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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實名小說 연구
유 인 순
1. 들어가는 글
“이상해요. 지금 저 꽃을 보고 있는데 불현듯 그 사람 생각이 나는 거예요. 작가 김유정 말이에요.”
그는 황당했다. 그날 단 한 번도 화제에 올리지 않았던 김유정을 절벽 끝에 매달려 느닷없이 불러내다니!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김유정은 죽지 않았습니다.”
구절초 꽃을 바라보며 김유정이 몇 살에 죽었느냐고 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김유정은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유는 김유정의 소설이 오늘도 읽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최초의 작품부터 自若한 一家風을 가졌고, 소설을 쓰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萬難과 싸우며 篤實一路이던 유정’ - 자연인 김유정은 1937년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경, 경기도 광주의 누님 집에서 죽었다. 그러나 소설가 김유정은 죽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오늘도 읽히고 있고, 나아가 그는 김유정이라는 實名과 함께 그를 아끼는 知人들, 또는 문단 후배들의 작품 속에서 다시 태어난 까닭이다.
김유정의 실명(實名)과, 삶의 자취가 소설 작품화된 것은 지금까지 9편 정도에 이른다. 그의 생전에 탈고되어 생전에 발표된 것이 3편, 생전에 탈고되고 사후에 발표된 것이 2편, 사후에 탈고되고 사후에 발표된 것이 4편에 이른다. 김유정 實名小說 뿐만 아니라 장르를 달리한 유정 實名의 作品化도 계속될 전망이다.
본고에서는 김유정이 實名으로 등장한 소설들을 대상으로, 이들 작품 속에서 작가 김유정이 어떤 모습, 어떤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 아울러 지금까지 발표된 김유정 실명소설들이 보여주는 특성과 문제점까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왜 실명소설이 쓰여지고 있는가, 실명소설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각오를 다지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실명소설의 읽기를 통해 ,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논지의 전개는 편의상 유정 생전, 사후 知友가 쓴 김유정 실명소설, 유정 사후 문단후배가 쓴 실명소설의 순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유정 생전 문단 知友가 쓴 김유정 실명소설
한 사람의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작가적 재능과 열정, 노력이 직접적 동인이 될 것이지만, 작가로서의 소양을 미리 알아보고 격려해 주는 존재와의 만남도 중요하다. 김유정과 안회남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안회남은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아들로 1923년 김유정이 휘문고보에 진학했을 때 같은 반에서 사귀게 된 급우이다. 안회남은 1931년 단편 <髮>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 이후 유정에게 창작생활을 권유하고 유정의 작품을 문단에 소개하는데 일조했다. 그는 30년대 전기에 주로 신변, 가정사를 제재로 한 작품을 많이 썼는데 유정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향>과 <우울>, <명상>에서이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 김유정이라는 실명이 완벽하게 나타난 것은 <명상>에서이고 <고향> 과 <우울>에서는 ‘소설가 김군’으로만 언급된다.
먼저 1936년 3월에 발표된 <고향>을 보기로 하자. 이 작품에서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방문, 옛친구들과 아버지에 대한 회고, 학창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서 김유정임이 확실한 ‘소설가 김군’에 대한 부분이 한 번 나온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하게 된 것은 은퇴자 아버님이 오직 하나 나를 학교에 넣어서 교육시키기 위하심이었는데 나는 학교를 중도에서 퇴학하였으며, 그때 아직도 어린 나는 마지막 바칠 한 학기분의 수업료를 술값으로 없애버렸고, 그후 이 막걸리에 대하여서는 소설가 김군과 충분히 수업하였던 것이다. (밑줄- 필자)
역시 ‘소설가 김군’이라는 일반명사로 김유정이 등장한 안회남의 작품은 36년 4월에 발표된 <우울>에서 이다. 이 작품에서 김유정은 안회남에게 ‘돈 10원만 취해달라고’하는 불운한 그러나 이미 인정받은 ‘훌륭한 소설가’로 나온다. 안회남은 김군이 어렸을 적에는 부유한 집의 자손이었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다는 것,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운이 몰락하고 인제 호구하기에도 어렵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무서운 폐병까지를 겸하여 신음’하고 있음에 안타까와 한다.
.......나에게서 돈이 나오면 하려고 했었는지 김군은 요새 머리도 깎지 못하고 푸수수, 모자도 몇 해가 지난 것을 그대로 눌러 쓰고 있었다. 그 행색이 초라하였던 것으로 하여 요 전날 어느 병원엘 가서 푸대접 받은 것을 그가 이야기 하였을 때, 그 때가 쪼르르 흐르는 두루마기 다 해어진 구두, 사실 저 모양으로 그가 종로 바닥엘 돌아다닐 때 누가 우리 문단의 유명한 인물로 짐작이나 하랴 나는 생각하면서 자고 이래 모든 천재들이 가난과 불행에 대한 일화를 마음으로 헤어 보았었다. 그가 병이 중하여감에도 돈이 없어 약을 쓰지 못하였다. 어느 한의 한 분이 약값은 받지 않을 터이니 약은 얼마든지 쓰라고 말하였으나 남의 귀중한 약을 돈도 안 주고 갖다 쓰려니 그 미안한 생각을 하느라고 더욱 병에 좋지 못한 것 같아서 그도 못한다고 그는 말하였었다. 학교엘 다니는 조카딸이 있는데 그 아이 월사금 때문에 걱정이라고 하길래, 아하 참 그전에 우리의 심부름을 해주던 계집애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인제는 커다란 색시가 되었겠구나 생각하며, 요새 호화로운 것을 좋아하는 여학생들 속에서 월사금도 내지를 못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소녀의 모양을 그리어보았다.
이미 등단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던 작가 김유정, 그 김유정의 병들고 초라한 모습, 그리고 유정의 조카딸 김 진수에 대한 이야기까지가 포함되어 있다. 가난한 작가로 생활을 이끌어가던 1인칭 화자는 결국 빚을 얻어 그 가운데 일부를 가지고 ‘신당리 사는 김군을 찾아’ 간다. 전차를 타고 문밖을 지나 김유정의 찾아갈 때 ‘ 언덕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함석 지붕 거적담의 신당리 풍경을 보고는 참 빈촌이로구나’ 한다. ‘그날 밤 과연 눈이 내리는데 그의 병에 해로울 줄을 번히 알면서도 우리는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우울하여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다’ 하는 대목으로 보아 이 글은 1935년 초겨울 내지는 겨울에 탈고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회남의 작품에서 김유정의 실명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1937년 1월에 발표된 <명상>에서이다. 1인칭 화자는 자식을 키우게 되면서, 그 옛날 자신에게 사랑을 부어주셨던 선친을 회상하고, 선친 안국선이 임종하시던 날도 김유정과 종일 한강에 나가 헤엄을 치다가 임종에 임하지 못했던 회한, 그리고 휘문고보 4학년에서 낙제를 하고 자퇴원서를 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김유정의 실명이 거론된다.
그러나 그후 나는 김유정군과 함께 4학년에서 낙제를 하였으며 혼자서 한 학기 분의 월사금을 新町遊廓에 가서는 소비를 하고 학교에다 퇴학원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밑줄- 필자)
안회남의 작품들 <고향> <명상>에서 김유정의 휘문고보시절의 모습이 잠시 보인 한편 <우울>에서는 1935년 초겨울에서 겨울에 이르는 기간, 김유정의 폐결핵과 가난에 찌든 모습이 보인다.
작가로서 문단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는 유정의 모습을 작품화 한 것은 李箱의 소설에서이다. 30년대의 요절한 천재로서 李箱과 金裕貞의 교우관계는 1935년 봄 무렵부터라는 것이 조용만의 증언이다. 李箱은 김유정을 신춘문예 당선 축하회에서 만난 이래 급속히 가까워졌고, 구인회의 입회 과정에서도 이상이 ‘우격다짐으로 이태준을 설복시켜 가입시킨’다. 그리고 [시와 소설]의 창간호에 김유정의 <두꺼비>가 실렸을 때 이상은 이 소설을 걸작이라고 떠들고 다닐 정도로 김유정을 좋아했다.
李箱은 <김유정-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집필하면서 그 서두에서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의 성격이 比較交友學的 측면에서 다룬 것임을,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김유정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는데,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들이 자신들에게 무례한 상대방 앞에서 속으로 노여움을 삭이고 참아내는 성격이라면, 김유정은 직선적이고 행동적이며 鬪士的 氣質로 뭉쳐진 사람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帽子를 홱 벗어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敏捷하게 탁 벗어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敵의 벌마구니를 발길로는 敵의 사타구니를 擊破하고도 오히려 行有餘力의 鬪士가 있으니 金裕貞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김유정이 당시에 썼었던 낡은 모자와, 유정이 술에 취했을 때의 모습에 대해서도 한 편의 생생한 그림을 보여준다.
“ 벙거지! 벙거지! 옳습니다”
태원도 회남도 유정의 모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벙거지라고밖에!
엔간해선 술이 잘 안 취하는데 취하기만 하면 딴 사람이 되고 만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아느냐 하면-
보통으로 주먹을 쥐이고 쓱 둘재 손가락만 쭉 펴면 사람 가리키는 신호가 되는데 이래가지고는 그 벙거지 차양 밑을 우벼파면서 나사 못박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허릴 없이 젖먹이 곤지곤지 형용에 틀림없다.
이상은 자신이 창문사에 근무하고 있을 당시 방문해온 김유정은 평소 말이 없고 뚱한 사람인데 술집 같은 곳에서 일단 술에 취하면 ‘강원도 아리랑 팔만구암자를 내뿜는’데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부르는 강원도 아리랑이 ‘바야흐로 天下逸品의 경지’라고 감탄한다. 이상은 이어서 어느 날 술집에서 ‘춘원의 문학적 가치’ 운운하는 문단친구들과의 토의가 그만 싸움으로 번진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여기에서도 김유정의 그 行有餘力의 鬪士적인 행동, 그 대책 없이 직선적이고 행동적인 성격을 그려준다. 한편 이 작품의 말미에서 유정의 폐결핵과 정릉리 어느 절간으로 정양간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유정은 폐가 거의 결단이 나다시피 못쓰게 되었다. 그가 웃통 벗은 것을 보았는데 崎嶇한 瘦身이 나와 비슷하다. 늘
“김형이 그저 두 달만 약주를 끊었으면 건강해지실 텐데”
해도 막 無可奈何더니 지난 칠월달부터 마음을 돌려 정릉리 어느 절간에 숨어 정양중이라니 추풍이 참起에 건강한 유정을 맞을 생각을 하면 나도 독자도 함께 기쁘다.(밑줄-필자)
<김유정-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은 김유정과 이상이 사망한 이후인 1939년 5월 [청색지]를 통해서 발표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김유정이 결핵이 심해져 정릉의 어느 절간으로 정양간 1936년 7월 이후, 가을 바람이 차츰 일기 시작한 초가을쯤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유정이 지닌 예술가적 특성으로서의 교만과 고집, 평소의 뚱한 성격과 술이 취했을 때 젖먹이의 곤지곤지 형상을 하는 투의 귀여운 버릇, 술집에서 끈적끈적한 소리로 부르는 강원도 아리랑, 술김에 친구들과 싸움이 붙었을 때의 좌우 살피지 않고 덤벼들어 싸우는 투사적인 성격, 폐결핵으로 이미 결단이 나다시피 수척해진 건강상태 등등, 유정의 프로필을 적확하게 그려낸다.
1939년 3월 [문장]지를 통해 발표된 이상의 <失花 >에서는 유정이 사망하기 석 달 전의 모습이 보인다. 작품은 전체 9장으로 구성된다. <실화>에서 대개 홀수 장은 작품의 공간이 서울이고 짝수 장은 도오꾜이다.
이야기는 1936년 12월 23~24일까지의 일본 도오꾜를 공간으로 전개된다. 도오꾜로 유학온 이상은 12월 23일 친구인 C의 집에서 C의 내연녀인 C양과 마주 앉아 있다. 이상은 C양 앞에서 C양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의 또 다른 자아는 두 달 전의 서울, 10월 23일 저녁부터 24일 이른 새벽까지 그의 아내 연이와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상의 아내 연이는 이상과 결혼하기 전 S와 깊은 관계였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연이는 남편인 이상을 기만하고 S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비밀을, 10월 23일 저녁부터 10월 24일 동이 터올 무렵까지, 이상이 연이를 다구치자 이에 S와의 관계를 털어놓는다. 이에 절망한 이상은 10월 24일 일찍 김유정을 찾아가 작별을 고하고 만류하는 연이를 두고 동경으로 떠난다.
<실화>의 6장에서 이상은 C양이 준 흰 국화를 갖고 나와 동경의 신죽구 거리를 헤메면서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들 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또 정지용의 싯구를 떠올린다. 김유정은 제 7장에서 나온다. 서울을 떠나 동경으로 오던 날, 이상은 유정을 찾아가 작별을 고한다.
밤이나 낮이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우리라. 그러나 兪政아! 너무 슬퍼하지 말라. 너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느니라.
이런 紙碑가 붙어 있는 책상 앞이 유정에게 있어서는 생사의 岐路다. 이 칼날같이 슨 한 地點에 그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면서 오직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울고 있다.
“喀血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痔疾이 여전하십니까?”
“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안개 속을 헤메던 내가 불현드키 나를 위하여는 마코- 두 갑, 그를 위하여는 배 십전어치를, 사가지고 여기 유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幽靈같은 風貌를 韜晦하기 위하여 裝飾된 茂盛한 花甁에서까지 石炭酸 내음새가 나는 것을 知覺하였을 때는 나는 내가 무엇하려 여기 왔나를 追憶해 볼 기력조차도 없어진 뒤였다.
“信念을 빼았긴 것은 健康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李箱兄! 兄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 겨우- 오늘이야! 겨우- 인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밤으로 치워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妖物에게 負傷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一期로 하는 不遇한 天才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 이 神聖不可侵의 찬란한 情死! 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그렇지만 나는 臨終할 때 遺言까지도 거짓말을 해 줄 決心입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풀어헤치는 유정의 젖가슴은 草籠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斷末魔의 呼吸이 서글프다.
“ 明日의 希望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유정은 운다. 울 수 있는 외의 그는 온갖 표정을 다 忘却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 兪兄! 저는 來日 아침 車로 東京 가겠습니다”.
“..............”
“또 뵈옵기 어려울걸요”
“...................“
그를 찾은 것을 몇 번이고 後悔하면서 나는 유정을 하직하였다. 거리는 젖었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생전의 유정과 이상의 마지막 만남이기에, 이상의 뇌리에 각인된 유정과의 작별의 장면을 전문 인용해 보았다. 작품에서는 裕貞이 아니라 兪政으로 표기되어 나오지만, 이는 작가가 만든 소설적 장치일 뿐이다. 폐결핵과 치질로 쇠약해져 유령과 같은 모습의 유정. 방안의 꽃병에서조차 결핵균의 전염을 막기 위해 뿌려진 석탄산 냄새, 앙상한 유정의 벗은 몸통. 신념도, 건강도 피안이 되어버린 이제는 오직 죽음을 기다릴 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울음으로밖에는 더 이상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없는, 이미 死神의 포로가 되어 있는 김유정. 그 김유정의 모습이, 이슬비에 젖은 12월 23일 도오쿄 거리를 방황하는 이상의 눈앞에 펼쳐진다. 도오쿄의 밤 거리를 헤메다니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12월 24일의 午前 一時. <실화> 제9장에서 이상은 12월23일 아침에 서울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떠올린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로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兪政’
건축기사 출신의 이상의 작품은 시작품 <오감도>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실화>에서도 그 구성에서 정밀한 대칭 또는 대립구조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1~9장까지의 서사 전개는 홀수 장-서울, 짝수 장 도오쿄로 나뉘어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두 곳의 공간을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특이한 공간체험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상이 유정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은 언제일까...... <失花>가 대개 實話를 토대로 한 것으로 보았을 때, 이상이 유정과 작별한 날은 1936년 10월 24일로 추정된다. 한편 작품 <실화>를 토대로 추정하면 1936년 10월 25일경이지만, 실은 10월 24일이 아닐까. 그래야만 <실화>의 대칭구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까닭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39년 3월 [문장]지에서지만 이 작품이 창작된 것은 1936년 12월 24일 이후,1937년 2월 12일 이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무렵 이상은 건강이 매우 쇠약해진 상태였고, 2월 12일에 사상불온자로 일경에 구속되어진 까닭이다.
3. 유정 사후 문단 知友가 쓴 김유정 실명소설
유정 사후에 작품화된 김유정 실명소설들에는 안회남, 그리고 유정과 같은 구인회 일원이었던 조용만들이 기억에 의해 재구성한 작품이 있다.
김유정 사후 제일 먼저 나온 김유정 실명소설은 1939년 10월 [문장]을 통해 발표된 안회남의 <謙虛- 김유정전>이다. 이 작품의 말미에는 원고의 퇴고일자가 7월 14일로 밝혀져 있다. 유정 사후 2년하고 석 달여 만이라 유정에 대한 안회남의 기억이 비교적 생생한 때에 작성되었다는 것, 무엇보다도 안회남이 ‘유정이 남기고 간 것, 많은 유고와 연애편지 쓰다 둔 것과 일기, 좌우명, 사진, 책 이런 것들을 전부 내가 맡아서 보관하고 있다’라는 언급에서 작품이 지닌 신빙성에 우선권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겸허- 김유정전>에서 현저한 것은 유정의 전기적 사실관련의 자료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회남이 유정과 만나기로는 휘문고보 1학년 때이지만 친밀해진 것은 3학년부터이고, 두 사람 모두 결석이 잦았다는 것, 두 사람이 친해진 것도 실은 결석이 유난히도 잦은 서로에 대한 탐색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서로의 집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는 것, 두 사람이 같이 학교 대신 취운정이나 남산으로 돌아다녔다는 것, 유정은 본래 부유한 집안의 자손이었으나 조실부모하고 형님과 함께 살았다는 것. 유정의 형님은 술주정뱅이에 난봉쟁이로 집안에까지 여자들을 끌어들여서, 회남이 유정의 실제 형수를 알아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는 것, 유정은 바로 그와 같은 집안의 불화 때문에, 형님에 대한 반항과 투쟁심, 그리고 소년시기에 자기자신만의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하여 학교를 자주 결석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하고 안회남은 소년시절 유정의 일탈된 생활태도를 이해해 보려고 한다.
한편 안회남은 유정이 일찍 여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본능적으로 연상의 박녹주에게 치닫게 된 것이고, 박녹주에게 접근하기 위해 유정과 동갑이었던 녹주의 남동생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이용당했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겸허- 김유정전>에서는 김유정 형님의 성격파탄자의 모습, 주정뱅이, 난봉꾼의 모습뿐만 아니라 일면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주는데 동생인 유정과 안회남을 술집까지 동행하는 호쾌함이 그것이다. 한편, 유정이 피복공장 다니던 누님과 함께 살아가던 시절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누님의 변덕과 히스테리적인 성격에 대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언급하는가 하면, 유정의 6자매 가운데 한 사람은 우물에 빠져 죽고, 유정의 누이동생은 큰 오라비에게 머리를 깍인 채 실진한 상태이고, 유정 또한 그들 못지 않게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보여준다. 즉 유정이 고향인 춘천에 가서 먹고 온 살모사로 만든 뱀술, 춘천근교에서 잡은 꺽지, 쏘가리, 川漁회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유정은 평소 어린아이 같이 단순하고, 순한 동물 같던 표정과는 달리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이는 유정의 형님이 갖고 있던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안회남은 개벽사에 근무할 때 만난 춘천 출신의 차상찬씨를 통해서 유정의 집안이 몇 천석의 재산가라는 것, 그 祖父代에 가렴주구를 통해 재산을 모았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유정 집안에 대해 그 당시까지도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소개한다. 그 외에도, 유정이 춘천에서 경영하던 금병의숙 시절의 에피소드, 문단 데뷔 무렵에 발표된 작품들, 유정이 죽기 전에 보내온 엽서의 내용, 유정의 사망소식을 알려온 현덕, 유정의 사후 김영수를 통해 들은 유정이 결혼한 적이 있었던 사실들, 유정이 박봉자에게 일방적으로 보냈던 연애편지 사건들을 소개한다.
한편 유정이 문단에서 활동하던 시절 문단 친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던 모습과 당시 문단의 화제가 되었었던 소설가 이상과 유정의 情死 운운하는 장면도 보인다.
정인택, 김환태, 이상, 제형과 함께 나를 찾아와 술을 조르던 생각이 난다. 그때도 피차에 궁한 시절이었다. 우리들 중에 누가 원고를 쓴 사람이 있으면 고료를 받아다 같이 점심 먹기, 외투를 벗어서 술 먹기 그런 때마다 유정은 기분을 못 이기어 늘 앞잡이로 났었다. ‘무교동’ 우리집을 골목 어구에 날마다 모여서서 우울하고 초라한 표정을 짓던 것이 꿈깥이 흘러갔다.
어느 날 병상에 누워있는 그에게서 엽서가 와 찾아가 보니까 유정이 내 귀에다 입을 대고 李箱형의 걱정을 하면서
“혹시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네가 눈치 좀 떠보렴”
하길래, 놀래어 자세히 알아보니, 李箱 홀로 유정을 방문하여와서 우리 두 사람 사정이 딱하기 흡사하니, 이 세상 더 살면 뭐 그리 신통하고 뾰족한게 있겠소. 둘이서 같이 죽어버립시다, 하더라고-
그러나 유정은 살고 싶었다. 그는 끝끝내 죽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정이 싫다고 하니까 李箱은 무안을 당해 표연히 돌아갔다는 것이다. 유정의 말을 듣고 李箱을 만나보니까, 그는 껄껄웃으며,
“안형, 제가 동경 가서 일곱가지 외국어를 배워가지고 오겠습니다”
하며, 그 시커먼 아래턱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이었다.
이상이 유정을 찾아가 동반자살을 권유하던 시기는 1936년 초가을쯤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상은 1936년 10월 24일경 동경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한편 안회남이 병상의 유정을 찾은 것은 유정이 신당리에 살고 있었던 1936년 겨울, 혹은 1937년 초쯤으로 보인다. 이때 유정은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살려고 애를 쓰던 유정도 나중에는 각오를 했던 모양이다. 그의 머리맡 벽 위에는 어느 사이에 겸허(謙虛) 두 글자의 좌우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이것에 대하여 유정 자신의 설명을 들은 일이 없다. 그러나 송장이 다 된 유정의 머리맡에서 이 두 글자를 보았을 때 그때처럼 나의 가슴이 무거운 때는 없었고, 지금도 그 것을 되풀이하면 여전히 암담하다.
아아, 멍하니 크게 뜬 그의 눈동자, 다른 사람이 아니고 유정이가 자기의 주검을 알고, 그것을 각오하였다는 것은 참 불쌍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자기를 극도로 낮추어 세상의 온갖 것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려는 그 겸손한 마음이여. 그것은 정말 옳고 착하고 아름다운 태도이다. 유정이 야윈 손으로 떨리는 붓으로 이 “겸허” 두 글자를 마지막 힘을 다하여 써서 머리맡에 붙이고, 조용히 눈을 감어버린 것은, 그대로 한 숭고한 종교의 세계이다.
유정과 안회남의 마지막 만남은 1937년 3월 초, 유정이 경기도 광주로 떠나던 날이다.
그가 광주로 떠나던 날 玄德씨와 그의 계씨인 玄在德씨와 나 세 사람이 자동차부로 나와 그를 작별하였다. 그것으로 유정과 영원히 이별이 될지 누가 알았으랴. 그날 아침 유정의 밥상에서 나는 현덕씨와 함께 약주술을 받아다 먹었다. 우리가 서로 “카-”하고 소리를 내며 몇 잔 하려니까, 조기국에다 밥을 말아먹고 있던 유정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더니,
“필승아, 나도 한 잔 먹으까?”
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광주로 내려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일이다. 나는 그때
“ 에이, 먹지 마라”
하고 그에게 술을 안 주었다. 그렇게 갈 줄 알았더라면 마지막으로 그 좋아하는 술이나 한 잔 주었을 걸. 서로 정답게 술잔을 나누어 볼 것을.
안회남의 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유정의 문단 데뷰를 전후한 작품활동이다. 유정이 춘천에 있으면서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흙을 등지고>를 안회남에게 보냈고 그중 <산골 나그네>는 [제일선]1933.3에 <총각과 맹꽁이>는 [신여성]1933.9에 발표되었으며, <흙을 등지고>는 이석훈이 애쓴 보람도 없이 그 원고가 신문사와 잡지사 편집기자의 책상 위에서 뺑뺑 돌다가 안회남이 이를 회수, 그 제목을 <따라지 목숨>으로 부치고 개작하여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보냈는데 이것이 <소낙비>라는 제목으로 당선되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정은 신춘문예에 공식으로 등단하기 이전인 1933년에 이미 잡지를 통해서 그의 처녀작을 발표했다는 것이고, 이로써 유정의 소설창작 활동은 이미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걸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안회남의 <겸허- 김유정전>에서는 휘문고보 시절의 김유정과 유정의 家系, 그 형제들의 독특한 성격들, 형제들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유정의 또 다른 특이한 성격들, 그의 여성관계와 문인이 된 이후의 문단친구들과의 교류관계, 문단 데뷔작품, 가난 속에서의 방황과 병든 이후의 고통스런 모습에 이르기까지 김유정의 전 생애에 걸친 면모를 보게 된다.
다음은 유정 사후 40년이 지난 뒤, 같은 구인회의 일원이면서 김유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조용만이 쓴 實名小說 < 李箱時代 젊은 예술가들의 肖像 3- 李箱․鄭芝溶․朴泰遠․鄭仁澤․具本雄․金裕貞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 >를 보기로 하자. 실명으로 다루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가운데 김유정 관련 부분은 [문학사상] 1987년 6월호에서 보인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조용만은 김유정이 춘천 사람으로 안회남과 친했다는 것,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가 ‘배울 것이 없다고 학교를 그만두었’고 고향으로 내려가 금병의숙을 운영했다는 것, 형의 방탕으로 생활이 곤궁해졌고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자 휴양한다고 충청도 금광으로 갔다는 것, 1935년 정월에 두 군데 신문의 신춘문예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알려졌고 이후 이상과 호흡이 잘 맞아서 친해졌다는 것을 간략히 소개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폐결핵에 걸려 정릉 절간에서 정양하고 있을 때 이상과 안회남이 병문안을 자주 갔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상과 김유정의 정사사건에 대한 전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하루는 이상이 유정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별안간에 유정이 각혈(喀血)을 하기 시작하였다.
요강을 끼고 쩔쩔매면서 한없이 나오는 피를 어쩔 줄 모르고 토해 뱉고 있었다. 이상도 각혈을 해왔지만, 이렇게도 오래 고생해온 일은 없었다. 이상은 놀라서 이 처참한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뒤에 기진맥진한 김유정이 겨우 진정해서 요강을 놓고 자리에 쓰러지자 이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형 이거 안되겠소. 우리들이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 있으면 무얼 하오. 자, 우리 둘이서 자결합시다.
이때 김유정은 답이 없다가 李箱이 돌아간 뒤, 李箱의 태도가 마음에 걸려 마침 찾아온 안회남에게 이상의 집에 가서 동정을 살펴보고 오라고 부탁을 한다. 평소 주사(酒邪)가 심해서 구인회원들과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안회남은 박태원을 불러 함께 이상의 집으로 갔고, 이상을 통해서 유정과 있었던 전후 사정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상은 이제 자살의 욕망은 없고 동경으로 가겠노라고 그의 포부를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한편 이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뒷부분에서는 마침내 동경으로 떠나는 이상이 서울역에 나오기 직전에 김유정을 만나보고 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암만해도 김유정 일이 염려가 되어서, 지금 가보고 오는 길요. 겨우 이야기는 하는데, 아주 탈진이 되어서 얼마 못 견딜 것 같애. 나 일본 가있는 동안에 일을 당할 것 같더군. 일 당하거든 두 분이 애 좀 써주어요.“
“ 이 사람,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요. 멀쩡한 사름을 놓고, 죽은 뒤 걱정을 하면 어떡하는 거요.”
구보가 이상을 나무랐다. 그랬더니 이상이 껄껄 웃으면서,
“김유정의 말이, 나보고 일본 가지 말고, 저번에 약속한 대로 같이 자살하자는 거요. 두 젊은 작가의 찬란한 정사(情死)를 결행하잔 말이지, 허허.”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에서 보이는 김유정은 李箱의 눈을 통해서, 그 이상의 주변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를 조용만이 기억에 의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상이 유정에게 자살을 권유했었던 이야기는 나중에 안회남과 박태원을 통해서, 이상이 서울을 떠나기 전 유정을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는 서울역에 이상을 송별하기 위해서 나왔던, 변동림, 박태원, 정인택, 윤태영 들 가운데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조용만의 경우, 이상, 김유정과 동시대 사람으로 같은 구인회원이었으므로 그가 들었었던 이야기들은 대체로 정확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작품이 유정 사후 40년이 지난 작품이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간 이야기들은 실제 사실과 조용만의 그간의 생활체험이 함께 용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4. 유정 사후 문단 후배가 쓴 김유정 실명소설
유정 사후, 문단 후배가 쓴 최초의 김유정 실명소설은 1974년 11월 [월간문학]을 통해 발표한 이동주의 단편소설 <김유정-실명소설>이었다.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는 함박눈 퍼붓는 야심한 밤, 돌쇠네 오막살이 건너방에서 젖먹이 딸린 들병이를 끌어안고 잠들었던 멱설이 가 들병의 남편이 깨우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이 부분은 김유정의 <솥>을 패로디 한 것으로 보인다. 들병이 부부와 헤어져 살래까지 20리 귀가길로 들어서는 유정을 그리면서 그가 김부자네 막내둥이라는 것, 조실부모했고, 연희전문 문과를 이 년에 집어치우고 춘천으로 돌아와 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을 하고 있다는 것, 부모의 재산을 독식한 형에게 재산의 분배를 요구하지 못하고 불평을 속으로만 삭이는 착하고 소심한 유정의 성격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작가 이동주는 실수를 보이기 시작한다. 김유정은 ‘살래’가 아닌 ‘실레’ 마을에 살았다. 또 김유정은 막내가 아니라 김부자네의 차남으로 2남 6녀중 7번 째였다. 그리고 유정은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가 두 달 여만에 학칙에 의거, 퇴학하였으므로 2년간 연전에 다녔다는 것은 작가의 오해이거나 착각이다.
이동주의 <김유정>에서는 유정이 해금장이와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남녘출신 들병이들에 대한 유정의 집착, 들병이와의 동침 장면을 그네의 남편에게 들켰던 밤 이전에도 이미 粉禮라는 이름의 들병이와 어울려 한 달 여를 금광 언저리 술집을 전전했다는 삽화가 보인다. 유정이 분례와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분례가 전라도 가시네였기 때문이며 유정이 이렇게 전라도 출신 가시네에게 집착한 이유는 바로 목노집 색시 박옥화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것이다.
1929년. 노란 은행잎이 나비 떼처럼 소복이 땅에 깔려 있던 초가을이었다. 숭인동 숭인탕 앞에는 젖은 수건을 든 웬 청년이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땅에 발이 붙은 채 꼼짝도 못한 그 청년은, 큰 키에 얼굴이 하얀 미남이었다. 그후 그는 며칠을 두고 실신한 사람처럼 이 목욕탕의 문전에 미이라처럼 서 있곤 했다. 엿새가 지난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의 가슴에더운 파도를 일게 한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매정했다.............(중략).......... 그녀가 탕에서 나올 땐 살갗이 발갛게 익었었고, 아무렇게나 틀어올린 젖은 머리는 마치 연유처럼 기름졌다. 나이는 서너 살쯤 위인 연상의 여인, 그녀에게서 그는 주렸던 모성애의 향수를 느꼈다. 그녀가 펄럭이는 치맛자락에는 어려서 어머니가 감싸주던 아늑하고 따스한 냄새가 풍겼다. 그는 커서까지도 어머니 치맛자락에 싸여 젖꼭지를 만지작거렸다.
유정이 박옥화를 처음 만나던 날의 묘사이다. 박옥화는 목노집 색시로, 흥타령과 육자배기를 부르며 술을 치는 작부로, 교양과는 거리가 먼, 대단히 관능적인 여자로 묘사된다. 옥화라는 이름의 기생을 쫓아 다니는 이야기는 유정의 자전적 소설 <두꺼비>에서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다. 이동주는 유정의 소설 <두꺼비>의 여주인공 이름을 차용한다. 그는 관능적인 목노집 색시 옥화에게 날마다 엽서를 보내고 일기장에는 혈서를 쓰고, 주모 편에 옷감이며 금반지를 사서 전하지만 옥화는 ‘고작 놈팽이를 따라 아랫녘으로 흘러’가버리는 것으로 처리한다.
아무래도 비약이 심하지 않은가. 흥타령과 육자배기를 부르며 술을 치는 목노집 작부에게 ‘박옥화’라는 문패를 단 집이 있다는 것도, 그와 같은 작부에게 날마다 연서를, 선물을, 때로는 혈서까지 썼다는 것 등등.
박녹주는 경북 선산 출신으로 유정이 그녀를 만났던 당시에 이미 인정받는 국창(國唱)이었다. 취입한 레코드가 있었고, 조선극장에서 판소리 발표회를 하는가 하면 김성수, 송진우 같은 후견인이 지켜주는 예인(藝人)이었다. 김유정의 짝사랑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동주의 <김유정>에서 또 다시 보이는 오해들은 대개 김영수씨의 <김유정의 생애>를 액면 그대로 수용한데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아내가 유정을 찾아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런 것들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형수가 나간 사이, 그는 요강에다 피를 쏟고 있었다. 가까스로 기침이 멎었는데 밖에서 누가 찾는다. 망막 속에 뿌연 모습, 그것은 여자였다. 이상의 부인이 비뚤어진 입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손짓을 했다. 반갑다는 인사였다. 그런데 여인의 눈은 젖어 있었다. 두 볼에 물줄기가 흘러 있었다. 이상이 죽었다고 전해 준다.
“나는 틀렸어. 유정이나 한 번 보고 죽었으면 했는데”
이상은 귤을 씹다 말고 이 한 마디를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중략).........
무더운 칠월, 가족들은 절로 가기를 권했다. 그 청을 받아들였다. 살고도 싶었지만, 가족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서서였다. 정능서 오리 쯤 떨어진 외진 암자였다.
유정이 정릉의 어느 절로 정양차 간 것은 1936년 7월의 일로 이 사실은 이상이 쓴 <김유정-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다. 유정은 1937년 3월 29일 경기도 광주에서 사망했고, 이상은 같은 해 4월 17일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으니 이동주의 <실명소설 김유정>에서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동주의 <실명소설 김유정>은 문단 선배 김유정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창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하여 유정의 작품 <솥>, <두꺼비>, 때로 안회남의 <겸허-김유정전>과 이상의 <김유정-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을, 역시 김영수의 < 김유정의 생애>를 자료로 하고 있지만, 자료의 수집이 불충분했고, 그나마 자료의 고증 및 분석과 정리가 불비했다. 잘못된 1차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거나 작품의 해석이 잘못 되었을 경우, 잘못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작가의 본의와는 달리 김유정의 생애와 그 문학에 대한 독자의 지적욕구를 오도시키는 총체적 혼돈의 양상을 보여주고 말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상국의 장편소설 <유정의 사랑>은 김유정에 관련된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그 자료의 확인과 해석, 평가 과정을 걸친, 한 편의 소설이며, 김유정의 작가론이고 작품론이다.
<유정의 사랑>은 전체 10장과 에피로그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홀수 장은 3인칭 시점이되 남 주인공 백진우를 초점화자로, 짝수 장은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여주인공 하리의 입장이 주를 이루되, 동시에 백진우를 향한 관찰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1920-30년대를 살았던 김유정과 박녹주의 이야길를 한 축으로, 다른 한 축은 1990년대를 살아가는 30대의 백진우와 문하리의 이야기를 병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의 표면적인 전체 줄거리는 간단하다. 국어학 전공의 백진우가 금병산 산행길에 혼자 산행을 하고 있던 여자를 만나고, 김유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일년 여 춘천 원근의 산행에 동행하는 과정 중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 두 사람은 편의상 남자 백진우에게는 ‘유정’이라는 이름이, 여자의 본명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하리’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을 느끼나, 대책없이 접근해오는 남자의 기세에 놀란 문하리는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은 채, 시골로 잠적한다. 남자는 수소문 끝에 마침내 여자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를 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리라는 상상의 여지를 주면서 글은 끝난다.
환생한 김유정으로 보아도 무방한 백진우는 37세. 대학강사이다. 어린 시절 증후성 간질을 앓았던 경험, 당시 자신의 발작한 상태의 추한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그리고 자신이 교육자인 아버지의 후실 소생이었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그를 염인증에 빠지게 한다. 고교 때는 전체 수석을 했고, 대학은 법과로 진학했으나 곧 지리학과로 전과했고 한때는 대기업에 스카우트되어 직장생활을 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 사표를 내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러나 전공은 엉뚱하게 국어학이며,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현재는 학위논문을 앞두고 자신감을 잃어 논문은 포기 상태에 있다. 중학교 국어교사인 아내가 있고 아이도 하나 있으나 마음은 언제나 ‘떠도는 영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덥씌워져 있는 듯한 인상의 남자. 작품의 말미에서 그는 소설을 쓰려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가 바로 작품에서 ’유정‘이라 불리는 백진우다.
말더듬의 장애, 조실부모하고 알콜중독자, 정신파탄자인 형님 밑에서, 히스테리환자인 누님 밑에서 폭압적 삶을 살아야 하기로, 폐결핵 말기, 결핵성 치루라는 치명적 중병을 앓고 있기로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던 김유정의 염인증과 절망과 고독.
김유정의 염인증이 운명적이고, 치명적 병환과 그로 인한 생존의 문제에 직결된 것이라면, 백진우의 경우는 다분히 감정적이고 감상적이고 또 충동적이다.
문하리, 30세, 2대 독자 집안에서 3녀 1남의 형제들 가운데 셋째 딸. 원하지 않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 거꾸로 세상에 나왔다.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자인 부친은 그 딸을 본성을 억압하고 착한 여자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본래가 할아버지를 닮아 엉뚱한 천성의 아이. 적록색약.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일류대학 수학과로 진학했다. 유명한 공립학교 수학교사, 어느 봄날 갑작스레 사표를 내고 학원 강사가 되었다. 무례 방자한 표정의 당돌한 성격의, 그러나 염인증의 여자.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외계인이었고 ‘들판의 한 마리 새’와 같았다.
박녹주, 경남 선산에서 한량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소리에 재질을 보였다. 12살때부터 소리를 위해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13살 때 소리판에서 조금 늦게 나온 딸을 보고 아비는 누구와 정분이 났느냐며 매질부터 했다. 딸은 자신이 뼈를 깎아 번 돈으로 한량생활을 하는 아비가 원망스러워 자살의 충동을 느껴야 했다. 아비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딸에게 기생수업을 시키려하고 돈 2백원에 딸을 양딸로 팔아치우기도 했다. 고생 끝에 마침내 국창으로 인정받게 된 박녹주, 그러나 그녀는 20명의 친정식구를 비롯한 식솔을 거느려야 하는 가장이었다. 한량의 아비로부터 딸이 아닌 돈벌이의 도구로 강요당한 박녹주, 그녀에게 강요된 가족 부양의 의무, 돈을 위한 남자들과의 부닥낌은 인간에 대한 단절감, 불신 일변도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보면 김유정, 백진우, 박녹주, 그리고 문하리를 하나로 엮는 줄은 염인증이다. 이들은 염인증을 토대로 서로에게 얽혀들도록 이야기는 전개된다.
<유정의 사랑>에서 홀수 장에서는 삼인칭 시점이되 백진우를 초점화자로 하리와의 만남,
김유정에 대한 그의 단상들, 김유정 관련 자료들이 배치된다. 관련자료들은 [김유정전집]에 수록된 소설, 수필, 서간문, 그리고 김유정이 작성한 설문지 내용들, 김영수의 <김유정의 생애>, 내용 안회남의 <겸허- 김유정전>, 조문희옹의 김유정관련 인터뷰 녹음을 녹취한 것, 이석훈의 <유정의 영전에 바치는 최후의 고백>, 김문집의 < 고 김유정군의 예술과 그 내적 비밀>,<김유정의 비련을 공개 비판함>, 박봉자의 <김유정의 여인>, 김진수씨의 <김유정의 광주 시절에 대한 인터뷰 내용>, 학술논문으로는 김병익의 <땅을 잃어버린 시대의 언어>, 이선영의 <김유정 연구>들을 여기 저기에 배치하고 그들에 대한 해설이나 고증을 겸하여 제시한다. 이들 제시된 자료 사이의 연관관계를 찾아 김유정의 생애를 재구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한편 짝수 장에서의 이야기는 문하리가 진행한다. 그녀의 성장과정과 방황부분, 백진우와 만남과 헤어짐의 부분들에서는 박녹주의 <나의 이력서> <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에서 그 상황이 비슷한 부분이 발췌되어 하리의 삶과 박녹주의 삶을 병치시킨다. 동시에 김유정의 문학에 눈 떠가는 하리의 문학적 성취를 위해서는 짝수 장 곳곳마다 김유정의 소설 제목과 발표지와 발표된 때가 소개되고 작품에 대한 수학도로서의 하리의 감상문적 언급이 소개된다.
<유정의 사랑> 전체 10장 가운데 김유정이 이야기의 표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대개 7장과 9장이다. 병을 고치기 위해 , 그 보다도 소설 쓰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붓기 위해 김유정은 상경한다. 그러나 가산을 탕진한 형님, 누님과 동거하는 매형 정씨와 한 방을 써야하는 고통,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정은 소설 창작에 몰입한다. 이때 유정에게 소설 쓰기는 ‘자기 실현의 가장 쉽고도 재미있는 놀이었다. 자기를 포함한 모든 대사의 완전한 객관화, 그 객관화는 일종의 복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복수극은 어떤 대안을 위해 짜여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파괴를 통한 카타르시스만 생각하면 되었다.’
어느 날(1935년 봄)김유정은 신문에서 박록주의 근황을 읽게 된다.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이동백 등 당시 국창이 모두 출연하는 장장 5시간 여의 창극 <춘향가>에서 박록주가 춘향역을 맡았는데 그 공연을 보러 모여든 관객으로 동양극장이 1주일간 대소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기사였다............(중략)..........자신이 지금 우리 나라에서 가장 각광받는 신진 작가가 되었다는 것, 유명해진 만큼 글쓸 일이 많아 정신없이 바쁘다는 것도 넌지시 비친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있듯 그대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도 쓴다. 그러나 편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그는 그 편지를 찢어버린다...............(중략).........
한껏 멋을 부리고 심각한 내용을 담으려 노력했던 그 편지 구절들이 떠올라 그는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는 비로소 박록주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몰아낸 느낌이었다. 그래, 바로 그 얘기를 소설로 쓰는 거다!
자신을 객관화한 작품이 비로소 구성된다.
단순한 자료의 고증이나 해설의 제시가 아니라 비로소 작가는 자료를 토대로 김유정의 자전적 소설 <두꺼비>나 <생의 반려>가 나오기까지 김유정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창작 과정에 대한 투사를 시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정의 사랑>에서는 한 단계 수준 높은 유정의 창작 심리까지는 추구해가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9장에서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여타의 김유정 실명소설이 유정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전달해주거나 생략하던 것과는 달리 임종 전후에 유정이 보는 환각상태가 박진감 있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작은 아버지! 또 기침이나면 어쩌려구 그러셔요.
녹주 녹주 새 사랑, 당신 사랑 유정이가, 춘향전을 다시 써서 그댈 춘향 분장시켜, 동양극장 창극 마당, 수천 관중 갈채 속에 , 방방곡곡 순회할 때, 겅중겅중 기뻐, 엉엉 우은 광대 있어, 그게 바로 유정일세.
작은 아버지!
녹주 사랑 내 사랑, 그대 내 필생의 역작, <숱밭> 소설 구상, 한 번 들어보시겠나. 천심이 민심이고, 민심 중의 으뜸은, 땅 파먹고 사는 무지렁이 농심인겨. 농심으로 일궈 내는 순박한 땅, <숱밭>으로 이름 붙여, 숲밭에서 일어나는, 작은 얘기 큰 얘기, 결말에는 그대가, 유정이와 부부되어 숱밭에서 아름다이, 천년만년 사는 얘기, 큰 사랑 얘기라네. 쓰게 되면 출판하여, 돈 벌어서 한양 진골, 구십구칸 내 집 찾아, 불쌍하신 우리 형수, 곱게곱게 모셔다가, 유정 조카 진수 아씨, 밝은 얼골 웃는 얼골, 보여주고 싶더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타관객지 외로이 난 사람, 괄시를 마라……저녁 하늘 해는 지고…… 나그네의 갈 길이 아득하여요……
작은 아버지!
..................................중략..........
.....................................................
얘, 뒤! 뒤!
가련토다. 꽃다운 나이, 천사가 하강했나, 죽은 엄니 환생했나, 십팔세 진수아씨, 삼촌 설사 받아내려, 이리저리 오강 찾아, 허둥지둥 방문 열고 댓돌을 더듬을 제, 과수원 배꽃마다, 어서 빨리 피어라고, 춘삼월 보름달이, 하얗게 웃고 있네
김유정이 사망하기 며칠 전, 유정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 혼수 상태 중에 유정은 진수를 박녹주의 현신으로 보고 그의 꿈을 펼쳐보이고, 진수와 박녹주,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보게되는데 이때 김유정의 환각세계는 판소리 가운데 아니리 형태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때 전개된 아니리에서는 박녹주의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와 김영수의 <김유정의 생애> 그리고 김진수씨와의 인터뷰 내용이 함께 용해된다. ‘저녁 하늘 해는 지고 나그네의 갈 길이 아득하여요..’는 김진수씨가 유정의 광주시절 삼촌에게 불러준 노래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정이 사망한 3월 29일은 음력으로 2월 17일, 월요일이었다. 춘삼월 보름달이 아니라 정이월 보름달이어야 했다.
저승길 떠나는 김유정에겐 진수가 조카가 아니었다. 그처럼 보고 싶었던 어머니가 저만큼에서 웃고 있었다. 편지를 전해 주러 문을 열고 선 형수님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다섯 누님들의 애증 엇갈리는 얼굴들이 허공에서 부산히 움직였다. 실성해 죽은 누이가 킬킬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가 혈서 뿌리며 맘껏 짝사랑한 박녹주와 박봉자가 저만큼서 사분사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갓난 것 하나씩 데분 들병이 아낙네들이 젖가슴 풀어헤친 채 실실 웃고 있었다.
조카 진수의 손을 잡고 빙긋 웃는 것을 마지막으로 김유정은 그의 짧은 생애에 괄호를 닫았다. 아침 여섯 시 삼십 분
그가 세상에 나와 누린 나이 스물 아홉.
1937년 3월초 정양차 김유정이 광주로 떠난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김영수, 김진수씨의 증언에 작가의 상상력과 추리력이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이 임종의 순간까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결핵성 치루로 인한 고통의 신음 속에서 죽어야 했던 것과는 달리, 백진우는 한가정의 가장으로 생활비에 대한 걱정 없이, 그리고 학위논문이 없이도 스승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어느 대학 전임강사로 취직된다. 지극히 운 좋은 사나이다.
박녹주는 1964년 판소리 <춘향가>로, 1970년에는 역시 <흥부가>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1월에 <나의 이력서>를 한국일보에 연재, 1976년에는 [뿌리깊은 나무] 6월호에 <여보, 도려님, 날 데려가주>를 통해 김유정과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박녹주는 1979년 5월 26일 사망하기까지 국창으로서의 긍지를 보여주었다. 문하리, 대책없이 폭주하는 백진우를 피해서 서울의 유명 사립학교 교사초빙도 사양하고 강원도 홍천군 물걸리 소재 팔렬중학교의 수학 교사로 자리를 옮긴다. 밤이면 사택 주위의 눈치를 보며 담배를 피운다. 대책없는 여자다.
작가는 이 작품의 작품집 <작가의 말> 부분에서 ‘김유정의 생애와 그 작품 세계를 소설로 재구성해 보고 싶다’는 욕망에다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한 편쯤은 써봐도 괜찮지 않겠느냔 생각’에서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말하자면 작가론, 작품론, 소설의 융합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론과 작품론이 합쳐진 문학평전이라고 보았을 때 이 작품은 90년대를 살아가는 남녀의 사랑이야기 때문에,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한 30년대 김유정의 문학적 삶과 고뇌에 대한 천착에 소홀한 듯 보인다. 유정의 생애와 유정의 작품에 대한 해명은 백진우와 문하리의 사랑이야기를 위한 소도구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편 소설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김유정과 박녹주, 백진우와 문하리로 병치되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네 사람의 공통적 성격인 ‘염인증’을 내세우는데 무리가 보이고, 백진우와 문하리의 이야기 속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너무 잦은, 너무 많은 자료의 열거가 서사전개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는 혐의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정 관련 많은 자료를 찾아내고, 고증하고,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내고 이들을 근거로 하여 김유정의 광주시절의 삶을 재구성했다는 것, 김유정의 작품창작 심리를 밝혀보기 위해 프로이드적인 심리학을 시도해보고 있다는 것들은 종래의 실명소설로부터 장족의 발전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5. 나가는 글
김유정의 생존과 사후, 유정의 문단 知友 또는 문단 후배들에 의해서 작성된 김유정 실명소설 9편을 대상으로 그들에 나타난 제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김유정 생전에 문단 지우들에 의해서 창작된 작품들, 안회남의 <고향>과 <명상>에서 김유정은 하나의 실루엣으로, ‘소설가 김군’ 또는 ‘김유정군’으로 나타나며, <우울>에서는 ‘훌륭한 소설가’로, 그러나 가난과 병고 속에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불운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이상의 <김유정-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에서는 한창 문단에서 인정받고 문우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덤벙대는 유쾌한 모습의 유정과 예술가로서의 교만과 고집, 직선적이고, 행동적이며 투사적인 성격, 평소에는 뚱하고 말이 없으나 술이 들어가면 어린 아이같이 변모하는 성격이 그려진다. 그러나 <실화>의 7장에 나타난, 이상이 마지막으로 만난 유정은 생사의 기로에서 절망과 울음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인물로 보인다. 유정 사후에 창작된 안회남의 <겸허- 김유정전>에서는 죽은이를 추모하기 위한, 죽은 이의 생애를 기록하여 오래 기억하기 위한 열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직접자료인 유정의 생전의 기억과, 간접자료인 자료인 亡者의 여러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여 이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조용만의 <李箱時代- 젊은 藝術家들의 肖像>에서는 김유정에 대한 작가의 기억, 구인회 무렵의 지우들의 이야기, 이상의 <김유정-소설로 쓰는 김유정론>들을 토대로 김유정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특히 김유정과 이상의 情死 에피소드, 또는 이상이 동경으로 떠나기 직전, 전송나온 친구들에게 들려준 김유정과의 작별 장면 같은 것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지인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것들을 기억에 의해 재구해 놓은 것이다. 지인들에 의해 작성된 실명소설들은 모두 직접적인 자료에 의한 것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그 신빙성과 박진감에서는 후세인들이 이를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문단 후배에 의해 작성된 실명소설의 경우는 그 내용의 충실성에 있어서 많은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동주의 실명소설 <김유정>의 경우, 원작의 패로디가 잘못될 경우, 독자로 하여금 원작과 작가 생애에 대한 커다란 오해를 일으킬 빌미가 되는 것이다. 이동주가 패로디한 <솥><두꺼비>의 경우가 그렇고, 또 생애 관련 자료의 경우에도 잘못된 자료를 수정하지 않고 사용하게 되어 ‘실명소설’이라는 이름에 큰 누가 되는 것이다.
전상국의 <유정의 사랑>의 경우는 그중 방대한 자료와 자료에 대한 정확한 고증, 작품에 대한 꼼꼼한 읽기가 시도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현대인의 사랑 이야기를 병행시키려 했다. 문학평전과 소설을 병행시키려던 욕망이 작품의 심미성을 넘어섰던 것일까. 김유정의 창작의 고뇌와 열정, 사랑을 거부당한 그의 고통은 단편적인 자료들의 제시를 통해서 유추해야할 뿐,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했다. 작가 김유정의 실체가 나타나기까지는 7장. 9장까지를 기다려야 했다. 7장에서는 조금, 9장에서는 임종 전후에 유정의 모습이 잘 나타났다.
작가들이 굳이 실명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상적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오래 기억하고 싶듯이, 기록으로 남겨 오래 보관하고 싶은 소박한 욕망. 창작품 안에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삽입시켜 그들의 현실적인 삶을 예술적인 무한한 삶으로 치환시켜주려는 욕망. 한때 같은 공간에 있었던, 그러나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도와주려는 욕망. 작품의 소재 개발의 일환으로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패로디하여 새로운 형태로 제작하고 싶은 욕망 등등이 될 것이다.
좋은 실명소설을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의 수집과 정확한 해석과 평가, 그들에 대한 깔끔한 정리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죽은 자료들의 단순한 짜깁기가 아니라, 그들 죽은 자료들을 공교하게 재조직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실명소설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실명소설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앞에서 분석한 실명소설 작품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김유정관련 실명소설이 더욱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2001.12. 09. 1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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