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석불
마애석불
마애관음좌상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면에 새겨졌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을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연화대좌 왼편, 그러니까 관음을 바라보아 오른쪽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 위패 모양으로 새긴 구획 안에도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이 관음상은 비록 작품이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 관음 도량의 성지인 동시에 기도(祈禱) 성지임을 나타내는 상징성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드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없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석불
마애석불
마애석불 앞 조망데크에서 바라본 서도면 쪽 모습
마애석불 계단길
보문사 경내 모습
보문사 경내에서 바라본 마애석불이 있는 눈썹바위 모습
윤장대를 돌리는 모습
윤장대
책장의 일종으로 불교에서는 경전을 넣은 책장을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윤장 또는 전륜장(轉輪藏)·전륜경장(轉輪經藏)이라고도 한다.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律)과 논(論),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疏)도 함께 넣어 둔다.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한 눈에 조망되는 등 경치가 장관이다. 특히 낙조(落照) 경관은 아주 일품이어서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한다.
보문사
보문사
보문사
보문사
보문사 찻집
보문사 경내에서 바라본 눈썹바위 모습
좀 더 확대해 보았습니다
보문사 석실
[석실(나한전)]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으로 보아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다. 또한 이 석실은 우리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사원의 예는 경주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開祖庵)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몇 되지 않는 귀중한 예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곧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 등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곧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인 1812년(순조 12)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고종 4)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하며 개수하였다.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佛壇)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늘 이 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기도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석실 나한상]
석실을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부 22불의 성상(聖像)을 모셔 놓은 불단이다. 석실이니만큼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단 및 닷집이 전부 돌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연꽃이 조각된 불단 위에 닷집이 달린 전각 형태의 불전(佛殿)이 있고, 그 안에 아래 위 두 줄에 걸쳐 감실(龕室)이 마련되었으며 여기에 22불의 석상이 봉안되었다.
석상의 22불의 석상(石像)은 아마도 전설에 전하듯,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려 봉안한 석상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이 22나한상의 명호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좌우의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 및 빈두로아존자·가락가빌차존자·바리도 아존자·노빈타존자·낙구라존자·발타라존자·가릿가존자·빌사라불타라존자·주단반탁기존자·라후라존자·나가세라존자·인계라존자·빌라바사존자·아시다존자·수단반탁가존자·정우존자·빈두루존자 등 18분의 나한들이라고 한다. 석상의 크기는 전부 30cm 안팎이다.
불단 뒤에는 1982년의 불단 조성을 기념한 <보문사석굴법당연기문(普門寺石窟法堂緣起文)>과 <법화경약모게(法華經略摹揭)>가 새겨져 있다. 연기문은 기현(奇玄)스님의 글이고, 게는 법화경의 내용을 베낀 것으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다.
한편 근래 이 석상들의 재질(材質)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되었다고도 한다.
불단 좌우로는 인등(引燈)이 있고, 불단 왼쪽 벽에는 석조 신중탱이 걸려 있다. 이 석조 신중탱과 불단 뒷벽에 커다랗게 조각된 탱화는 1980년 조성된 것이다.
이제 외포리로 향합니다
새우깡을 받아 먹으려고 낮게 비행중!
1.강화 보문사(普門寺. 관음성지 나한기도 도량)
[개관]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번지 낙가산에 있는 사찰.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있다.
양양낙산사와 금산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절의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
[전화] 032-933-8271~3
[홈피] http://www.bomunsa.net
[보문사 창건 전설]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의 돌덩이 22개가 한꺼번에 그물에 걸렸다. 고기를 잡지 못해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를 바다에 버린다. 다시 그물을 쳤는데 또 다시 바로 그 돌덩이들이 걸리게 되자, 어부는 또 다시 그 돌덩이를 바다에 버렸고, 돌이 두 번이나 그물에 걸리게 되자 그만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덩이는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인데, 바다에 두 번이나 버렸다고 질책하고, 내일 다시 그곳에서 불상을 건져서 명산에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 날, 23개의 불상을 건져 올린 어부는 꿈속에서 노승이 당부한 대로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겼는데, 현재의 보문사석굴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불상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석굴이 불상을 안치할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고, 굴 안에 단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 깨어진 옥등잔 전설
옛날에, 보문사의 어린 사미승이 부처님께 등공양을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갔다. 나한전에는 보문사에 전해 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인 옥등잔이 있었는데, 사미승은 옥등잔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이다.
사미승은 옥등잔을 내리고,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실수로 등잔을 떨어뜨리게 된다. 떨어진 옥등잔은 두 조각이 나게 되고, 사미승은 혼비백산하여 법당을 빠져나와 구석에 주저앉아 훌쩍이게 된다.
마침 지나던 노스님이 사미승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옥등잔을 깨게 된 일을 말하게 된다.
사미승과 노스님은 깨진 옥등잔이 있는 나한전으로 들어갔는데, 두 동강난 옥등잔은 멀쩡히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노스님은 옥등잔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깨진 흔적조차 없이 멀쩡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이것은 분명 나한의 신통력 때문이로다"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보문사 교통편]
■ 버스 이용시
신촌 시외버스터미널 및 인천 종합터미널에서 강화행 버스 - 강화터미널 - 외포리 삼보해운 카페리 선착장 - 석모도행 카페리 승선 (30분 간격 운행)
◆ 서울-강화
서울 신촌, 인천등지에서 시외버스이용 강화도착(10분간격, 1시간10분소요) 또는 서울 시흥동이나 개봉동에서 강화행 버스승차 강화도착. 신촌등지에서 외포리까지 운행하는 버스도 있다.
◆ 강화-외포리
강화버스터미널에서 20분간격 운행하는 외포리행 직행버스이용 (20분소요), 시내버스는 50분소요.
■ 승용차 이용시
서울 - 김포 - 강화진입 - 외포리 이정표를 따라 30분 정도가면 외포리 삼보해운 선착장 도착 - 승용차와 함께 카레리에 승선 - 석모도 - 보문사
■ 석모도 / 보문사 방향
(강화읍까지 오시면 자세한 이정표가 있음)
◆ 외포리-석모도(석포리)
외포리 석모도선착장에서 30분간격 운행하는 배편이용(10분소요), 자가용이나 버스까지도 배에 실을 수 있다.
◆ 석모도-보문사
수시로 운행하는 보문사행 버스이용
◆ 자가운전
서울방면에서 김포를 거쳐 왕복 4차선의 48번국도를 타고 강화로 들어선후, 강화시내에 들어가기 바로전 좌회전하여 84번도로를 타고 가다 찬우물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6km정도간후 인산리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km정도 진행하면 외포리 도착. 김포시내를 거치지 않는 길은 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제방도로로 들어서는 길이있지만 요즘은 이곳도 많이 막힌다.
◆ 운항 소요시간
외포 ↔석포 10분 (30분에 1회운항, 승객 폭주시 수시운항)
선수 ↔보문 20분 (1시간에 1회운항)
- 제2 삼보해운 여객터미널
- 제3 삼보해운 여객터미널 2000. 5. 10 개통운항
※ 위의 본문 내용은 보문사 홈피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