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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설화에는 온조 시조설과 비류 시조설이 있다. 소서노(기원전 66~ 기원전 6)는 그 중 비류
를 시조로 본 『삼국유사』에만 등장한다. 정사인 『삼국사기』는 온조 시조설을 채택했기 때문에
소서노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2006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주몽》은 소서
노를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부각시켰는데, 야사에 나오는 짧은 소서노 얘기로 어떻게 그만한 각본을
썼는지 작가의 창의력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소서노는 졸본의 토호인 연타발의 딸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결혼했다. 남편은 아들 비
류와 온조가 어릴 때 요절했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 해모수의 서자인 주몽이 소서노 앞에 나타났
다. 소서노가 29세, 주몽이 8세 연하인 21세 때였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인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2050년 후 드라마 《주몽》에
서 소서노 역을 맡았던 한혜진은 축구선수 기성용과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기성룡 역시 한혜진보
다 8세 연하다. 참으로 운명적인 만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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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과 결혼한 소서노는 졸본의 5부족 통합을 당면과제로 인식했다. 졸본의 토호들은 떠돌이 주몽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지만 소서노는 밀고 나갔다. 오래지 않아 명석하고 결단력 있는 주몽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특히 주몽의 마술(馬術)과 궁술은 발군이었다. 주몽은 우태의 자식인 비류와 온
조를 친자식처럼 돌보며 부족 통합에 앞장섰다. 이를 두고 「여인열전」의 저자 이덕일은 토착자본
가 소서노가 전문경영인 주몽을 영입하여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고구려가 한참 기반을 잡아가던 기원전 19년, 각중에 주몽의 맏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청년 유리가 짠
~! 하고 나타났다. 주몽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임신 중인 부인 예씨를 부여에 남겨두고 도망을 쳤었
는데, 유리라는 청년이 주몽이 예씨에게 건네주었던 비표를 가지고 나타나자 주몽은 그를 장자로 인
정하고 태자에 책봉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주몽이 급서하고 유리가 보위에 오르자 소서노와 두 아
들 비류‧온조는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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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서둘러 고구려를 떠났다. 소서노의 참모들은 물론 부여에서 주몽을 따라
왔던 장수들도 일제히 뒤를 따랐다. 졸본에서부터 소서노를 따라왔던 수백 명의 백성들도 장래가 불
투명한 망명길에 동참했다.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진입한 소서노 일행은 몇 달을 남행한
끝에 현재의 중랑천을 만났다. 수량이 풍부하고 주변에 개활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는 강변은 정착하
기에 제격이었다. 현 도봉구 일대다.
정조 때 정약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삼각산 동쪽 기슭에서 옛 성터를 찾아냈는데, 이
미 발굴되어 있는 하남위례성의 이름에 빚대 그 일대를 하북위례성이라고 명명했다. 그 지역은 예로
부터 고현(古縣)이라는 지명과 함께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었다. 백제는 상당
기간 하북위례성에 도읍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하남위례성은 옛 마한의 도읍이었다는 학설이 유
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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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자 비류가 반기를 들었다. 새 나라를 세우려면 모름지기 바닷가를
터전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간곡하게 만류해도 듣지 않자 소서노는 백성들 가운데 희망자를
비류에게 딸려 보냈다. 온조는 하북위례성을 쌓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기원전 18년 5월 부여 시
조인 동명왕의 사당을 세워 고유제를 올리고 개국을 선포했다. 중국사서 『위지』「백제 조」에 보
면 백제 지도자들이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왔다’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닷가를 찾아 떠났던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터를 잡았다가, 물이 짜고 쓸데없는 개펄이 많아 도저
히 살 수 없다며 보따리를 싸서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소서노와 온조는 비류와 백성들을 따뜻하게 맞
아들여 각자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위례성의 백성들이 그새 부유하고 안락하게 사는
모습을 본 비류는 자신의 단견에 쪽이 팔려 이내 화병으로 죽었다. 뒤를 이어 소서노도 온조왕 13년
(기원전 6) 노환으로 죽었다. 향년 60세의 장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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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네들이 쓴 正史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는 주몽, 백제의 건국시조는 온조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
제에 있어 두 나라를 건국한 인물은 소서노였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
론 중국 측 사서의 기록을 종합해 봐도 두 나라를 건국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소서노다.
『삼국유사』에서 소서노를 발견하여 널리 알린 분은 신채호 선생이다. 선생은 소서노가 마한 왕과
소통하며 비류가 다스리는 미추홀과 온조가 다스리는 백제의 공통왕으로 군림했다고 주장했다. 신채
호는 소서노가 죽은 뒤 형제가 갈라졌다고 했는데,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해석이다. 어떤 해
석이 맞든 소서노가 위대한 여걸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멀리서만 찾던 단풍구경을 가만히 살펴보니 주변 가까이에 가득 입니다. 아파트 조경의 고운 색채가 선명하게 가까이 있고 참으로 아름답고 그리고 풍요로운 풍경 입니다. 저녁먹고 산보하는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활기찬 한주 시작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