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6. 주일 큐티
요한복음 11:25 ~ 3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관찰 :
1) 이것을 네가 믿느냐
-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과정을 통해서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주시고자 하셨다. 즉, 예수님이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이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증거하셨다. 그 핵심은 바로 생명에 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종이 되어 참 생명이 상실된 인간은 스스로 그 생명을 새롭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만이 인간의 생명을 새롭게 공급해 주실 수 있으시다. 바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죽어도 사는 존재가 된다.
-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은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 이전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지식은 머리로 아는 앎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들여 하나 되는 연합을 통해서 누리는 지식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시는 것이 그 삶에 영생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27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는 합당한 반응을 하고 있다.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함으로 칭찬을 받았던 바로 그 고백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이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고백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간 여인이었다.
2) 마리아를 만나시는 예수님
- 28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 마르다는 이제 여동생 마리아를 불러온다. 나사로의 집은 상당한 재력가였기 때문에 종에게 시켜서 집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던 마리아를 오도록 시킨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오셔서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 했던 이들과 조우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계책을 쓰고 있다.
- 29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 어떤 못된 존재들이 이런 구절을 통해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를 이상하게 상상하는 자들이 있다. 전혀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경외하였기에 언니 마르다가 맡겨놓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내려놓고 급히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다.
- 30절.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 예수님은 아직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와 함께 계신 상황이었다. 예수님도 당시의 상황에서 나사로의 집에 가서 상가집에 방문한 이들과 불편한 관계로 마주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으로 여겨진다.
- 31절.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 나사로의 집에 방문한 이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상황에서 마르다도 없고, 마리아마저 급하게 나가자 함께 따라 나가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리아가 오라비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곡할 것으로 여겼다. 그런 일은 유대인의 상가집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상가집에는 곡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마리아를 따라가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삯을 받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부주의하여 마리아가 급히 나가는 것을 눈여겨 보지 못하고 따라나서지 못했더라면 나사로의 부활 현장을 무리들이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의 안배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마리아는 예수님을 신뢰하였지만 약간의 원망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예수님께 기별해서 예수님이 속히 오시면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셨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이시기에 그가 분명히 나았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를 마리아는 아직 알지 못했다. 부모님도 여의고 오라비에 의해서 자란 막내 마리아에게 있어서 오라비의 죽음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 임했고, 그 원인을 예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잘못된 모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자신이 그렇게 함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사정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또 자신의 완전한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시고자 나사로의 죽었다 살아남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 마자 그 발에 경배했다. 그녀는 예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여기고 그렇게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서 그 어떤 조금의 불손한 마음이나 감정을 가진 것이 아니었던 것임이 드러나는 행위라 할 것이다.
가르침 :
1) 마르다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믿음이 더욱 깊은 데로 인도되고 있다. 마르다 역시 마리아와 같이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믿었던 예수님이 더디 오신 것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것에 대해서 순응하게 되었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된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계시해 주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도통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이신 분이시고, 생명이신 분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미련하고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크고 놀라우심을 찬양할 따름이다.
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게 된다. 이 과정을 겪으셔야 했기에 제자들에게 보다 깊은 확신을 주시고자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는 이 사건을 예수님은 주도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4)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극심한 심정 고통을 경험해야 했지만 그것을 감수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이들은 믿음이 성숙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 세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5) 마리아의 나이를 염두에 둘 때, 아직 어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까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그녀가 보인 반응을 생각해 볼 때, 이 때의 모습은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경배함으로 그녀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권세가 이미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던 것이다.
적용 :
1)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있다.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그 믿음이 더욱 분명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그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뿐만 아니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즉 부활이요 생명되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위험이 내재되어 나사로의 집으로 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나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시고, 그것을 증거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열어서 주님의 가르치심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예수님만이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이 땅에서 손해보는 것은 아무리 손해 보아봐야 죽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그 죽음을 보상해 주시고, 살려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내가 손해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떠한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또 어떤 상황과 사정이 몰려와도 담대함이 필요하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을 가진 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 나로 말미암아 주님을 증거받는 이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