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법통)노회 최초의 노회장 선교의 새 장을 열며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잘 알려진 겔슨 엥겔 선교사(한국명 왕길지) 엥겔은 자신의 한국 이름을 '엥겔'과 발음이 비슷하고,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왕길지(王吉志)로 정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여선교회연합회 파송을 받은 그는 처음 부산 경남지방에서 18년 가까이 순회전도자이자 개척선교사로 사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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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순회 여행에서 중요한 일은 개 교회의 적절한 말씀의 봉사자를 선택하여 ‘조사’로 혹은 영수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교육하고 격려하는 일이었다. 왕길지도 바로 이와 같은 일들로 바쁜 날들을 보냈다.
왕길지 선교사는 공교회 지도자로서 한국교회와 경남지역교회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그는 주로 동부 지역 곧 울산, 기장, 서창, 언양, 병영 등지를 순회하였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설립되었다. 엥겔 선교사와 직접적인 관계 하에 설립된 9개 처의 교회라고 한다.
특별히 경남노회 100사에 따르면 엥겔 선교사는 한국장로교회사에 있어 경남노회가 출발에 있어 최초의 노회장을 맡아 3회 연임하는 등 부산 경남지역의 선교뿐만 아니라 교회와 노회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관심을 모은다.
그는 1913년에 언더우드를 이어 두 번째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초기 한국장로교를 섬겼다.
1900년 10월 29일 부산 도착
그는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워템베르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였고 힘겨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나이 4살 때 아버지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1889년 8월 29일 선교사 교육 기관인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젤선교교육원’(Basel Mission House)으로 가서 3년간 신학교육과 선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엥겔은 1892년 6월 바젤선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인도 서부 푸나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클라라와 결혼했다. 푸나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그는 건강이 악화하여 6년 만에 선교사역을 접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40년 동안 선교사로 일하겠다.”고 서원했던바, 건강이 회복된 후에는 선교사역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호주 빅토리아장로회로 소속을 옮기고,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엥겔은 부산진에 있는 여선교사들이 기거하던 집에 살면서 한국 선교사로서 삶을 시작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어 습득이었다. 엥겔 선교사의 내한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새로운 출발과 쇄신을 가져왔다.
그동안 선교사들 간의 불화와 대립은 조직과 제도의 약점을 보완하도록 자극을 주었고, 여전도회연합회와 청년 연합회가 각기 독립적인 선교사를 선정, 파송, 후원, 관리해왔으나 이제는 이전보다 분명한 행정적인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일신여학교와 고아원, 부산교회(현 부산진교회)를 치리하였고, 아담슨 선교사와는 선교사역지를 분담하여 지역을 순회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일상적인 과업이 되었다.
부산 경남의 첫 한국인 목사 배출
순회전도자이자 개척선교사로 헌신한 그는 먼저 와 있던 아담슨 선교사가 마산 거창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남 서부지역을 맡고 있어 동남부지역인 울산, 기장, 서창, 병영, 함안 등지를 광범위하게 맡아 사역을 진행했다.
왕길지 선교사는 1909년 부산-경남지방에서 첫 한국인 목사를 키워냈는데, 그가 바로 호주 선교부의 첫 열매인 심취명이다.
심취명은 멘지스의 전도로 베어드에게 세례를 받은 심상현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영향으로 신앙심을 갖게 된 후 일신여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1904년에 부산진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는 심취명을 장로로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평양신학교에 보내 1914년 부산진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세웠다. 그리고 동래 안평교회, 동래 수안교회, 기장교회, 장전리교회, 금사교회, 송정교회, 산성교회, 하단교회 등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아담슨이 은퇴하여 귀국한 1914년 이후부터 호주 선교부에서 그의 대표성은 확고해졌다. 그는 1913년 9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14년 경상노회 임시 노회장에 이어 1916년 경남노회가 조직될 때 초대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3회를 연임하였다.
신학 교육의 거목 신학지남 발행
언어에 천재적 소질을 지녔던 왕길지 선교사는 한국말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20여일이 지난 1900년 11월 25일 한국말로 축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시작했다. 루터의 찬송가로 알려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도 그다.
엥겔의 선교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평양신학교에서의 활동이다. 엥겔은 1906년부터 매년 3개월씩 평양에 올라가 강의를 했고, 나머지 시간은 부산 경남지역 선교에 주력했다.
1916년에 평양신학교에서 '정교수' 5인으로 교수회를 조직하여 강의와 직무를 분담하면서, 엥겔은 '도서관리 및 교회사, 희랍어 담당 교수가 되었다.
1918년부터는 평양신학교의 공식 요청으로 평양에 파견되어 신학교 교수사역과 문서선교에 전념하였다. 그는 1920년에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3~1934년에 아모스서를 개정했다. 특별히 1918년 3월에 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을 창간하고 책임편집자가 되어 3년간 봉직하였으며 총회 창립(1912) 이전의 역사를 담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출판하였다. 이렇듯 그는 신학교수로서 신학 교육 외에 역사 편찬과 문서출판, 교재 집필, 성경 번역 등의 다양한 사역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총 받은 청지기
1937년 3월 왕길지 선교사는 38년의 선교사 생활과 31년의 교수 생활에서 은퇴했고 경남노회를 비롯한 기독교 인사들과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환송을 받으며 호주로 귀국하였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 해 호주장로회선교공의천에서 왕길지 선교사 부부에 대한 감사와 그들의 업적을 정리한 헌사를 회의록에 남겼다.
“오래전 인도에 있던 한 젊은 선교사가 40년만 사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 선교사의 인도 사역은 금방 끝났고 실망한 그는 호주로 자리를 옮겼다. 엥겔 박사는 하나님의 다양한 은총을 받은 청지기였다. 그는 기질적으로 타고난 완벽주의와 신비주의 은사, 학자적 기질과 음악 재능, 어학의 재능, 목회자로서 자질과 굴하지 않는 신앙심을 갖춘 사람이다.
그는 이 모든 은사를 주신 분께 되돌려 드렸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은사들을 37년간 한국에서 역경의 목회와 선교사역을 하는 곳에 쓰도록 만드셨다. 이 모든 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는 이듬해 1938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은 1954년 8월 16일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학지남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법통노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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