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심
행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13 / [성령 강림]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지 일곱 주간이 지난 오순절이었다. 신도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휘몰아오는 듯한 소리가 그들이 모여 있는 온 집안으로 울려 퍼졌다. 3) 그리고 불길이 혀처럼 갈라져 나타나서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 4) 그러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께서 이런 능력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5) 그때 예루살렘에는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려고 여러 나라에서 건너와 머물고 있었다. 6) 하늘로부터 큰소리가 그 집 위에 들리자 많은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려고 달려왔다. 그들은 각각 자기네 나라 말이 제자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7)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이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지금 이들의 말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말로 들리다니! 9) 우리 가운데는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10)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태생의 사람들이 있고,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지방 사람들, 로마에서 찾아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11) 거기다가 그레데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가 각기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이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니!' 12) 그들은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하고 서로 물었다. 13) 그러나 그중에는 `술에 취해 하는 짓거리야!' 하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이며 초대 교회의 성장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사람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조롱까지 합니다.
그들이 다같이(1) 오순절은 유월절을 지낸 지 7주가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칠칠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장막절, 유월절과 더불어 유대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뿐만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신 16:16). 대략 120명의 무리가(1:15) 다락방에 모여서(1:13)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2-4)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홀연히) 놀라운 현상이 벌어집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보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다양한 표현(바람, 소리, 불의 혀)이 있지만, 성령님은 비인격적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다락방에 있던 모든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성도의 삶 속에 능동적으로 역사하시어 성도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능력이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권능입니다(행 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각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5-13)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각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제자들이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랍니다(6). 제자들이 성령님을 따라 말하는 방언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했던 방언과는 다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방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사람들은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각 나라 언어로 선포되는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제자들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고 있는 제자들이 놀라울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이한 현상과 증거하는 내용을 듣고 경솔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완악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술에 취해서 떠드는 것으로 조롱합니다.
적용: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볼 때 이해할 수 없고, 놀랍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기 보다는 겸손한 모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앤드류 매튜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놓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날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기쁨으로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 설 교 >
오순절과 성령강림
박영선 목사
사도행전의 기록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뭐냐고 하면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한 신자의 신앙의 색깔과 모습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를 성경이 요구하고 지시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드디어 오순절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120명의 신도들에게 성령이 내립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가직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성령강림의 모습, 성령충만의 모습이 모든 신앙인이 가지는, 신자가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되는 경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성령충만의 확인과 분명한 경험,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방언과 성령의 어떤 나타남이 그들에게 있어야 되고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실 지난 70년 중반부터 80년 초까지 어간에 가장 많은 혼돈을 자아냈던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혹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은 얻지만 성령을 받는 것은 조금 더 고급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한동안 한국교회를 강타했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사 성령의 나타냄과 성령께서 주시는 어떤 초월적인 간섭, 이런 것이 우리에게 감지되는 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저급한 신자이고 누구나 꼭 이것을 경험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며 성령의 강림은 꼭 그런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는 데에 대해서는 저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그들이 보고 들은대로, 여태껏 배운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수난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너희들이 왜 그러느냐 하면서 너희들이 다 새 술에 취했다라고 그들을 묘사합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며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 2:12)
이 사람들이 완전히 돌아서 저런다, 말하자면 자기네들이 가진 주장과 견해를 저렇게 미친듯이 주장할 수 있겠느냐 싶어서 새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그들에게 설명하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행 2:14-21).
요엘서에 나오는 예언을 인용해서 그들이 지금 처한 위치와 그들의 경험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된 17절 이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지금은 말세입니다. 말세란 시간적으로 끝이기 이전에 순서적으로 끝이라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가 끝이니까 이 끝의 순서를 마지막으로 남긴 기간은 다 말세라고 했습니다.끝이 되기 위한 전 사건은 무어라고 했습니까? 재림이 끝이니까 초림이 끝이전의 최종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초림하셔서 이제 승천하셨으니까 남은 일은 재림하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초림하셔서부터 말세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17절의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라”는 말씀이 ‘그 때가 되면 누구든지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겠다’는 얘기냐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거든 말세인 줄 알아라’가 되는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가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주께 구하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이 구절이 이해되고 있는데 이 구절은 다른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거든 이제는 말세인 줄 알아라’ 이런 말도 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사건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경험해야 되는 신앙 경험의 전형이 되는냐 아니면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인하여 이제부터는 ‘새 시대’라고 개막을 선언하는 것이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든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이 대목에 오면 조금 더 확실한 힌트가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이제 성령이 오실 수 있었다는 쪽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껏 잘못 생각한 식으로 오순절 성령 사건을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고 그것도 충만함으로 받을 수 있고 그리고 기도하고 열심히 구하면 방언도 하고 병 고침도 있고 예언하는 은사도 받을 수 있다, 마음의 기쁨이 폭발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이런 것을 위한 기록으로, 그것을 위한 사건으로 의도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거든 이제부터는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의 결과로 이 일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추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곧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3-26절)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계신 것같이 우리를 하나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게 하시기 위한 선결 문제는 우리르 죄에서 꺼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거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셨습니다. 가시면서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바와같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리라.”(1-3절)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실 때는 같이 살려고 오실 것입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를 없이 해야 하며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터 구원해 내야 됩니다.
죄를 씻어낸 것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드디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이제 함께 하시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다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에 궁극적인 목표와 이유를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0-22절)
하나가 된다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지어져 가는데 그 일을 위하여 먼저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개막 테이프를 자르는 것, 공식적인 이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사 드디어 이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된다를 공개적으로 역사와 온 우주 앞에 선포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새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새 인간으로 완성될 것이다에 첫 테이프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제 신자란 존재론적으로, 운명론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 오순절 성령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개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역사적이고 새로운 장을 여는 공식적인 개막을 선언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 공개되고 객관화되고 외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결혼식을 숨어서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고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공개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성령이 와 계시는 것이 공개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외적인 표현이 있고 어떤 감동이 있고 경험적인 것으로 오신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맨 정신으로 누구의 협박에 의해서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인 따라 나오신 분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핑계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항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란 그 만큼 괜찮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세상이 두쪽이 나도 하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것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차를 태워주기 위해서 왔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앉아서 기다릴 겸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여러분 마음에 만족스러운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둘러대는 것이지 제가 보면 여러분 마음 속에도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지않고 여기에 와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와 같은 어떤 외적인 표징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오도되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것이 없으면 성령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덜 사랑한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를 좀 열등하게 취급을 한다고 하는 이상한 생각에 말려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날 삼천 명이나 구원을 얻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날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37-42)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의 대열에 참여했는데 방언했다든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기록은 거기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한 논쟁거리가 뒤에 나옵니다. 즉 사마리아 전도 사건과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사건을 말하면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내리시는 일이 구별된 사건으로 등장해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은 다르다는 아주 중요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구언을 얻으면 꼭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따로 기도해야 되고 성령을 받는 자는 좀 다른 고급한 신자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제대로 믿으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꼭 방언을 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바로 맨 처음 사건, 맨 처음 얻은 신자들, 여기서도 그들이 구원함을 얻었으되 사도 베드로가 약속한 것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 다는 약속까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얻은데 성령의 임함에 대한 성령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 사람이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의 성령을 받는다는 약속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즉 그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는 이제 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다 결정하는 자가 아닙니다. 창세기 6장을 봅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1-3절)
말하자면 성령을 완전히 거두어 가 버리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드디어 살지 않기로 하십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자가 되었고 죄악 속에 묻혀 있는 자가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맨 처음으로 하신 일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구약식으로 성전에 가서 지성소에 제물을 갖고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시는 신인 합동의 존재론적으로 어디까지가 성령 하나님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지를 모르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위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9-11절)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입니다. 신자의 존재는 이제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합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망하면 성령 하나님도 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여기 성경에 있는 식으로 하자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나는 못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라는 존재를 평가받지 않고, 같이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온전하신 것도 이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혼자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런 존재로의 부름에 대한 첫 선언의 개막 테이프를 끊는 사건이 성령강림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갖는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같은 역사적 사건의 반복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에게서 더나셨던 하나님이 이제 다시 오사 하나 되는 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시고 시작하신 사건이고, 그 일은 우리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완성되는 목표까지 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로 갈 것입니다. 가느 과정에 여러 단계와 가는 길마다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며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 필요하다면 나타날 텐데 그것이 꼭 시작일 필요만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시작의 모습으로서 성령강림이 체험될 수 있고 중간의 여러 과정으로 성령이 와 계시며 간섭하시는 것이 체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꼭 방언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모습일 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부부가 결혼식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드디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 날이야말로 모든 사람들 앞에 이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모든 것이 허락된 날이므로 그날이 가장 행복한 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어느 때가 가장 부부 관계가 좋습니까. 그것이 만일 연애할 때라면 여러분은 결혼 잘못하신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행복하고 더 사랑해야지 살아갈수록 재미가 엇다면 그것이 무슨 결혼입니까. 물론 연애할 때보다 결혼해서의 생활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애 때는 생활이 없지 않았습니까. 사랑을 주고 받는데 생활이 개입이 안 됩니다. 그때는 연지곤지 바르고 용돈 들고 만나서 놀려고만 하는 계획으로 시간을 잡아놓고 만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밤낮 행복했지요. 만나면 고기만 썰고 택시만 타고 다니고. 그러나 지금은 택시를 타기보다는 전철을 이용합니다. 생활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치장하고 노는 것이 많지는 앟지만 살면 살수록 잘했다, 더 사랑한다 하는 것이 부부생활의 의도된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꿈결같이 그때가 늘 좋아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언젠가도 예를 든 것처럼 연애할 때가 가장 크게 사랑을 하고 좋은 것 같지만 그때는 사랑이 뭔지 모를 때입니다. 그때는 불길만 요란합니다. 마치 산닭 위에 휘발유 붓고 불질러 놓은 것 같습니다. 불길은 요란하게 치솟았는데 불 꺼진 다음에 먹으려고 하면 털밖에 그을린 것이 없습니다 껍질도 다 안 타고 속은 먹을 수도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서로 깊은 사랑의 경지에 가는 것은 마치 삼계탕 할려고 일 주일 정도 삶아 놓은 닭 같지 않습니까. 어디가 뼈고 어디가 살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입니다. 결혼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은 그때의 순수함, 열정, 방향성. 이런 뿌리를 연결하자는 의미에서 돌아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때의 감격으로만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초대교회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늘 소녀 시절이 좋았어, 연애시절이 좋았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인생을 사는 동안에 열매를 맺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짝거리다가 꽃만 피우다 돌아가려는 것과같이 그것은 일종의 허영입니다. 그것은 책임없는 일이고 더 깊은 경지의 기쁨과 영광된 문제들에 대하여 모르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신자들도 이런 불행이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제일 감격스러우냐 하면 예수 모르던 사람이 중간에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밤낮 그것만 하는 사람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에수 믿게 하고 그 감격만 연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사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한다면, 말하자면 전도자로서 그러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우리 신앙의 체계에 있어서도 그 연애 때의 감정, 결혼식 때의 행복같은 그런 감정의 연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거룩을 사모하게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더 열심을 갖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더 아느 일에 나를 몰아가며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나의 인격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으로 몰고 가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를 내가 사모하는 것들에서 어떤 식으로 경험이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으로만이 아니고 회개와 눈물로만이 아니고 어떤 산을 옮기는 능력과 기도하는 역사로만이 아니라 나를 아버지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완성되어 가는 일에 조그만 진전과 보충과 나아감으로써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날 것이며 필요하다면 기적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밤낮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여기서부터 더 발전적이고 지속적이고 완성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감격에만 묻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건이 갖는 목표와 방향성을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떼어 놓는 자가 되어야 되고 그런 의미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줄 아는 자로 서야 됩니다. 나의 감격과 행복을 구하지 말고 완성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할 말이 있고 꺼내 놓을 것이 있는 자가 되지 말고 만들어져 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제 우리만으로는 우리의 존재를 평가하지 않는,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셔 새 사람이 되었다 하는 신자의 존재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싸움거리는 이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추적을 해서 신자가 갖는 바 신자 된 특권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꼭 한다 하는 문제는 사도행전에서는 중요한 싸움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첫 성령강림에 있어서도 강조된 것이 방언이었고, 사도행전 8장에 가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를 해서 그곳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는데 나주에 사도들이 그 얘기를 듣고 그곳을 방문합니다. 그때 사도들에 의해서 그들이 다시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도받고 구원얻은 일이 있고 그 다음에 다시 나중에 사도들이 권하여 성령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가면 에베소 교회에 이미 그 교인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다시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교파는 아니지만 ‘오순절파’라고 하는 파가 있었습니다. 특별한 교파는 아니고 뜨거움과 열심, 어떤 체험들과 은사들을 강조하는 신앙 노선을 걷는 자들을 오순절파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오순절파는 장로교 안에도 있고 천주교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되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 이상의 것들이 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은사들을 받는 것이 있는데 그거을 사마리아 전도 사건과 에베소 교회 사건을 근거로 듭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성령 받는 일은 다른 문제다, 성령을 받으면 분명히 성경 어디에나 강조되는 것처럼 꼭 방언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문제가 사실이 그러한가? 오순절 성령강림에서의 방언 사건이, 말하자면 성령이 오시면 꼭 나타나느 필수적인 현상이냐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4을 보시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마리아 전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방언과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방언은 여기에서 일어난 방언과 달라 보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5-11)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이 알고 있는 방언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쓰는 대화용의 말이 아니고 신령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런 방언이 아니고 외국어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방언이 두드러졌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셨다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제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방언이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와 게시다는 표징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셨다는 표라는 것은 조금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외국어를 주시느냐 하면 문제는 자명합니다. 사도행전 1:8의 약속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주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금 이 방언은 성령이 오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잇다. 그 해야 할 일, 땅 끝까지라는 전도의 책임의 영역을 위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성령이 임하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셔서 이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외국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외국어를 할 능력을 가졌다’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제 이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표로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받은 신자로서의 표가 아니라 이제 내가 너희들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천하 만인의 아버지가 되려 하시며 나도 유대인만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 천하 만인을 구하러 온 메시야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그들을 모두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 이 일을 해결했으니 이제 너희는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유대인만이 아니다 온 천하 만인에게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자 이국어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면 외국어를 했다, 기도를 해서 성령을 받아 외국어를 할 것이다라가 아니라, 이제 성령이 임하시고 주께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그 혜택을 누구에게까지 허락한 것이냐를 강조하려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더 중요한 요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방언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구원을 얻는댜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대상은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초대교회 유대인들에게는 사실은 획기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충격적인 하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인의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지금 사도들이 성령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외국어를 하게 되었다 하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을 만한 실력이 있었고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너스로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해줬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으며 민족적인 구별로써 우열의 개념이나 혹은 더 이익받고 덜 이익받는, 그런 장해도 없는 구원의 대상이 전 민족 땅 끝까지라는 지적을 여기서 받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 성령강림과 방언을 허락하신 데에는 그 대상이 땅끝까지요 각 족속이라는 뜻보다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뜻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18절). 이 말씀에 응함입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을 이런 차원에서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그 충만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외국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이 일차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쓰이는 언어이지 신령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부터 이해를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방언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은 그 방언이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이기보다 이제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문턱을 넘어선 뜻이라는 것을 일차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로 한 그 약속 속에 더 큰 의도와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방언을 주시고 나가서 전도하게 하는 것과 성령이 직접 한 심령을 두드리어 그를 얻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완벽하고 쉽겠습니까. 성령이 직접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공부시켜서 대학 입시를 보게 하는 것과 선생님이 직접 시험 문제를 푸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성적이 좋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입니다.
그러면 왜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켜서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합니까. 목적이 정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보내느냐가 아닙니까. 지금 외국어도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무슨 외국어가 필요합니까. 성령이 꽉 잡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있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이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외국어를 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같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어 그의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를 어떻게 요구하시느냐가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죽어가는 영혼을 붙들어 오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시험 문제에 정답을 쓰는 것만이 문제라면 선생님들이 가서 직접 시험보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그럴바에는 성령이 가셔서 일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데에 도움을 받았습니까. 손해를 봤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주변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혹은 안 믿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대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꼴보기 싫어서 안 믿는 사람이 그만큼 또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남편 중에서 혹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집에 가서 조용히 물어보십시오. 왜 안 믿느냐고. 틀림없이 당신 때문이라고 그럴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쓰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큰 비밀인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 속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관계로써 우리를 이제부터 대접하고 초대한다는 놀라운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성경이 묘사한 것 중 대표적인 것을 추적해 봅시다.
그 사건이 얼마나 오순절 성령 사건과 흡사한가를 보면 여러분이 참으로 놀라운 기쁨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13-17절)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주님게서는 성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곧 성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성부 하나님은 늘 기뻐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하여 성자 하나님은 한 번도 이의 없이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 다 하나님의 뜻과 합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성부 하나님이 인정 하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소리까지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지금 오순절 성령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외국어를 준 것은 결국 이들에게 내가 너희들 모든 민족들에게 말할 수 있게 했다라고 함으로써 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요,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내가 기뻐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만일 하나님 앞에 흡족한 자들이 아니라면 그 가는 길을 막아서지 않겠습니까. 마치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못 알아 듣자 천사를 내려 당나귀를 막듯이, 만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하나님 편을 들기에 부적합한 자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외국어를 그들에게 주사 사도행전 2:5 이하에 나오는 것같이 일본에서도 오고 대만, 싱가폴, 필리핀에서도 오고 소련, 몽고에서도 왔는데 우리나라 말로 다 듣는다 하는 그 얘기는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내려오신 데 대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 아들은 내가 기뻐하는 자요 너희들은 이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히시듯이 지금 이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우리의 발걸음과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들을 펼치시기로 하며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비밀과 온갖 뜻들을 함께 나누시기로 한 대상이다 하는 뜻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성령이 오시더라, 성령이 오시니까 방언이 나오더라 그것으로 기뻐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기뻐할 문제지만 그러나 그것 이전에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느냐.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전서 2장으로 가면 우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이것을 이렇게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너희를 불러내신 자를 선전하며 전도하는 일을 책임맡아야만 된다’라고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전도할 책임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그 차원만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고, 너희가 어떤 자들이 되었기에 너희의 입술과 너희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될 수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높은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수 많고 부족하고 완악한 우리들이 도대체 어떤 부름을 받았기에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과 우리를 고쳐내시는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마음 놓으시고, 기뻐하신 것같이, 우리가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을 구언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놓으시고 마음이 놓으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 같은 것들한테 구역장을 맡기시고 어떻게 하나님이 안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가가하는 것보다 성경이 얘기하는 대로 하자면 우리가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자면 한심하지만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사역을 다시 한 번 이런 시각으로 보십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게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절)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언제나 지키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에게 성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고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쪽에서 성자 하나님을 보면 언제나 흡족하고 만족스럽고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에 어긋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았고 말하자면 지금 우리도 그렇게 주님이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냐 하면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이의 기쁘신 뜻을 늘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드문데 성경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그런지를 잘 기억해 보십시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28장을 봅시다. 성령이 오셨으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방언을 하고 전도를 하게 되었다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무엇과 대응이 됩니까? 조금 전에 요한복음 8장에서 본 바와같이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도다, 항상 나와 함께 계셔서 지키시고 나는 또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늘 나와 함께 하신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게 하시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신자는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자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자이며 그래서 성령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놓아두시지 않는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지금 성령이 오셨더니 마음의 기쁨이 있고 이런 은사가 나타났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실 수 있어서 우리에게 방언을 허락하시고, 지금 오순절 강림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래서 신자들은 뛰어나가 기쁨으로 그 일을 시행하는 자 되고 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느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신의 존재가 자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합니다만 이제는 우리가 우리 하나만으로 우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어긋난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성령을 섭섭하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일은 있어도 성령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안타깝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금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허락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제 어떻게 인정하시느냐 할 때 마태복음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내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절)
부부같은 존재입니다. 제가 파란색을 좋아하는데 제 아내가 베이지색을 좋아한다면 제가 무슨 색의 옷을 입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저는 돈까스를 좋아하고 제 아내는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무엇을 먹게 됩니까. 어느 쪽이 보통 양보를 합니까. 양보한 쪽이 남편이든 아내이든 양보할 때 할 수 없이 양보합니까. 기쁨으로 양보하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안하실 리야 없지만 말하자면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다고 하면 하나님도 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하나님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우리도 좋아하는 그런 부분이 생깁니다. 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더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개성들을 쓰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히 의미있는 일입니까.
우리에게 방언을 하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그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 및 저금통장까지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교회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무슨 일을 해야만 된다, 죄를 졌느냐 안 졌느냐 이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돌아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 부르심을 입은 상급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선포에 대하여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사가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그 영광과 특권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역하시기를 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여러분의 의견을 들으시며 여러분의 인생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찬송이 있고 정말 승리와 기대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 특권들을 빼앗기지 마시고, 허락된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시간만 보내는 게으른 신앙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순절과 성령강림
겔 37:1-6 행 2:1-4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세상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두려움의 삶을 살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행 1:4). 그때 10일 만에 강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나더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행 2:1-4). 그 후 그곳에 있던 제자들에게 변화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은 소리는 있고 힘과 능력으로는 나타나는데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을 설명할 때 바람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요엘서 2장 28절에는 “성령을 부어 주리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기원전 800년경에 예언한 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세 위를 갖고 계십니다. 이 세 위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이 세 위가 서로 일체를 이루는 것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또한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pneuma)라고 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이 임하셔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광야시험 중에도, 각종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게 오셨지만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오셔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며 활동하셨습니다. 그렇게 2천 년 전 오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오늘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을 성령강림주일이라고 합니다.
오순절의 의미
오순절은 헬라어로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합니다. 이는 “50일의 제삿날”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순절에는 4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❶ 맥추감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여름 보리를 거둔 후 첫 곡식을 드리며 맥추감사절을 지켰습니다(출 23:16). 새 곡식을 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만 드리는 감사절을 맥추절이라고(출 23:16)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난 50일째 날이라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한 유월절이 지난 7주후 다음날이어서 칠칠절이라고도(레 23:15-16) 했습니다.
❷ 십계명 돌비를 받은 날입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해서 시내광야에 도착한 때가 3월(출 19:1)이었는데 그 날이 출애굽한 지 50일째였습니다. 그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이 적힌 돌비를 받았습니다. 그 계명 속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이것이 계약 내용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날을 감사절로 지켰습니다. 영적 말씀을 받은 날로 지킨 것입니다.
❸ 성령이 강림하신 날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몸부림치며 했을 것입니다. 성령받기 위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절박할 때가 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 진정으로 기도하며 진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영국이 프랑스군을 지원하고자 29만 명의 대군을 출격시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도 전멸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며 급하게 도버해협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영국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총력으로 그 뒤를 쫓아왔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군대에 쫒기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영국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전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뿐입니다. 모든 국민은 영국군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영국 국왕이 백성들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때로 환란이나 절박함은 재앙이 아니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때 영국 국민이 기도할 때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몰살당할 위기에 있는 29만 명 속에 내 아들들이 들어 있는데, 내 조카가, 내 동생이, 내 형이, 내 손자가 들어있는데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위기의 때에 드려지는 기도, 내 이기적인 기도가 아닌 공동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국군이 도버해협을 건널 때는 더 없이 좋던 날씨가 독일군이 건널 때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그래서 애굽군대가 그랬듯이 갑작스런 폭풍우로 인해 독일군대는 대파를 당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영국군은 도착 후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날 승리한 이유는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모두가 간절하게 중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겠습니까? 그 기도는 분명 회개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박하면 회개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무능과 교만됨과 원수맺음과 죄지은 것에 대해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를 좋아하십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 받는 조건이 바로 먼저 회개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날 자신들의 무능함과 추함과, 교만, 몰이해와 불신을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❹ 교회 탄생일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며 모여서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 공동체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그 모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교회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된 날이 바로 오순절 날입니다. 구약시대의 언약 공동체라는 것도 바로 교회 개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교회개념을 총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총회를 히브리어로 카할(신 9:10, 10:4, 18:16)이라고 하는데 그 때에는 백성들이 다 모였습니다(출 19:5-6). 그들은 정기적으로 년 3차례 유월절 때, 맥추절 때, 수장절 때(출 23:14-17)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약시대에는 카할, 즉 언약 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강림 하신 후 그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도 민족공동체도 아닌 예수와 연합된 성령이 내주하시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공동체 일원은 모두 형제이고 자매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나 민족공동체 차원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도행전 2장처럼 네 것 내 것이 없이 서로 나누고 함께 하며 섬기며 하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강림 후에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후대에 이 날을 “메시야가 완성된 날”이라 해서 “화이트 선데이(White Sunday)”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날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그리스도인이 세례 받음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과 오순절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심
성령을 보내심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❶ 선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일의 목표와 관심은 세상구원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복음을 전하고 증거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목적과 할 일을 발견하여 내 양을 먹이라는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 설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날 베드로는 유대교의 역사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오순절은 기독교의 절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시대마다 준비된 사람들을 선교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입을 열게 하시고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복음을 받은 선교사들로 인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보내심은 선교가 제일목적입니다.
❷ 희망입니다. 당시는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오심은 희망이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그 당시는 민족의 압제 생활로 미래가 막막하고 암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조차 없었고 현실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때 성령은 그를 이끌고 골짜기로 가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버려진 해골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자 마른 뼈들이 움직이더니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환상을 본 에스겔은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 회개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것이다.” 요엘서에서 요엘도 외쳤습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 이사야도 외쳤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피곤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곤비치 아니하리라.” 성령은 능력의 영이고 소망의 영이며 새 힘과 새 길을 여시는 희망의 영이십니다.
❸ 연합입니다. 성령은 일치와 연합을 이루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하나를 이룬 일이었습니다. 먼저 언어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12개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통일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는 바벨탑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통일이었습니다. 또한 뜻의 일치도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 12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으나 모두 한뜻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에 매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강림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사명은 바로 하나를 이루는 일입니다. 성경도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시편 133편을 보면 형제의 연합을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는 오늘 교회가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불렀던 노래의 가사입니다. 12지파로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곳으로 모여듭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줄지어 올라갑니다. 그때 이 시로 하나 됨을 꿈꾸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마치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타고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1-3).” 이는 임직식 장면을 연상한 표현입니다. 기름은 제사장이 임직식 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헐몬산의 이슬은 모든 식물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수를 말합니다. 이는 땅을 비옥하게 해 주는 생명수입니다. 즉 형제가 함께 한마음으로 연합하여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공동체는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뜻입니다. 그렇기에 분열과 갈등을 서로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사회도 살고 나라도 살고 교회도 살고 기업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백성들이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서로 분열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했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으로 이방신을 수입하였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남북으로 둘로 분열되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분열은 망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공동체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가운데 하나 되라는 메시지를 여러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잃은 양 비유(눅 15:3-7)는 이탈한 양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 양들이 고난 받는 모습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리 양 때문에 나머지 99마리가 불편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나머지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잃은 동전 비유도(눅 15:8-10)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 때문에 나머지 9개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탕자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이탈하거나 낙오하거나 병들면 모든 가족에게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는 모두 공동체 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 개신교회는 분열이 심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성찬에 두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일 년에 두세 번 성찬식을 합니다. 그것도 떡은 잘게 썰고 포도주는 작은 잔에 각각 나누어 줍니다. 성찬식은 원래 주님과 연합됨을 확인하고 지체됨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이전 성만찬은 큰 떡에서 떼어먹고 큰 잔에서 나누어 마셨습니다. 그래야 주님 몸에서 우리 모두가 지체됨을 확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은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가 없이 인간만 있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공동체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중재됩니다. 누군가를 도울 때도 내가 가진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고치고 치료하는 것도 오직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형제의 약점을 고치겠다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은 형제의 상처만 크게 할 뿐입니다. 그냥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내 아픔을 치료하고 고쳐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만약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고치려고 하기보다 주님이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유지법입니다.
나의 이야기
성령이 내 인생에 임재하시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임하심은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에서 고백하고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내가 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사역하고 살고 일하게 됩니다. 그때 나를 초월하고 가족을 초월하고, 내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또한 때로 나를 포기하고 희생도 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또 내가 성령의 사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화의 주인공, 일치의 주인공, 화해의 주인공,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불화의 요인의 근성과 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또한 욕망과 투기, 탐욕과 음란함의 뿌리도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그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힘입으십시오. 이 성령에 흠뻑 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로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 모두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불같은 성령 바람같은 성령
이필재 목사
지금 아이티에는 갈보리교회 선교사 11명이 계약을 하고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금년 10월에 제가 아이티에 가기로 약속해 놓고 있는 중에 이런 지진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지진 지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진도 7.0의 지진이면 이 갈보리교회 같은 건물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번 아이티 지진에 대통령궁도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견고하지 못하게 건축된 빈민국의 건물들이라 여지없이 그 주변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계속 연락을 시도한 결과 오늘 아침 한통의 이메일이 저한테 왔는데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을 거처 저한테 다시 온 것입니다. 깔리테풀리오리도 목사님이 보내신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이메일 밑에 최광규 선교사님께서 한국말로 다시 번역해서 보내주셨습니다.
『 존경하는 이필재 목사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저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은 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원 중 목사님 한분이 사망했고 많은 목회자의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죽었으며 모든 선교사들은 지금 집과 가산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이티는 이번 지진으로 피로 얼룩진 폐허가 되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형제 된 깔리테풀리오리도 목사 』
이런 내용의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마 미국이 재건 약속을 철저히 하고 있으니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만, 갈보리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회의해서 소식이 오는 대로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사들을 돕는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자신이 들어가셔서 갈보리교회 선교사 11명 중 지금 한분이 돌아가시고 남은 선교사 10명의 형편을 다 알아본 후 보고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이번에 제 개인적으로 간증거리 하나가 생겼습니다. 카리브호텔에 투숙한 한국인 3명이 연락 두절이라고 하는 방송이 계속했고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에 모두 나왔고, TV에서도 계속 방송했었습니다. 미국 신문에는 이름까지 나왔는데 한국 신문에는 이름은 나지 않고 성과 나이와 신분이 세 사람이 났습니다. 결국 카리브호텔도 무너졌는데 분명히 한국사람 세 사람이 그곳에 투숙했는데 호텔은 무너지고 연락 두절이 되면서 ‘이것은 틀림없이 사고가 생긴 것이다.’ 모두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사업을 늘 같이 하는 쟁쟁한 사업가들이고, 몇 천 명씩 종업원을 둔 사업가들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제 사위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이 안 되니까 정말 답답하고 마음이 많이 쓰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 있을 때 지진이 나서 호텔이 무너졌지만 이 세 사람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젯밤에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으며 여기서 정말 걱정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괜찮으냐고, 마음의 충격이 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사위는 저보다 믿음이 좋습니다. 저더러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아버님이 늘 설교하셨으면서 왜 걱정하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티에 계속 사업을 할 것이냐?” 질문하니 “그럼요. 계속 사업할 겁니다.” 사실 미국이 관세를 삭감해주는 나라가 세계에서 몇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업가들은 더 끌리는 겁니다. 제품을 미국으로 만들어 들어가면 관세를 거의 삭감해 주니까 사업가들은 그게 매력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가서 그것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위가 하는 말이 “사업을 계속 할 것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더군다나 오바마가 이번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보니 그곳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자라는지 우리 아이들과 그곳 아이들을 비교하니 천국과 지옥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그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이미 월드비젼과 하루 만에 예약하고 왔습니다.” 지난주에 그런 일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제가 늘 광고하는 게 있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은 새벽 기도회 나가라는 겁니다. 저는 경험한 것이 하도 많아서 늘 자신감 있게 말합니다. 한번 새벽기도 나가 보십시오. 교인들 가정에 얼마나 간증 거리가 많은지 목사가 시키는 것은 절대 해롭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은 성령님의 성격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은 성경말씀에 성령은 불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배경은 장막절인데 오늘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쌀농사는 없고 보리농사이기 때문에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부르는데 성경에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오순절, 맥추절, 수장절, 칠칠절은 모두 다 똑같은 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첫 수확 곡식은 가지고 와야 합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지켰습니다. 민수기 28장 26절에 있습니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그리고 말씀이 계속됩니다.
17절에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으로 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 정성껏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 년에 세 번씩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바로 사람이 많이 모인 그 때를 맞추어서 구원 역사로 비추어지게 된 것을 성령이 지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성령님의 역사가 그렇게 특별 사건에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가장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전달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는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어떻게 많이 모여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5절에 보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했습니다. 외국에 있는 사람도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장막절이 되면 유대 나라로 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 모이는데 이것은 아마 이슬람이 더 잘 압니다. 이슬람의 특별절기에는 외국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짓밟혀서 죽는 사람도 생길 정도입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해마다 그럽니다. 유대 나라에 세 절기도 그런 모습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하나님의 계획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있는데 오늘은 어떤 일들이 벌어졌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 사람으로 막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이 “아니,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 각국에서 온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가?” 바대인, 메대인, 애굽인, 구레네, 리비야, 로마, 아라비아인들인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온 세계를 대상으로 지금 사역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네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2장에 와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 역사가 일어났다고 오순절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성령 사역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불이다. 불 같은 성령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출현이 불로 나타난 것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세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어디서 만났습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이야기했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군사들이 엘리사 숙소를 다 에워싸고 이제 엘리사는 잡혀 죽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화 되었는데 다 물리쳤잖아요? 그 물리쳐준 하나님의 군대를 성경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불말과 불병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은 엘리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승천할 때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이 성경에 불말과 불수레라고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했던 엘리야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불로 내려서 소멸해 버렸습니다. 레위기 성경에 보면 “성전 안에 항상 불을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 그래서 항상 불을 피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같은 하나님의 성령 임재가 항상 교회 안에 이렇게 타고 있어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성입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가톨릭에 들어가 보십시오. 들어가자마자 왼쪽이나 오른쪽에 촛불이 수백 개입니다. 그래서 헌금 좀 하고 촛불 하나 켜고 기도하고 나옵니다. 그 불을 왜 켜놓은 겁니까? 그곳이 어두워서 켜 놓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대로 하나님의 임재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7절에 산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제일 큰 불의 역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밤에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그러면 왜 불로 나타나셨는가? 불의 성격이 있습니다. 불은 소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이라면 모든 물체가 없어져버립니다. 잿더미가 되고 재가 날아가면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간혹 우리 집안에 지저분한 쓰레기를 소각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농촌에는 불태워버려야 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성격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에 대한 소멸의 능력이 불 같은 성령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지저분한 인간의 모든 죄를 흔적도 없이 보이지 않도록 다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죄가 다 없어지는 겁니다. 정결의 성격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 지낼 때 성경에 보면 고기는 먹고 내장, 이런 것은 다 불태워서 하나도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 뜻은 지저분한 짐승의 똥이나 내장 같은 죄를 모두 다 소멸해서 보이지 않게 하는 불 권능의 사역을 말합니다. ‘성령은 불 같은 것이다.’ 불은 심판의 상징입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 불로 심판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이 아니하냐?” 세상의 모든 마귀의 세력은 불 같은 성령의 역사로 소멸되어짐을 성령의 성격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뚜렷한 불의 성격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지면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사역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부인이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남편이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또, 자식이 말려도 안 되고 부모가 말려도 안 됩니다. 불같이 되어버린 걸 어떡합니까? 또, 누구든지 당하지 못합니다. 죽음도 안 되기 때문에 순교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역사에 기독교를 가장 잔인하게 핍박한 국가는 로마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인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다 기억하는 것은 원형극장 사건입니다. 공고합니다. “몇 월 며칟날 원형극장에서 기독교인들 사잣밥 되게 하니까 구경 오라.” 다 써 붙입니다. 그러면 잠실야구장 같은 곳으로 사람들이 가득하게 모입니다. 이때 붙잡아 온 기독교인들을 벌거벗겨서 운동장 가운데로 몰아놓고 며칠씩이나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잘 보는데 사자들이 다른 동물을 순식간에 잡아먹어서 뼈다귀만 남습니다. 원형극장에서는 사람도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구경하고 있으니 인간으로서 이게 할 일입니까? 거기 끌려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을 것을 알고 끌려가지 모르고 끌려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잠실 운동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내가 장본인으로 끌려가서 사잣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시겠습니까?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불 같은 성령이 그때 주어졌으므로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큰 축복이야. 아무나 순교하나? 하나님이 순교자로 정해준 사람만 순교하는 건데. 할렐루야!’ 그래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가기 직전까지 나는 이제부터 예수 안 믿겠다고 말하면 그 시간으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하고 풀려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충만의 문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365일 죽을 각오로 사역을 한다고 그 뜨거운 열정, 불 같은 용기가 결국 어떻게 했습니까? 로마를 뒤집어엎어 버렸습니다. 지금 세계 교회 중심은 로마가 되었잖아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옛날 부흥회는 실감이 나는데 요즘 제가 부흥회를 다녀보면 그렇게는 안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제가 청년 시절에는 교회 부흥사가 오면 통성기도를 하게하고 항상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불 받아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령 받으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충만, 불 같은 성령! 어떤 경우에 주어지는가? 잘못 생각하면 ‘제자들은 이때 비로소 성령을 받은 것인가?’ 아닙니다. 12사도, 120사도 이 과정을 한번 정리해 보면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 관계성이 이루어졌는데 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동안에 성령 체험을 하고 메시아성에 대한 확실한 고백을 했고 사도가 된 것에 대한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 사도가 필요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는 다 도망을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시 모아놓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으니 이제는 제2의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 제자들이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면 십자가 사건도, 부활 사건도 주님의 놀라우신 기적 모든 사역도 전설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령 강림 사건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역사 출발이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객관적 지식이 주관적 체험으로 승화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에 대해서도 절대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은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시다.” 하지만 안 믿습니다. 알고 있는데 안 믿습니다. 객관성 있는 진리이지만 나의 주관적 체험으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서기관들을 불렀잖아요?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베들레헴입니다.” 정확하잖아요? 너무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한 사람도 메시야에게 와서 경배를 안 합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의 기적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토록 놀라고 신기하면서도 예수님은 안 믿습니다. 배고팠을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기적을 일으켜 다 같이 먹었잖아요? 먹은 사람들은 죽도록 예수 믿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먹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관적 체험으로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자리에 왔을 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 충만의 사건은 어떤 성격인가? 1단계가 은혜적 역사라고 말합니다. 내가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는데 2단계는 은사적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 은사적 충만의 역사가 내림으로 하나님이 목적하는 어떤 사역에 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들어 쉽게 말씀을 드리면 저는 어려서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성에 대해서 확실한 고백을 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아주 기뻐서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에서 날마다 살다시피 하는데 그토록 평생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10대 후반, 20대 초반 시절에 나에게 또 다른 성령의 뜨거운 체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이건 뭐야?’ 바로 은사적으로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하는 은사적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것을 받은 겁니다. 지금 사도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두면 또 흩어지고 말아.” 불 같은 은사적 성령 체험을 줄 때 비로소 그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은사적 성령 충만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똑같지 않고 똑같은 목적이 아니라 각자 다른 목적의 충만 역사로 “이때는 네가 이것을 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충만 역사를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하는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충만 역사가 급하고 강한 바람 같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령은 불 같은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지 불이나 바람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교하실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시면서 성령은 바람 같은 것이라고 어디서 오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이 너희에게도 임하는 것이라고 설교를 해주셨잖아요? 여러분! 바람을 보십시오. 태풍이 불어도 우리 눈에는 안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잖아요? 성령의 역사는 자유함이 있어서 우리 영 가운데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도 없게 예수님의 설교대로 분명히 내게 주어졌는데 자율성이 있어서 그 대기권 안에 어떤 곳이라도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람이잖아요?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열어드린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독교 복음을 들어오지 못하게 아무리 문을 잠가 놓아도 바람은 들어갑니다. 성령은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굳게 문을 잠갔습니까? 그런데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대한민국이 지금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은사적 성령 충만의 사건은 어느 때 주어졌는가? 여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이런 사건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들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예수 믿는 형제들이 마음을 같이 해서 한 곳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적 힘이 나타나는지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 기도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은사적 면에서 차이가 큽니다. 저는 어쩌다가 강남금식기도원의 전속 강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7년이나 했으면 그만 두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계속 하라고 해서 매달 한 번씩 갑니다. 거기 가보면 사람들이 어떤 때는 수천 명씩 와서 기도합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할 일이 없나? 뭐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기도할까? 집에서 기도하던가 자기 교회에서 기도하던가 할 것이지….’ 이 사람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막 합심하여 기도할 때 영적인 역사가 크게 역사한다는 체험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 그렇게 모이는 겁니다. 가보면 혼란스러울 만큼 기도를 합니다. 강대상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사람은 땅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요상한 율동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은 바람이라고 바람 소리를 냅니다. “쉭! 쉭!”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극히 감정적이라 신앙생활도 천지개벽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 술 취했다.” 성령 충만한 사람과 술 취한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담력이 생깁니다. 무서운 사람이 없게 됩니다. 술 취해 보셨습니까? 길거리 지나가는데 술 취한 사람들 보세요. 아무나 보고 덤벼듭니다. “야! 뭐야? 이 사람이! 왜 쳐다봐?” 그런데 다른 사람과 시비가 안 붙습니다. “저 사람 술 취했어.”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파출소에 잡아다 놓아도 경찰들을 막 때립니다. 성령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담력이 생깁니다. “너 사잣밥 되게 할 거야!” “그래?” 성령 충만한 사람 못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진행의 장애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성령 충만의 역사가 가는 것을 방해하면 화가 내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의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도를 드릴 때 밤새도록 바람이 불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회오리바람이 불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프뉴마’(pneuma)라고 하는데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물의 성격, 불의 성격, 바람의 성격 그 특징이 뭡니까? 바로 자유함입니다. 어떤 것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우주 공간을 왕래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은 땅 속에도 스며들잖아요? 성령은 심령 속에도 파고 들어갑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래서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이제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저는 북한 땅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같이 뜨겁게 번질 것이며 바람같이 통과해서 삼팔선을 넘어 신의주까지, 주문진까지 왕래할 것을 믿기 때문에 갈보리교회 마지막 선교지는 북한이라고 기도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0년 사도행전 29장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 물같이, 불같이, 바람같이 온 세상에 이루어지고 이런 일에 쓰임을 받는 여러분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축복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오시다
이정선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모였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던 바로 그날에 해당하는 날입니다. 1절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이라는 단어는 50일째 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 순(旬)은 열흘입니다. 한 달이 30일이니까 셋으로 나누어서 초순, 중순, 하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순이면 50일이 됩니다. 영어로는 penteco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에서 온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펜타는 5입니다. 그래서 미 국방부를 펜타곤이라고 합니다. 펜타곤은 오각형이라는 뜻이지요.
50일째 되는 날이라면 어디에서 시작해서 50일이 되는지 기준이 있어야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연중 세 개의 큰 명절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설, 추석,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맨 처음에 오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면서 생겨난 명절입니다(신 16:1). 두 번째 명절이 오순절인데, 구약에서는 칠칠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레 23:15-16). 칠칠절이라는 말은 칠일이 일곱 번, 즉 7주가 지난 날을 의미합니다. 7X7은 49니까, 그 다음 날 50일 되는 날이 명절이 됩니다. 유월절에 처음으로 곡식을 베는데, 그 때로부터 50일 동안이 수확의 계절입니다. 그렇게 수확이 끝나는 날이 칠칠절, 즉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명절은 유대력으로 7월 1일입니다(레 23:24). 이것이 초막절인데, 명절 가운데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초막절은 두 번째 추수가 끝난 다음에 모든 백성이 들에 텐트를 치고 생활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오순절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유월절 후 첫 번째 안식일에서부터 50일 후가 오순절 날이 됩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때 유월절이 목요일이었고, 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이 안식일이었고,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후 딱 7주 만에 오순절이 되었는데, 바로 그날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으니까(행 1:3), 이날 오순절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0일이 되는 날이군요. 그날 제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오순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모인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늘 그렇게 모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히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2절). 그리고 불꽃이 내려와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는 각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3절).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자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오신 유일한 단 한 번의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그 이전에도 오셔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먼저 성자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고, 그 구원이 각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에 일회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대관식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대관식은 왕위에 오른다는 공식적인 의식입니다. 대관식 이전에도 왕이었지만 대관식을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관식은 다시 반복해서 하지 않습니다. 한 번 대관식을 한 후에는 그냥 왕으로서 통치하는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떠난 다음에 성령을 보내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십니다. 영어성경에는 another Counselor, 또는 another Helper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또 다른 보혜사라면 보혜사가 한 분 더 있다는 말인데, 누가 보혜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예수님처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실 다른 분이 오신다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말입니다.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성자께서 하실 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성자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시는데,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놓은 구원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그리고 그렇게 떠나신 후 열흘이 지나서 마침내 성령이 오셨습니다. 마치 임무교대를 하는 것처럼, 성자께서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성자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사셨기 때문에 그분이 인격체이신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렇게 인격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도 바람소리처럼, 또 불꽃 모양으로 오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마치 하나님의 기운이나 능력 정도로, 즉 비인격체로 오해하는 분들이 종종 있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성령께서도 성자와 같이 인격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보혜사이시고 또 성령도 똑같이 보혜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행 1:5).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말합니다. 성령 세례는 성령의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그분의 활동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도 받았지만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했습니다. 물로 주는 세례는 성령 세례 받았음을 확인하고 선언하는 외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4절에 보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을 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성령이 한 사람에게 임하셔서 그 안에서 온전하게 역사하시는 상태입니다. 내 인격 속에서 거짓과 불의와 욕망에 이끌려 살던 것이 과거의 내 모습이었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내 인격을 가득 채우시니 내 속에 있던 거짓과 욕망이 모두 쫓겨나가고 성령께서 하시려는 대로 내가 순종하며 살아가는 상태,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가 되시지요? 성령 세례는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순간이고, 성령 충만은 점점 믿음이 깊어지면서 나중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라고 고백한 것은 훨씬 이전이었지만,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령께서 오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이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맨 처음 하신 일이 제자들의 입에서 다른 언어가 나오게 하셨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다양해진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한 것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흩으셨습니다(창 11:7-8). 오늘도 우리가 언어가 달라서 겪는 고생과 불이익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지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설움이 이 언어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그렇게 나뉘고 흩어졌던 언어의 장벽이 사도행전에 와서 극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셨던 언어를 하나님이 다시 통일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저주를 거두시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막혔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시겠다는 상징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자께서 이루신 구원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믿도록 하시는 일을 위해서 오셨는데, 제자들을 사용하여 그 일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께 훈련을 받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예수님께 배운 것을 전하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큰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는데(요 14:16),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믿습니다. 그 오순절 날 공식적으로 오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을 때까지 쉬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할 수만 있으면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답게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느낄 수 있습니까?
먼저 여러분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죄를 위한 것이고, 그분을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믿어지면, 여러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각 신자의 몸을 성전 삼아 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전 3:16)?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우리의 죄악된 성품의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나쁜 짓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겠지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술 취하는 것에 비유해서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사람이 술에 취하면 제 정신으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못하고 술기운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술이 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셔서 성령의 뜻대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우리가 성령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꾸만 악한 성품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실까요? 분명한 사실은 성령께서 절대로 떠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체시기 때문에 감정을 가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살면 성령께서 기뻐하시지만, 그렇지 못하면 슬퍼하셔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엡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데서 더 나아가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살전 5:19). 성령을 소멸한다는 표현이 좀 지나친 것 같네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없애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영어 성경에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번역했군요.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신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데, 우리가 자꾸만 반역하고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나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려는 성령의 사역이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의 사역을 소멸하는 행태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계속해서 말 안 듣고 나쁜 짓을 하면 언제까지 놔둘 수 있습니까? 매를 들어야지요.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도 말 안 들으면 매를 맞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저 한쪽 구석에 계십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충만하게 채우고 계십니까? 여러분 마음 속의 성령께서는 늘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자주 근심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옛 습관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람 저 사람 돌보시느라 너무 바빠서 나한테까지는 못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모든 신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현장에서 성령께서는 근심하시며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릴 때,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조금만 더 성령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드리십시오. 조금만 더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령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사는 것이 귀찮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가장 즐겁고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
김상복 목사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만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다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이후로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요, 이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는 것은 더 억울한 일이요, 듣고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더 억울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체험하고 신앙의 확신 속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사건이 약 2천년 전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약 50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중 380명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120명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일들은 해가면서 성령의 체험을 기다렸습니다. 가룟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맛디아를 선출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할 일을 해가면서 기대하고 기다릴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밥 할 때는 밥 하고, 아이들 돌볼 때는 돌보고, 직장에 가면 열심히 일하고, 사업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주님의 전에 와서 모여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할 때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입니다. 500명 중에 380명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성령강림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또 함께 모여 기도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모여 기도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일에 교회에 오실 때 영적 기대감을 갖고 오십시오. 한 주간동안 주일을 생각하면서, ‘이번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과 기도를 올리고 말씀을 듣고 헌신할 때 성령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내게 역사하실 것이다’ 하고 기대하십시오.
성경을 펼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저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수십 번 읽었던 성경구절인데, 어느 날 기도하면서 다시 읽을 때 그 속의 한 마디가 튀어나와서 내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그 자리에 고꾸라집니다. 어떤 때는 바로 무릎을 꿇습니다. 깨달음이 옵니다. 눈이 뜨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건 참 내가 잘못했었구나.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합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말씀을 공부할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기다리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의 단점 한 가지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빨리 하고 ‘아멘!’ 그러고 일어나서 집에 가버립니다. 하나님도 말씀을 하시고 싶은데 자기 할 얘기만 20분, 30분, 1시간 하고는 금방 나가버리니까 하나님이 “좀 기다려라. 나도 할 얘기가 있는데...” 하십니다. 여러분, 앞으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실 말씀을 꼭 기대하십시오.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순종하며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기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나타나십니다.
오순절에 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한지라”(행2:2). 성령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셨어요. 언제 성령께서 나타나실지 몰라요. 성령강림은 사람이 조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어느 순간 성령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나타나십니다. 어느 때는 꿈으로, 어느 때는 환상으로, 어느 때는 음성으로, 어느 때는 가슴이 찔림으로, 어느 때는 평화와 기쁨으로, 어느 때는 용서의 선언으로, 성령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때마다, 찬양할 때마다, 예배할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갑자기 나타나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휙 하더니 120명이 있던 방에 가득 찼어요. 그리고 갑자기 각 사람의 머리 위에 혀같이 갈라진 불이 임하였습니다. 타원형의 혀를 절반을 갈라놓은 모양의 불길이 사람들의 머리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순간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이란 성령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많이 받고 조금 받고가 없어요.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로 인사할 때 서로의 인격에게 하지, 손이나 발에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몸소 찾아오십니다. 성령을 1/4만 갖고 있다가 기도하면 성령이 1/2 오시고, 더 기도하면 4/3 오시고, 바짝 기도하면 충만하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한 분이므로 더 오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계시든가 안계시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가슴속에는 이미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님이 나를 더 많이 가지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배시간에만 성령을 의식했는데, 이제는 차를 타고 갈 때, 생각할 때, 느낄 때, 말할 때, 행동할 때, 사람들과 만날 때, 사업할 때, 공부할 때, 늘 성령을 의식하여, 성령께서 내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컵에 절반밖에 없던 성령이 어느 날 가득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생각하게 하시고, 그분이 말하게 하시고, 그분이 행동하게 하시고, 그분이 느끼게 하시고, 여러분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지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마치 분노에 충만한 사람이 분노에 사로잡혀 얼굴색깔, 눈빛, 몸짓, 목소리까지 변하는 것처럼,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습니다.
성령충만의 결과가 초대교회에는 방언이라는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2:4). 방언은 사람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방언”(other tongues)이란 다른 나라 말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무려 16개 나라 사람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제자들이 자기 나라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라 “도대체 이게 뭐냐?” 한 것입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7절). 여기에서 ‘갈릴리 사람(Galilean)이란’ 예루살렘 사람들에 비하여 교육받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전에 시골사람을 비하하는 말을 했었지요.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나라말을 거침없이 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11절에 보니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것이 두 가지 있어요. 그 외국인들이 언어를 알아들었고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말을 “The wonderful works of God”이라고 했어요. 즉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의 역사”(The works of God)란 표현은 성경에서 네 경우에 쓰입니다.
❶ 하나님의 창조(creation)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끝내신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마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무엇을 하게 됩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게 됩니다. 욥기 10장 3절에도 “당신의 손의 작품을 멸시하십니까?”(spurn the work of your hands) 라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게 자기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뇌성과 번개와 비, 눈과 들, 짐승 폭풍, 추위, 자연, 어두움, 구름 등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욥37:4). 또한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욥33:29).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보입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아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이 나옵니다.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눈을 떴고 영적인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어린 아기를 보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가슴이 찡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아기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만 보면 그런 증세가 자꾸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보고 느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❷ 하나님의 보전의 사역입니다. “The work of preservation,” 즉 보호하시고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내팽개쳐 놓는 것이 아니라 보전하여 지속적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순서대로 뜨고, 바다에서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어 돌아다니다 필요한 곳에 내려줍니다. 그러면 그것이 샘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어 그 속에서 많은 생명들이 움틉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찬양을 합니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여러분도 성령에 충만하여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감동과 감화와 충만한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❸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인류를 주관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자녀와 가문과 직장과 사업체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큰 손이 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삽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이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❹ 기적들이 있습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역사들을 이루시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제한이 있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건강에 제한이 있고, 생각에 제한이 있고, 능력에 제한이 있고, 사랑에 제한이 있고, 인내에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설교를 듣는 도중에 질병이 사라집니다. 기도와 찬양과 말씀 속에서 가슴에 맺혔던 한이 풀어집니다.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the wonderful works of God)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종종 제게 와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올 때는 제 어깨가 너무 아팠었는데 예배 도중에 시원해지더니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수십 년 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 나를 배신하여 내게 고통을 주었던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 이제 집으로 돌아오겠답니다. 내 일생을 망쳐놓고 이제 늙어서 돌아오겠다는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성령께서 용서해주고 받아들이라고 하셔서 용기가 생겼습니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예요.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몇 년 동안 모은 돼지저금통을 들고 와서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어린 아이가 그것으로 뭘 하고 싶지,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났겠습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감동입니다. 회계부의 많은 어른들이 감동을 받고 “아! 이 교회가 이렇게 되는구나!” 했습니다. 우리가 한동안 재정부족으로 저 기도탑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저 기도탑을 저희가 하겠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헌신의 열망이 생긴 것입니다. 내 시간과 물질과 사랑과 건강과 재능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순종하며 기도하는 자들의 삶속에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번에 잠깐 하와이에 강의하러 갔다가 판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성경공부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성경공부를 하며 몰래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그만 교회에 들켰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법원 판사 자리를 사임하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일들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와 바울의 감옥 문을 여는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갇혀있는 것 같아도,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아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인생의 막힌 것들을 활짝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 속에 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성령에 의지하여, 그 능력과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체험한 사람들이 압니다. 2천년 전 오순절에는 방언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와 똑같은 환경과 똑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사는 역사예요. 그러나 오늘 21세기의 환경과 여건에서도 동일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 사람들 술에 취했는가? 참 이상하네” 하며 사람들이 놀랍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십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예수를 안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드높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이렇게 역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의 언어를 통해서 간증하는 입술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흥의 원동력
김경년 목사
어떤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특이한 실험을 했답니다.
벼룩은 원래 자기 몸체에 비해 엄청나게 높이 뛸 수 있습니다.
그 벼룩 한 마리를 잡아 유리 병 속에 넣습니다. 그리고 유리 병 중간 부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아 버립니다. 그 결과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부딪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분명히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계속하던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립니다. 조금만 더 뛰면 등이 부딪치 게 됨을 안 벼룩이 아예 더 이상 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 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리 병 중간부분의 유리를 치워버립니다. 벼룩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껏 자기 세계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제거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벼룩은 마음 놓고 있는 실력껏 높이 뛰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벼룩은 예전 유리 가 막혀 있던 위치 직전에서 여전히 멈추고 맙니다. 벼룩은 투명한 유리가 변함없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벼룩이 자신의 세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스스로 국한시켜버린 결과이기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이번에는 물고기를 실험했답니다. 큰 수족관에 물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수조의 한 가운데를 유리로, 이번에는 세로로 막은 뒤 한 쪽 편에 물고기들을 넣습니다. 물고기들은 번번이 중간에 막힌 유리에 머리가 부딪칩니다. 분명히 그 너머 에도 물이 있는 것이 보이고, 중간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부딪치기만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물고기 역시 중간 너머 가기를 포기해버립니다. 유리 칸막이가 있는 직전에서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시 머리가 어스러질 듯이 부딪칠 것을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때 그 세로 칸막이 유리를 치워버립니다. 그래도 물고기들은 수족관 반 너머를 가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막대기로 몰아도 예전 칸막이가 있던 곳 직전에서 돌아서 버리고 맙니다.
물고기들 역시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거기에 여전히 그리고 반드시 있을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물고기들이 자기 세계를 스스로 수족관 반 이 내로 제한해버린 부정적 결과입니다.
우리는 위의 실험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바깥 세계를 잘 수용하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평생 자기라는 우물 속에 갇혀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2-13절 /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의심했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질 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미쳤다고 말하고 술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부인하거나 비판하면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을 봅시다.
한자로 오순(五旬)은 50을 말합니다.
오순절을 희랍어에서 “펜테코스테(pentekoste)”라고 하는데 “50번 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승천하신 후 10일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 2-4절 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일어난 특별한 일은 성령께서 임하시매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이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언어와 다른 언어를 의미합니다.
본문 5절-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는 순간 놀라면서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하고 말한 것은,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하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한결같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 사람'에 지나지 않는 무식한 어부들이 다른 나라 말을 따로 배울리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그들이 모두 갑자기 유창하게 자신들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 소동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찜이뇨'라고 서로 반문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9절-12절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 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그들은 당시 유럽과 중동 및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그들은 각기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각각 그들의 모국어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 어찐 일이냐?'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많은 외국어를 다 섭렵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갈릴리의 어부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성령이 임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께서 임하시므로 제자들은 비로소 자기라는 좁디좁은 우물, 갈릴리라는 편협한 자기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 속에 내주 하시므로, 그들은 그제야 그들 바깥에 있는 더 큰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를 향하여 열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유다 사람과도 사마리아 사람과도 땅 끝의 사람과도 온전히 말이 통하는 바른 그릇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로소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그들은 자기 우물에 틀에 갇혀있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우물을 벗어난 사람들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자기 지식, 경험, 한계를 넘어선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사도행전 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끝으로,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성령 강림 이후 세계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은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운 날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영주에 가서 그 지역에 중직자요, 지도자들인 남선교회 회원들 300여명 앞에서 오전 오후 두 시간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주시 영풍군 문수면 월호2리 298번지입니다. 정말 시골 작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고,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이렇게 점점 세계로 성장하게 된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중학교 3학년 때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제가 이렇게 큰 세상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강의를 하면서 많은 분들이 저를 격려하시고,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지만, 또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것과 성령의 충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고, 에베소서5장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곧 성령인데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다시금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얼마만큼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므로 ‘충만’이란 더 많이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분의 인격을 따라 그 분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그 분의 의도대로 말하고 그 분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 론
우찌무라간조라는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은 성령강림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을 통해 나의 틀을 극복하고 더 넓은 세계로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