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자(들)'에 대하여 — 대통령을 떠나 한 남편의 통곡을 음모로 바꾸지 마십시오!!!
미국 로스앤젤레스 글렌데일에서 26년째 환자를 진료하는 Dr. 이광엽입니다.
저는 3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도 조국 대한민국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살수록 고국의 역사는 더 선명하게 보이고, 그 역사를 함부로 다루는 일에는 더 예민해집니다. 오늘은 건강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한 사람의 의사로서, 한 사람의 재외동포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을 존중하는 한 사람으로서 분명히 제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긴 글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짧게 말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9월 23일 한국에서 허진호 감독의 영화 '암살자(들)'이 개봉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그날의 비극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테러범의 범행이 아니라, 당시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가 기획하고 은폐한 자작극일 수 있다는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제목부터가 '암살자'가 아니라 괄호를 친 복수형 '암살자(들)'입니다. 총을 쏜 문세광 한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제목에서부터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던지는 암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를 감정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로 증명하겠습니다. 감정만으로 쓴 글은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반론을 하나하나 짚고, 그 반론들이 왜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그날의 사실
모든 논쟁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제29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열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연단에서 경축사를 읽고 있었고, 그 뒤편 단상에는 육영수 여사가 단정한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객석에는 1,600여 명이 있었고, 행사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습니다.
경축사가 이어지던 중, 객석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습니다. 재일교포 문세광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다 실수로 자기 허벅지를 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통로로 뛰쳐나오며 연단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숙여 피했습니다. 경호원들과 문세광 사이에 총격이 오갔고, 그 혼란 속에서 단상의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았지만 그날 저녁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49세였습니다. 합창단으로 무대에 섰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도 이 참극 속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겨우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총격이 멎고 여사가 실려 나간 뒤, 대통령은 다시 연단에 섰습니다. 중단되었던 경축사를 끝까지 읽었습니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은 단상에 떨어져 있던 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직접 주워 들고 퇴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전 국민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문세광은 누구였는가
문세광은 195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였습니다. 수사 당국은 그가 조총련 간부의 포섭과 지령을 받아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준비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건 한 달 전인 1974년 7월, 오사카 고즈 파출소에서 경찰관의 권총을 훔쳤고, 일본인 명의의 여권으로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권총 탈취는 일본 경찰이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 권총이 바로 국립극장에서 불을 뿜은 총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일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범인이 일본에서 자랐고, 일본 경찰의 권총을 훔쳤고, 일본 여권으로 입국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친서를 든 특사를 서울에 보내 유감을 표해야 했습니다. 범행의 핵심 수단이 일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문세광은 1심, 2심, 대법원을 거쳐 사형이 확정되었고, 그해 12월 20일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그가 쏜 총탄에 육 여사가 숨졌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사법적 결론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언은 따로 있습니다. 2002년 5월,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랫사람들이 관련된 일이었고 자신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며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의 테러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체제입니다. 1983년 아웅산 테러도,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도 끝까지 부인해 왔습니다. 그런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기는 방식이기는 했지만, 자기 쪽 사람들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사실상 시인했습니다.
사건 직후 북한은 이 사건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한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식의 선전을 폈습니다. 그로부터 28년 뒤 북한 최고 권력자 스스로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4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만든 영화가 북한이 스스로 폐기한 바로 그 선전과 같은 방향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올리고 있습니다. 가해자 쪽이 인정한 사건을, 피해자의 남편 쪽으로 의심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공정하게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인을 죽이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는 공식 수사에서 밀려난 형사와 권력에 맞서는 기자들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워, 현장의 총성 수와 사라진 탄환, 허술한 경호 같은 의문을 추적해 갑니다. 그리고 그 추적의 끝에서 관객이 중앙정보부라는 권력 기관이 이 사건을 기획하거나 이용했을 수 있다고 추론하도록 이야기를 쌓아 올립니다. 영화 속 범인의 이름도 문세광이 아니라 한 글자를 바꾼 '문태광'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1974년의 중앙정보부는 누구의 기관이었습니까.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었고, 그 부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의 부인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대통령 직속 기관이 대통령 모르게 기획했다는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중앙정보부의 공작을 암시하는 순간, 그 화살은 필연적으로 그 기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에게 꽂힙니다. 관객은 바보가 아닙니다. 영화가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관객은 그 끝에 누가 서 있는지 압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박정희 배후설'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독 자신도 이 점을 의식했는지, 방송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그것을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발언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 자신이 대통령의 관여를 믿지 않는다면, 왜 대통령 직속 기관의 자작극을 암시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왜 제목을 굳이 복수형으로 붙였습니까. 인터뷰에서 한 말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의 머릿속에 남지 않습니다. 관객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두 시간 동안 스크린이 쌓아 올린 의심입니다. 창작자의 책임은 인터뷰가 아니라 작품으로 지는 것입니다.
반론 하나 — "단정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내놓는 주장은 "영화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았다,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단정하면, 우리는 그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 증거로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시는 다릅니다. 암시는 증거를 내놓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의심만 남깁니다. "그랬다"고 말하면 증명해야 하지만,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면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서도 관객의 마음에는 똑같이 의심이 심어집니다.
의학도 똑같습니다. 제가 환자에게 "당신은 암입니다"라고 말하려면 조직 검사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검사 결과도 없이 "혹시 암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환자를 두 시간 동안 공포에 몰아넣는다면, 그것은 진료가 아니라 가해입니다. 근거 없이 던진 의심은 단정보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반박할 대상조차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 더 깊이 남습니다.
실존 인물의 실명과 실제 사건을 가져와 영화를 만들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을 피하는 기술일 뿐입니다. 사실로 주장할 자신이 없는 이야기라면, 애초에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지 말았어야 합니다.
반론 둘 — "탄환에 실제로 의문이 있지 않느냐"
두 번째로 나오는 주장은 "이 사건에는 실제로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의문은 실제로 있습니다.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고 이건우 경감은 1989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현장의 탄흔을 근거로 문세광이 쏜 총탄이 육 여사를 맞히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장 검증 전에 청와대 경호실이 탄두를 수거해 갔다고도 말했습니다. 이후 방송 다큐멘터리와 음향 분석 연구에서는, 여사를 맞힌 총탄이 문세광을 제압하려던 경호원 쪽에서 발사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장봉화 양이 경호원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는 것은 당시에도 파악된 사실입니다. 탄환의 수거와 감정 과정이 기록상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의문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의문을 끝까지 규명하려는 노력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의문들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혼란스러운 총격전 속에서 경호원의 총탄이 여사를 맞혔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경호실이 그 사실을 감추려고 증거를 부실하게 다루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즉, 경호의 실패와 그 실패를 덮으려 한 조직의 문제입니다.
이것과 "누군가 여사를 죽이려고 계획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설령 여사를 맞힌 총탄이 경호원의 총에서 나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경호원은 왜 총을 쏘았습니까. 문세광이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며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문세광이 총을 들고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총격전의 원인은 문세광이고, 그 총격전 속에서 벌어진 모든 비극의 책임은 총격전을 시작한 자에게 있습니다. 경호원의 오발은 사고이지 음모가 아닙니다. 사고를 감추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부끄러운 책임 회피이지 살인 기획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발 의혹이라는 사실의 조각을 가져다 계획된 암살이라는 결론으로 이어 붙이는 것, 그것이 음모론이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작은 의문 하나하나는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문들 사이를 잇는 선은 증거가 아니라 상상으로 그려집니다. 그 상상의 선이 죽은 사람의 인격을 짓밟는 방향으로 그려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진실 규명이 아닙니다.
반론 셋 — "경호가 그렇게 허술할 수 있었겠느냐"
세 번째로 나오는 주장은 "일부러 열어준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문세광은 출입 비표도 없이 행사장에 들어갔습니다. 충격적인 경호 실패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만 돌아보면, 경호 실패는 권력의 음모가 아니라 권력의 오만과 방심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지붕 없는 차를 타고 저격범의 사정거리 안을 지나갔습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은 호텔 문 앞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괴한의 총에 맞았습니다. 1984년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는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호 체계를 갖췄다는 나라들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호 실패가 곧 음모의 증거라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도 그 나라 권력자가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실제로 벌어진 일을 보십시오. 박종규 경호실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선 사람이 차지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차지철의 강압적인 경호 체제와 권력 내부의 갈등은,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자신이 궁정동에서 총탄에 쓰러지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1974년의 사건이 권력이 꾸민 계획이었다면, 그 계획은 대통령의 아내를 앗아갔고, 경호실장을 물러나게 했고, 끝내 대통령 자신의 죽음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계획을 세우는 권력자는 없습니다.
반론 넷 —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음모론은 언제나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를 묻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묻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 이후 반공과 반일 분위기가 높아져 정권이 정치적 이익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정부가 이 비극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지적하는 부분이고,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극을 활용한 것과 비극을 만든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의 노고를 치켜세우는 정치인이 있다고 해서, 그 정치인이 불을 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잃은 것을 따져보십시오. 대통령은 24년을 함께한 아내를 잃었습니다. 세 자녀는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정권은 가장 따뜻한 얼굴을 잃었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대통령에게 바른말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사가 떠난 뒤 청와대는 더 닫히고 더 경직되었다는 것이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정치적으로 계산해도, 이 사건은 대통령에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문세광의 총구는 누구를 향했습니까. 대통령이었습니다. 실제로 연단을 향해 총탄이 날아왔고,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한 발만 빗나가도 자기가 죽을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행사장에서, 1,600명의 눈앞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아내를 죽이는 계획을 세웠다는 가정은 상식으로도, 논리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론 다섯 — 52년 동안 아무도 찾지 못한 증거
이 사건이 일어난 지 52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정치 세력도 여러 차례 집권했습니다. 과거사를 규명하기 위한 국가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도 과거의 공작 사건들을 스스로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기자와 연구자와 방송사가 이 사건을 파헤쳤습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부인의 죽음을 기획했거나 관여했다는 증거는 단 한 조각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문서도, 증언도, 녹음도 없습니다. 권력이 바뀌면 숨겨졌던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이 나라에서는 과거 정권의 공작과 조작이 뒤늦게 밝혀져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대통령 부인의 암살이라는 가장 큰 사건에 대해서만 반세기 동안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애초에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증명의 책임은 주장하는 쪽에 있습니다. 이것은 법정의 원칙이고, 과학의 원칙이고, 제가 매일 진료실에서 지키는 원칙입니다.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요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관여했다고 암시하려면, 그 암시를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아야 합니다. 52년 동안 아무도 내놓지 못한 그 증거를, 이 영화는 증거 없이 스크린에 올렸습니다.
반론 여섯 — 영화는 확인된 사실조차 뒤틀었습니다
이 영화가 의문을 제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짚어야 합니다. 영화는 문세광이 오사카의 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친 사실을 허위인 것처럼 그린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총 탈취는 일본 경찰이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한국 정부의 발표만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수사로도 확인되었고, 그 때문에 일본 정부가 특사를 보내 유감을 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의문이 남아 있는 부분에 질문을 던지는 것과, 두 나라 수사 당국이 이미 확인한 사실까지 거짓처럼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앞의 것은 탐구이고, 뒤의 것은 왜곡입니다. 확인된 사실을 무너뜨려야만 원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그 결론은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라 의도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반론 일곱 — "표현의 자유"
가장 많이 나오는 주장은 "영화는 창작이고, 창작은 표현의 자유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표현의 자유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헌법의 첫 번째 수정 조항에 새긴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미국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실존 인물에 대한 허위 사실로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법적 책임을 지는 행위입니다.
대한민국 형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자 명예훼손죄를 따로 두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반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기자회견을 열 수 있고, 소송을 걸 수 있고, 자기 목소리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79년에 세상을 떠난 대통령은 지금 이 영화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반론할 수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은 가장 비겁한 형태의 공격입니다. 그래서 법이 따로 보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감독과 제작진은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되었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공식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이 영화를 옹호하는 분들께 진지하게 묻습니다. 만약 다른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그 가족이나 측근이 배후였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영화가 나온다면, 여러분은 그것도 표현의 자유라며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존경하는 인물의 죽음을 두고 가장 가까운 가족을 의심하게 만드는 영화가 나온다면, 그때도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이 영화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대상에 따라 기준이 바뀐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진영 논리일 뿐입니다.
반론 여덟 —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어떤 분들은 "박정희는 독재자였으니 이런 비판을 받아도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이 주장에 가장 신중하게, 그러나 가장 분명하게 답하겠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늘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신 체제와 장기 집권, 민주주의의 억압, 인권 침해는 역사가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 시절 고통받은 분들이 있었고, 그분들의 아픔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한 인물의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하는 것은 성숙한 사회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통치에 대한 비판과, 한 남자에게 아내 살해의 혐의를 씌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앞의 것은 역사 평가이고, 뒤의 것은 인격 살인입니다. 누군가를 정치적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아무 누명이나 씌워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인물을 비판하려면 그가 실제로 한 일로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 않은 일까지 덧씌우는 순간, 그 비판은 설득력을 잃고 증오의 표현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역사의 진실을 원하신다면, 이 영화의 암시에는 함께 반대해 주셔야 합니다. 거짓 위에 세운 비판은 진짜 비판까지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증거 없이 죽은 사람의 가정사를 음모로 덧칠하는 일에는 한목소리로 반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을 존중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제 논리에서 잠시 벗어나, 두 분이 어떤 부부였는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암시가 얼마나 잔인한지는, 두 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는 순간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한국전쟁의 포화가 이어지던 1950년 12월 대구에서 결혼했습니다. 충북 옥천의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육영수 여사는, 가난하고 과묵한 군인 박정희를 선택했습니다.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전쟁 중에 치른 결혼식은 초라했습니다. 그 뒤로 24년 동안 여사는 군인의 아내로, 대통령의 아내로 남편 곁을 지켰습니다. 세 자녀를 키웠고, 청와대 안에서도 직접 살림을 챙겼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총탄에 쓰러진 아내를 떠나보낸 뒤 대통령은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 같았다고 곁에 있던 이들은 증언합니다. 장례식 날 영구차가 청와대를 떠날 때, 대통령이 흐느끼며 차마 손을 떼지 못하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오열하던 그 장면을 전 국민이 보았습니다.
대통령은 그 뒤로 일기와 시에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남겼습니다. 아내가 없는 빈방에 대한 이야기, 아내가 가꾸던 꽃밭에 대한 이야기,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이야기들입니다. 대통령은 여사의 묘소를 자주 찾았고, 홀로 앉아 한참을 머물다 돌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이 기록들은 정권의 선전물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손으로 쓴 개인적인 글들입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역시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두 분은 지금 국립서울현충원에 나란히 잠들어 계십니다.
이런 부부를 두고,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꾸몄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것. 저는 이것을 창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모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모독은 두 분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세 자녀에게, 52년 전 어머니를 잃은 그 아이들에게, 이번에는 "당신들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던지는 것입니다. 한 가족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을, 또 한 번 그 가족의 가슴에 겨누는 것입니다.
육영수 여사는 단순히 대통령의 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늘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던 분이었습니다.
여사는 청와대로 들어오는 국민의 편지를 직접 읽고 챙겼습니다.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담당 부서에 알아보게 했고, 국민의 불만과 쓴소리를 대통령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사를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의 곁에서, 그 권력자에게 듣기 싫은 말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여사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와 음성 나환자촌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가족에게서도 버림받고 사회에서 철저히 격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사는 그들의 손을 맨손으로 잡았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나환자의 손을 잡는 사진 한 장은, 그 어떤 계몽 운동보다 강하게 국민의 편견을 허물었습니다. 여사는 양지회를 조직해 봉사 활동을 이끌었고, 육영재단을 세워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를 펴냈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들던 시절,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저는 매일 진료실에서 환자의 손을 잡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얼마나 큰 치유가 되는지, 30년 가까이 그것을 경험해 왔습니다. 여사가 나환자의 손을 잡았던 그 순간은 그 어떤 약보다 강한 치료였을 것입니다. 이런 분의 죽음을 정치적 음모의 소재로 소비하는 것은, 여사가 평생 지키려 했던 따뜻함과 품격을 짓밟는 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도 과장 없이 사실만 말하겠습니다. 사실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일제 35년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 나라에는 공장도, 자본도, 기술도 없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나라 살림의 상당 부분을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었고, 해마다 봄이면 보릿고개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수출로 먹고사는 산업국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처음 달성했을 때 온 나라가 기뻐했고, 그날이 훗날 '무역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3년 뒤인 1977년, 대한민국은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00배의 성장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1979년, 1인당 국민소득은 1,6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그 상징이 경부고속도로입니다. 1968년 2월에 착공해 불과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킬로미터가 뚫렸습니다. 당시 야당과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이 공사를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차도 몇 대 없는 나라에 무슨 고속도로냐, 부자들의 놀이길을 만들려는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국제기구조차 경제성을 의심했습니다. 대통령은 직접 지도를 펴고 노선을 그리며 공사를 밀어붙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77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분들의 희생 위에 놓인 그 길은 대한민국 산업의 대동맥이 되었습니다. 반대했던 사람들이 옳았는지, 대통령이 옳았는지는 지금 그 길을 밤낮없이 달리는 수많은 화물차가 대답하고 있습니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얼굴을 바꾸었습니다. 정부는 전국의 마을에 시멘트와 철근을 나누어 주고, 주민들이 스스로 회의를 열어 쓰임새를 정하게 했습니다. 성과를 낸 마을에는 더 많은 지원이 돌아갔습니다. 초가지붕이 바뀌고, 마을길이 넓어지고, 다리가 놓이고,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지금도 많은 개발도상국이 이 모델을 배우러 한국을 찾습니다.
여기에 1968년 포항제철을 세워 철강 산업의 기틀을 놓았고, 울산과 창원과 구미에 중화학공업 단지를 일구었습니다. 전쟁과 땔감 채취로 벌거숭이가 된 산에 나무를 심는 산림녹화 사업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드문 나라로 평가받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랑하는 조선, 자동차, 철강, 전자, 석유화학 산업의 뿌리는 모두 그 시절에 심어졌습니다.
저는 이 성과를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이 기적은 공장에서, 건설 현장에서, 논밭에서, 그리고 먼 이국땅에서 땀 흘린 수많은 국민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국민을 한 방향으로 모으고, 반대를 무릅쓰고 길을 연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서독으로 건너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인터넷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을 담보로 서독에서 차관을 얻어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서독의 첫 차관 협정은 1961년에 맺어졌고, 광부 파독은 1963년부터, 정부 차원의 간호사 파독은 그보다 뒤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차관이 먼저였고, 파견이 나중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과장된 신화에 기대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의 왜곡을 비판하면서 저 스스로 사실을 부풀린다면, 제가 이 글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힘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이야기는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눈물겹습니다.
1963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약 8천 명의 광부와 1만 명이 넘는 간호 인력이 서독으로 떠났습니다. 광부 모집에는 대학을 나온 청년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광부들은 지하 천 미터 아래 막장에서 뜨거운 열기와 석탄 먼지를 마시며 일했습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분들이 있었고, 평생 진폐증과 후유증에 시달린 분들이 많습니다. 간호사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병원에서 가장 궂은일부터 떠맡으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번 돈을 고향으로 부쳤습니다. 그 돈은 가족을 살렸고, 나라의 귀한 외화가 되었습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서독을 국빈 방문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첫 유럽 방문이었습니다.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를 만나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학자 출신 총리 에르하르트는 고속도로를 놓고 제철소를 세우라고, 그리고 이웃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조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통령은 서독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경부고속도로의 구상을 굳혔다고 합니다.
12월 10일, 대통령 내외는 루르 공업지대의 함보른 탄광을 찾았습니다. 강당에는 서독 각지에서 모인 한국인 광부 대표들과 한복을 차려입은 간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부들로 구성된 악단이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시작된 합창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고, 마지막 소절에 이르러서는 울음으로 무너졌습니다. 애국가는 끝내 제대로 불리지 못했습니다.
연단에 선 대통령은 준비한 원고를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하다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통령도 울고, 육영수 여사도 울고, 광부와 간호사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여사는 행사가 끝난 뒤 간호사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으며 위로했습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대통령이 눈물을 멈추지 못하자, 동행한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건네며 위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함보른 탄광의 강당에서, 남편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이역만리의 동포들을 끌어안던 그 아내를, 10년 뒤 그 남편이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역시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언어의 벽과 싸우며 공부하고, 일하고, 삶을 일구어 온 이민자입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막막함, 말이 통하지 않아 겪었던 서러움, 그럼에도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며 버텼던 시간들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이곳 LA 한인 사회에는 서독 광부와 간호사로 일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신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제 진료실에도 그런 분들이 오십니다. 그분들의 굽은 손마디와 무릎을 치료하면서, 저는 그 몸에 새겨진 역사를 봅니다.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는 막장의 어둠과 병원의 새벽과, 함보른 강당의 그날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교과서 속 인물이 아니라, 머나먼 타국까지 찾아와 함께 울어준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이 영화 이야기를 듣고 어떤 마음이 드실지 저는 압니다. 그분들을 대신해서라도 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영화일 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개봉 닷새 만에 15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습니다. 5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이 이야기를 보고 있습니다.
실존 인물의 실명과 실제 사건을 가져와 만든 영화는, 관객에게 역사로 받아들여집니다. 특히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역사 교과서 열 권보다 강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지금 한국의 20대와 30대 가운데 1974년 8월 1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이 사건을 처음 접하는 창구가 이 영화라면, 그들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문세광이라는 테러범의 얼굴이 아니라, 무언가를 숨기는 권력의 그림자일 것입니다. 북한의 지령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공작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작의 끝에 서 있는 대통령의 얼굴일 것입니다. 한 번 심어진 의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10년 뒤, 20년 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그거 사실 배후가 따로 있었다며"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 인물을 다루는 창작자에게는 더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반론할 수 없는 죽은 사람의 명예를 짓밟고, 살아 있는 유가족의 가슴을 찢는 방향으로 향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가해입니다.
집권 여당의 두둔과 이중잣대에 대하여
이 논란에서 저를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영화 자체보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태도입니다.
역사 왜곡 논란이 일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최민희 의원은 이 영화를 픽션이라고 두둔하며 보러 가야겠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정작 이 영화가 역사를 왜곡했느냐는 질문에는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당 차원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공작 정치'라고 몰아붙였고, 감독을 국정감사에 불러 제작 경위를 묻자는 요구도 막아섰습니다.
저는 민주당이 내세우는 원칙, 즉 정치가 창작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영화를 검열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과,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를 집권 여당의 지도부가 나서서 감싸고 관람을 독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앞의 것은 원칙이고, 뒤의 것은 편들기입니다. 정말로 정치가 창작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면, 여당 지도부는 이 영화를 두둔하지도 말았어야 합니다. 비판하는 쪽은 정치 개입이고 두둔하는 쪽은 정치 개입이 아니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중잣대입니다. 불과 1년 전, 민주당은 제주 4·3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2'를 역사 왜곡 영화라고 공개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때 민주당은 표현의 자유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특정 인물을 미화했다며 정면으로 문제를 삼았습니다. 저는 그 비판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여기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제가 묻는 것은 기준입니다.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역사관을 담은 영화는 역사 왜곡이고,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편에 불리한 음모를 암시하는 영화는 표현의 자유입니까.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영화가 누구에게 유리한가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진영 논리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당파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만약 보수 정당의 지도부가 어느 진보 정치인의 죽음을 두고 그 가족이 배후였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영화를 두둔하고 관람을 권했다면, 저는 똑같이, 아니 더 강하게 비판했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명예와 유가족의 고통은 좌와 우를 가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기준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집권 여당은 한 정파가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책임을 진 정당입니다. 그 지도부의 말 한마디는 개인의 영화평이 아니라 국정을 책임진 세력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집니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과 그 부인의 죽음을 다룬 영화, 북한 최고 권력자조차 자기 쪽의 관여를 인정한 테러 사건을 자국 권력의 자작극처럼 암시하는 영화를 두고, 집권 여당의 최고위원이 역사 왜곡 여부에는 입을 닫은 채 관람을 권한다는 것은 책임 있는 공당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발언이며, 당파를 떠나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할 일입니다.
결론 — 증거를 내놓든지, 의심을 거두든지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쏜 사람은 문세광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과 남의 이름으로 된 여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대한민국 수사 당국은 그가 조총련과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발표했고, 대한민국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특사를 보내 유감을 표했고, 북한 최고 권력자는 28년 뒤 사실상 자기 쪽의 관여를 인정하며 사과했습니다.
현장의 총탄을 둘러싼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문이 가리키는 것은 경호의 실패와 혼란 속의 오발 가능성이지, 대통령의 살해 기획이 아닙니다. 설령 오발이 있었다 해도, 그 총격전을 시작한 것은 문세광이었습니다. 그리고 52년 동안,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대통령이 부인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단 한 조각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영화 '암살자(들)'은 이 모든 사실을 뒤로한 채, 대통령 직속 기관의 공작이라는 암시를 쌓아 올렸습니다. 감독 자신도 대통령이 지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관객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부릅니다. 집권 여당의 지도부는 그 영화를 감싸고 관람을 권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영화 제작진은 증거를 내놓으십시오. 대통령이 부인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내놓으십시오. 그렇다면 저는 누구보다 먼저 그 증거를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면, 한 남편의 통곡을 음모로 바꾼 데 대해 유가족과 국민 앞에 사과하십시오.
최민희 최고위원과 민주당 지도부는 이 영화를 두둔하고 관람을 독려한 발언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십시오. 그리고 1년 전 다른 영화에 들이댔던 역사 왜곡의 기준을 이 영화에도 똑같이 적용해,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는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십시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신 분들, 보실 분들께 요구가 아니라 부탁을 드립니다. 영화는 영화로 보시되, 역사는 기록으로 확인해 주십시오.
역사는 정직해야 합니다. 비판도 사실 위에 서야 하고, 상상력도 사실을 존중해야 합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 과를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지 않은 일로 그를 단죄하는 것은, 그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들과 젊은 세대에게 그날의 사실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내의 관 앞에서 흐느끼던 한 남편의 모습을, 중단된 경축사를 끝까지 읽고 아내의 고무신을 주워 들고 내려오던 그 뒷모습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함보른 탄광 강당에서 울음에 묻힌 애국가를, 경부고속도로 위에 잠든 77명의 이름을, 그리고 나환자의 손을 맨손으로 잡아주던 한 여인의 따뜻한 손을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날 국립극장에서 함께 목숨을 잃은 열일곱 살 장봉화 양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고 육영수 여사님과 박정희 대통령님, 그리고 장봉화 양의 명복을 빕니다. 그 시절 이 나라를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린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Dr. 이광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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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 한편으로 인해 요즘 시끄럽네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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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 없는 이념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