년이 지나도 여전한 공사 현장의 안전 불감증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세계일보 08.12. 5)
지나친 암기 중심의 교육이 전체 사회에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를 위의 이천 지역 창고화재에서 알 수 있다. 이런 해마다, 달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불상사 혹은 실정(失政) 혹은 부정(不正), 부패(腐敗)의 악순환을 열거하자면 입에 단내가 날 정도이다.
이런 사회적인 오류를 피할 길은 암기식 교육, 시험을 지양(止揚)하는 길 뿐이다. 이는 정치개혁이나 공무원 기강 확립 혹은 국민의식개혁 등의 각성, 계몽 활동으로 될 문제가 아니다. 교육제도의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위에서 열거한 각성, 계몽 운동을 벌이면 효과가 있다. 교육제도 개혁의 방향은 필자가 이미 수차 반복한 것처럼 독일, 핀란드의 교육 국가주의를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시장주의의 반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