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어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봄 추위를 한자말로는「춘한」(春寒)이라 하고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로는「꽃샘」이라고 한다. 손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詩的인 감각으로 볼 때「춘한」과「꽃샘」은 분명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꽃샘'은 어감도 예쁘지만 꽃피는 봄을 샘내는 겨울의 표정까지 읽을 수가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계절까지도 이웃 친구처럼 의인화하며 살아왔던 한국인의 유별난 자연 감각이 이 한 마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꽃샘 추위의 한국적 정서를 보다 시적인 세계로 끌어올린 것이 정지용의 '춘설'이다. 그리고 지용은 그 시에서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불후의 명구를 남겼다. '시는 놀라움이다.'라는 고전적인 그 정의가 이처럼 잘 들어맞는 시구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의 관습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굳은살이 박힌 일상적 삶의 벽이 무너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그 놀라움이며 '시'이다.
<춘설>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침에 문을 여는 순간 속에서 출현된다. 밤 사이에 생각지도 않은 봄눈이 내린 것이다. 겨울에는 눈, 봄에는 꽃이라는 정해진 틀을 깨뜨리고 봄 속으로 겨울이 역류하는 그 놀라움이 <춘설>의 시적 출발점이다. 그것이 만약 겨울에 내린 눈이었다면 '선뜻'이라는 말에 느낌표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차가움이 아니다. 당연히 아지랑이나 꽃이 피어날 줄 알았던 그런 철(시간), 그런 자리(공간)에 내린 눈이었기 때문에 그 '선뜻!'이란 감각어에는 '놀라움'의 부호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러한 '놀라움'은 손발의 시러움 같은 일상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 '이마' 위의 차가움이 된다. '철 아닌 눈'에 덮인 그 산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적인 산이 아니라, 이마에 와 닿는 촉각적인 산이며,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이 아니라 '이마받이'를 하는 '서늘옵고 빛난' 거리가 소멸된 산이다. 그렇게 해서 '먼 산이 이마에 차라'의 그 절묘한 시구가 태어나게 된다.
'이마의 추위'는 단순한 눈내린 산정의 감각적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춘설'과 '꽃샘추위'에 새로운 시적 부가가치를 부여한다. '춘설이 분분하니 필동말동하여라'의 옛시조나 '春來不似春' 같은 한시의 상투어들은 봄눈이나 꽃샘추위를 한결같이 봄의 방해자로서만 그려낸다. 그러한 외적인 '손발의 추위'를 내면적인 '이마의 추위'로 만들어 낸 이가 시인 지용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꽃 피기 전 철도 아닌 눈'은 어느 꽃보다도 더욱 봄을 봄답게 하고, 그 감각과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진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봄눈이 내린 산과 이마받이를 한 지용은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어라'라고 노래한다.
꽃에서 봄향기를 맡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일상적 관습 속에서 기계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용과 같은 시인은 오히려 봄눈과 같은 겨울의 흔적을 통해 겨울옷의 옷고름에서 봄향기를 감지한다. '새삼스레'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지용에게는 시간을 되감아 그것을 새롭게 할 줄 아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금가고 파릇한 미나리의 새순이 돋고 물밑에서 꼼짝도 않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그 섬세한 봄의 생동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리고 겨울과 봄의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마의 추위(꽃샘추위)'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활짝 열린 봄의 생명감은 '웅숭거리고 살아온 겨울의 서러운 삶'을 통해서만 서로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봄눈이야말로 겨울과 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고, 끝내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그 차이화를 보여주는 놀라움이 되는 것이다. 봄의 시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용의 상상력에 의하면 그것은 봄눈에 덮인 서늘한 뫼뿌리에 혹은 얼음이 녹아 금이 간 그 좁은 틈 사이에 있다.
그래서 지용의 시 '춘설'은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로 끝나 있다. 달리는 자동차 속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우리의 몸은 앞으로 쏠리게 되고 그 충격을 통해 비로소 달리는 속도를 느낀다. 봄눈이 바로 봄의 브레이크와도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봄눈은 밤낮 내리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므로 꽃샘이나 봄눈을 통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겨울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꺼운 솜옷을 벗고 도로 추위를 불러들여야 한다. '새삼스레', '철 아닌', '도로'와 같은 일련의 시어들이 환기시켜 주는 것은 시간의 되감기이다. 그래서 '핫옷 벗고 다시 칩고 싶다'라고 말하는 지용의 역설 속에서 우리는 스위스의 산 골짜구니 깊숙이 묻혀 살던 '드퀸시'의 오두막집을 상상하면서 쓴 '보들레르'의 글 한 줄을 생각하게 한다. <이어령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