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 작곡가 연주가
이름: Liszt, Franz 남자
생년월일: 1811년 10월 22일 오전 01시 16분
출생장소: 오스트리아 Raiding, 47n34, 16e32
출처: 출생시간은 기록이 있으나 어디에서 나온 출생시간인지 출처가 없음.
양 력: 1811년 10월 22일 01:16
음/평: 1811년 9월 6일 01:16 남자
시 일 월 년
己 辛 戊 辛
丑 巳 戌 未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대운: 역행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84 74 64 54 44 34 24 14 4.4
사망일자: 1886년(76세, 경인대운 병술년) 7월 31일 폐렴으로 사망함.
쇼팽을 위하여, 리스트의 특별한 우정 (서프라이즈)
[티브이데일리 양소영 기자] 2015. 07.26(일)
'서프라이즈' 리스트와 쇼팽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됐다.
26일 오전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쇼팽을 위하여'가 전파를 탔다. 1931년 클래식 피아노 음악의 거장인 리스트와 쇼팽이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공개됐다.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 환상곡' '파우스트 교향곡'으로 유명한 헝가리 출신으로 '피아노의 신'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은 '야상곡' '즉흥환상곡'으로 유명한 폴란드 출신으로 '피아노의 시인'이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피아노 연주를 통해 가까워졌다. 리스트와 쇼팽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리스트는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고, 쇼팽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리스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쇼팽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다. 당시에는 현란한 기교가 들어간 음악이 인기였다. 쇼팽은 현란한 기교보다는 다양한 음색과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연주법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쇼팽을 아마추어 음악가로 생각했다. 아무도 그의 연주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 리스트는 사람들이 쇼팽의 실력을 알 수 있도록 그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쇼팽의 연주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쇼팽은 결국 상처를 받고 칼크 브레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리스트는 쇼팽을 만류했다.
얼마 후 리스트는 자신의 연주회 중, 불을 끄고 연주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아름다운 연주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불이 켜진 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인물은 쇼팽이었다. 리스트는 사람들이 쇼팽의 아름다운 연주를 알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던 것.
이후 사람들은 쇼팽의 아름다운 연주에 열광했고, 쇼팽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예술가가 됐다.
프란츠 리스트(독일어: Franz Liszt, 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은 헝가리 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어: Liszt Ferenc)이다. 뛰어난 기교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낭만시대 음악에 큰 공헌을 했다.
생애
리스트는 헝가리의 라이딩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터하지 백작 밑에서 첼리스트와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안나 라거이다.
리스트는 여섯살 때 아버지에게서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금방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그 재능을 높이 산 지방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리스트의 아버지는 리스트를 데리고 비엔나로 유학을 떠난다.
비엔나에서 리스트는 잠시 훔멜에게서 수업을 받았지만 훔멜의 수업료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그만둔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열두살이 되던 1822년 12월 데뷔했다.
칼 체르니는 리스트의 첫 정식 피아노 교사이자 마지막 스승이었다. 리스트는 프레데리크 쇼팽과도 친해졌지만 이는 곧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다.
1823년 파리로 옮겨간 리스트는 1824년부터 파에르와 레이하 밑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공부했다. 1827년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불로뉴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잠시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다. 1832년 천재 바이올린 주자 파가니니의 공연에 다녀온 후 리스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먹고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한다.
1834년 리스트는 마리 다구 (Marie d'Agoult) 백작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녀 블랑딘, 차녀 코지마, 그리고 일찍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 다니엘을 두었다.
1840년부터 1841년까지 리스트는 영국에서 두차례 순회공연을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리스트 신드롬"이 유럽을 휩쓴 것은 그 이듬해인 1842년이었다.
리스트는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리스트의 잘생긴 외모와 쇼맨십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의 공연에서 여성팬들이 여러번 기절하기도 했다고 한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 슈만, 장차 그의 사위가 되는 바그너 등의 당대의 음악가들과 화가 앵그르, 시인 하이네,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등과 친분을 다졌다.
리스트는 잠시 탈베르크와 경쟁관계에 놓였으나 탈베르크의 명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이 후 리스트의 라이벌은 언제나 쇼팽이었다.
1847년 리스트는 바이마르의 궁정에서 케펠마이스터로 일한다. 이 시기 리스트는 자인-비트겐슈타인 Sayn-Wittgenstein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졌다. 피아노 공연보다는 작곡에 주력할 것을 권한 사람도 공작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으나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남편은 아직 살아 있었고, 교황청은 공작부인의 이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리스트는 1861년 로마로 옮겨갔다. 1865년 리스트는 예전의 희망대로 카톨릭 성직자가 되어 종교 음악 작곡에 헌신했다.
1869년부터 리스트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같은 해 리스트의 딸 코지마가 바그너와 결혼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자 리스트는 몇년동안이나 코지마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1876년부터 죽기 전까지 리스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886년 7월 31일 리스트는 둘째 딸 코지마의 품에 안겨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