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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묵상글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 볼 수 있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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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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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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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10월 04일 성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35958
김레오나르도 2023.10.04 05:27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 볼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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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기도가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요? 미국의 심장병 전문의 벤슨 박사는 노인 73명을 선발해서 절반은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갖도록 하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살게 했습니다. 3년간의 관찰 결과, 아침저녁으로 기도한 이들은 혈압이 낮아지고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규칙적인 기도, 식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정숙 치료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이 심한 사람을 열흘간 명상하게 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후 정신적 건강을 얻었다고 느끼는 등 의학적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곳에는 영적인 기운이 있어서 그 곁에만 있어도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곳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가 가득해서, 그냥 그 곁에만 있어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건강을 통해 이 사회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에도 건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개의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의 상업 도시로 많은 이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향해 단호하고 무거운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영적, 육적 건강으로 이끌어 주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께 멀어지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까지 망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부터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가 늘어날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건강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가정 안에, 교회 공동체 안에, 마지막으로 세상 안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나요? 그래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있나요? 오히려 힘을 빼는 그래서 함께하고 싶지 않은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에 적극적인 ‘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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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바꿀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또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루 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라인롤드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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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 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루카 10,16)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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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을 잘 듣는 사람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베싸이다, 지역은 가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합니다. “심판 때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하신 것입니다.
그런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게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5) 하셨으니, 사랑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주님의 품에 머물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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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인 아시시에 가면 성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성인은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은 새와도 대화 할 수 있었고, 장미와도 대화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기도하던 성당에는 비둘기 한 쌍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몇 백 년을 이어가며 성인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인이 유혹을 견디기 위해서 장미 밭에서 굴렀을 때, 장미는 가시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성인이 기도하던 곳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면 좋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을 나누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작은 존재로 여겼고, 가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세속적인 재화를 멸시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에서 진정한 부유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프란치스코는 참된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죄악 된 일을 해왔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겸손함 덕분에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인 나병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안아주었는데, 그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자만과 자기 과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은 우리에게 겸손의 덕을 되찾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생명’ 존중입니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을 "형님 태양," 달을 "누님 달"이라 부르며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여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자연은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반영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시적 표현에 그치지 않았고, 매우 깊은 영성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물을 돌보는 것이 창조주를 존경하는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환경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를 돌보는 것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나무, 강, 생명체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손길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후손들이 그 열매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은 ‘그리스도께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이웃을 향한 그의 급진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크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단순한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이들들, 병자들, 소외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그들을 조건 없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겸손, 단순함, 창조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헌신의 메시지로 세상에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은 우리에게 거룩함으로 가는 길이 부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신실함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한 자들을 안아주고, 창조물을 돌보고, 모든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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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아시시에 방문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성인이 뒹굴었다는 가시덤불도 기억나고, 성인이 거닐었던 행랑 그리고 많은 동물과 함께 대화했다는 장소도 기억납니다.
성인은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인을 찾아온 동물들의 소리와 자연의 소리까지도 말입니다.
이런 성인의 모습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금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위의 말씀에서 ‘너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직접적인 대상은 파견된 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으로 비추어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너희’는 세상 모든 만물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곳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모든 만물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살피며,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제로 삶을 살다 보면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신부님들은 미사와 기도에만 충실하면 될 것을 왜 사회와 경제와 환경에 소리를 낼까요? 왜 신부님들이 거리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걷고, 초를 들어 올릴까요?’
왜 그럴까요? 왜 사제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낼까요? 그것은 바로 세상 모든 곳에 하느님의 뜻과 숨결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사제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다시금 우리 마음에 새기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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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얼굴 다른 생각
자고 일어났습니다.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어젯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라면을 먹고 잤기 때문입니다.
이런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한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퉁퉁 부었네, 그것 봐! 먹고 자면 안 된다니까’라고….
다른 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퉁퉁 부었네, 젊어진 것 봐, 하루아침에 얼굴이 팽팽해졌어!’라고….
같은 얼굴, 다른 생각인 것이지요.
우리 삶에는 이런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같은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일들 말입니다.
오늘은 마음 다부지게 먹고 하루아침에 젊어져 보시겠습니까?
라면 하나로 충분합니다. 팽팽한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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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을 구원할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 가난, 겸손”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인도하소서.”(시편139;1.24ㄴ)
오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흡사 10월을 대표하는 가난과 겸손의 성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인 축일 때 마다 확인하는 생몰연대와 산 햇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만 44세를 살았지만 영향력은 영원합니다. 기후위기를 겪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종파를 초월하여 개신교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프란치스코 성인이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교황님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가장 현대적인 성인 프란치스코입니다. 성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산과 강”이라는,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상징하는 제 좌우명 자작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정주의 산, 흐르는 강이 기막힌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이래야 정주는 안주가 되지 않고 늘 새로울 수 있습니다. “산”이 상징하는 바 성 베네딕도라면, “강”이 상징하는 바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두 분은 경쟁 관계가 아닌 보완관계의 성인이요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를 산다면 정말 “Ever old, Ever new”(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 최고의 영성이겠습니다.
성인의 감동적인 일화는 한둘이 아닙니다. 삶전체가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한권의 살아 있는 복음서 같습니다. 오늘 본기도가 참 아름답게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하나이다.”
예수님과 산상수훈의 “참행복”을 사랑했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고백입니다.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시편 141장을 읊은후 선종했고 마지막 유언은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 널리 회자되는 “평화의 기도”와 더불어,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요약하는 “오, 감미로워라” 시작되는 성가 “태양의 찬가” 역시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백의 기도이자 시요 노래입니다. 이에다 몸과 맘이 하나된 춤까지 곁들이면 정말 멋지다 싶습니다.
시간되면 “평화의 기도”도 읽어보시고 “태양의 찬가” 노래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태양의 찬가”를, 퇴장성가는 “평화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성인은 1226년 선종하신 2년후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후, 1939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모든 동물들과 새들, 그리고 자연환경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과 제1독서 욥기에서도 성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 요소를 발견합니다. 바로 회개와 가난, 겸손입니다. 저는 감히 오늘 강론 제목대로 “세상을 구원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회개-가난-겸손” 이라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숱한 기적에도 회개하지 않은 악한 세 도시를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너 벳사이다야! 너 카파르나움아!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기적의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회개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이자 성인들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갔던 성인들이요 성 프란치스코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인은 결정적 회개에로 이끈 성서는 마태복음 10장9절 말씀이었고 성인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개 은총의 열매가 바로 자발적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는 가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고백할 정도로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정말 가난을 사랑한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일 것입니다. 엊그제 주교들의 시노드 피정 개막 연설시 교황님의 한 대목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여기 있습니다.”
(We are here as beggars of God’s mercy)
우리가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이라면 예수님은 거지 대장쯤 되지 않겠나 불경한(?) 생각도 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의 회개가 참으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욥은 회개와 더불어 침묵중에 진짜 가난과 겸손을 깊이 체험했음을 다음 고백이 입증합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몰라서 의심에 무수한 의문들을 남발하지 정말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침묵할 것입니다. 정말 주님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주님 자비의 거지들로 행복할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만날 때 참된 가난과 겸손이요 이런 자기를 아는 가난과 겸손이 참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중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위해 서있는 빈손의 대열은 얼마나 거룩한 아름다움의 복음적 장면인지요! 가톨릭 교회의 영성체가 아니곤 도대체 어느 종교에서 이런 체험이 가능하겠는지요? 회개한 하느님 자비의 거지들로서 가난과 순수, 겸손과 지혜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동적 장면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또 하나의 거룩한 하느님의 거지가, 성 프란치스코가 되어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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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10.4.금요일 신랑 박준영 안드레아 신부 김묘경 엘리사벳 혼인미사
창세 1,26-28.31ㄱ 마태19,3-6
장소;명동 대성당 시간;10.4일 오후1시
더불어 일치의 여정
“사랑과 지혜, 감사와 겸손, 예의와 배려”
오늘 신랑 박준영 안드레아와 신부 김묘경 엘리사벳의 혼인을 많은 분들이 축하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신랑신부에게, 그리고 훌륭한 신랑신부를 키워낸 양가 부모님께 기쁨의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또 오늘 혼인미사에 참석한 모든 형제자매님들께도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더불어 일치의 여정입니다. 혼자가 아닌 반드시 더불어의 여정이요 획일적 일치가 아닌 하느님 중심의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부부가정공동체 역시 똑같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아, 혼인은 참 좋은 것이구나!
혼인은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기적이자 축복의 선물이구나!
이토록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구나!”
오늘 혼인날 10월4일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로 저와 신부의 아버지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명동대성당에서 미사 주례하기도 처음이고, 프란치스코 제 영명축일에, 혼인 미사주례하기도 처음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막힌 섭리 은총입니다. 그러니 참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합니다. 얼마전 결혼이 성사된후 신부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 모습이 멀리 불암산 기슭 수도원 저에게까지 느껴졌습니다. 순간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서로가 구원했구나! 서로 감사해야 되겠구나!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참으로 묘하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서로 구원합니다. 혼자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평생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평생 주님 안에서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노력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하느님의 은총도 함께 갑니다. 더불어 일치의 여정은 다음 세 가르침만 명심하여 실행하면 됩니다.
첫째, 하느님을 닮는 삶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의 고귀한 품위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 말씀대로 하느님은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동등한 품위의 남자와 여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함은 바로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고귀한 품위의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말도 있듯이 평생 배워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요, 사랑과 지혜가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이 됩니다. 사랑과 지혜, 바로 하느님을 닮은 고귀한 품위의 사람입니다.
둘째,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찬미와 감사, 겸손과 온유입니다. 혼자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천국은 개인입장이 아닌 단체입장입니다. 부부공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저는 감히 “부부는 잘 살고 못 살고 관계 없이 평생 살았다는 자체로 성인이요 구원이다.” 라고 단언합니다. 어떻게 평생 함께 잘 살 수 있을까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아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삶의 중심임은 오늘 복음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자는 아내와 결합하여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이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둘을 한몸이 되게 하신 하느님은 부부일치의 중심입니다. 그러니 평생 삶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평생 우정의 반려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부부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찬미와 감사,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고귀한 품위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평생 기도와 평생 말씀 공부는 필수입니다.
셋째, 서로의 거리를, 차이를, 영역을 존중하는 삶입니다.
서로를 존중함에 예의와 배려는 필수입니다. 함께 해도 홀로입니다. 함께와 홀로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합니다. 사랑은 주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입니다. 서로의 자리를,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예의와 배려의 사랑입니다. 이런 진리를 잘 드러내는 칼릴 지브란의 ‘결혼에 대하여’라는 글의 일부를 나눕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때로는 홀로 있기도 하라
비록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 처럼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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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소망>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나의 얼굴이
나를 보내신 분의 얼굴이
될 수 있기를
나의 마음이
나를 보내신 분의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나의 말이
나를 보내신 분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삶이
나를 보내신 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내가
나를 보내신 분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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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제자들에게 당신 말씀의 전달자라는 큰 영예를 내리시다
주님께서 거룩한 사도들에게 주신 큰 권한과, 그들을 크게 칭찬하신 일, 또 최고의 영예를 내리셔서 영광스럽게 해 주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이 얼마나 큰 영예입니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존엄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선물입니까? 비록 미약한 지식인들이지만 그들에게 하느님 같은 영광을 입혀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기시며, 그들을 물리치거나 감히 거역하는 자들은 벌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거부당할 때, 바로 당신이 거부당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들을 물리치는 죄는 곧 그들을 보낸 당신을 물리치는 죄요,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물리치는 죄라고도 하십니다. 성인들을 물리치는 인간의 죄를 그분께서 얼마나 크고 위중한 죄로 여기시는지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얼마나 든든한 벽을 제자들 둘레에 세워 주신 것입니까! 그들을 위해 얼마나 안전한 보호망을 쳐 주셨습니까! 이런 제자들이기에 사람들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고, 그들이 결코 다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살펴 주십니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잘 들어 보십시오. 이제까지 자연과학에 대해 논했던 학자들 가운데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이 순수한 영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순수한 영들은 무언가의 형상이 아니며, 순수한 영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하느님으로부터 곧바로 흘러 나온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중재도 받지 않고 하느님에게로 다시 흘러들고,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옵니다. 그들은 천사들보다 더 뛰어나며, 하느님의 순수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응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느님의 이 순수한 존재를 '아무개'라고 부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과학에 대해 말한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이제까지 어떤 학자도 이보다 더 고상한 것을 말하려고 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성령 안에서 말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아무런 형상 없이 존재를 이해하고, 아무런 중재 없이 존재에 몰두하지만, 우리 복음서의 이야기에서 '구원'은 그러한 존재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유일하신 하느님(the only One) 이외의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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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성인의 날✝️
5. 프란치스코와 불과 물 그리고 바위와 통나무
성 프란치스코는 작은 피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불을 더 사랑하였다. 이것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불의 본기능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난로 가까이 앉아 있다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린넨으로 된 속옷 무릎 부분에 불이 붙어 버렸다. 그는 열기를 느끼고도 끄려하지 않았다. 그의 동료가 옷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갔으나 성 프란치스코는 그 불을 끄지 못하도록 만류하면서 “친애하는 형제여, 불 형제를 해치지 말아요!”라고 했다.
그래서 이 동료는 수위하는 형제에게 달려가서 그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데려 왔다. 그 수위 형제는 성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불을 꺼버렸다. 그는 이처럼 불을 좋아하였으며 비록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등불이든 촛불이든 끄지 않았다. 또 형제들이 자주 불이 타고 있는 장작이나 불이 완전히 붙지 않고 연기만 나는 장작을 이리 저리 던지기가 일쑤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불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의미에서도 땅 위에 잘 쌓아 두도록 하였다.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 산에서 사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동료는 그가 언제나 식사할 때만 이용하는 초막에다 정찬 시간이 되면 불을 피워 놓았다. 불이 탈 때쯤 자기가 기도하던 초막에서 성 프란치스코를 모시러 갔다가 그날의 복음을 읽어 드리기 위하여 미사 경본을 가지러 갔다. 왜냐하면 사부께서 미사 참례를 할 수 없을 때마다 그날의 복음 말씀을 식사 전에 듣고 싶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식사 준비때문에 불을 피워 놓은 초막에 돌아오자 불길이 이미 지붕에 번져 활활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불을 끄는데 최선을 다했으나 혼자 힘으로는 끌 수가 없었다. 그때 성 프란치스코는 그를 도와 함께 불을 끄려 하지 않고 있었다. 고작 밤에 덮고 잘 모피를 집어 들고 숲속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형제들이 이 초막이 불타는 것을 보고 서둘러 와서 꺼주었다. 얼마 후에 성 프란치스코는 식사하러 돌아왔다. 그는 식사하면서, “나는 그 모피를 다시 덮지 않을 것입니다. 내 탐욕 때문에 불 형제가 그 모피를 태우도록 버려 두지 못했기 때문이오”라 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불 다음으로 물을 특별히 더 사랑하고 있었다. 물은 거룩한 회개와 시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물로 더러워진 영혼을 씻는 예식을 행함으로써 영혼이 처음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손을 씻을 때마다 물이 발에 밟히지 않는 장소를 택하였다. 마찬가지로 그가 바위를 걸을 때도 반석이라 부르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공손하고 경건하게 걸었다. 또 “저 높은 바위에 나를 올려 세워 주소서”(시편 61,2)란 성구를 암송할 때면 깊은 흠숭과 경배를 드리며 “당신이 저를 바위 아래 두셨사옵니다.”하였다.
불을 피우려고 나무를 자르는 형제 보고는 나무를 통째로 자르지 말고 나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시키신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으로 통나무 그대로 두고 가지만 자르라고 하였다.
-완덕의 거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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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루카 10,13)
우리는 삶을 살아오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 이들이, 많은 경우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사람들과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 때문이든지 그 관계가 잘못될 때 가슴에 상처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전 보았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가슴에 와닿았던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지금도 마음에 남아 흐르고 있습니다. 『 ‘동생의 죽음에 대해 정말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나에게 다 말했니?’ 아버지가 물으셨다. ‘다 말했어요.’, ‘별로 할 애기가 많지 않지, 그렇지?’, ‘네’라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어요.’, ‘나도 그것을 알고 그렇게 설교해 왔단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저와 저의 두 형들의 부족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아직도 저의 큰 형과 작은 형은 I.M.F 이후 맺힌 매듭을 풀지 못한 채 형제가 아니고 원수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 형들을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지만 아무런 화해의 몸짓을 엿볼 수 없습니다. 삶이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고 말하지만, 저의 두 형들은 아직도 이 말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복음의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꼭 들어야 할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에서 주로 활동하시면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였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기적을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들쓰고 회개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0,13참조) 이런 배경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이들 도시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부모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식에게 안타까운 심정에서 ‘애야, 이제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너 그렇게 살다가 불행해진다!’라고 야단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인 것처럼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의 불행은 곧 예수님의 불행이며 고통이기 때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선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스스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이란 이름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가 이해하지 않으면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랑의 무력함에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닫힌 인간의 영혼을 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닫힌 문을 열고 나오시도록 다만 문을 두드리실 뿐입니다. 변화되기를 바라시고 변화할 수 있도록 은총과 사랑을 베푸실 뿐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시고 참아주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0,16)하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 제자들에게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코라진,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의 경우처럼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배척과 거부를 받았음을 환기시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디서든지 어떤 일(=배척과 거부 등)을 겪게 되던지 결코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고 꿋꿋이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치유하는데’ 모든 힘과 열정을 집중하도록 격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은 결실맺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책하거나 낙담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는 단지 일흔두 제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이에게 대한 지지와 격려입니다. 아버지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한 운명공동체로 묶어 주시고 우리의 사명 의식을 고취하시려는 당신의 깊은 배려와 지지를 표명하신 것으로 알아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지만, 때론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자책하거나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그들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었다면,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완전히 사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진정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귀하게 여기고 체험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사랑하려는 그 모습이 진정 예수님께 큰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은총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상응한 삶을 살지 못한 채 남남 아닌 남으로, 원수처럼 살아가는 저와 제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어 맺히고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입니다. 축일을 맞는 모든 분에게 축하와 함께 기도드립니다. 성인처럼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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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회개로 구원의 빛인 참된 안식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0-03 ㅣNo.176516
‘예수님께서 회개 않는 고을들에 이르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했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부족한 이, 악의를 가진 이, 겉과 속이 다른 이들에게 온갖 독설을 담아 아예 작정이나 한 듯 퍼부으신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그분을 무서운 분으로 여긴다. 그러나 준엄하게 꾸짖으시는 건 그들의 마음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뜻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살리는 길이기에.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그리고 너 벳사이다야!” 참으로 뜻밖이다. 일찍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실 때 그 고을에 의인 다섯 명만 있어도 진노를 거두겠다는 주님이신데.
그러한 주님 모습을 알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그분의 자비를 청했던 것이다. 자비의 주님께서 왜 불행을 언급하셨을까? 벳사이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의 출신 고향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에서 필립보와 나타나엘까지 간택하셨다. 사도들의 절반이 아마도 이곳 출신일 게다. 그만큼 이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애정이 남달랐으리라.
그럼에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다. 이는 저주라기보다 예수님의 탄식으로 보아야 하겠다. 사실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당시에 신흥 도시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시리아와 인접한 국경 도시로 사통팔달 잘 연결되어 있었기에. 특히 카파르나움에는 가나안 지역을 통괄하는 로마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더욱 번창했으리라. 로마 군인들이 상주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교 문화와 장사꾼들로 넘쳐 났을 게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들떠 있었고, 조용했던 시골엔 돈이 풍족해졌다. 미래는 온통 희망으로 비쳤으리라. 그런 그들께 예수님 말씀이 속속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과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베푼 저 기적들을 티로와 시돈에서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기적 앞에서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그들의 완고함을, 불행이라시며 크게 지적하셨다.
사실 언제까지나 햇볕만 내리쪼이는 땅은 없다. 햇볕만 받으면 땅은 서서히 갈라질게다. 언제까지나 비바람만 맞는 땅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이 진리들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이처럼 예수님이 불행하다시며 심판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저주보다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시는 뜻이 담겨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에 빠져 회개하지 않기에.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언제나 베풀어 주신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믿는 이가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도록 이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 곧 회개이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회개의 여정이 되어야 하겠다. 실은 많은 이가 예수님 말씀에서 위로만을 듣고자 한단다. 그러나 가끔은 이런 저주가 담긴 게 더 실질적일 수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기도와 묵상으로 어둠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빛인 참된 안식을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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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기 38,18).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욥이 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욥 자신에게서 이미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질문하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히려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하여 본 적이 있는지, 새벽에게 자리를 지시하여 본 적이 있는지, 많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욥은 이 물음들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고,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들로, 욥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고통이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듯이, 동물들이 살아가듯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은 입을 막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내 삶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다 아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욥기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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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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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 감사의 내용을 보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꼭 하느님께서 편을 갈라서
누구에게는 보여주시고
누구에게는 감추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의 다른 부분을 보면
오늘의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숨어서 몇몇 사람들에게만 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모든 사람이 초대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드러내 보이는 쪽보다는
받아들이는 쪽에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고
철부지들은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알아듣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드러내 보이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동사를 사용해서
아버지를 드러낸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구절을 이어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시는데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시지만
철부지들만 받아들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하느님이 필요하지만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부족함을
가난으로 살아갑니다.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그 부족함을 늘 직면하는 삶입니다.
부족함을 직면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부족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기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소유하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도 갖고 싶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것도 갖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의 관심, 칭찬, 인정 등을 받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록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들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서도
부족함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더 잘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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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소유의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대자유의 삶을 찾은 프란치스코!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 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성인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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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띠로와 시돈에게 기적을 보였더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큰 기적과 놀라운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었는데도 믿지 않는 마을들을 엄하게 꾸짖으신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하느님의 은총을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받아들이지도, 응답도, 보답도, 회개도 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마을을 저주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기를 바라시며 걱정하시는 말씀이다. 이 순간에도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너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겠느냐? 라고 나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16절)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큰 권한과 최고의 영예를 주셨다. 비록 인간들이지만 하느님 같은 영광을 입혀 주셨다.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분을 물리치는 것이며,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물리치는 죄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니, 어떻게 잘못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말은 성령 안에서 하는 선포이기 때문에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요,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물리치는 것이며 그분과 아버지 하느님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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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회개: 병신 여우 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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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1)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선고’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이신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이고,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도시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2)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 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안 믿었더라도, 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안 믿었더라도, 죄는 죄이고,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은
사람들과는 좀 다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들을 기회가 없어서 전혀 몰랐던 경우와 듣고서도 거부한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에 성탄절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고, 그날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했다는 변명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 지역 사람들이나 이슬람 지역 사람들이라면
그런 변명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3) 13절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은 “너희가 받은 은총들”입니다.>
“나는 받은 은총이 없다.
그러니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짚어보면서 “이것도 은총이었고, 저것도 은총이었다.” 라고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그게 무슨 은총이냐?” 라고 부정해 버리면 도와줄 방법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교만한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스스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따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부터가 죄입니다.
16절의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합니다.
4)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단순하게 죄를 뉘우치는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죄를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회개는 인생과 삶 전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전부 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변화시킨 다음에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고, 그냥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배반자 유다가 자살한 것은 죄책감 때문일 텐데,
용서받기를 거부한 일이기도 하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갔습니다(마태 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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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13-16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아시스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분명 ‘기쁜 소식’입니다. 자기 목숨을 건질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진짜 기쁜 소식으로 완성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들은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들은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오아시스를 찾아간다면 물을 마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사막 한 가운데에 오아시스가 어딨어?’라는 생각으로 자기가 들은 말을 허튼 소리로 여기며 무시한다면 탈수 증세로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누가 그를 죽인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불신과 완고함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고을의 주민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셔서 망하라고 ‘저주’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세 고을은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로써,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시고 놀라운 기적들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을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좋은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것을 실천에 옮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세속적인 재물과 성공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원래 걷던 잘못된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그 길의 끝에 멸망이 있음을 알면서도 간 것이니 파멸에 대한 책임은 그들 스스로에게 있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은 ‘그러다가 정말 큰일나니 얼른 발길을 당신께로 돌리라’는 애처롭고 간절한 ‘탄식’이었던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은 그분에 대해 아는 것으로, 그분 말씀이 진실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자기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을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자기 발걸음을 주님께로, 그분께서 이끄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되는 세 고을 사람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회개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분들 중에 회개를 꺼리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자기 삶을 성찰하는게 아니라, 자기는 특별히 큰 죄를 지은게 없다고 항변하시기도 하지요. 물론 그분들이 주장하시는대로 십계명을 대놓고 거스르는 대죄는 안지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죄 없다’는 완고한 태도로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욕망이 이끄는대로 계속 걷다보면 그 길의 끝에서 ‘지옥’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어서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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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를 물리치는 자는 ”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이고 티로와
코라진은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이지요.
벳사이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쪽에 위치한 물의 수원지 입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필립보, 안드레아, 베드로의 고향(요한 1,44)이기도 해서 다른 제자들과
예수님께도 친숙한 마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 사람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마르 8,22-26)
또 다른 기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따로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가셨는데
군중이 그것을 알고 그 마을까지 따라 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제자들이
주님께 허기진 군중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곳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루카 9,10-17)
카파르나움은 갈리릴 호수 북쪽에 위치하고 여기에서 더 북쪽 육지 방향으로
코라진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마귀들린 사람을 치유하시고(마르 1,21),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마태 8,1-4).
또한 이곳에서 백인대장의 종(마태 8,5-13), 베드로의 장모(마태 8,14-15),
죽었던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마르 5, 35-43),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마르 5,25-34).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시고(마태 12, 9-14),
“생명의 빵”에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시셨습니다. (요한 6,22-71)
티로, 시돈은 사렙타라를 사이에 두고 있는 페니키아 관할 지역에 있고
중해 연안 항구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가 그곳에서 마귀가 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 15,21-28)
지금은 레바논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특히 코라진, 카파르나움,
벳사이다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이 가는 곳이지만 이곳 주민들의 냉담한 태도에
슬픈 표현을 하십니다.
그래서 코라진과 베사이다를 두고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4)라고 표현하십니다.
또 주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두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15절)라고 슬픔을 나타내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일만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사람들의 냉랑함에 대해 섭섭한
심정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있는 이방인의 도시 티로와 두로를 비교하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으시지만 장차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음을 맞으실 것을 예견하시는 말씀도 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동포로 부터의 배척은 더 큰 슬픔을 가져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차가운 시선이나
배척하는 마음을 전해 받을 때,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느끼지요.
가깝기 때문에 기대도 하고 이해 받고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돌아 선 상대의 모습에서
우리는 곧잘 ‘세상에 혼자’라는 씁쓰레함에 빠져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받곤 합니니다.
당신이 죽음을 준비하며 예루살렘으로 스스로 나아가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설령 나를 반대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고
피하는 것이 아닌 바로 그 자리에서 미운 이웃을 맞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사리오의 달에 묵주 기도와 함께 용기를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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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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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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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4.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과감한 용기와 확고한 순종의 삶
<2024.10.4>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8:1~16절)
❝과감한 용기와 확고한 순종의 삶❞
❚ 영적으로 혼탁한 시기일수록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용기 있게 결단을 내려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떠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 과감한 영적인 용기와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1~8절).
유다의 히스기야는 이십오 세에 왕으로 즉위하여 이십구 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다윗의 모든 행위과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3절)행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제거하였습니다. 특별히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부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보관하고 있던 놋 뱀을 향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분향하며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을 만큼 하나님 여호와만을 의지한 왕이었습니다(5절). 그는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연합하다’는 ‘달라붙어 있다, 친밀하게 교제하다...’란 뜻입니다. 이 용어는 서로 밀착되어 달라붙어 있다는 의미로 특히 몸의 지체들이 붙어 있는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 되었습니다. 즉, 히스기야가 어느 정도 하나님께 밀착되어 의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6절). 이러한 히스기야와 하나님은 함께하셨고,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앗수르를 섬기지 않았고, 유다의 영토를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도록 확장하도록 하셨습니다(7~8절).
우리 인생이 형통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따르는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외적 우상이든 내적 우상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잣대로 삼아 바르게 분별하여 과감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의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유혹하며 방해하는 것들을 분별하여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에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과 순종에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의 삶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감한 영적인 용기와 결단을 통해 형통한 삶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종의 삶이어야 합니다(9~12절).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앗수르에 맞서 대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사마리아는 3년간 항쟁하다가 결국 BC 722년에 함락이 됩니다. 앗수르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앗수르로 잡아 가서 고산 강가의 할라와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11절).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여호와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2절).
인생의 회복과 심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선택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는지가 형통과 멸망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달라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다가 많은 희생과 억울한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성도로써 성도다움의 빛을 더욱 밝힐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참된 비결이 됨을 깨달아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타협을 찾기에 앞서서 기도가 우선돼야 합니다(13~16절).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은 지 십사 년째 되던 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해 왔습니다. 산헤립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순식간에 유다의 많은 영토와 성읍을 점령했습니다(13절). 히스기야는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항복 의사를 전했습니다. 무슨 요구를 하든지 다 수용하겠으니 이제 물러가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굴욕적인 태도를 취하고 맙니다. 산헤립은 금 30달란트와 은 300달란트롤 요구했고,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굴 보물 창고에 있는 모든 은을 산헤립에게 주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여호와의 성전 문과 문 기둥에 자기가 입혀 놓은 금을 벗겨 내어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14~16절).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보이지 않는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종의 심판과 징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살펴보고 무너진 신앙을 바로 세워 견고히 하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위협과 인생의 위기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방법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지 않는 것이기에 또 다른 시련이 반복될 뿐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당면한 삶의 문제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문제가 심각하고, 어려울수록 기도의 무릎을 꿇고 믿음의 담력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움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믿음의 능력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믿음을 붙들고 결단력 있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만을 따르는 믿음과 결단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8: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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