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
그 이름 부르면
실안개 한 줄기 눈가에 스치는 듯
몽롱함에 젖어드는 곳
춘천!
그 이름 귓가에 닿으면
눈 앞으로 다가오는
금물결 은물결
춘천!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노래처럼
꽃잎처럼 피어나는
춘천!
춘천!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안개와 호수와 산
안개 호수 산
춘천!
그냥 오셔서
안개 호수 산과 함께
며칠 지내보세요
춘천!
무술년 구월의 마지막 날(2018..09.30)이었다. 고을학교와 약속된 장소는 춘천시 동춘천 지역 만천 사거리의 '얼시구절시구'. 가을색 점차 짙어가는 때에 안개 마저 짙게 흐르고 있었다. 춘천의 변두리 지역이라 버스 노선은 없고, 택시를 타기에도 애매하고, 걸어서 가면 될 듯 싶었다.
머릿속에는 도로변 정경이 죽 나타나는데 쉬지 않고 걸어가도 늘 제자리인 듯, 연신 시계를 보면서 걸었다. 온몸의 땀구멍이 모두 열려서 땀이 줄줄 흘렀다. 40분 거리였다. 늘 자동차를 타고 지나다니던 곳, 걷던 곳은 아니었다.
이 도로는 잼보리 도로로 80년대 중반에 건설되었다. 느랏재와 가락재를 거쳐 구성포에서 홍천으로 나가 인제 양양 속초까지 뚫린 지방도로에 이어진 2차선 도로였다. 그러나 배후령 터미널이 뚫리면서 도로는 4차선으로 확장, 이제는 구봉산 앞에서 소양강 댐 부근, 고가도로와 배후령터널을 통해 양구까지 고속으로 달리게 되었다.
(만천 사거리)
(만천 사거리에 있는 식당 '얼씨구 절씨구')
식당 앞 돌무더기 앞에 앉았다가 마을 안쪽 구경이나 할까 하고 막 나서는데 골목쪽에서 3명의 여성군이 나타났다. 모두 백팩을 메고 있었다. 춘천에서 4명의 탑승자가 있다고 하더니.. 그들이 먼저 고을학교 참석자냐고 물었다. 그래서 인사를 나누었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07:00에 출발했다면 아무리 달려와도 08시 이후가 되지 않겠느냐고 설왕설래,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08:00 정시에 맞추어 고을학교 전용버스가 '얼씨구 절씨구' 앞으로 들어섰다.
전용버스에 탑승, 집행부와 우리들 포함 29명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청평사로 가려면 소양땜 정상까지 가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배후령 터널을 지나, 오음리 가는 부근에서 우회전, 오봉산(청평산)을 타고 올라가면 곧 청평사 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다. 만천사거리에서 30분만에 청평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청평사 주차장에서 20여분 걸어 올라가면 청평사에 닿을 수 있다.
<진락공중수청평산 문수원비(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碑 )>에 의하면 오봉산의 아주 오래 전 이름은 경운산( 慶雲山)이었다. 맹수와 도적들이 들끓던 험준한 산이었다.
(청평사로 올라가는 계곡쪽에 있는 거북바위. 예로부터 거북바위가 있는 곳까지 물이 풍성하면 사찰이 풍성해지리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소양땜에 담수가 시작되면서 청평사는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유명사찰이 되었다.)
아래 사진은 거북바위를 확대해서 찍은 것이다.
(사진 : 김순태)
10C 후반, 당나라의 승려 영현선사가 신라국으로 왔고 이곳 경운산에 들어와 '백암선원'(白岩禪院)을 창건했다(973).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 고려조 문종 때 이의(李顗)公이 춘주도감창사가 되어 경운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를 사랑하게 되어 백암선원의 옛터에 절을 짓고 ‘보현원 ’(普賢院)이라 하였다(1068).
이자현( 李資玄 1061~1125)은 이의의 장남으로 성품이 곧고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그는 진사시에 급제하고 대악서승이라고 하는 높은 벼슬까지 받았으나 29세 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1089) 보현원에서 수행에 들었다. 이자현은 두 번이나 문수보살을 친견한 관계로 '보현원'을 '문수원'(文殊院)으로 바꾸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이자현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도둑과 맹수가 자취를 감추게 되자 이자현은 이곳의 산 이름 경운산을 ‘청평산(淸平山)’이라 부르게 하였다.
청평사가 있는 구역은 그 전체가 자연스럽게 꾸며진 정원이다.
다산 선생은 1820년대,양수리에서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청평사를 방문했다. 청평사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기락천이라는 험한 벼랑길, 하도 가파라서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고 그의 <산행일기>에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몰되어 기락천의 벼랑길은 찾을 수 없다.
끊어진 협곡은 쌓인 녹음을 깨고
아침 노을에 강을 붉게 물들인다.
높이 임하여 심연을 알 수 없고
우러러 보면 돌이 굴러떨어질 듯
이름난 도회지에 여기가 북문
엄중한 빗장으로 쇠철벽을 닫았다.
빠른 배를 훌쩍 버리고선
미투리 신고 산사람을 따른다.
혼백 떨려 나아가질 못하겠군
갓 젖은 진흙에 범 발자국 찍혀 있어
수석을 즐김은 본시가 한가한 일
누구에게 핍박 받아 그런 것이랴
기호를 어떻게 절제하겠나
어질도다 이자현은
이래서 찾았구나 깊은 산골을
-다산 정약용-
구송폭포九松瀑布) 혹은 구성폭포(九聲瀑布)
하늘은 두 가닥 비단 띠를 드리우고
산은 구송정 위로 솟아났다.
표효하게 신선수레 날더니
놀이하는 뜨락이 너른도 하다
급한 소리는 변괴 있나 근심케 하고
남은 힘은 조졸 잘함을 보겠다
수풀에 바람 불어 기상이 쇄락하니
숙취를 죄다 깨게 한다.
- 다산 정약용-
다산 선생은 1820, 1823년 두 번에 걸쳐 이곳 청평사를 다녀가며
청평사 폭포 관련 시작품 4작품을 남겼고, 이자현 선생에게 남다른 애정을 보인 바 있다.
맑은 흐름이 백 가지로 변하나
유래를 따져보면 한 줄기 샘
서글프게 꽃들은 죄다 시들어도
바위만은 씩씩하게 끄떡 않는다.
산을 나가는 날이면 알리
넘실넘실 너른 강이 되리란 걸.
-다산 정약용-
새로 내린 비를 다시 보태어
태화탕을 부글부글끓여대네
예리함은 산을 뚫고 들어갈 듯 하고
요란함은 숲을 흔들어 서늘케 하는데......
-다산 정약용-
(공주와 상사뱀, 사진: 이지범)
원나라 시절의 이야기라고 한다. 궁중의 한 무사가 공주를 짝사랑하다가 죽었다. 그는 죽어서라도 공주와 함께 하고 싶어했다. 그는 죽어서 뱀이 되어 공주의 몸에 칭칭 감겨들었다. 뱀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궁에서 나온 공주는 세상을 방랑하다가 이곳 청평산으로 들어왔다. 공주는 구송폭포 옆에 있는 굴속에 기거하며 청평사에 올라가 침선봉양을 하고 밥을 얻어와 뱀과 더불어 나누어 먹었다.
(공주가 거처하던 굴, 사진: 이지범)
하루는 공주가 절에 올라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굴로 돌아갈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뱀이 공주를 찾아 절로 들어가려고 회전문을 막 들어서는 순간 천둥 벼락이치면서 뱀은 급류에 휘말려 계곡 아래로 떠내려갔다.
마침내 뱀에서 해방된 공주는 모두가 부처님 공덕이라고 생각하여 이곳에 머물러 불도를 닦았고, 원나라 왕실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들은 천자는 특별히 청평사에 내릴 하사금과 사신을 보내왔다. 절에서는 공주를 위하여 공주탑을 세웠는데, 구송폭포 윗쪽 벼랑 위에 실제로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이자현의 가계는 경원 이씨( 경원은 현재의 인천) 로 왕실과의 혼맥이 80여년을 이어온 대단한 집안이었다. 경원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외손녀가 현종의 왕후가 된 이후, 조부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에게 시집보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부원군이 되었다. 왕가와의 혼맥은 아들과 손자에게로 이어진다.
이자연은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래 도표를 보자.
이자연(李子淵 1003~1061)
장남:이의 (李顗) -李資玄(1061~1125) - 청평산에서 은거생활냄
이의의 딸은 선종에게 시집감
차남:이호 (李顥) -李資謙( ? ~ 1126) -- 딸 셋을 왕에게 시집보냄
이자겸:차녀를 예종에게 시집 보내 인종을 낳다
이자겸: 삼녀와 4녀를 인종에게 시집보내다
이자현은 이자연의 장손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청평산 문수원에서 불교의 이치를 연구하고 참선을 하다가 입적했다. 이에 비해 이자현과 사촌관계였던 이자겸은 차녀를 예종에게 시집보내 인종을 낳았다. 인종은 이자겸의 외손이다. 그런데 이자겸은 3, 4녀를 외손에게 또 시집보낸다. 이른 바 이모를 조카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다.
이자겸은 왕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다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반역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자현은 왕의 간곡한 부름에도 사양하고 이곳 청평산(경운산, 오봉산)에서 37년간, 불도를 닦고 참선을 하며 살다가 입적했다.
진락공 중수청평산문수원비에 의하면 이자현은 청평산에 살면서오직 채식만을 하고 납의(衲衣 :승려가 입는 검은색의 옷)만을 입으면서 검약과 청정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문수원 밖의 여러 곳, 마음에 드는 장소마다 암자, 당, 헌 등 십여 곳에 이름을 부쳤는데 그가 거처하는 곳은 실은 소박한 암굴, 바위위, 나무 밑 등이었다.
이자현의 부도( 왼쪽에서 두 번째 둥근 공 모양의 것)
(사진 : 이지범)
이 부도가 있는 담장을 끼고 왼쪽 골짜기로 조금 올라가면 한때 김시습이 제자들과 와서 사시던 '세향원 ' 터가 있다고 한다. 김시습은 이자현의 청렴한 삶을 존경하여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자현의 부도 오른 쪽으로 그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조성한
영지(影池)가 있다.
이 영지는 사다리꼴로 아랫변(사진 아랫쪽)이 윗변보다 길다. 현재는 영지 주변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서, 또 영지 안에 물풀들이 많이 자라서 영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영지 안에는 큼직한 바위 5개가 들어가 있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투입된 바위들이다. 앞의 커다란 바위들은 삼신산을 의미하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고, 뒤의 것들은 곤륜산 수미산 같은 신화가 서린 산들로 배치한 것이라 한다.
이자현 거사는 이곳 영지의 불교적이면서도 도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명상에 잠겼을 것이다. 당시 청평산 산봉우리와, 그 아래 있는 암자의 모습이 모두 이 영지에 비치어 보였다고 한다.
낙도음 樂道吟
집은 푸른 산봉우리 위에 있고 家在碧山岑
전부터 내려오는 보배로운 거문고 從來有寶琴
한 곡조도 타보지 않았네 不妨彈一曲
그 곡조 알아줄 이 없기에 祗是少知音
- 이 자 현-
영지 속에 비쳐진 자연을 보고 우주의 섭리를 익혀가던 거사, 그러나 진실로 마음의 한 줄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이를 그리워하는 모습, 자연의 아름다움을, 때로 떨쳐냈다고 생각했었지만 불현듯 찾아온 인간으로서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시문으로 엮어가던 고인의 모습이 바로 옆에 있듯 느껴진다.
이자현의 청렴한 삶을 존경하여 한때 청평산에 와서 머물렀던 김시습도 이 영지를 바라보며 시를 썼다.
네모 못엔 천 길 산봉우리 비치고
절벽에선 만 길 물 내달리며 떨어지네
이것이 바로 청평산 선경의 운치
어이하여 시끄럽게 지난 행적 묻는가
- 김시습-
영지 아래 쪽에, 이제는 마모되어 읽어내기 어렵지만,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다.
(사진 :이지범)
아래 사진의 큼직한 바위 위에 글자가 각인되어 있다.
신선이 사는 영지로 들어가는 다리 -선동교
마침내 나타난 청평사의 회전문과 청평산 봉우리
회전문은 '윤회전생'의 약자로 저 문을 통해들어가면서 우리의 악업을 모두 씻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 옛날, 공주를 짝사랑하여 죽어서 상사뱀이 되어 사랑하던 여자를 칭칭 감싸고 있었던 뱀도, 저 회전문을 들어서려는 순간 내침을 당하여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고 하는, 신통력이 대단한 문이다.
맨 앞, 한 가운데, 밝은 베이지색으로 도색된 문이 1550년대 보우 스님이 직접 지휘 감독하여 세운 회전문이다.
가까이에서 본 회전문
( 사진: 김순태)
사찰 건물 내측에서 본 회전문
(사진: 김순태)
청평사 회전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장경비'가 있었던 흔적, 서쪽에는 얼마 전에 복원된 '진락공중수 청평산 문수원비'가 있다.
김상헌의 <청음집>에 의하면 적어도 1635년까지 장경비가 이곳에 있었다. 장경비 앞면은 이제현이 썼는데, 원나라의 태정제가 청평사에 대장경과 돈을 보내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진락공 중수 청평산문수원비'는 1125년 이자현의 입적 5년 뒤 '진락공'이라는시호를 받고 그 3개월 후인 1130년 11월에 세워진 비라고 한다.
문수원비의 내용은 이자현이 청평사에 은거하기까지의 과정, 이자현이 문수보살을 접견하게 된 내용, 능엄경을 중심으로 참선 위주의 수도를 했다는 것, 임금과의 관계, 입적 내용과 그가 저술한 책명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종임금이 이자현을 그리워하며 보낸 편지도 기록되어 있다.
평소에 볼 수 있기를 원하였더니
그리운 생각 날로 점점 더하여 가노라
높고 어진 뜻은 빼앗기 어려우니
이 내 마음을 어이하리오.
1125년 4월 21일, 이자현은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인들에게
"사람의 목숨이란 무상한 것이니 태어 났으면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삼가하여 슬퍼하지 말고 도를 마음으로 삼으라"
그는 신시(오후 6시경)에 입적했다. 청평산에 머문지 37년, 향년 65세였다.
문수원비의 글 내용은 김부철이, 글씨는 탄연이 썼는데 이들은 모두 이자현의 사문이었다고 한다.
청평사에 듣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 이자현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사진: 김순태)
회전문 앞에서 건너편 경운루에 서계신 이지범 선생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회전문 바깥인 이쪽은 속세, 회전문 안 경운루마루에 서신 곳은 성스러운 공간........
경운루
(사진: 김순태)
문수원 이후 이곳은 퇴락해 있다가 1550년대 보우대사가 들어오면서 현재 규모로 불사를 일으켜 세웠다. 문정왕후의 지원을 받은 보우대사는 문수원 시절의 건물을 중수하고 '청평사'라 부르게 했으며 청평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당시 숭유억불정책의 시대에 이를 무마하기 위한 보우대산의 노력이 시각적으로 나타난 것이 회전문 대들보 부근에 나타난 홍살문 구조이다.
불교와 유교의 화모니를 이룬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바로 이 회전문이다.
회전문으로 들어와, 경운루 지나서면 나타나는 소맷돌 계단, 대웅전
수줍은 듯 소맷돌 아래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조선조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문양이다.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숨어 있는 듯한 극락보전
다시 왼쪽으로 좀더 옮겨가면 극락보전의 전체 모습과 산신각을 볼 수 있다. 극락보전 뒤쪽에 청평산 상봉이 보인다.
극락 보전 왼쪽에는 수령 850년 되는 주목도 있다. 아마 김시습도, 김창협도, 정약용도 보고 가셨을 것이다. 사람보다 훨씬 많이 살아가는 주목.
집행부에서 빨리 내려오라고, 다음 코스로 떠나야 한다고 야단이다.
경운루 누마루 문을 열면 전망이 좋다. 그곳에서 기념사진 찰칵!
집행부 포함 29명 가운데 춘여고 출신 6명이 출석했다. 기념사진!
(사진: 김순태)
청평사를 둘러보고 돌아나오는 길, 퇴계 이황 선생이 청평사를 찾아보고 이자현 선생을 옹호하던 시를 생각했다.
( 훗날 일부 사람들은 이자현의 은거생활에 대해 비난 한 적이 있다. 그가 문수원에 살면서 호외호식, 주민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것이다.)
협곡 죄이고 강은 굽이 굽이 돌아 벼랑길 기울더니
갑자기 마주친다. 구름 밖 맑은 시내
지금도 사람들은 여상의 혜원을 말하는 데
이곳이 바로 임이 밭갈던 골짜기로다.
흰 달은 하늘 가득히 소회를 밝혀주고
산 아개 자취 없듯 뜬 영화를 버렸구료
우리 나라 은인전을 어느 누가 엮을 것인가
작은 티 있다해서 옥구슬을 버리릿가
-퇴계 이황-
퇴계선생의 모친은 춘천 박씨이다. 퇴계선생은 어린 시절 춘천에서 살았었다고 한다. 춘천의 '퇴계동'은 퇴계선생이 살던 동리이름이다. 춘천의 공지천은 퇴계선생이 민물고기 공지를 잡아올리던 내의 이름이다.
소양땜과 청평사를 배경으로 한 현대소설로는 정찬의 <죽음의 질문>, 윤대녕의 <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씩>, 오정희의 <옛우물>이 있다.
정찬의 소설은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문단 데뷰초, 문학을 통해 순수성을 추구하려던 작가가 어느 새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어 영혼 없는 소설을 쓰게 된다. 그는 어느 날 청평사를 찾아오고 이자현의 삶을 되새기면서 부끄러움과 절망 속에 빠지게 된다. 결국 그는 작가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짙은 자책과 부끄러움 속에서 죽음으로써 자신의 작가답지 못했음에 책임을 지게 된다.
윤대녕의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씩>에서는 인연의 신비, 만남의 신비, 우리들의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거듭 윤회전생을 통해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소설이다. 청평사 극락보전의 심우도, 댐이 생기기전 청평사 아래로 흐르던 원천강과 소를 키우던 마을 사람들 이야기, 소양땜 공사와 담수, 소가 되어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등등 현실적이고도 환상적인 이야기가 함께 얽혀들어가 있는 소설이다.
오정희의 <옛우물>에서는 남편 아닌 남자를 못잊어하는 중산층 중년 여성의 방황을 그린다. 여성은 어느 날 신문에서 자신이 젊은 날 사랑하던 남자의 부고 기사를 읽게 된다. 여성은 그 옛날 그 남자와 함께 갔었던 청평사 선착장 부근에서의 기억, 어린 시절 옛우물에 서린 전설들을 떠올리고 마침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 이소설의 요지다.
청평사 탐방에서 고을학교팀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청평사 서쪽 계곡으로 1시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암반에 '청평식암'이란 문자가 각인되어 있다. 이자현 거사가 수행하던 곳이라 한다.
( 이 문자도 이자현 거사의 친필일 가능성이 크다)
아래 사진은 역시 청평식암 인접한 너럭한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이자현 거사가 이곳에서 물을 받아 끓여서 차를 우려 마시던 곳이라 한다.
청평사 주차장 출발, 장절공 신숭겸 묘소로 가는 길에 신매 중학교 옆에 있는 박사마을 현양비를 보았다.
봉의산을 진산으로 하는 춘천시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소양강이 있다. 이 소양강의 동쪽에 춘천시가 있고 서쪽에 있는 지역을 서면이라고 부른다. 이 서면 지역은 교육열이 높아서 이곳에서 2018년 10월 8일 현재 171명의 박사가 배출되었다. 이들 박사가운데는 한승수씨 같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
(서면 출신 박사 현양비)
장절공 신숭겸 모역으로 들어섰다.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태생으로 후삼국 시대에 춘천으로 들어왔다. 그는 처음 궁예의 수하가 되었으나, 궁예왕이 태봉국 건국 후 의심병이 들어 부하들을 불신하고 왕으러서의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왕건의 수하로 돌아섰다고 한다.
신숭겸 ( 申崇謙, ?~927)의 처음 이름은 능산, 당시 일반인은 성씨가 없었다. 어느 날 왕건과 더불어 사냥에 나가 하늘에 날고 있는 기러기를 화살로 쏘아 맞추자 왕건은 자신의 외조모의 성씨인 '신'씨성을 주었다. 기러기를 쏘아 떨어뜨린 곳이 평산이었기로 신숭겸은 평산 신씨 (平山申氏) 의 시조가 되었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동상, 근래에 세웠다.)
( 장절공 묘역, 사진 :김순태)
후삼국 시대였던 927년, 대구지역 달성군 공산에서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전투를 벌였다. 견훤군의 기습공격을 당한 왕건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때 왕건과 외모와 체격이 비슷했던 신숭겸은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적군을 유인하다가 전사했다. 적군은 신숭겸의 시신을 왕건의 것으로 오인, 시신의 목을 베어 갔다. 한편 이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을 비롯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 이후 달성군에 소재한 공산은 '팔공산(八公山) '으로 불리게 되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왕건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게 했다. 신숭겸의 넙적 다리에는 삼태성(혹은 칠성) 모양의 점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시신을 찾아 확인했다. 그리고 없어진 머리를 위해서 처음에는 나무로 두상을 만들어 붙이고, 장지를 찾게 되었다.
왕건은 춘천 방동리에 자신이 죽으면 묻힐 능자리를 갖고 있었다. 왕건은 신숭겸을 위하여 황금으로 두상을 만들어 붙이고, 자신의 장지로 쓰려던 이 곳에 신숭겸을 모시게 했다.
(사진 :김순태)
장절공 묘역에는 봉분이 3개, 황금두상을 갖고 있는 장절공의 유해가 도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태사 장절공 신숭겸지묘)
어느 틈에 고을학교 회원 두 분이 봉분 뒤, 전망 좋은 곳에 올라 손모자를 만들어 이마에 붙이고 장절공 묘역의 전망을 살펴보고 있다.
장절공 묘원 앞에서 본 방동 마을, 멀리 건너편 대룡산과, 앞산에 의해 가려져 있는 소양강, 대룡산과 소양강 사이에 춘천시가 자리 잡고 있다.
장절공의 위패는 묘역을 중심으로 오른 쪽, 장절사에 모셔지고 있다.
(장절사, 사진 :김순태 )
(신도비를 모신 비각, 사진 :김순태)
장절공 신도비는 1805년 순조때,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의 충절을 현양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글 내용은 당시의 세도가인 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글씨는 조선후기 4대 명필이었던 신위
(申緯)가, 상단의 전액(篆額)은 당시 좌의정 서매수(徐邁修)가 썼다.
신숭겸 관련 , 신숭겸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대구 달성지역의 표충사와 전라도 곡성지역의 용산당이 있다.
왕건은 대구 달성 팔공산 전투장에 지묘사(智妙寺)와 미리사(美理寺)를 건립, 장절공의 영정(影幀)을 모시게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조선조에 들어 지묘사가 폐찰된 자리에 사당을 지어 충렬사로 중수, 1671년 (현종12년) 표충사(表忠祠)라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하게 했다.
한편 장절공의 출생지인 전라도 곡성에는 용산단이 있다. 고종 5년(1868)에 토지 매입, 광무 원년(1897)년에 유허비 건립, 1929년에 단을 모아 용산단 건립, 매년 9월 중정일(仲丁日) 에 다례를 올리고 있다.
춘천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영토 확장을 위해 서로 각축전을 벌이던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춘천지역에서는 구석기 시대 유물은 물론 금병산 남쪽 산기슭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묘총과 거기에서 나온 유물들, 고구려 시대 고분들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고분 가운데 2기가, 장절공 묘역 인접 지역에 있다. 묘역에서 도보 5분 거리 서쪽 지점에 고구려 고분 2기 중, 오른 쪽 고분만 개방되어 있고 왼쪽 것은 보호를 위해 매립되어졌다.
이 무덤은 동쪽에 통로인 널길을 낸 무덤 방이 하나인 "동편연도 단실분"이다. 이 무덤은 석실주위를 네모난 돌로 쌓아 올린 다음에 봉토를 씌웠다. 자연석을 쌓아 돌방을 만들고 그 위로 넓은 판석으로 돌방의 모서리를 없애는 방식을 거듭하여 맨 위의 구멍에 하나의 뚜껑 돌을 덮는 말각식 천장(抹角式 天障)으로 처리하였다.
말각식천장이라....2007년 1월 페르시아 여행 당시, 이스파한에 있는 주마마스지드에서 처음 이런 천정을 보았다. 귀접이식 천정, 마름모꼴 천정, 궁형천정이란 별칭이 있다는 것. 벽면 상단 모서리에 판석을 밀어넣고 맞붙여 점차 천정의 열린 면적이 반씩 줄어들면 판석으로 덮개를 해서 마무리 짓는 방식이 말각식 천정이다.
당시 우리 답사팀을 인솔했던 정수일 교수께서는 이와 같은 천정 양식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선을 보였고, 이후 페르시아 -> 중앙아시아 -> 고구려로 전해졌다고 강조 하셨다.
문화란 돌고 도는 것이에서 이슬람 사원의 천정으로 마감되었던 말각식 천정이 실크로드를 타고 와서 고구려의 무덤 조성방식에 영향을 끼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강원도 춘천의 방동리에서 확인하게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