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시인:
전남 영광 출생. 2008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 『야구공을 던지는 몇가지 방식 』. 『서민 생존현장』
제20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수상.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
슬럼프
하린
일요일 오후엔 후회를 예약해 두자
발목을 버리지 않는 나무들이 즐비한 숲 속에서
한계선을 들킨 고풍스런 태도를 연출해 보자
후회가 탄생하는 대목에서 새가 울지 않는다면
발목 아래 작은 뱀들이 너와 나의 허락을 휘감지 않는다면
모든 가면을 벗고 알몸을 실천해보자
우리의 등 뒤엔 우리 아닌 것들을 보고 있는
눈동자가 너무나 많아
비난 받는 습관을 선천병이라 여기며 ‘이곳’과 ‘그곳’의 차이를 드러내자
숲에서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조절을 할 수가 없다
바위의 통증과 피로는 보이지 않고 보호색만 가득하니
배고픈 벌레들을 위해 풀의 사랑법을 배워보자
후회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계절이 찾아온다면
절망이 귀신처럼 출몰하는 날들만 계속 된다면
초록이 다 사라지기 전에 덩그러니 무덤 하나를 실천해보자
관계망상3
정오의 태양 아래 죽은 개가 할딱거리며 쓰러져 있다
어떤 누구도 쳐다보지 않으니 비극적이지 않다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구더기가 끓어올라도
필사적으로 다가온 나비가 스스로 날개를 잘라도,
팔랑팔랑 대신
득실득실만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어도,
무관심엔 맥박이 없으니
신음소리는 분명 환청이다
당신은 언젠가 한 평생 기다림에 집중하다 시든 꽃을 본적 있다
넌, 벗어날 수 없어, 목줄은 결국 반복한 자의 것이니까
개를 사랑한 꽃의 대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개가 향기를 갖으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목줄을 수습하려는 태도는 그만 두시길
후각은 당신과 맞지 않고
꽃의 입장이 되어 꿈속을 산책하는 일과
심장에 향기를 불어넣는 일은
끝끝내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
문1
방금 당신이 열고 나온 장면 속에서 나는 엉망진창이에요
심각은 문과 문 사이의 관계
불륜은 심각과 문 사이의 관계
미닫이를 좋아하나요
여닫이를 사랑하나요
그래요 각자의 상상대로 여기 아니면 저기
미리 엔딩을 정해놓으면 재미없어요
당신에겐 여분의 궁금증이 남아 있고
똑, 똑, 똑, 쇄골을 노크하면 쿵! 쿵! 쿵! 심장이 대답할지 모르니
문이 끝날 때마다 제스처가 중요해요
돌아서는 순간 우린 남남이잖아요
괜찮다는 듯, 괜찮을 거라는 듯
그런데 왜 당신은 당신이라는 문을 자꾸 만들어 내나요?
헤어진 다음 태도는 금물이고
망각은 불안과 불편의 쌍생아라는 것을 더더욱 알고 있으면서
간극
당신도 어려운데 당신 거울은 더더욱 힘들군요
투명엔 왜 찢어지거나 접힌 페이지가 없습니까?
밤을 단정하지 말아주세요
우린 어떤 목차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단에서부터 난간에 이르기까지 당분간 우리 헤어집시다
얼마간 소진됩시다
먼지의 가능성으로 다짐합시다, 훌훌 아니면 툴툴
천사를 흉내 내기 전에 지옥에게 먼저 말을 겁시다
당신은 오열처럼 혼자입니다
무음처럼 증발합시다
월요일을 감행하시겠습니까?
호흡을 갖는 것은 착각입니다
나에게 후회를 기부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섹스 안엔 스프링이 빠져있습니다
식은 지 오래된 키스를 끝내 주시겠습니까?
입술의 높이를 바꿀 수 있다고 선언해주시겠습니까?
통조림
겨울잠 자기에 가장 좋은 곳은 통조림 속이다
이렇게 완벽한 밀봉은 처음
모든 수식어가 바깥에 머문다
이곳에서 1인극은 생리적 현상
숨이 막혀도 웃을 수 있고 들키지 않게 울 수도 있다
그대로 멈춰서 극한의 목소리를 삼키면 그뿐
믿어야 할 것은 오직 잠이고
유통기한은 무한대니 적을 필요가 없다
용도는 단순하게 목적은 비릿하게
미발견종으로 1000년쯤 살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고고학적 취향을 즐기자
미라가 돼서 타인의 꿈속을 유령처럼 걸어 다니자
누구든 통조림 안이 궁금해서 서성이게 만들면 된다
한참 후에 발견될 유언 몇 줄을 빗살무늬로 새긴 상태면 족하다
어떤 천사가 뚜껑을 딱하고 딸 때까지
처음 그대로 변질도 없이 참다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순간, 꿈틀대면 되는 거다
계절은 딱 하나다, 궁핍도 가난도 비굴도 없다
머릿속 황사가 걷히고 심장 속 늪지대가 마르고
내가 나에게 들려주던 거짓말도 삭제된다
누군가를 저주하던 버릇은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왜 증오는 토막 난 후에도 싱싱해지고 있는 걸까, 점점 더
달아나는 레슨
너의 미술은 지칠 대로 지쳤다
네가 그린 빌딩 사이로 갈증이 흐른 뒤
혀를 늘어뜨리는 프레임은 견고하다
처음도 선이고 마지막도 선인데
아이들은 너무나 일찍 놀이터를 그만뒀다
액자 속 잉어가 팔딱거리고
교차로에선 속보들이 제멋대로 충돌한다
넌 상체만 가진 여자와 악수를 한다
잘 해보자는 뜻이었을까 헤어지자는 뜻이었을까
일렬로 선을 채우며 맨홀 속으로 사라지는 개미들
굳어가는 밑줄이 되고 싶어 고개를 파묻은 채 땅만 본다
직선 다음에 직선만 계속 된다
수평 다음에 떨어지는 직선 그리고 바닥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직선
평가는 단호하게 이루어지고
너와 너의 그림자를 위로하기 위해 창문이 새들을 가두려한다
파닥이면서 윤곽을 벗어나는 기법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는데,
여자는 아랫사람의 도리, 즉 아랫도리를 가르친다
허공을 찢고도 피를 흘리지 않는 새들처럼 그냥 넌 직선을 세운다
연필이 무른 발목을 내주듯이 넌 지금도 자신을 마모시키는 중이다
비상구 표지판 속 뛰어가는 사람을 자꾸 아버지라 부르며
세 번째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우글거리는 피비린내를 시 속에 적고 있던 나는 누군가의 공포이거나 울음이거나 하는 것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는데,
두 번째 문장에서 아까부터 고양이가 물고 할퀸 것은 싱싱하지 않은 핏덩어리
바닥을 추종하는 비굴이거나 퇴화된 통증이거나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맹목이거나
무서운 발톱을 뒤집어쓰고 골목과 염증 사이를 활보하면서 시가 되길 거부하는 것들을 할퀴고만 있었지
시어들의 사생활이란 코끼리가 하늘 위를 난다거나 뱀이 백지처럼 조용하다는 허풍이 아닐 텐데,
겨우 표정을 간수 하고 있는 뒤숭숭과 비난을 조곤조곤 수습하면서 창문 너머 응급실을 내다보는 취향을 그만 멈춰야할까
지금껏 한 번도 불이 꺼지지 않았던 응급실, 그 지독한 실패를 천사들은 뭐라고 부를까
궁금해 하다가 상징이나 암시를 흉내 내고 있던 동공을 보고 말았지, 쓰레기통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나에게 들킨 내 눈동자를 말이야
지금 등 뒤에서 나를 클릭하던 신들은 알고 있을까, 소스라치게 놀란 문장의 안색을, 소멸을 뒤집어쓰려다 들켜버린 어설픈 마무리를
찰나의 발견
1.
잉어가 할딱거리고 있다
얼마 만에 가물거리는 순간이 오는 걸까
나는 나를 몰래 지켜보기로 한다
빈틈도 없이
빠져나가던 숨이
당신의 깜박임 때문에 잘려나간다
이게 진짜 패배구나, 싶은데
눈동자를 감출 수 없다
비는 끝내 오지 않고
신음소리마저 시들어 간다
모든 파문이 사라진다
2.
‘아직도’에서 ‘이미’로 돌아서는 순간이 온다
나의 친애하는 증오여
약관에 동의하십니까, 물을 수 없다
사랑과 여자는 이미 떠나고
사라진 자리엔 붉은 밑줄이 총총
이 시대의 문법에 끝내 맞지 않는 거다
온갖 결속이여, 안녕
딜리트키를 누룬다
레시피
오늘 태양의 요리는 볶음
주재료인 아버지는 철근을 엮으며 비실비실
숙취와 불면으로 알맞게 저며져서 최적의 상태
십장의 잔소리 한 모금 마시고
잔뜩 발효된 상태에서 흐물흐물 지하로부터 멀어지니
요리의 완성은 시간문제
1:1:1의 비율로 섞인 것은 엄마 새엄마 고지서
고열로 치닫는 30층 공사장에 던져 놓으니
질긴 정신줄 끊어놓기 좋게
바람 한 점 불지도 않는다
시멘트 냄새가 적당하게 간을 맞추고
요리를 거절할 신은 하나도 없으니
공중에 새 한 마리 더 추가할 뿐이니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재빨리 뛰어내릴 수밖에
아, 태양의 레시피는 얼마나 간단한가?
아, 이 요리의 가격은 얼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