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강압적 설득의 기술, 세뇌
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반하여 다른 생각을 갖게 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까? 과연 세뇌는 가능한 것일까? 미국의 저명한 정신의학자인 지은이는 중세시대의 종교재판부터 과학적 실험을 통해 행동을 조건화하려 했던 파블로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유령처럼 늘 따라다녔던 세뇌의 역사를 추적한다. 이단을 굴복시키기 위해, 새로운 인간(소비에트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포로와 범죄자들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때로는 신흥종교의 신도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사용된 강압적 설득의 기술을 세상을 뒤흔들었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파헤친다.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조작하기 위한 정부기관과 과학자들과 범죄자들과 사이비종교 지도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와 함께 한물간 비과학적 개념이라는 평가를 받는 ‘세뇌’가 현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파블로프의 과학적 실험부터 스탈린의 여론조작용 공개재판, 한국전쟁, 스톡홀름증후군, 사이비종교, 그리고 가짜뉴스와 소셜 미디어까지
잔혹한 고문과 심문, 수면 박탈, 행동 조건화, 사상 주입, 진실 약물, 기억의 제거와 복원, 납치범과 인질, 사이비종교의 집단 자살, 가짜뉴스와 소셜 미디어…. 세뇌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류의 온갖 어두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의 배후에는 정부기관의 관계자와 군대와 행동과학자, 정신과 의사, 신경과학자, 범죄자들과 사이비종교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진행된 이른바 MK울트라 프로젝트 중에는 아파트 한 채를 빌려 매춘부를 고용, 고객들을 대상으로 몰래 LSD를 탄 음료를 복용하게 하거나 공중에 에어로졸 형태로 LSD를 뿌린 실험도 있었다.(168~169쪽) 원하는 정보를 캐내는 데 환각물질인 LSD가 효과가 있는지 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주동자는 놀랍게도 CIA였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에 억류된 미군 포로들 중 자유세계로 귀환하지 않은 군인들이 등장하자 공산진영의 세뇌 공작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대규모 자금을 학계에 쏟아 부으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은이는 모진 고문과 수면 박탈, 공개재판, 정신 개조 등과 같은 고전적인 세뇌 기술부터 CIA가 벌인 LSD 환각 실험, 정신의학자 이웬 캐머런의 정신 조종 프로젝트, 사이비종교의 집단 자살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을 파헤치면서 은밀하고도 강압적인 설득의 기술이 어떻게 정교하게 다듬어져 현대의 신경과학과 가짜뉴스와 소셜 미디어까지 이어지는지를 살펴본다.
“인터넷은 새로운 LSD”
더욱 정교해지고 은밀한 강압적 설득의 기술이 사회를 위협한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사상 개조 프로그램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때 OSS에서 심리전 전문가로 일했던 기자 에드워드 헌터는 ‘자유세계의 정신을 파괴하여 자유세계를 정복하려는 무시무시한 공산주의의 새로운 전략’(117쪽)이라며 ‘세뇌(brainwashing)’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한물간 데다 비과학적 용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세뇌라는 용어가 갖는 은유는 아직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21세기에 더욱 발전한 기술들로 인해 세뇌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6년 미국 대선 캠페인 기간 동안 소셜 미디어에서 민주당 관계자들이 워싱턴 DC에 소재한 ‘코밋 핑퐁’ 피자 가게에 근거지를 둔 아동 성매매 조직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피자 가게는 수백 건의 협박을 받았고,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28세 남성은 소총을 소지한 채 워싱턴 DC로 찾아와 가게에 총을 난사하기도 했다. 2주 후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힐러리 클린턴 선거 캠프 당국자들이 아동 성추행과 학대를 동반한 악마숭배에 연루됐다고 하는 소셜 미디어의 게시물을 믿느냐고 물었다. 트럼프 지지자의 46퍼센트, 심지어 클린턴 지지자의 17퍼센트가 믿는다고 대답했다.”(389쪽)
지난 세기의 세뇌와 강압적 설득이 고문과 심문 그리고 정신 개조, 진실 약물, 재판과 같은 원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악마적 방법이었다면 현 시대의 강압적 설득은 은밀하고 기만적이며 세련된 기법이 동원된다. 지은이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그리고 신경과학의 발전은 강압적 설득을 은밀하고 정교하며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가짜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지며, 정부는 여론을 조작하고 다른 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트롤군을 양성해 거짓 정보를 쏟아냄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인터넷 상의 제한된 소통은 말 그대로 세뇌의 촉진제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인터넷 사용으로 우리는 이제 훨씬 더 빠르게 ‘귀를 거짓 보고들로 틀어막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393쪽)
17세기에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의 정신도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지은이는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는 것(자백의 법적 실효성은 차치하고)은 효과가 불분명하며, 종교를 바꾸는 개종이나 신흥종교에 빠지는 회심도 오래가지 않으며, 1950년대와 60년대에 찾으려 했던 (적으로부터 비밀을 캐내는) ‘진실 혈청’은 존재하지 않고, 기억을 제거하고 새로 이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른바 세뇌라는 것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비과학적 용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 쉽게 고문과 심문에 무너져 내리고, 망상에 가까운 사이비종교에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는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하게 되며, 눈과 귀를 틀어막는 가짜뉴스에 쉽게 속아 넘어가고, 이런 취약한 인간의 정신을 조작하기 위해 현대의 인지과학, 신경과학, 행동과학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