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감사미사를 올리다.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혹독한 천주교 탄압을 했던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신자였다면 믿을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였다.
조선에 포교활동을 하던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의 지도층인 왕실에 접근하기 위해 고종의 유모인 박말따(세례명 박마르타)를 포섭하고, 박말따를 통해 여흥부대부인 민씨에게 접근하여 포교에 성공한 것이다.
고종이 즉위했을 때 궁궐에서 감사미사를 올렸다는 말이 있다. 이런 민씨의 행동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왜 갑자기 마음이 돌변하여 천주교 신자 10,000여명을 죽이는 병인박해를 일으킨 것일까?
‘상가집의 개’ 흥선군 이하응
조선왕조 말기 안동김씨, 풍양조씨 등 세도가들의 등살에 전주이씨 왕족들은 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똑똑해 보이는 왕족들은 이런저런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당해야 했다.
왕족의 수난시대인 세도정치기에 태어난 흥선군 이하응은 세도가의 눈에 나지 않기 위해

파락호 생활을 하며 살았다. 세도가의 잔칫집에 흥선군이 찾아가면, 전 같은 음식을 던져준다
. 땅에 떨어진 전의 흙을 털어내고 흥선군은 먹었다. 이런 흥선군을 사람들은 ‘궁도령’ ‘상가집의 개’라며 놀려 먹었다.
흥선군이 이런 갖은 수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선군 이하응에게는 자신의 아들을 기필코 왕위에 올려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되찾겠다는 꿈이 있었다.
이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경기도에 있던 자신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이대에 걸쳐 왕이 난다는 충청도 예산의 명당자리에 이장을 하고 자신의 꿈을 키운다.
당시 조선팔도에서 난을 제일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던 흥선군은 난을 그리면서 때를 기다린다. 또 흥선군의 난 그림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흥선군과 신정왕후와의 거래
철종이 시들시들하여 곧 죽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흥선군은 당시 궁궐의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에게 달콤한 제안을 몇 가지 한다.
당시 12살 이었던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위에 올리면 엄마뻘인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실권을 잡을 수 있을 거라 한다. 또 고종의 왕비를 신정왕후 조씨 가문에서 간택하기로 한 것이다.
비명에 간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이런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인다.
철종의 병상을 떠나지 않고 지키던 신정왕후는 철종이 붕어하자 옥쇄를 치마폭에 감싸고 나와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의 26대 왕으로 선포한다.
이렇게 해서 흥선군은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 대원군, 흥선대원군이 된 것이다.
서양난리가 나면 목에 십자가를 걸어야 한다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1863년을 전후한 19세기 중반은 서양세력이 동쪽을 점령해오는 서세동점의 시기로, 수시로 이양선이 조선 근해에 출몰해 통상을 요구하던 시기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 이미 중국은 1,2차에 걸친 아편전쟁의 패배로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었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획득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은 서양 오랑캐와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야 되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민가에서는 곧 서양 난리가 나는데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풍문이 돌고,민심은 흉흉해진다. 이런 어수선한 형국에 고종이 즉위를 한 것이다.
조불영 삼국동맹 추진
고종이 즉위하고 1년여만에 정권이 안정되기도 전에 조정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 일어난다. 두만강 국경도시인 경흥에 러시아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 던 것이다. 통상거부는 곧 전쟁이라 생각했던 조선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해법을 제시하는데 조불영 삼국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신들 본국의 나폴레옹3세에게 조선의 사정을 이야기하면, 나폴레옹3세는 또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의 협조를 받아 조불영 삼국동맹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크림전쟁, 아프칸전쟁을 통해 그 동안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번번히 좌절시켰다. 조선을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라도 영국은 조불영 삼국동맹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불영 삼국동맹 추진 제안에 흥선대원군은 흔케히 허락한다.
그 동안 눈치 보며 포교활동을 했던 선교사들은 신이 났다. 선교사들의 궁궐 출입이 잦아진다.
집권 초 불안한 정치기반
러시아가 요구한 통상여부의 답변 기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삼국동맹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천주쟁이들이 수시로 궁궐에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면서 흥선대원군의 정적들이 이를 꼬투리 잡아 들고 일어날 조짐마저 보인다. 여기에 이명복을 고종으로 만들어 준 신정왕후 마저 반대하고 나서면서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러시아의 침략위기보다 더한 정치적 위기에 몰린 것이다.
‘병인박해’ 조선을 순교의 땅으로 만들다
위기에 처한 흥선대원군은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천주쟁이를 빠짐 없이 주토하라’는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명을 받은 흥선대원군은 조선천지를 피로 물들이면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난다.
먼저 조선에 와있던 프랑스 선교사 11명 중 9명을 잡아들여 목을 자르는 군문효수를 시킨다.
그리고 일반 천주교 신자 색출을 위해 오가작통법이 시행된다. 5가구를 하나로 묶어 그 중 한집만 걸려도 나머지 네집이 같은 죄를 뒤집어 쓰는 오가작통법으로 무고한 백성들까지 광풍처럼 몰아치는 칼바람을 피하지 못한다. ‘너 천주쟁이지’ 하면 그냥 목이 달아난 것이다.
이렇게 병인박해 때 8,000여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러는 백성들이 천주교신자로 몰려 희생된 것이다.
이 병인박해를 서양의 천주교 역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순교의 땅’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박해였던 것이다.

흥선대원군 ‘쇄국의 강’을 건너다
당시 조선사회는 개항과 개화, 쇄국과 척사라는 두 흐름이 사회전반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다. 이런 긴장감을 단번에 날려버린 것도 병인박해다.
조선의 대외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1866년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강”을 건넜다라고 표현을 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을 죽이면, 프랑스 애들이 쳐들어 올 것을 뻔히 알고도 병인박해를 일으킨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병인박해를 일으킨 것이고, 조선은 쇄국이라는 자물쇠를 덤으로 하나 얻은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
신유박해, 기해박해 또한 천주교 탄압을 빙자한 정적 탄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천주쟁이로 몰려 수많은 사람들이 제명에 못살고 죽은 것이다.
현대사에서는 빨갱이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아직도 좌파 빨갱이 타령이다. 또 좌파 타령에 놀아나는 자는 뭔가?
이명박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가 찾아오면 대북 불장난도 능히 일으킬 인사다. 방송장악을 통해 국민을 세뇌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자다.
한심하다. 우리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다. 역사의 퇴보다.
우리 삶도 발전되어야 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도 발전되어야 한다.
문화의 힘
백범 김구 선생은 오래 전 이미 대한민국이 나아갈 바를 알려주지 않았는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 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시 보아도 참으로 명쾌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문화강국 대한민국!’ 이름만 들어도 설레지 않는가?
꾸준함이 혁명이다
정기훈의 역사이야기 http://cafe.daum.net/abia
아래 동영상은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병인박해 인강자료입니다.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