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원래 왕가의 별궁이었으나, 임진왜란 직후 [정릉동 행궁]역할을 했으며, 광해군 때 정식 궁궐로 승격 경운궁(慶運宮)이 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후 황궁(皇宮)으로 쓰였다. 현재는 대한제국 시절의 면적이 1/3로 줄었다 .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이곳을 하사 받아서 월산대군의 저택이면서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의주목까지 피난갔다 온 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불타버려 거처 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왕의 여자〉는 이 정릉동 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다.
광해군때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경운궁 확장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정통성 부족했던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 동생인 9살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시킨, 폐모살제 사건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慶運宮)- 즉조당卽阼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즉위한지 3달 후에 인조는 창덕궁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후 별 다른 존재감 없이 아관파천(아라사공사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
1897년 명성황우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으로 유폐당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아라사공사관)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慶運宮)에 거처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하게 된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경운궁(慶運宮)에서 지냈고, 이후 대한제국의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만 1907년 11월 고종 아들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아버님 만수무강하시라고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좁은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에 애착을 보인 것은,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고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 무력도발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였던 경운궁(慶運宮)은 각별해 했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5년간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동양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도 이 무렵에 지었다. 그리고 서양식 정전으로 활용할 목적의 석조전도 이때 착공했는데 워낙 큰 규모여서 10년후 경술국치 이후에 완공되었다.
당시 경운궁(慶運宮)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경희궁과 연결하는 홍교도 건립했다. 홍교는 고종이 경희궁에서 열릴 관병식을 보기 위해 건립하고,
1904년 2월 29일에 덕수궁德壽宮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가 전소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덕수궁德壽宮의 건물들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하고,
8.15 광복 직후, 정부수립 이전 미 군정기에는 석조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의논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할 상황이 됐으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라고 고민하던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했다.
대한민국은 1996년 해밀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대한문 大漢門 : (大漢: 한양이 창대해진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 동쪽이 새로운 중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약 10m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환구단 ~ 고종이 황제임을 하늘에 고 하고 제사던 곳인데 -> 일제가 허물고 조선호테르 건축, 현제 조선호텔
환궁우 ~ 신 위폐 모신 곳 (사진의 왼쪽으로 현제 남아 있음)
금천교 ~ 궁 안팎을 가르는 경계선,
조선 궁궐에는 정문을 들어와 그다음 문을 향하는 중간에 물길이 있다.
이 물길은 나쁜 귀신이 건너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뜻으로 금천(禁川)이라 하고, 풍수적으로 배산임수 명당수(明堂水)였고, 기능적으로는 궁궐 내 배수로였다.
궁궐 사람들의 마중과 배웅을 하고, 기다림의 장소인 것이다.
<임오화변 때. 영조는 경희궁에서 나경언을 친국하였다. 당시 창경궁에 있던 사도세자는 경희궁으로 달려와 영조에게 죄를 빌며 나경언과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영조가 들어주지 않자 물러나와 경희궁 금천교, 위에서 밤새 석고대죄를 하였다.>
우리가 손님을 맞아들일 때, 배웅할 때,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릴 때 대문까지 나가는 것처럼 궁궐에서는 금천교가 그런 곳인 것이다.
중화문
가운데에는 왕의 답도(가마 지나는 길) ~ 황제를 뜻하는 쌍용이 조각되 있다. (타궁월=봉황 조각) / 좌우에 있는 조각 동물은 해치로 – 선악을 구분 동물이다.
중화전 中和殿 : 황궁으로 문색칠이~ 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중요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곳이다.
'중화(中和)' 뜻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으로, 《중용(中庸)》에서 유래한다.
창건 당시에는 2층이었으나, 대화재로 불탄 이후 재정 상의 문제로 단층으로 지었다.
1907년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과 순정효황후 결혼식, 1907년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식 등을 한 곳.
내부 용상위 천장에도 봉황이 아닌 용이 달려있다.
이 용들은 각각 조선과 대한제국을 상징한다. 뒤에 있는 병풍 그림은 "일월 오봉도" 라 한다.
석어당 昔御堂
'석어(昔御)' 뜻은 '옛날(昔)에 임금(御) 선조가 머물던 곳'이다.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갔다 환도한 후, 거처하셨던 곳이자 승하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월산대군의 고택으로 늠름한 2층 한옥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인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고 삼촌이 왕이 되는 바람에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궁을 나와 살은 곳이다.
임진왜란 아픔을 기억하고자-단청도 칠해지지 않은 왕가의 사가로서~ (경복궁의 건청궁 역시 명성황후 시해당한 곳으로 단청을 칠하지 않았는데 _일제가 젤먼저 허물고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지어 버렸다.) 이 밖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다.
즉조당 卽阼堂 ~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하여 / 덕혜옹주가 뛰 놀던 유치원이었음.
현판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즉(卽)'자 옆엔 '어필(御筆)'이라 써 있다.
'즉조(卽阼)'는 '즉위'와 같은 말로, 인조가 이 곳에서 황제에 오른걸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신 공간이다.
덕홍전 德弘殿 ~ (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면서,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함녕전 咸寧殿 ~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1897년 건립된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한다.
함녕전은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하였다. 이 곳은 1919년 1월 21일 일제가 고종을 유폐시키고, 고종이 별안간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 독살설로 그해 3.1운동 도화선 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된 계기가 된다.
정관헌 靜觀軒 ~ (靜觀 : 고요히 바라보다)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서,
고종이 커피를 즐기던 서양식 정자이며.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 동양식이고,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다. 내부기둥은 로마네스크 양식,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천도복숭아 를 물고있는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석조전 石造殿 ~ (石造 : 돌로 짓다)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2층은 침전과, 서재이다.
입구 꼭대기 삼각형 박공안에는 대한제국 상징인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광복후 한반도 운명 –미.소 공동위원회 (신탁통치, 임시정부 수립),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 2014년에 석조전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고 인터넷 신청 접수해야 관람 가능하다.
앞 연못에는 원래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상이었으나~~ 일제가 놀이공원 처럼 물개상으로 바꾼 설계도 발견.
중명전 重眀殿 ~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
1897년 황실의 도서와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고종 황실도서관, 1899년 준공하였다.
1905년 이곳에서 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
헤이그특사(만국평화 회의)파견 장소로서, 일본의 방해와 강대국의 무관심으로 회의장에 못들어가고 이위종,이준열사등이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을 해서 신문에 실렸다고 한다. 이로인해 고종황제는 황제의 자리서 강제로 퇴위 당한다.
1910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되어 결국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나라를 잃어 버린 계기가 되었다.
그후 일제시대 때에는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인 경성구락부로 사용되는 치욕을 당한다.
돈덕전 현재 복구 공사중 ~ 올 가을 개관을 목표
2층 서양식 건물, 헤이그밀사후 강제 퇴위당하고, 2대 황제 황태자인 순종이 이곳서 즉위 한후 창덕궁으로 갔다.
'고종의 길'은 위 지도에 표시한 바와 같이 덕수궁에서 경희궁까지 고종이 다니던 길이었다. 당시 경희궁은 왕이 머무는 왕궁(덕수궁)의 보조 궁으로 고종이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자주 경희궁으로 행차하는 행정관청 이었다.
정동교회
미국선교사 “아펜젤러“ 1885년 전국 최초 설립교회 + 배제학당 설립
3.1운동가들이 정동교회 다니며 서재필등이 독립운동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다녔다.
첫댓글 복습하고자 합니.
이번 탐방을 통해서 경운궁이 덕수궁 옛지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전혀 전혀 몰랐던 지식~
아는 만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