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 최종천
오늘 거멍이가 죽었다 / 최종천
올해가 모차르트가 죽은 지 250 주년이라고
인간의 역사에는
나는 자신의 피조물이다 고로,
십오 촉 / 최종천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상처를 위하여 / 최종천
박씨의 검지는 프레스가 먹어버린
사랑이여 / 최종천
사랑이여 네가 왔다는데 눈보라처럼 혹은 가난하다는 것
시계 1 / 박종천
시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의자 / 최종천
다리 하나가 부러진 의자가 홀로
상징은 배고프다 / 최종천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毒 / 최종천
못견디게 예쁜 여자의 매력에는
맞선 / 최종천
내일 난 누구를 만나기로 되 있죠
화곡역 청소부 한달 월급에 대하여 / 최종천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구근식물 / 최종천
돼지머리 / 최종천
경험에 의하면 배가 출출해야 머리가 맑다 저 너그러운 웃음은 분명 그 무거운 비계덩어리를 떼어 내고 무언가를, 예를 든다면 無所有따위를 터득한 그 웃음일 것이다 돼지머리를 볼 때마다 나는 긴장한다 입에 돈을 물려주면서 전율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귀신의 상징이랄까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와는 다르다 사업이 번창하게 해 달라고 네 앞에 손을 삭삭 비는 사람들 돼지만큼은 배가 부른 사람들 인간의 비만을 용서한다는 듯한 너의 진지하고 즐거운 웃음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는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돼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혐의 나의 긴장은 돼지머리에 칼이 닿으면 아무런 근거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돼지머리가 베푸는 용서를 받아들여 식욕을 채운다 일반적으로 정신이 흐려 있을 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 서해에 저도(猪島)라는 섬이 있다. 언젠가 그곳에 갔던 적이 있다. 왜 그곳에 갔는지, 언제 갔는지, 누구와 함께 갔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작은 섬. 사방 파도가 살아서 넘실거리고 사방팔방으로 한없이 바다가 열려있는 곳. 어찌해서인지 그 섬은 돼지를 뜻하는 ‘저도’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며, 섬의 상징 동물로 돼지를 섬기고 있었다. 돼지만큼 양극단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우선 돼지는 일상생활에서 속된 존재로 인식된다. 물론 풍요와 다산의 의미를 표출하여 ‘복 돼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돼지는 지저분한 존재로 인식되기가 십상이다. 식탐의 존재로 비쳐지고 아무 곳이나 찾아가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미천한 존재로도 읽힌다. 그러나 사실은 돼지만큼 깨끗한 동물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딘 가에서는 돼지를 관상용으로 키우며 거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돼지머리 또한 양극단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일상에서는 돼지머리란 무식하고 미련한 머리, 아둔한 지혜, 기억력이 좋지 않은 존재로 다가온다. 그러나 제의에서 돼지머리는 성스러움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웃는 모습의 돼지머리를 찾기도 하거니와, 그것에 따라 값도 다르다 한다. 제사상에서 돼지머리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얻는다. 이렇듯이 돼지의 의미만큼 양 극단적으로 파악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는 성(聖)과 속(俗)을 동시에 한 몸에 가지고 있으며 한 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돼지는 성과 속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올리는 민속신앙의 세계는 미신이라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돼지는 이 세상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아, 세상을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어 놓고 그대들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진실로 행복한가? 자고로 “배가 출출해야 머리가 맑”은 것이다. 또한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돼지는 꿀, 꿀, 꿀 웃으면서 “일반적으로 정신이 흐려 있을 때 사람들은 / 즐거워하고 만족한다”고 우리에게 한없이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가 제사가 끝나고 돼지머리 고기를 안주삼아 마실 한잔 술의 입맛을 다시면서 제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동안에도. / 김완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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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천 시인
1954년 전남 장성 출생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삼계중학교 졸업을 학력의 전부로 마감하고 17살에 무작정 상경. 1968년 마장동 뚝방, 성동극장 옆골목에서 2년간 구두 닦고, 조선호텔 뒤 중국집 외백, 명동 피자집, 신설동 맥주집 등등을 전전하며 낮엔 입을 의탁하고 밤엔 등을 뉘였다. < 눈물은 푸르다 >는 16년만에 낸 첫시집. 용접공으로 일하는 노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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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현장의 다양한 은유들 - 최종천 시인의 말
자지라는 말을 원고의 맨 앞에 말하기가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으나 부끄러울 것도 없으리라. 이유는 자지의 반대의 것을 사용한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더욱 부합할지라도 이상하게도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에서는 용납이 안 될 것이고, 그에 비하여 자지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적은 편이다. 여하간에 자지는 인간의 남성주의적 사고로 인하여 그 반대의 ‘―지’보다는 실용적이고 전천후全天候적인 것이 분명하다. 자지와 용접봉의 관계는 밀접하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로 부터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은유 속에서 일체가 되어 있다. 기계를 제작할 때 자재들을 도면대로 조립하는 과정에서는 우선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접을 튼튼히 한 다음에 본격적 인 용접에 들어가게 된다. 대부분의 기계의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최소 두 명 이상이 용접에 들어가기 전에 기계의 구조를 잘 분석한 다음 어디는 어느 정도로 두껍게 때우고 어디는 가늘게 때운다든가 또는 어디를 맨 먼저 때워야 한다는 순서를 정하고 그 약속을 둘이서 나누어 가진 다음에 용접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둘 사이의 이 약속이 비틀어지면 기껏 잘 만들 어 놓은 기계의 각이 틀어지거나 몸체가 비틀려서 이걸 잡는 데는 제작한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 용접봉 통 안의 용접봉 수가 줄어든다. 용접작업은 의외로 고된 작업인데 그 이유는 용접의 결과가 반듯하게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정자세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 중에 제일 기다려지는 것은 음료수 와 마누라들의 무전 페르몬이다. 하루에 두 번 정도는 전화가 온다. 저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서너 개라는 개수는 용접봉 통에 남아 있는 용접봉의 개수인 것이다. 용접봉은 그대로 자신의 성기의 은유가 되어버린다. 용접봉 통에 가득 찬 용접봉이 몇 개만 남은 것은 일을 그만큼 했기 때문이고 일을 하면 몸이 많이 피곤할 것이다. 저녁에 집에 가서 아내에게 줄 것은 통 안에 남아 있는 서너 개 뿐인 것이다. 다른 모든 작업장의 시설들이 그렇겠지만 철공장의 대부분의 공구나 설비들은 성적인 은유로 표현하기가 좋다. 산소절단기 의 경우 가끔 화구를 가는 바늘로 쑤셔 주어야만 절단이 기가 막히게 잘 된다. 볼트는 남자의 성기에 너트는 여자의 성기에 은유된다. 볼트와 너트가 조립되는 과정이나 그것을 푸는 일 은 성행위에 비유된다. 그런데 이런 은유들이 어떤 특정한 언어감각이 좋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초보자가 용접해 놓은 것을 보면 구불구불하고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한다. 그걸 우리 고참들은 ‘뱀 잡았다’고 은유 한다. 뱀이 기어가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얇은 철판을 때우 다가 빵꾸가 나서 그걸 메우려고 하다 보면 두둑히 쌓이게 되는데 이것은 떡을 쳐 놓았다고 우리는 말한다. 중에 철판에 볼트의 머리를 용접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대부분 우리는 용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나는 그때 의식적으로 은유를 찾았으나 찾아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도면을 보더니 아! 이거는 볼트를 심어야 되네?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철판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조이는 경우와는 다른 표현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용접을 한 볼트에는 여러 가지가 달리고 너트로 조여지는데 영어의 너트라는 단어에는 열매라는 뜻도 있다. 시인들이라면 어떻게 표현할 것 인가? 한다. 다양한 은유들이 만들어진다. 구조란 반드시 상호간에 작용이 있어야 하며 이 작용이 무질서로 이행하는 경우는 구조라고 볼 수가 없다. 작업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은유들은 노동자와 노동 사이 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노동의 피로를 덜어준다. 바쁜 노동을 바쁘지 않게 해준다. 일하는 틈틈이 생각할 여유를 만들어 준다. 노동자 상호간에 협력을 하게 한다. 생각 자체에 여유를 만들어 준다. 이런 은유의 말들이 오고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나는 기성시인들에 의하여 제작되는 시들 이 우리 생활에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매우 의심 스럽다. 시는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인 생활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동현장에서 생성되는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다. 그 이유는 다양한 은유들은 의식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몸이 불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을 때 인디언은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얼굴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노동자들의 성적인 표현을 화이트칼라들은 점잖지 못하다고 비웃을지 모르나 성적 은유의 작용은 섬세한데 이런 다양한 성적인 은유를 통 하여 벗어버린다. 몸이 하나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몸을 부려서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보편적인 문화 속에서는 육체와 얼굴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도로 상징 조작되는 현대예술의 영역 즉 의미 의 문화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눈에 띄는 욕망의 기호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끝없는 성욕과 수행능력만이 부부 지간의 유일한 애정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아내의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잘되든 못되든 세를 주거나 팔아버릴 수는 없다. 어떤 사내들은 아내의 구멍가게가 너무 불경기여서 잔업을 하고 늦게 들어가고, 어떤 아내 들은 통 불경기를 몰라서 사내들이 일찍 집에 들어가 아내의 구멍가게 일을 도와준다. 막 장가를 간 이상순이라는 친구는 거의 모든 시간을 졸았다. 그는 대단히 노력을 해서 장가를 갔는데 마누라 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대고 절을 한다더니 바로 그의 경우가 그랬다. 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잔업을 거의 안 하는 사람도 그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마누라의 구멍가게는 당시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의 수치를 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현대사회는 아주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사修辭되어 있으며 문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사고와 개념은 이미 은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일상어들의 대부분은 은유다. 은유는 이미 시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남성의 성기가 어떻게 은유되고 있나를 보는 것만으로 도 충분하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에 청와대에 비유되기 도 했다. 남성은 물론 여성들까지도 부정적인 것에는 ‘좆 같다’는 표현을 한다. 애기들의 오줌을 누일 때도 여자애기는 은밀하게 한다. 그에 비해 남자애기는 전천후 全天候적이다. 거의 아무 데나 대고 오줌을 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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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실재의 쇠를 붙이기 위해 밤엔 상징의 언어를 붙이기 위해 밤낮을 번갈아가며 일으키는 두 개의 불꽃! 이 불꽃들 의 기록이 바로 용접공 시인 최종천의 삶이자 시다.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온 뒤 첫시집 『눈물은 푸르다』 (2002)로 2002년 제20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최종천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의 밥그릇 이 빛난다』가 출간되었다. 첫시집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이번 시집에서 그는 '예술과 노동을 잇는 시인'(김우창)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한층 더 심화된 시세계로 '예술과 노동 사이의 이음새를 세심하고 낱낱이 밝혀주는 시인'으로 거듭난다. '상징'과 '실재'라는 핵심어를 중심에 놓고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로, 또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인의 이중적인 삶의 무늬와 결을 역설과 반어의 굵직한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불꽃을 일으켜 쇠를 이어붙이는 작업으로 잔뼈가 굳은 용접공, 그 일상이 이번 시집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뱀잡기」1ㆍ2ㆍ3). 먹고살려면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는 숙명은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을 꾸려나가 기는 여간내기에게 피차일반이다. 하지만 지겨운 노동을 끝내고 저녁 어스름을 밟아 귀가하여 생물학, 철학, 종교 학 관련 책을 읽으며 '생각의 실을 풀어 옷을 짜는'(「털옷」 )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위해, 밤낮을 번갈아가며 일으키는 두 불꽃! 이 불꽃들의 기록이 바로 최종천의 삶이자 시다. 이전 시세계의 아쉬움 으로 지적된 이미지 형상화와 언어 조탁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정제된 면모를 띤다. 그의 시는 선이 곱고 화려하게 빠진 하늘거리는 옷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자연의 풍화작용 을 겪고 온몸으로 그 흔적을 끌어안은 굵직굵직한 바위의 형상에 가깝다. 생김생김은 투박하되, 바람이 지나가고 빗방울이 부딪친 자국을 고스란히 간직한, 크고 작은 다양 한 사연(이야기)들이 현란한 수사를 압도한다. 드러나는 제2부를 비롯해, 1ㆍ3ㆍ4부의 작품들 역시 일상의 다양한 사건들이 그만의 개성적인 관점으로 형상 화되어 있다. 특히 노동계급의 뛰어난 지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시들, 굳이 분류하자면 '새로운 노동시'로 규정 될 완성도 높은 시편들(「나사들」 「몽키」 「방법서설」 「아직 진화중입니다」 「죽음의 다리를 건너는 법」 「뱀잡기」1ㆍ2ㆍ3 「이성민을 만나다」 등)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인식하는 것은 사막지형처럼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지반을 확인하겠다는, 또한 자신의 발밑 곳곳에 숨은 허방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시인에게 허방, 그것은 실재의 탈바가지를 쓴 허깨비로서 의 상징을 가리킨다(「허깨비를 세우다」). 예컨대, 미적 감수성이 증대한 오늘날 여성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다이어트 다. 비만은 아름다움의 적이자 철천지원수로 간주되고, 날씬하다 못해 비쩍 마른 모델이 굶어죽는 사건까지 벌어 지고 있다. 시인은 이런 현상을 예견이라도 한 듯 '비만'에 관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역시 '환상을 제공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자신의 "굶주림과 포만의 공포"를 "명징하게 형상화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 이라는 것이다(「비만」). 그래서 비만을 혐오하며 몰아 붙일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공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에 의해 창조되고 있는" "현재진행중인 조각"으로 여기고 '감상하라'고 충고한다(「비만에 불만을 표하지 말자」). 대한 옹호이자, 실재에 비해 과도하게 부풀어오른 상징 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반성을 촉구하는 명령이다. 만약 오늘날의 세계, 실재를 가장 하며 현실을 움켜쥐는 화려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매혹 되기만 한다면, 무너진 삼풍백화점에서 생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붕괴된 실재의 잔해 더미 속에서 나를 구원할 "시집 종이", 그 물질성을 육화 하지('뜯어먹지') 않고 그 상징성('시')만 취한다면 분명 굶어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상징은 배고프다」). 생사가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 실재를 넘어선 상징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잘 알지만, 그는 실재에 봉사하는 노동자인 동시에 고도의 상징성을 조작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징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이중적이며, 자기반성적일 수밖에 없다. 헤겔전집을 읽고 베토벤을 들으며 고도의 상징으로 이뤄 낸 '의미'를 소비하면서 자신도 소비되는 묘한 가역작용 을 경험하고(「나는 소비된다」), 용접봉을 쥐고 민활히 움직여왔을 손이 '허구조작(문학)'에 빠져 눈이 멀어가는 것에 연민을 갖기도(「가엾은 내 손」) 한다. 시인에게 시란 그 자체가 자기각성으로서의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환언하면, 상징을 비판하면서도 상징 의 수혜자로서 자신의 역설적인 운명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제인 것이다. 노동시 계열의 시인과 다르다. 그는 비판자인 동시에 향유자인 것이다. 현대문화가 내뿜는 상징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면서도 그 위험한 상징 을 도구삼아 사태를 언표화해야 하는 상황, 이때 생성되는 팽팽한 시적 긴장이 최종천 시의 힘이고 그만의 지성과 명민함이 발휘되는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라는 과거의 낡은 범주에 가두어놓고 최종천 의 시를 음미하는 일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그에게 노동은 인간이 인간됨을 회복하는 유일한 통로다. 마주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개선하자는 프로파간다가 아닌 생활정치의 내면화를 통한 자기갱신의 방편으로 선물된 것이다. 이제 노동은 사회구성의 한 요소로 일정한 당파성과 계급성의 특징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운명 이자 구원(救援)의 행위로서 정당하게 수용되고 확장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은 모두의 '의무'라고 강조한다(「당신은 얼마나 불행하기에」 「화곡역 청소부의 한달 월급에 대하여」).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온다고,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마음속에 심어놓는 게 아닌 스스로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인의 이러한 면모는 "프레스가 베어 먹어버린" 박씨의 반토막짜리 검지가 들어갔던 목장갑의 "접혀 들어간" 부분에 자기 손가락을 끼워보며 환하게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끼고, 노동이야말로 노동으로 말미암은 '상처'야말로 "영혼을 켜는 발전소"라고까지 말한다 (「상처를 위하여」). 잘린 손을 소주로 씻으며 담벼락 밑에 시든 손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노동현실의 병폐 들을 파묻던, 비장함이 절절 흐르던 박노해의 「손무덤」 과 사뭇 다른 노동의 수용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최종천이 궁극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 공장 소음으로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어이―" 하고 사람을 불러 사용중인 크레인 대신 "그럼 같이 들자는, 드는 동작을 해보이면서 / 말 대신 동작과 표정"을 주고받으며 "반은 짐승을 닮은 몸짓과 발성, 비분절음"으로 "모든 동작과 표정이 언어" 인 세계, '언어의 본질'이었던 '침묵'을 향해 진화하는 세계(「아직 진화중 입니다」), 즉 "자연처럼 일할 수" 있는 세계(「비대상(非對象)」)를 그린다. "절망은 희망의 위성 같은 것으로서/ 희망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기에/ 희망을 꺼두면 절망도 빛나지 않을 것"이고 "지구가 사막화하고 있는 것은 /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기 때문"이라고 (「희망을 꺼놓자」). 이것은 '희망 없이 사랑하라' 했던 칸트의 말처럼, 휘황한 현실에 들떠 허망한 꿈을 좇기보다 내 발밑을 굽어보고 생의 참뜻을 행위에서 찾자는 다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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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세상의 절반은 병이다..그래도 시인의 눈길은 맑았었나 봅니다..저는 우주를 채울 듯 하기만 한데..홍시..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오늘 글을 읽으면서..이렇게도 많은 눈으로 홍시를 보는구나 싶어서..선뜻 손내밀어지지 않을 듯 합니다..늘 감사의 말씀을..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