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회장 정주영의 5남으로 1948년 생이니 우리 또래인 그가 현대건설, 현대차, 중공업에서 두루 경영 수업을
거치고 현대상선의 전신인 아세아 상선 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1981년이었다, 여러 아들 중에서도 가장 부친을
닮고 총애를 받아 훗날 그룹 후계자로 여겨졌던 그가 처음 맡은 사장이라 가히 열성적이었다.
나는 정사장 취임후 선장으로 채용 되어 다른 선장 다섯 명과 서울 본사로 올라가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저녁에 정사장이 마련한 만찬을 같이 하고 흥(?)에 겨운 사장과 같이 2차로 싸롱으로 가서 새벽 3시경까지
흥청거리며 유흥을 즐겼고, 그리고 마치고 나왔을 때에 기사와 비서는 새벽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상선 선장은 상법 상 선주 대리인으로서 선원법의 선원이 아니라서 선원노조에 가입할 수도 없다. 그래서
통상 선장의 채용은 사장 전결 사항으로 처리 된다,
그리고 얼마후 약 2만톤 급의 벌크선 현대11호 선장으로 승선하였고 항로는 캐나다 서부 뱅쿠버항을 기점으로
미국 서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엘에이를 거쳐 호주 시드니, 멜버런, 서부의 퍼스까지를 왕복하며 주로
목재와 펄프 용지 그리고 콘테이너를 약 1년간 운송하였다.
그후 한진해운 콘테이너선 선장, 일본 SANKO Kisen 선장 등으로 이적하며 선장 생활을 하다가 그가 현대
사옥 12층에서 투신하였다는 비보를 전해 들은 것이 2003년 이었다. 그때는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나서고
있었고 현대전자 회장, 현대상선 회장 그리고 아산그룹의 회장도 겸하고 있던 그의 투신은 놀라웠고 많은
의혹이 있었던 사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1998~2003) 북한에 약 5억 달러를 현대상선 해외계좌로 비밀리에 북한에 송금한
사실이 미국 재무부에의해 발각되어 언론에 보도되어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았던 김대중이 햇볕정책이란 미명아래 대북 퍼주기가 한창이던 시절에 현대의 송금이
김대중의 비호와 사주였음을 모르는 이 없었건만 이를 조사 받던 정몽헌의 스트레스를 가히 짐작은 간다.
그러나 당시 회자되었던 그의 타살설 또한 신빙성이 있다.
1. 현대그룹 후계자로서 기반을 굳히고 있었고 아산회장 현대상선등 맡고 있던 기업들이 탄탄대로 였기에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없었고,
2. 현대사옥 12층엔 투신할 만한 창문이나 출입구가 없고 여느 고층빌딩과 마찬가지로 폭 30센티 길이
1미터의 환기창 뿐인데 키 180에 85키로의 거구가 투신이란 말도 안된다는 어느 교수의 현장 검정,
3. 일개 사장도 아니고 여러 기업을 거느린 회장이 퇴근도 안하고 야간에 사옥에 머무는데 기사도 비서도
대기자가 없었다는 건 말도 안되고 아침에 순찰 경비에 의해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4, 자살에 대한 어떠한 수사도 없이, 유서에 대한 필적 감정도 없이 흐지부지 종결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고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으니 북핵의 일등 공신은 김대중의 혁혁한 공로라는 생각이다.
억울하게 죽었을 고 정몽헌 회장을 회상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