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악산, 감미로운 달의 바위 속으로 걸어가는 길

[둘레길]

월악산, 감미로운 달의 바위 속으로 걸어가는 길

보덕암~중봉~영봉~마애불~덕주사 11km

여인이 월악에 들어왔던 그날도 이렇듯 는개가 왔을 게다. 쏴 하고 내려주면 맘이라도 씻길 텐데 눈이 되지 못한 방울방울은 고요히 세상을 가라앉힌다.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전설 같은 구름은 모든 걸 희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옅은 길을 붙잡고 닿은 곳은 중원 미륵사지, 옛날에는 무척 큰 절이었다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은……, 사라진 것을 보러 온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며 하늘재에서 내려온 하늘은 아스라한 풍경만을 내어준다.

935년 신라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다.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은 크게 영접을 받아 호화롭게 행차하였다 한다. 이에 반대한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행차는 초라했을 게다. 하늘재를 넘어 월악산에 닿은 그날도 이렇게 추적추적 는개가 세상을 하얗게 가라앉히고 있었을 것이다.

중봉 오름길의 전망대. 깃털구름과 운해, 상고대가 작품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평일에 비까지 내리니 관광객은 우리뿐이다. 잊혀진 절에는 커다란 돌로 남은 거북이와 보물 몇 호라는 석탑이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다. 안으로 걸어가자 덩치 큰 불상이 멍하니 있다.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미륵리마애석불이다.

갓을 쓴 머리는 크고 팔은 짧고 다리는 단순하게 치마를 입은 듯 적당히 선만 그었다. 어린애가 찰흙으로 주물러 만든 것처럼 조잡해 감흥이 없다. 얼굴만 천년 세월을 비껴간 듯 하얗고 섬세하게 조각된 것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주민들은 불상이 신통해서 그렇다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불상이 며칠 동안 땀을 흘린 적도 있다지만, 학자들은 화재에 그을려 얼굴만 새로 조성했을 거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믿고 싶은 걸 믿으면 된다.

보덕암에서 중봉 가는 길. 상고대가 황홀경을 연출한다.

정면에서 보니 석탑과 석불이 반듯하게 일렬로 선 게 한눈에 보인다. 그 뒤로 월항삼봉의 산덩이가 희미하게 겹쳐 있는데 쉬 눈을 뗄 수 없는, 한국적인 그림이다. 넓은 절터는 주춧돌이 있던 흔적만 남아 이제는 풀과 나무가 세월의 공터를 메우고 있다. 잊혀진 절터의 몽유도원도 속을 거니는 게 좋았고 아름다웠다. 해가 쨍한 사람이 북적거리는 날 다시 찾으면 지금의 미륵사지라 믿지 못할 것이다.

아침이 되어도 흐림은 가시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일기예보를 위안 삼아 보덕암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올라갈 땐 무거운 짐을 도맡아 지고 하산할 땐 쓰레기를 주우며 산행 속에서 덕을 쌓는 홍장천(자이언트트레킹 이사)씨와 산 잘 타는 주부 장명숙(39)씨가 동행했다. 보덕암에선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가 마중 나왔다.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꼬리를 흔들어대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명랑해진다. 뒤뚱뒤뚱 배불뚝이 새끼 강아지도 한몫한다. 이끼 낀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약수 맛이 깔끔하다.

중봉의 철계단 길. 월악산 특유의 암봉에 상고대가 서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그재그 오름길에 몸을 푹 담근다. 헐떡거리는 호흡을 채찍질해 더 깊숙이 산에 몰입한다. 초장에는 별 풍경도 없으니 매연에 절은 육신을 자연 쪽으로 맞추는 데 주력한다. 처음엔 싫다고 반항하는 심장과 근육도 쭉 밀어붙이면 묵은 매연을 와락 토해내고 초록색 호흡에 동화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몸이, 호흡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자니 땀이 나긴 하지만 즐겁고 보람 있다.

하봉에서 뻗은 주능선에 닿자 수고했다며 월악산이 선물을 준다. 나무 결결이 하얗게 빛나는 상고대를 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우와” 하고 감탄이 터진다. 충주호에서 일어난 안개 입자가 찬바람에 실려와 고지대의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게다. 마침 운 좋게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상고대를 어루만지자 장식에 불이 들어온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투명한 빛을 낸다. 인위적인 트리 불빛에 비할 수 없이 맑고 아름답다. 설경 속 어디선가 ‘닥터 지바고’의 라라가 불쑥 나타나더라도 어색하지 않으리라.

중봉 철계단 길. 운해 아래 송계리가 까마득하다.

비만 오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어느 새 하늘이 맑게 갰다. 몇 년 전 월악산 종주 때 폭우로 비등산로를 헤쳐 탈출하고 다시 능선에 붙어 밤 늦도록 걸었던 고달팠던 기억의 산인데, 이젠 화사한 기억으로 바뀌게 될 듯싶다.

철계단을 올라 중봉 줄기에 이르자 시야가 트이면서 먼 산이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동쪽의 구름을 뚫고 솟은 소 등짝처럼 푸근한 긴 줄기, 소백산이다. 구름바다 위를 헤엄쳐 가는 동화 속 고래다. 서쪽으로는 송계리가 발아래다. 어찌나 산세가 절벽인지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볼 때의 풍경이다.

중봉을 넘어서자 빛나는 흰색 망토를 걸친 커다란 봉우리가 나타난다. 오늘 산행의 주인공인 영봉이다. 주인공이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주위로 옅은 구름이 피어오른다. 대자연의 특수효과만큼 황홀한 게 또 있을까. 신비로운 장면이 가슴속 깊은 데로 고요히 스며든다. 자연에는 진실한 감동이 있다.

영봉으로 이어진 중봉 능선길.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낙엽과 상고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산사면 우회로를 따라 거대한 달덩이를 돌아서니 달의 꼭대기로 이어진 철계단이다. 잡념을 씻어내는 역할을 맡은 긴 계단은 무념무상의 호흡을 이룰 수 있도록 사람들을 지도한다. 이 경지에 닿은 이들이 달 표면에 설 수 있는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달과 가장 연이 깊다는 산 월악의 절정 그 끝에 설 수 있다. 그 절정을 자주 맛보면 영봉이 왜 신령 영(靈)자를 쓰는지를 알게 된다.

눈이 십 리 이십 리 밖을 넘어 백 리 밖까지 가 닿는다. 구름 속에서 검은 거인들이 깨어난다. 검은 산등성이가 흘러내리는 구름 속에서 차츰차츰 선명해지고 있다. 주흘산 등성이는 구름을 뚫고 상어 지느러미가 불쑥 솟은 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탁월한 모습이다. 만수봉으로 이어진 남쪽 줄기는 상고대가 녹아내리느라 은빛이다. 부드럽게 빛나는 산의 결에서 모락모락 구름이 핀다. 파란 하늘의 밑바탕에 구름이 화사한 붓질을 하자 검은 곡선의 거인들이 숨을 쉬며 깨어난다. 영봉은 이렇듯 세상을 온통 화사한 빛깔로 터뜨려놓아 산행이 얼마나 매혹적인 행위인지 알려준다.

영봉이 월악산의 주봉인 것은 높아서가 아니다. 키로만 따지면 공원 내에 문수봉(1,161m), 대미산(1,115m), 매두막(1,099m)처럼 힘센 봉이 널려 있다. 미학적인 주봉인 게다.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서서 하산 길을 잡는다. 곳곳에 미끄러운 데가 널려 엄지발가락 끝에 힘을 주며 꼼꼼하게 밟는다.

설경만큼이나 맛난 점심을 곁들이자 산행이 흠잡을 데 없이 완성되어간다. 오후로 접어들어 햇살이 더 포근해지자 960봉으로 이어진 능선에 눈이 내린다. 상고대가 녹으며 눈발처럼 떨어진다. 하얗게 맺힌 투명한 이미지들이 햇살에 찔려 맹렬히 고꾸라진다. 스스로의 운명을 미리 알았더라면 저리 황홀하게 몰락하진 못했으리라.

월악산 영봉의 거침없는 풍경.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해서 월악(月岳)이란 이름을 얻었다.

960봉을 내려서니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마애불이 햇살을 받아 환하다. 암벽에 새긴 13m의 불상 아래엔 무언가를 비는 여인들이 많다. 왕건에게 항복한 아버지 경순왕을 버리고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떠난 후 덕주공주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 마애불은 덕주공주가 생전에 빌었던 그 기도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덕주산성 동문을 내려서자 어디선가 향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산속으로 깃든다. 월악산에 달이 뜨면 낭떠러지 아래로 절명하는 잊혀진 여인이 있을 것 같은 느낌.

깎아지른 절벽에 서서 중원을 바라보라

베테랑에겐 수산리~중봉~영봉~덕주사 코스, 일반인에겐 덕주사~영봉~동창교 코스 강추

“월악산은 사람들이 얕잡아봤다가 큰 코 다치는 산이지요.”

그렇다. 가파른 계단이 많은 월악산은 산행이 힘들다. 등산깨나 했다는 이들도 무수히 늘어선 계단 앞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계단이 많은 것은 그만큼 가파르고 험한 바위가 많아서다. 그러나 산행 후에는 더 보람되다는 게 하재석(47)씨의 말이다. 그는 월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으로 15년을 이곳에서 근무했으며 한수면 송계리가 고향인 토종 월악산 사람이다.

하씨는 월악산의 매력으로 “깎아지른 절벽에서 충주호를 내려다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영봉에서의 경치가 최고이며 맑은 날에는 충주와 제천 일대가 다 보인다”고 한다. 그가 꼽는 월악산의 명품 코스는 두 가지다. 일반 등산객을 위한 코스로 덕주사를 들머리로 올라 영봉을 찍고 동창교로 내려오는 코스, 베테랑을 위한 코스로 수산리를 들머리로 중봉을 거쳐 영봉 찍고 덕주사로 내려서는 코스를 꼽는다. 체력을 안배한 코스다.

1 상고대가 하얗게 수놓인 하봉 우회길. 2 960봉으로 이어진 능선의 헬기장에서 본 영봉. 거대한 바윗덩이가 영봉이다. 3 덕주사 마애불.

“덕주사에서 영봉 가는 코스는 힘은 들어도 그리 지루한 코스는 아녜요. 수산리에서 올라오는 중봉 코스는 경관은 제일 좋죠. 근데 힘들어서 일반 등산객들한테는 무리고요. 전문산악회에서 온 사람들이 좋아라 하죠.”

그 밖에 소소한 장점으로 산불경방기간에도 연중 개방한다는 것과 덕주사·신륵사·지광사·세계사 등 주변 사찰에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산행길잡이

가파른 계단 많은 ‘악’ 소리 나는 산
중봉 길은 3~4월까지 잔설에 주의해야

수산리 산행 들머리는 보덕암이다. 버스 정류소가 있는 수산교에서 보덕암까지는 2km에 1시간 정도 걸리므로 자가용으로 보덕암 주차장까지 콘크리트 도로를 타고 가는 게 낫다. 길이 좁아 45인승 버스는 못 들어간다. 보덕암에서 영봉으로 이어진 길은 겨울철 잔설에 주의해야 한다. 북사면이라 3월에도 눈이 남아 있는 지역이며 녹지 않은 눈이 다져져 빙판길로 변하는 곳이 많다. 볕이 좋은 겨울날이라도 아이젠은 필수다.

가파른 험산이지만 국립공원답게 시설물이 잘 정비돼 있어 위험한 코스는 없다. 그러나 눈이 덮였을 때는 중봉에서 영봉으로 이어진 사면길이 희미한 편이므로 길 냄새를 맡는 데 신경써야 한다. 하봉은 우회하도록 길이 나 있으나 간간이 들어서는 이가 있다. 지난 10월에도 하봉으로 들어섰다가 등산인이 임시로 묶어둔 고정로프가 끊어져 사망한 경우가 있으므로 비법정길을 맘먹고 가고자 한다면 확보장비를 준비하든지 아니면 애초에 법정등산로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영봉은 거대한 알바위라 긴 계단을 올라야 정상에 닿는다. 내려갈 땐 올라온 계단으로 다시 내려간다. 정상에서 보면 동창교 갈림길 근처의 헬기장이 가깝게 내려다보이지만 암봉을 둘러가는 것이기에 한 시간은 가야 닿는다.

960봉에서 덕주사로 내려서는 길은 간간이 암릉도 보이고 마애불도 볼 수 있어 그렇게 지루한 편은 아니다. 덕주사부터는 포장도로가 나 있어 아래 도로까지 금방이다. 길은 전반적으로 계단이 많으므로 관절이 안 좋은 이는 신륵사를 들머리로 택하는 게 낫다. 신륵사~영봉 코스는 정상까지 거리가 가깝고 힘이 가장 덜 드는 코스다.

월악산은 잔설과 빙판길이 많고 영봉은 강풍이 부는 암봉이므로 보온옷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싸늘한 철계단의 난간을 마음껏 잡을 수 있도록 장갑도 필히 챙겨야 한다. 가민 콜로라도300 GPS로 확인한 보덕암과 영봉, 덕주사 코스의 실주행거리는 11.4km다.

교통 (지역번호 043)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날머리인 덕주사에 차를 세워두고 택시로 보덕암까지 가거나 보덕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덕주사에서 택시를 불러 차를 가지러 가야 한다. 월악산 인근의 택시는 일광택시(845-1881), 덕산개인택시(651-6631), 덕산택시(644-7779) 등이 있으며 덕주사에서 보덕암까지 요금은 2만5,000원 정도다. 택시가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므로 미리 예약을 해두는 게 좋다.

서울에서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를 경유해 송계계곡으로 오는 버스가 있다. 1일 8회(06:40, 08:40, 10:40, 12:40, 14:40, 16:40, 17:40, 18:40) 운행하며 3시간 소요에 1만3,000원. 다른 지역에서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충주가 기점이다. 제천의 월악산이지만 충주시내에서 더 가깝고 버스편도 많다.

충주에서 내송계행(송계 직행) 버스는 1일 5회(7:50, 10:45, 13:10, 15:45, 18:35) 운행하며, 동창교탐방지원센터 인근 정류소에서 충주로 나가는 시간은 08:52, 11:52, 14:37, 15:12, 20:07이며 2,900원에 50분 걸린다.

충주에서 송계행 버스는 수안보를 거쳐 오는 버스이며 송계까지 1시간20분이 걸린다. 충주에서 07:15, 08:30, 10:25, 11:30, 13:25, 14:40, 16:55에 출발, 송계에서 08:48, 09:58, 11:48, 12:58, 14:48, 16:08, 18:18에 나간다. 요금은 3,900원.

송계에서 제천 가는 버스는 1일 6회(07:00, 09:10, 11:10, 12:50, 16:30, 17:50) 있으며 1시간20분 걸린다.

숙식

수산리 쑥갓마을에는 인가가 많으나 숙박업소는 없다. 송계리 동창교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숙소와 식당이 많으며 덕주사 앞에도 숙박업소가 있다. 덕주골에는 덕주골산장(010-7455-1034)의 송어회가 맛나고, 그 외의 식당으로 여주박상궁맛집(651-1949), 덕주펜션민박(011-482-9611), 월악산토박이식당(651-5207), 월송가든펜션(651-6478), 월악산펜션(644-1118) 등이 있다. 송계리 동창교 부근에는 월악산휴게소(653-7801)가 가장 소문난 맛집이며 펜션과 슈퍼를 겸하고 있다. 특히 두부버섯전골(6,000원)이 저렴하고 푸짐하다.

기왕 1박하고 간다면 인근 수안보온천에 들러 피로를 녹이는 게 좋다. 온천단지 내에는 호텔, 장급여관, 콘도, 대중목욕탕 등 30여 개의 온천업소가 있다.

1 월악산휴게소의 두부버섯전골. 2 미륵리마애석불.

명소

덕주사 마애불과 미륵리마애석불

덕주사 동쪽 암벽에 새겨진 13m 높이의 불상으로 보물 406호다. 살진 얼굴과 간략한 조형수법, 입체감이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등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불상 조성 기법에 힘입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덕주사는 신라 말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중원미륵사지의 석불은 마의태자가 누이 덕주공주를 만나러 왔다가 세웠다고 한다. 보물 96호이며 하늘재 서쪽 상모면 미륵리에 있다.
출처 월간산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구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