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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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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집 외 / 최종천
동산 추천 0 조회 65 09.09.21 20:3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집 / 최종천


 


나는 왜 고집스럽게 집으로 가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집을 가지려 등이 휘고
집안의 장롱이나 책상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두어 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리를 헤매면서 알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빛나는 언어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의미를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행복이라는 상징은 얼마나 춥고 배가 고픈가.
나는 오늘도 많은 의미를 소비했다
가엾은 예수와 노자에게
다시는 언어를 구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눈사람의 집은 그의 몸이다
그의 몸은 그의 全集이다
나도 눈사람처럼 집 없이 살고 싶다

 

 

 

 

 

 

 

 

Friendship

 

 

 

 

 

오늘 거멍이가 죽었다 / 최종천

 

 

올해가 모차르트가 죽은 지 250 주년이라고
그를 추모하며 그의 음악을 듣자고 한다.
오늘은 모차르트만 죽은 날이 아니다
오늘은 누구보다 우리 공장에서 기르는 간절한 눈빛의
거멍이가 죽은 날이다
건너 공장의 수컷을 만나러 가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나는 모차르트보다 거멍이를 추모하리라
누구는 “죽음은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 죽음은 개 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개구멍을 통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많다
정문보다 개구멍을 통하여 드나드는 자들은
성공을 보장받게 된다
개에게는 개구멍이 없다
개만도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모차르트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은 의무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차르트의 피조물이다

 

나는 자신의 피조물이다 고로,
나는 거멍이를 추모하고자 한다
모차르트는 듣다가 꺼 버릴 수 있지만
거멍이의 짖는 소리는 꺼지지 않는다
거멍이가 꺼버려야 비로소 꺼진다
헛것인 나를 짖어주던 거멍이의 눈동자가
하늘에 떠 있다,  별이다.



 

 

 

 

 

 

 

 

 

 

 

십오 촉 / 최종천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오 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내 담장을 넘어와 바라볼 때마다
침을 삼키게 하는, 그러나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 촉은 될 것이다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필라멘트
이백이십짜리 전구를 백십에 꽂아 놓은 듯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떨어지지 않는
십오 촉의 긴장이 홍시를 켜 놓았다
그걸 따 먹고 싶은
홍시 같은 꼬마들의 얼굴도 켜져 있다

 

 

 

 

 

 

 

 

 

 

 

 

 

상처를 위하여 / 최종천

 

 

박씨의 검지는 프레스가 먹어버린
반 토막짜리다 그런데 이게
가끔 환하게 켜질 때가 있다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면
내 손가락에서 그의 검지 반 토막이
환하게 켜지는 것이다
박씨는 장갑을 낄 때마다
그 반 토막의 검지가 가려워서
목장갑 손가락을 손가락에 맞게 접어 넣는다
그 접혀 들어간 손가락은 때가 묻지 않는다
환하게 켜지는 검지의 반 토막이 보고 싶어
나는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곤 하는데
그러면 전신에 전류가 흐르듯 하는 것이다
상처가 켜 놓은 것이 박씨의 검지뿐이랴
과일들은 꽃이라는 상처가 켜 놓은 것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꺼져 있다
상처는 영혼을 켜는 발전소다

 


 

 

 

 

 

a day somwhere

 

 

 

사랑이여 / 최종천

 

 

사랑이여 네가 왔다는데 눈보라처럼 혹은
먼지처럼 이 지상에 내렸다는데
와서 어디에 있는가
나의 가난한 방에 있는가
교회나 성당에 있는가
사랑이여 네가 있다면
물은 왜 더러워지며
공기는 왜 희박해지는가
어디엔가 있긴 있을 것인데
소설이나 시속에 있는가
어린이의 눈 속에 있는가
네가 있다면 사랑이여
사람들은 너 때문에 죽어야 하리
너 때문에 살아야 하리
남자는 여자를 사기 위해
여자는 남자를 사기 위해 태어난다
소녀는 벌써 낙태를 경험하고
여아의 탄생은 저지당하는
이 지상에서 사랑이여
네가 있다면
탄생의 조건은 없어야 하리
목숨을 구걸하고 거래하는 일도
없어야 하리
또 없어야 하리
친구들과의 사귐을 젖혀두고
내가 이렇게 시를 쓰는 일도
이 황홀한 햇살을 거절하고
처박혀 상상에 골몰하는 일도
없어야 하리
사랑이여 너는 가난하고 소박한 삶에서
도망쳐 나와
그 찬란하고 화려한 사치향락 속에 숨었느냐
영화 속에나 혹은 연속극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가
사랑이여 너는 어디에 있느냐
죽었느냐 살았느냐
오늘도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교회나 성당 불당에 나가
십자가 앞에서 석가의 앞에서
아들 딸들의 합격과 출세 성공을 기도한다
나는 노동자다 나는 보았다
일요일날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내 옆에서 묵묵히 노동을 하는 예수를
그는 말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자기에게 주문서를 놓고 간다고
그 많은 것들을 해 주기 위해
일요일에도 일해야 한다고 했다
소녀들은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몸을 판다
아버지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딸들과 매음을 하고 있다
 

가난하다는 것
고독하다는 것
이것이 축복이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사랑이며 행복이라는 사실을
전태일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타락으로 치닫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비치는
하나의 성좌다

 

 

 

 

 

 

 

 

 

 

시계 1 / 박종천

 

 

시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밥을 줘야 돌아가는 것
밧데리를 갈아야 돌아가는 것
나는 시계를 허리띠에 차고 일한다
함마질을 못 견디는 시계
우리 과장님은 손목에 차고 있다
내 시계보다 좀 느려서 식사합시다 하면,-벌써요?
깜짝 놀라며 오분을 올라선다
밧데리 갈아야 겠네요, 과장님
고장났나? 간지 얼마 안 되는데?
고장이나 과장이나 그게 그거네 하니까
아, 최종천씨 시계는 뭐여? 묻는다
나는 웃 작업복을 들추며 허리띠를 보여준다
없잖아? -이거여, 이거.
우연하게 배꼽이 거기 있었다 

 

 

 

 

 

 

Sleepy

 


 

의자 / 최종천

 

 

다리 하나가 부러진 의자가 홀로
바닷가 선창을 서성거린다
멀쩡한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도
앉아서 죽치고 있는 의자들을 떠나
여기까지 온 의자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만나면 즉시 인사할 수 있는 자세로
혹은 사과할 수 있는 자세로 서성거린다
서있는 의자 위에
보이지 않는 것과 함께 새 한 마리 앉아있다
의자와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인지
다리 하나는 들고 있다
이제 의자는 다리 하나를 마저 찾아
편안하게 쉬어본다, 그도 잠시 뿐
의자는 다시 곧게 설 것이다. 서서
자기를 데려 갈 절정의 파도를 혹은
인간을 기다릴 것이다
다리가 네 개인 책상보다
세 개인 책상이 더 견고하게 선다고 한 사람은
니체다, 그는 평생을 하나의 다리로만 살았다
아니면 새 개의 다리로 살았을 것이다. 나머지
두개의 다리를 어찌 할 수가 없어
다리가 없는 사람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두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저 의자의 다리 하나를 빼앗아 버린 사람은 누굴까
그도 다리 하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중간을 택했다. 다리 하나가 고장난 나는
걸음에 춤으로 리듬을 만들어가며
의자를 들고 서성거리고 싶을 때가 있다

 

 

 

 

 

 

 

The long journey

 

 

 

상징은 배고프다 / 최종천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가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의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 최종천

 

 

못견디게 예쁜 여자의 매력에는
독소가 있을 듯
거기다 계산이나 학력 사회적 지위까지
이토록 화려하고 보면 그녀는
독버섯이거나, 독거미이거나, 헌데
그런 여자들이 의외로?
애인이 없다고, 독은 독인데 孤獨이군
高毒, 그녀의 미소는 얼마나 농도가 짙은지
그녀의 눈빛은 다이옥신이 타는 듯 보이지 않는
불꽃을 가지고 있다 푸르스름한 그녀의
孤毒. 사내들은 모른다. 독은 독으로 치유해야 한다
그녀의 毒을 미량만 훔쳐서 나의
孤獨에 타 마시자 나의 사십 오년이나 된 실업에 타 마시자
그녀의 毒을 나의 獨에 타 백신을 제조하자
요컨데, 에이즈 백신을, 쾌락 백신을, 우울증 백신을
모든 孤獨한 여자는 毒을 품고 잔다
呱獨하지 않은 예쁜 여자는 독보다 더 위험하다
약효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毒은 없고 獨만 있다
이런 여자가 독버섯이다 독거미이다
이 지긋 지긋한 가난을 견디는
차별을 견디는 천대를 견디는
대한민국의 마누라들이여
대한민국의 졸장부들이여
그대 마누라의 씁쓸한 입술 맛은
뽀뽀가 끝나고 조금 지나면 달지 않은가
독이 병을 치료한다
세상의 절반은 병이다

 

 

 

 

 

 

Modern day camel trader

 

 

 

맞선 / 최종천

 

 

내일 난 누구를 만나기로 되 있죠
나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논길을 걸을 때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도록 홀연히 걷는
겁 많은 여인에 불과하므로
조용히 앉아 그가 펼치는 청사진을 혹은 필름들을
보기만 할 거 랍니다
다만 내게도 소원이 있다면 그가
일종의 견적서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나의 오래된 고독을 우롱하지 않기를 바라죠
물론 나는 사랑도 일종의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사랑에는 한계가 모호하고
사업의 윤곽은 뚜렷하지요
성공하는 남자는 결코 원하지 않을 거 에요
나처럼 수줍은 여인과 무엇을 동업할 수 있겠어요
그래요 고독은 도대체가
무엇의 밑천도 되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 늘 고독하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때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지요
햇살의 커튼으로 창을 장식하고
특히 설거지 할 때는 물을 아끼죠
차를 잘 끓이고 말수가 적답니다
그래요, 비서에나 어울리는 것이죠
내 반짝이는 비늘을 그가 어디에
묻혀 갈지를 모르겠어요

 

 

 

 

 

 

 Magic kiss the reload version !

 

 

 

 화곡역 청소부 한달 월급에 대하여 / 최종천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지원비가 드디어 한 달에 100만원씩
1200만원으로 올랐다, 용렬하게
이 몸도 신청했다. 문득 화곡역 청소부에게
한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왜 물어보고 싶었을까?
63만원이라고 했다.
시집도 내고 목돈으로 1200만원이나 벌었으니
행복은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배때지가 꼴린다, 내가 못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의 이 말은 은유도 비유도 아니다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다. 그 청소부는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하고도 그것밖에 가지지 못하나
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시인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시인들이여
행복은 권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그대는
시인은 못되리라. 행복은 누구나의 의무이다
우리의 행복함은 곧 우리가 선함이요
우리의 불행은 곧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라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원리는
화곡전철역에서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월급이 63만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Oldonyo Lengai

 

 

 

구근식물 / 최종천

 


마당 안의 꽃밭에 구근식물들은
비온 뒤 그들의 깨끗하게 씻긴
예쁜 발가락들을 내 보이곤 한다
이 골목 천막을 친 기숙사에서
나는 그런 구근들을 가끔 보게 된다
잠결에 뒹굴다 내 밀어진 발들을
가만히 손끝으로 간질이면 들어간다
열대사막의 푸른 식물처럼 서서히 움직인다
나는 그녀를 지니고 나서부터
사랑은 植物的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홀랑 벗고 엉키고 있을 때면
인간은 하나의 球根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본격적인 괘도에 진입한다면
사랑은 생물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린 것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란다고 말한다
그날 밤 나는 내 알뿌리 한 토막을
아내의 구덩이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돼지머리 / 최종천 

 

 

경험에 의하면

배가 출출해야 머리가 맑다

저 너그러운 웃음은 분명

그 무거운 비계덩어리를 떼어 내고

무언가를, 예를 든다면 無所有따위를

터득한 그 웃음일 것이다

돼지머리를 볼 때마다 나는 긴장한다

입에 돈을 물려주면서 전율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귀신의 상징이랄까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와는 다르다

사업이 번창하게 해 달라고

네 앞에 손을 삭삭 비는 사람들

돼지만큼은 배가 부른 사람들

인간의 비만을 용서한다는 듯한 너의

진지하고 즐거운 웃음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는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돼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혐의

나의 긴장은 돼지머리에 칼이 닿으면

아무런 근거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돼지머리가 베푸는 용서를 받아들여 식욕을 채운다

일반적으로 정신이 흐려 있을 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

서해에 저도(猪島)라는 섬이 있다. 언젠가 그곳에 갔던 적이 있다.

왜 그곳에 갔는지, 언제 갔는지, 누구와 함께 갔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작은 섬. 사방 파도가 살아서 넘실거리고 사방팔방으로 한없이

바다가 열려있는 곳.

어찌해서인지 그 섬은 돼지를 뜻하는 ‘저도’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며, 섬의 상징 동물로 돼지를 섬기고 있었다.

돼지만큼 양극단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우선 돼지는 일상생활에서 속된 존재로 인식된다.

물론 풍요와 다산의 의미를 표출하여 ‘복 돼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돼지는 지저분한 존재로 인식되기가 십상이다.

식탐의 존재로 비쳐지고 아무 곳이나 찾아가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미천한 존재로도 읽힌다. 그러나 사실은 돼지만큼 깨끗한 동물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딘 가에서는 돼지를 관상용으로 키우며

거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돼지머리 또한 양극단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일상에서는 돼지머리란

무식하고 미련한 머리, 아둔한 지혜, 기억력이 좋지 않은 존재로

다가온다. 그러나 제의에서 돼지머리는 성스러움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웃는 모습의 돼지머리를 찾기도 하거니와, 그것에 따라 값도

다르다 한다. 제사상에서 돼지머리는 성스러움의 의미를 얻는다.

이렇듯이 돼지의 의미만큼 양 극단적으로 파악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는 성(聖)과 속(俗)을 동시에 한 몸에 가지고 있으며

한 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돼지는 성과 속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올리는 민속신앙의 세계는 미신이라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돼지는 이 세상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아, 세상을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어 놓고 그대들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진실로 행복한가?

자고로 “배가 출출해야 머리가 맑”은 것이다.

또한 “돼지의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인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돼지는 꿀, 꿀, 꿀 웃으면서 “일반적으로 정신이 흐려

있을 때 사람들은 / 즐거워하고 만족한다”고 우리에게 한없이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가 제사가 끝나고 돼지머리 고기를

안주삼아 마실 한잔 술의 입맛을 다시면서 제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동안에도.

/ 김완하 시인 



 

 

************************************

 

최종천 시인

 

1954년 전남 장성 출생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전남 장성 삼서면에서 한 농사꾼의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삼계중학교 졸업을 학력의 전부로 마감하고 17살에 무작정

상경. 1968년 마장동 뚝방, 성동극장 옆골목에서 2년간 구두

닦고, 조선호텔 뒤 중국집 외백, 명동 피자집, 신설동 맥주집

등등을 전전하며 낮엔 입을 의탁하고 밤엔 등을 뉘였다.

< 눈물은 푸르다 >는 16년만에 낸 첫시집.

용접공으로 일하는 노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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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현장의 다양한 은유들 - 최종천 시인의 말

 

자지라는 말을 원고의 맨 앞에 말하기가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으나 부끄러울 것도 없으리라. 이유는 자지의 반대의 것을

사용한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더욱 부합할지라도

이상하게도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에서는 용납이 안 될 것이고,

그에 비하여 자지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적은 편이다.

여하간에 자지는 인간의 남성주의적 사고로 인하여 그 반대의

‘―지’보다는 실용적이고 전천후全天候적인 것이 분명하다.

자지와 용접봉의 관계는 밀접하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

부터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은유 속에서 일체가 되어 있다.

기계를 제작할 때 자재들을 도면대로 조립하는 과정에서는

우선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접을 튼튼히 한 다음에 본격적

인 용접에 들어가게 된다.

대부분의 기계의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최소 두 명 이상이

용접에 들어가기 전에 기계의 구조를 잘 분석한 다음 어디는

어느 정도로 두껍게 때우고 어디는 가늘게 때운다든가 또는

어디를 맨 먼저 때워야 한다는 순서를 정하고 그 약속을

둘이서 나누어 가진 다음에 용접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둘 사이의 이 약속이 비틀어지면 기껏 잘 만들

어 놓은 기계의 각이 틀어지거나 몸체가 비틀려서 이걸 잡는

데는 제작한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용접봉을 용접봉 통에 가득 담아 가지고 용접을 하는데 시간에

따라 용접봉 통 안의 용접봉 수가 줄어든다. 용접작업은 의외로

고된 작업인데 그 이유는 용접의 결과가 반듯하게 잘 나오게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정자세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 중에 제일 기다려지는 것은 음료수

와 마누라들의 무전 페르몬이다. 하루에 두 번 정도는 전화가

온다. 저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 줄 거는 서너 개밖에 안 남았다, 이 사람아.” 이때의

서너 라는 개수는 용접봉 통에 남아 있는 용접봉의 개수인

것이다. 용접봉은 그대로 자신의 성기의 은유가 되어버린다.

용접봉 통에 가득 찬 용접봉이 몇 개만 남은 것은 일을 그만큼

했기 때문이고 일을 하면 몸이 많이 피곤할 것이다.

저녁에 집에 가서 아내에게 줄 것은 통 안에 남아 있는 서너

뿐인 것이다.

다른 모든 작업장의 시설들이 그렇겠지만 철공장대부분의

공구나 설비들은 성적인 은유로 표현하기가 좋다. 산소절단기

의 경우 가끔 화구를 가는 바늘로 쑤셔 주어야만 절단이 기가

막히게 잘 된다. 볼트는 남자의 성기에 너트는 여자의 성기에

은유된다. 볼트와 너트가 조립되는 과정이나 그것을 푸는 일

은 성행위에 비유된다. 그런데 이런 은유들이 어떤 특정한

언어감각이 좋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초보자가 용접해 놓은 것을 보면 구불구불하고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한다. 그걸 우리 고참들은 ‘뱀 잡았다’고 은유

한다. 뱀이 기어가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얇은 철판을 때우

다가 빵꾸가 나서 그걸 메우려고 하다 보면 두둑히 쌓이게

되는데 이것은 떡을 쳐 놓았다고 우리는 말한다.
몇 년 전에 경남 함안에서 대규모의 공사를 했는데 작업

중에 철판에 볼트의 머리를 용접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대부분 우리는 용접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나는 그때 의식적으로 은유를 찾았으나 찾아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도면을 보더니 아! 이거는 볼트를 심어야

되네?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철판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조이는 경우와는 다른 표현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용접을 한 볼트에는 여러 가지가

달리고 너트로 조여지는데 영어의 너트라는 단어에는

열매라는 뜻도 있다. 시인들이라면 어떻게 표현할

인가?
노동현장에서 은유는 그때그때 생성되어 돌다가 소멸

한다. 다양한 은유들이 만들어진다.

구조란 반드시 상호간에 작용이 있어야 하며 이 작용이

무질서로 이행하는 경우는 구조라고 볼 수가 없다.

작업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은유들은 노동자와 노동 사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 노동의 피로를 덜어준다. 바쁜 노동을 바쁘지 않게

해준다. 일하는 틈틈이 생각할 여유를 만들어 준다.

노동자 상호간에 협력을 하게 한다. 생각 자체에 여유를

만들어 준다. 이런 은유의 말들이 오고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나는 기성시인들에 의하여 제작되는 시들

이 우리 생활에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매우 의심

스럽다. 시는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인 생활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동현장에서 생성되는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다.

그 이유는 다양한 은유들은 의식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몸이 불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에게 어째서 벌거벗고 사는지를 물었

인디언은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얼굴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노동자들의 성적인 표현을

화이트칼라들은 점잖지 못하다고 비웃을지 모르나 성적

은유의 작용은 섬세한데 이런 다양한 성적인 은유를 통

하여 벗어버린다. 몸이 하나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몸을 부려서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보편적인 문화 속에서는 육체와 얼굴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도로 상징 조작되는 현대예술의 영역 즉 의미

문화 속에서 인간의 육체는 눈에 띄는 욕망의 기호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끝없는 성욕과 수행능력만이 부부

지간의 유일한 애정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부부가 맞벌이로 가정을 꾸려 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아내의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잘되든 못되든 세를 주거나

팔아버릴 는 없다. 어떤 사내들은 아내의 구멍가게가

너무 불경기여서 잔업을 하고 늦게 들어가고, 어떤 아내

은 통 불경기를 몰라서 사내들이 일찍 집에 들어가

아내의 구멍가게 일을 도와준다.
1978년에 나는 세기냉동에서 일을 했는데 동료 중에

장가를 간 이상순이라는 친구는 거의 모든 시간을

졸았다. 그는 대단히 노력을 해서 장가를 갔는데 마누라

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대고 절을 한다더니 바로 그의

경우가 그랬다. 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잔업을 거의

하는 사람도 그 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마누라의

구멍가게는 당시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의 수치를 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현대사회는 아주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사修辭되어 있으며 문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사고와 개념은 이미 은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일상어의 대부분은 은유다.

은유는 이미 시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남성의 성기가 어떻게 은유되고 있나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에 청와대에 비유되기

했다. 남성은 물론 여성들까지도 부정적인 것에는

‘좆 같다’는 표현을 한다. 애기들의 오줌을 누일 때도

여자애기는 은밀하게 한다. 그에 비해 남자애기는 전천후

全天候적이다. 거의 아무 데나 대고 오줌을 누인다.



철야 작업 / 최종천



저놈은 망치만 들었다 하면 존다
봄도 다 가고 여름인데
놈의 색시는 예쁘다고 한다
가을에도 그녀는 예쁠까?
겨울에도 여전할까?
겨울에 놈은 졸지 않을 것이다.
봄 여름 한때
물오르던 것 목마르던 것
함마질에 철야 작업에
놈의 열 개나 되는 그것이 다 빠지고
남은 두 개로 버티며
포도시 현상 유지하고 있는데
아직도 물이 오르는
통 불경기를 모르는 마누라의
구멍가게는 팔 수도 없고 세를 줄 수도 없다
녀석은 남은 한 개
그걸 들고
마누라의 구멍가게로 간다
오늘밤 철야는 이 용접봉
하나만 녹이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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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실재의 쇠를 붙이기 위해 밤엔 상징의 언어를 붙이기

위해 밤낮을 번갈아가며 일으키는 두 개의 불꽃! 이 불꽃들

의 기록이 바로 용접공 시인 최종천의 삶이자 시다.
『세계의 문학』(1986)과 『현대시학』(1988)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온 뒤 첫시집 『눈물은 푸르다』

(2002)2002년 제20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최종천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의 밥그릇

빛난다』가 출간되었다.

첫시집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이번 시집에서 그는 '예술과

노동을 잇는 시인'(김우창)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한층

심화된 시세계로 '예술과 노동 사이의 이음새를 세심하고

낱낱이 밝혀주는 시인'으로 거듭난다. '상징'과 '실재'라는

핵심어를 중심에 놓고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로,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인의 이중적인 삶의 무늬와 결을

역설과 반어의 굵직한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최종천은 시인이기 이전에 노동자다.

불꽃을 일으켜 쇠를 이어붙이는 작업으로 잔뼈가 굳은

용접공, 그 일상이 이번 시집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뱀잡기」1ㆍ2ㆍ3). 먹고살려면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는 숙명은 단지 그만의 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을 꾸려나가

여간내기에게 피차일반이다. 하지만 지겨운 노동을

끝내고 저녁 어스름을 밟아 귀가하여 생물학, 철학, 종교

학 관련 책을 읽으며 '생각의 실을 풀어 옷을 짜는'(「털옷」

)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낮에는 실재의 쇠를 붙이고, 밤에는 상징의 언어를 붙이기

위해, 밤낮을 번갈아가며 일으키는 두 불꽃! 이 불꽃들의

기록이 바로 최종천의 삶이자 시다. 이전 시세계의 아쉬움

으로 지적된 이미지 형상화와 언어 조탁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정제된 면모를 띤다. 그의 시는 선이 곱고 화려하게

빠진 하늘거리는 옷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자연의 풍화작용

을 겪고 온몸으로 그 흔적을 끌어안은 굵직굵직한 바위의

형상에 가깝다. 생김생김은 투박하되, 바람이 지나가고

빗방울이 부딪친 자국고스란히 간직한, 크고 작은 다양

한 사연(이야기)들이 현란한 수사를 압도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 주제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는 제2부를 비롯해, 1ㆍ3ㆍ4부의 작품들 역시

일상의 다양한 사건들이 그만의 개성적인 관점으로 형상

되어 있다. 특히 노동계급의 뛰어난 지적 감수성

보여주는 시들, 굳이 분류하자면 '새로운 노동시'로 규정

완성도 높은 시편들(「나사들」 「몽키」 「방법서설」

「아직 진화중입니다」 「죽음의 다리를 건너는 법」

「뱀잡기」1ㆍ2ㆍ3 「이성민을 만나다」 등)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그가 스스로 노동자로서의 계급성이나 당파성을 민감히

인식하는 것은 사막지형처럼 시시각각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지반을 확인하겠다는, 또한 자신의 발밑 곳곳에 숨은

허방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시인에게 허방, 그것은 실재의 탈바가지를 쓴 허깨비로서

상징을 가리킨다(「허깨비를 세우다」). 예컨대, 미적

감수성이 증대한 오늘날 여성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다이어트

다. 비만은 아름다움의 적이자 철천지원수로 간주되고,

날씬하다 못해 비쩍 마른 모델이 굶어죽는 사건까지 벌어

지고 있다. 시인은 이런 현상을 예견이라도 한 듯 '비만'에

관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의 극치를 두고 예술이라고 이름'하는 인간에게
비만

역시 '환상을 제공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자신의 "굶주림과

포만의 공포"를 "명징하게 형상화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

이라는 것이다(「비만」). 그래서 비만을 혐오하며 몰아

붙일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공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에 의해 창조되고 있는" "현재진행중인 조각"으로

여기고 '감상하라'고 충고한다(「비만에 불만을 표하지

말자」).
물론 이때의 '감상'은 극도의 궁핍함에 오그라든 실재에

대한 옹호이자, 실재에 비해 과도하게 부풀어오른 상징

대한 비판을 내포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반성을

촉구하는 명령이다. 만약 오늘날의 세계, 실재를 가장

하며 현실을 움켜쥐는 화려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매혹

되기만 한다면, 무너진 삼풍백화점에서 생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붕괴된 실재의 잔해

더미 속에서 나를 구원할 "시집 종이", 그 물질성을 육화

하지('뜯어먹지') 않고 그 상징성('시')만 취한다면 분명

굶어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상징은 배고프다」).

그런데 이 지점에 최종천의 복잡성이 자리한다.

생사가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 실재를 넘어선 상징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잘 알지만, 그는 실재에 봉사하는

노동자인 동시에 고도의 상징성을 조작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징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이중적이며,

자기반성적일 수밖에 없다.

헤겔전집을 읽고 베토벤을 들으며 고도의 상징으로 이뤄

낸 '의미'를 소비하면서 자신도 소비되는 묘한 가역작용

을 경험하고(「나는 소비된다」), 용접봉을 쥐고 민활히

움직여왔을 손이 '허구조작(문학)'에 빠져 눈이 멀어가는

것에 연민을 갖기도(「가엾은 내 손」) 한다.

시인에게 시란 그 자체가 자기각성으로서의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환언하면, 상징을 비판하면서도 상징

수혜자로서 자신의 역설적인 운명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종천은 박노해 김해화 백무산 등, 80년대

노동시 계열의 시인과 다르다.

그는 비판자인 동시에 향유자인 것이다. 현대문화가 내뿜는

상징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면서도 그 위험한 상징

을 도구삼아 사태를 언표화해야 하는 상황, 이때 생성되는

팽팽한 시적 긴장이 최종천 시의 힘이고 그만의 지성과

명민함이 발휘되는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라는 과거의 낡은 범주에 가두어놓고 최종천

시를 음미하는 일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그에게 노동은 인간이 인간됨을 회복하는 유일한 통로다.

마주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개선하자는 프로파간다가

아닌 생활정치의 내면화를 통한 자기갱신의 방편으로

선물된 것이다.

이제 노동은 사회구성의 한 요소로 일정한 당파성과

계급성의 특징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운명

이자 구원(救援)의 행위로서 정당하게 수용되고 확장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은 모두의 '의무'라고

강조한다(「당신얼마나 불행하기에」 「화곡역

청소부의 한달 월급에 대하여」).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온다고,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마음속에 심어놓는 게 아닌

스스로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인의 이러한 면모는 "프레스가 베어 먹어버린"

박씨의 반토막짜리 검지가 들어갔던 목장갑의  "접혀

들어간" 부분에 자기 손가락을 끼워보며 환하게 전류

흐르는 것을 느끼고, 노동이야말로 노동으로 말미암은

'상처'야말로 "영혼을 켜는 발전소"라고까지 말한다

(「상처를 위하여」). 잘린 손을 소주로 씻으며 담벼락

밑에 시든 손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노동현실의 병폐

들을 파묻던, 비장함이 절절 흐르던 박노해의 「손무덤」

과 사뭇 다른 노동의 수용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직설적인 어조로 문명을 비판하고 세태를 풍자하지만,

최종천이 궁극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 공장 소음으로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어이―" 하고 사람을 불러 사용중인

크레인 대신 "그럼 같이 들자는, 드는 동작을 해보이면서

/ 말 대신 동작과 표정"을 주고받으며 "반은 짐승을 닮은

몸짓과 발성, 비분절음"으로 "모든 동작과 표정이 언어"

인 세계, '언어의 본질'이었던 '침묵'을 향해 진화하는

세계(「아직 진화중 입니다」), 즉 "자연처럼 일할 수"

있는 세계(「비대상(非對象)」)를 그린다.

최종천는 우리에게 '희망을 꺼놓자'고 제안한다.

"절망은 희망의 위성 같은 것으로서/ 희망의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기에/ 희망을 꺼두면 절망도

빛나지 않을 것"이고 "지구가 사막화하고 있는 것은

/ 태양보다 희망이 더 빛나기 때문"이라고

(「희망을 꺼놓자」). 이것은 '희망 없이 사랑하라'

했던 칸트의 말처럼, 휘황한 현실에 들떠 허망한

꿈을 좇기보다 내 발밑을 굽어보고 생의 참뜻을

행위에서 찾자는 다짐인 것이다.

<창비>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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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9.22 09:45

    첫댓글 세상의 절반은 병이다..그래도 시인의 눈길은 맑았었나 봅니다..저는 우주를 채울 듯 하기만 한데..홍시..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오늘 글을 읽으면서..이렇게도 많은 눈으로 홍시를 보는구나 싶어서..선뜻 손내밀어지지 않을 듯 합니다..늘 감사의 말씀을..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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