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1659~1701)의 아버지는 부유한 역관이지만 어머니가 여종 출신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
터 신분이 천민이었다. 자색이 워낙 빼어난데다 총명했기 때문에 권력을 잡고 있던 남인들은 그녀
를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나인으로 천거했다. 옥정은 이내 사랑하던 인경왕후를 잃고 정에 목말라
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었다. 그러나 옥정이 후궁의 첩지를 받기도 전에 그녀를 남인
들의 간자라고 본 숙종의 모후 명성대비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났다. 명성대비는 왕실의 안위를 위해
서둘러 서인의 딸 민씨를 숙종의 계비(인현왕후)로 맞아들였다.
옥정이 궐에서 쫓겨나자 정이 많은 자의대비는 인조의 5남 숭선군에게 사람을 보내 그녀를 돌봐달라
고 당부했다. 숭선군은 부인에게 그 일을 맡겼고, 부인 신씨는 옥정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옥정의
오라비 장희재에게도 미모의 여종을 첩으로 내주었다. 신씨는 옥정을 처음 본 순간 숙종이 결코 그녀
를 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게다가 개국 이래 승은을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둔 전례가 없
었기 때문에 옥정은 미구에 입궐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숙종 9년, 명성대비가 죽자 숙종은 즉각 옥정을 불러들였다. 모후의 눈치를 보느라 말 한 마디 못했지
만, 숙종은 옥정의 나긋나긋한 성품과 전신에 착착 감기는 교태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서인들은 온갖 모함으로 옥정을 쫓아내려 했지만, 숙종은 재위 12년 12월 옥정을 숙원(종사
품)에 봉하는 어깃장을 놓았다. 「여인열전」의 저자 이덕일은 장희빈의 악행에 대한 모든 기록은 서
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제하에 이 章을 쓰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극에
서 보던 내용과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장숙원은 곧 인현왕후와 경쟁에 나섰다. 『숙종실록』 재위 12년 12월 10일 조의 기록이다.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어느 날 임금이 그녀와 교접하려 하자 장씨
는 내전(인현왕후의 거처) 앞으로 달려와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하고 외쳤다. 중전이 어떻게 나오는
지를 살펴보려는 계교였다. 중전은 이에 말려들지 않고 낯빛을 가다듬은 채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
교를 받들어야 하거늘 어찌 이리도 방자하게 구느냐!’ 하고 꾸짖어 돌려보냈다. 이후 장씨는 중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건방진 태도를 보이며 공손하지 않았다.>
인현왕후는 서인을, 장숙원은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니 얼마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가문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장숙원은 왕후의 상대가 못 되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맞대결에서는 얻을
게 없음을 깨달은 인현왕후는 장숙원보다 자색이 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서인 영수 김수항의 손
녀를 후궁으로 들였다. 김씨는 입궐과 동시에 귀인(종일품)에 봉해져 장숙원보다 품계가 높았지만,
숙종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신분이나 서열이 아니라 오직 장숙원만 가지고 있는 비기(秘技)였다.
그것은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고난 무기였다.
서인들도 장숙원의 타고난 비기를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온갖 모함으로
숙종과 장숙원 사이를 이간질해봤자 백약이 무효일 터였다. 심지어 숙종 13년 6월에 발생한 수해를
장숙원의 요망함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뜨려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제 발등을 찍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참에 숙종 14년 10월, 장숙원이 덜컥 아들을 낳았다. 첫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은 하늘에 닿았다.
숙종은 장숙원을 즉각 소의(정이품)에 봉했다. 서인들이 발칵 뒤집혔다. 당황하면 자충수가 튀어나오
는 법, 서인들은 궐문을 지키는 사헌부 금리(禁吏)들을 사주하여 장소의의 산후조리를 위해 입궐하는
모친 윤씨의 가마를 뒤집어엎고 욕을 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천인(賤人)이 함부로 가마를 탄 채 입궐
한다고 핍박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숙종은 대노했다. 왕자 탄생 3개월 만인 재위 15년 1월, 숙종은 문무백관들을 모아놓고
장숙원이 낳은 왕자를 원자에 책봉한다고 선언했다. 반대가 빗발쳤지만 숙종은 반대하려는 자는 즉
시 궐을 떠나라며 서인들의 입을 봉했다. 그리고는 종묘에 나아가 열성조들에게 원자를 책봉했다는
고묘(告廟) 의식까지 마쳤다. 고묘를 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조치라는 뜻이다. 대전으로 돌아온
숙종은 장소의를 치하하고 그 자리에서 왕비 다음으로 높은 빈(정일품)에 봉했다. 장옥정이 장희빈
또는 희빈 장씨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희빈(禧嬪)에서 희는 장옥정을 가리키는 고유명
사, 빈은 내명부 품계를 나타내는 일반명사다. 숙종은 희빈 외에도 숙빈(영조의 생모)을 비롯하여 희
대의 호색한 치고는 비교적 적은 편인 총 6명의 후궁을 두었다.
고묘 15일 후, 조선 500년을 통틀어 가장 당쟁을 악화시키던 서인 영수 송시열이 나서서 원자 책봉을
거두어달라고 상주했다. 그는 이번에도 ‘송나라 철종’ 운운하며 사대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숙종
은 송시열이 서인들의 득세를 믿고 감히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를 제주도로 유배한 뒤
곧바로 사약을 내렸다. 이어 숙종은 국정에 걸림돌이 되는 서인들을 모조리 내쫓고 남인들을 대거 등
용했다. 숙종 조에 일어난 최대 정변 기사환국이었다.
장희빈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궁극적인 꿈은 남인들의 집권이 아니라 자신이 국모가 되는
일이었다. 장희빈은 베갯머리송사로 꾸준히 숙종을 설득했다. 숙종도 남인정권 아래 서인인 인현왕
후를 그대로 두면 보위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장희빈의 설득에 차츰 동화되었다. 숙종은 어전회의에
서 왕비가 장옥정을 숙원으로 들였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투기해왔다며 왕비의 자질을 거론했다.
『숙종실록』에는 숙종이 사례로 든 왕비의 투기 사실이 여러 가지 기록되어 있다. 재위 15년 5월 4
일, 숙종은 끝내 인현왕후를 폐위한 뒤 궐에서 내쫓았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일본.중국 빠진 관함식도 기대에 못미치는 초래한 국가행사 였지만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절차상 정당성을 지키지 못해 시위대의 사면을 검토하겠다는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국가 안보에 관련한 중대한 방위산업은 그 명분과 정당성이 사전 검토 되었고 절대적인 국책으로 존중 되어야 합니다. 온갖 시위대를 의식하면 국력이 제대로 유지 될수 없기 때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