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왕생론》과 《이행품》
정토 교리사에서 천친보살의 《왕생론》은 용수보살의 《이행품》의 연속이지만, 더 분명하고 더 체계적이다.
단지 제목만 보더라도 두 저작의 특색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이행(易行)을 기치로 내걸어, 대승 보살도가 이 땅에서 현생에 불퇴전지에 이르는 데 어려움과 쉬움이 있음을 명확히 밝히면서 어려운 것을 버리고 쉬운 것을 골라 아미타불의 본원칭명으로 돌아가고, 나아가 아미타불의 정토왕생을 구하도록 한다. 다른 하나는 원생(願生)을 종지로 삼아, 일심으로 귀명하고 오념문의 수행을 일으켜 마침내 왕생하게 됨을 직접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이행품》은 함축적인 방식으로 점진적인 인도를 하는 반면, 《왕생론》(원생게)은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정토문의 본뜻을 드러낸다. 그러나 두 저작의 본질은 완전히 일치하며, “이행”이든 “원생”이든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칭명”을 교리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또한 수행 방법에 있어서, 용수보살은 본원의 취지를 간단히 “염아(念我)”, “칭명(稱名)”, “자귀(自歸)”를 열거하며 밝혔을 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천친보살은 《왕생론》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오념문행으로 전개하며, 아울러 다양한 이론을 부여하였다.
본원취의문(本願取意文)의 “염아(念我)”를 통해 관찰문을 개설하였고, “칭명(稱名)”을 통해 찬탄문을 개설하였으며, “자귀(自歸)”를 통해 작원문을 개설하였다. 또한, 《찬아미타불게》에서 자주 언급되는 “계수례(稽首禮)”와 “귀명례(歸命禮)”를 통해 예배문을 개설하였으며, 마지막 회향게를 통해 회향문을 개설하였다.
어떻게 “염아(念我)”에서 관찰문이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는가? 이 “염아”에 대해 용수보살 자신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人能念是佛 無量力功德 即時入必定 是故我常念
사람이 한량없는 힘과 공덕을 갖춘 이 부처님을 염할 수 있다면 즉시 필정에 들어가리니, 그런 까닭에 나도 항상 염하느니라.
천친보살은 “부처님의 본원력(佛本願力)”으로 “무량력(無量力)”을 해석하고, 국토의 공덕, 부처님의 공덕, 보살의 공덕이라는 “삼엄이십구종(三嚴二十九種)”으로 “무량공덕(無量功德)”을 해석하였다. 용수보살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은 이와 같다”고 하였으며, “미타장(彌陀章)”의 찬탄 게송에서도 이 무량공덕을 부처님의 공덕, 중생의 공덕, 국토의 공덕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용수보살은 “무량력”과 “무량공덕”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전체로 보고, 이를 하나로 합쳐 “무량력공덕(無量力功德)”이라고 하였다. 천친보살 역시 삼엄이십구종의 공덕을 “원심장엄(願心莊嚴)”으로 보고, 이를 불허작주지공덕인 부처님의 본원력에 귀속시켰다. 따라서 이 둘은 완전히 일치한다.
《논》에서는 찬탄문, 관찰문, 작원문을 각각 “여실한 수행과 상응한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용수보살의 본원취의문인 “아미타불의 본원은 이와 같다”에서 설명한 “염아, 칭명, 자귀”를 계승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시 《논》 전체를 용수보살의 본원취의문에서 말하는 교(敎), 행(行), 과(果) 이 세 가지 법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다음을 알 수 있다. 게송은 “교”로, 주로 아미타불의 본원 교리를 펼치며, “아미타불의 본원력은 진실한 공덕이다”라는 이론을 세우는 것으로, 이는 용수보살의 “아미타불의 본원은 이와 같다”라는 구절에 대한 전개에 해당한다. 또한, 장행에서 오념문을 개설한 것이 “행”이며, 이는 “나를 염하여 칭명하며 스스로 귀명함”의 전개에 해당한다. 다섯 가지 공덕의 과(果)와 하나의 보리과는 “과”이며, 이는 “즉시 필정(必定)에 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의 전개에 해당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왕생론》은 용수보살의 본원취의문을 전개한 것으로, 근본적인 정신은 완전히 일치하며, 단지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1) 체재(體裁) 면에서, 《이행품》은 용수보살이 일반적인 대승 수행의 십지(十地) 계위를 논한 《십주론》에 부수적으로 포함된 한 품(品)이며, 《왕생론》은 천친보살이 정토종의 종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독립적으로 저술된 논서이다. 이로써, 용수보살 시대의 정토 교법은 전체 대승불법 속에서 여전히 함축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천친보살을 통해 독립적인 형태로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2) 접근(切入) 방식에서, 용수보살은 일반적인 대승불법이 이 땅에서의 수행을 통해 어떻게 불퇴전지에 이를 것인지를 목표로 삼아 아미타불 정토의 교설을 전개하였다. 반면, 천친보살은 직접적으로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왕생론》의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으로 온 시방(세계를 비추는 데 걸림이 없는)
무애광여래께 귀명하오며,
안락국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나이다.
용수보살은 우회적으로 인도하는 방식을 취한 반면, 천친보살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3) 근거(依據)에 있어서, 《이행품》은 간단명료하게 “아미타불의 본원”을 제시할 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반면, 《왕생론》은 제목에서 먼저 “무량수경”의 이름을 언급하고, 또 게송에서 “저는 수다라의 진실한 공덕상에 의거한다”고 밝히는 등, 정토삼경을 큰 배경으로 삼아 광범위하게 교리를 펼쳤다.
(4) 형식(形式) 면에서, 《이행품》은 하나의 점과 직선형 표현 방식을 채택하였다. 하나의 점은 “본원”이고, 직선은 “염불 ─ 성불”, 즉 본원칭명이 원인이고, 퇴전하지 않고 성불하는 것이 결과라는 것이다. 반면, 《왕생론》은 이러한 본원의 핵심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여, 염불에서 성불로 이어지는 직선을 구조화된 방식으로 확장하였다. 즉, 오념문을 원인으로 다섯 가지 공덕의 결과를 얻으며, 마지막에는 하나의 보리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5) 교상(敎相) 면에서, 《이행품》은 일반적인 법문의 난행을 비교하며, 아미타불 정토법문의 이행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면서 하열한 범부가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반면, 《왕생론》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이행은 단지 하열한 범부만을 위해 개설한 것이 아니라, 대승 보살도의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설사 높은 지위의 보살조차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행품》은 정토법문의 “쉬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왕생론》은 그 쉬움의 기초 위에서 법문의 “수승함”을 드러내었다.
물론 《이행품》의 쉬움은 동시에 수승함이기도 하다. 단지 칭명이라는 쉬운 행만으로도 현생에서 퇴전하지 않고 빠르게 보리과를 얻을 수 있으니, 어찌 수승하지 않겠는가? 반면, 《왕생론》의 수승함은 동시에 쉬움이기도 하다. 즉, 본래 보살에게 속하는 수승한 수행과 수승한 과보인데, 범부도 오념행을 통해 이를 얻을 수 있으니, 어찌 쉽지 않겠는가? 쉽고도 수승하고, 수승하면서도 쉬운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본원칭명이기 때문이다.
(6) 교화와 인도(化導) 측면에서, 《이행품》은 일반적인 대승불법에서 정토법문을 분리해 내어 여전히 소극적인 자기 구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반면, 《왕생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반적인 성도 수행을 정토법문으로 귀속시켜, 적극적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천친보살은 정토법문을 용수보살 시대의 부수적인 위치에서 독립된 법문으로, 우회적인 방식에서 직접적인 방식으로,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로, 자기 구제에서 중생 구제로, 본원이라는 하나의 점에서 정토삼경으로, 단일한 칭명에서 구조적인 오념문으로, 아래로 열등한 범부를 구제하는 데서 위로 높은 지위의 보살까지 아우르는 위대한 공적을 이루었다. 용수와 천친 두 보살을 거치면서 아미타불의 정토법문은 순수하고 완전한 자태로 인도 대승불교의 큰 무대에 우뚝 서게 되었고, 찬란한 별처럼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