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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통신 <15>
도서관 천국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6>
도서관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내가 기한이 지난 책을 아직 반납 안했는데, 빨리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를 2불까지 물게 될 수도 있고 계속 반납 안하면 도서관 이용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경고장이었다. 내가 지난 금요일에 다 돌려주었는데, 이게 웬 홍두깨 같은 말이냐 기분이 나빠져서 도서관에 전화를 걸었다. 내 말을 들은 도서관 사서는 혹시 착오였는지 자기가 다시 서가를 뒤져보겠다고 하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아직도 그 책이 서가에는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내가 반납한 것으로 컴퓨터 기록을 바꾸었으니 안심하라고 하면서도 혹시 우리 집에서 책을 찾게 되어 돌려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며칠 후 아이 방 침대 시트를 갈아주느라 매트를 들썩이는데 침대와 붙은 벽 쪽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매트를 들추니 침대 밑으로 책이 한 권 떨어져 있었다. 아이가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놔둔 것이 매트와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짐작이 되었다. 집어보니 얼굴 뜨겁게도 며칠 전 너무나도 당당하게 돌려주었다고 항의했던 그 책이었다. 어쩔 것인가 가서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그런데, 그 날 내 전화를 받은 직원이 누군지나 알면 좋겠는데 얼굴도 이름도 모르니.
그 책을 들고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내가 기한 지난 책에 관한 경고장을 받았다. 나는 책을 다 돌려주었다고 생각을 하고 며칠 전 전화로 말해서 너희가 반납된 것으로 처리를 했는데, 오늘 청소하다가 침대 사이에 끼어있던 걸 발견했다. 미안하다. 그 동안의 연체료를 다 물겠다 등등. 그랬더니 그 사서 하는 말, 이미 반납처리 되었으니 되었다. 그리고 책을 돌려주어서 아주 고맙다. 연체료는 낼 필요 없다고. 그래서 나도 대단히 고맙다는 말만 하면 되었다. 정말로 미안하고 또 내 잘못에 대한 너그러움에 고마워서.
다시 몇 년 후 도서관에서 똑같은 편지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남편에게. 그런데 그 책이 분류된 종류가 남편이 읽는 종류의 책이 아니었다. 그래도 확인을 했다. 남편은 당연히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시 나는 당당하게 항의 전화를 했다. 그 사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해보겠다고 하면서 서가와 컴퓨터를 확인하고 그 책이 없는데 혹시 아이나 누구 집안 식구 중에 남편의 카드로 대출했을 가능성은 없겠는지를 물었다. 나는 우리 식구는 모두 다 자기 도서관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하면서. 그 사서는 어쨌거나 반납한 것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오늘 내가 이러저러 해서 도서관에 전화를 했었다고 말했더니 우리 아이가 그 책을 자기가 빌렸다는 것이다. "너 그런 책 읽지 않잖아?" "읽으려고 빌린 것 아니야. 그냥 숙제 하는 데 필요해서 빌렸던 거야." "언제?"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이가 영어 숙제 때문에 도서관 가야 한다고 남편보고 데려다 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남편은 데려다 주고 대출해주는 일만 했으니 그 책 제목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밖에. 사실 아이는 카드만 있지 자기 카드는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다. 어차피 우리가 차로 데려다 주어야 하니까 지갑 가지고 가는 우리가 빌리게 되고. 아이가 혼자서 책을 빌리러 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또 아이 책을 빌려오는 것은 주로 내 담당이기 때문에 남편이 어쩌다 데리고 갔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지만 내가 또 한 번 너무 당당했다 싶었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책을 들고 갔다. 내 설명을 들은 사서는 자기가 전화를 받지는 않았지만 어디 보자고 하면서 컴퓨터 기록을 보더니 연체료를 얼마 내면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연체료를 내니 처음보다 덜 미안해서 좋았지만 이제 이런 실수는 두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이 들어 그 다음부터는 경고장이 날아오면 어쨌거나 우리 집 안에 있다고 믿고 뒤진다.
첫 번 도서관과 두 번째 도서관은 다른 도서관이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하나는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다른 하나는 10분 거리 안에 있다. 이 도서관들 말고도 나의 대출카드로 책을 빌릴 수 있는 도서관이 4개 더 있다. 내가 사는 지역에. 다른 지역에 가서는 내 대출카드로 책을 빌릴 수 없다, 물론 개가식이라 누구나 들어가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시내에 있는 오클랜드에서 제일 큰 도서관은 만원 정도 내고 일년 회원이 되면 그곳에서도 책을 빌려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럴 필요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내가 사는 곳 6개 도서관을 뒤지면 엔간한 것이 다 있으니까.
한 번은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시리즈물 중에서 이미 대출되어 사이사이 빠진 것을 다 찾아내어 빌려오느라 도서관 4군데를 순회한 적이 있다. 아이는 내게 좀 미안해했지만 나는 오히려 신이 났다. 한 시간 돌아 예닐곱 권의 시리즈물을 다 채워서 빌려올 때의 기분은 보물섬지도 조각들을 맞추어 보물섬으로 향하는 기분 못지않기 때문이다. 진짜 보물섬지도 맞추기 해본 적은 없지만.
한 번에 몇 권씩 빌려주는지는 한 번도 너무 많이 대출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내가 많이 빌려올 때는 20권 정도까지 빌려오고 기한은 3주, 만일 연장하고 싶으면 기한 내에 전화 걸어 연장하고 싶다고 말하고 내 카드 번호만 불러주면 다시 3주간 오케이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을 저 도서관에 돌려주어도 그만이다. 물론 권장사항은 아니지만. <2003.08.22>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7> 학교이야기 1
아이가 학교에서 준 것이라고 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 3에 해당되는 이곳의 Form 4학년 초였다. 제목은 '학생을 한 개인(individual)으로 여기고 가르치기'라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우리 아이가 속한 학년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먼저 있었다. 학교가 계속 성장하고 있지만 (학제가 한국과 완전히 달라서 고등학교가 다섯 학년이다. 이 학교의 학생 수는 2천명이 넘는데 한국에서는 보통 규모의 학교이지만 뉴질랜드에서는 두 번째로 크다.) 학생들이 한 개개인으로서 받아 마땅한 돌봄과 관심을 받도록 보장하고 싶다는 것이 그 편지의 전달내용이었다.
한 개개인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말이 눈에 설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우린 늘 집단으로만 교육받고 존재해왔는데, 나라와 민족 앞에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개인을 내세우는 것은 이기주의와 동의어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목표 설정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맞게 계획을 세워서 학기말에 한 번씩 체크를 하게 할 것인데, 부모에게 아이가 선택한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함께 의논하고 그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라는 것이 학교에서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내용은 별것이 아닌데 학습목표를 세우라는 말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덧붙여서 '개인적인 기술과 자질/관계를 맺는 기술과 자질(personal/relationship skills and qualities)'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그런 것들이 나중에 아이가 자기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기술과 자질을 갖춘 행동을 하도록 부모들도 아이들을 격려해달라는 말을 끝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기술과 자질이 무엇인지 목록을 쭉 적어놓았다.
그 목록을 나는 열 번도 더 읽었다, 그런 말은 내가 교육받은 16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개인적인 기술인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걸 그대로 옮겨본다면
*지도자가 되어도, 따라가는 자가 되어도 편안할 줄 안다
*필요하다면 위기상황에 기꺼이 처할 줄 안다.
*좌절과 실패에 대처할 줄 안다
*정확한 자기 이미지를 갖는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줄 안다
*호기심을 보여준다.
*과제에 충실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도움을 청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배운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
*물건과 소유에 대한 책임을 진다.
*변화에 잘 대처한다.
*적절한 유머감각을 갖는다.
*활동과 토론에 참여한다.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다.
*독립적으로 일(공부)할 줄 안다.
*(말로 되어있든 글로 되어 있든) 지시에 따를 줄 안다."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임을 지금 이 나이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위에 나열한 성품을 갖게 된다면 공부를 좀 못한들 이 세상 어디를 간들 즐겁고 행복하고 자신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가 될 성품이 없으면서 따라가는 일에도 늘 불만이고, 위기사항은 늘 피하기만 하면서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한다면 이 나라에서든지 우리나라에서든지 어디 산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감동하기 잘하는 나는 ‘아, 이 나라 학교는 역시 우리나라하고 다르구나’ 라고 감탄을 하며 아이가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명문이라고 소문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엄마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 학교는 역사가 유구한 학교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으로 정복하여 뉴질랜드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준 힐러리 경도 그 고등학교를 다녔다. 한국 아이들도 그 학교에 꽤 있다고 했다. 왜냐, 그 학교의 대학진학율이 다른 학교보다 월등 높기 때문이다. 그 엄마의 말에 의하면, 또 그것이 사실인데, 이 학교는 반을 나눌 때 시험을 보아 성적 순으로 나눈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A반부터 B반, C반, 이런 식으로 쭉 나가기 때문에 아이 반이 어느 반인지 알면 그 아이의 전체 등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안다는 것이다. 입학할 때 그렇게 정해서 첫 학년(Form3)에는 시험 볼 때마다 반을 바꾸고 그 다음 학년부터는 시험을 볼 때마다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성적이 계속하여 두 번 좋으면, 그러니까 그 윗반 학생보다 잘 하면 그 윗반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반이 이동된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아이가 두 반을 건너 올라가서 보니 배우는 내용과 진도가 이전 반에서 공부한 것과 다르고 심지어는 교과서도 달라서 그 동안 그 반에서 이미 공부한 내용을 따라가느라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우열반 갈라서 공부시키는 것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 학교에 다니는 한국 아이들은 거의 과외를 한다는 것이 그 엄마의 설명이었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우열반이 있기는 하다. 첫 두 해를 공부 잘하는 반 2개 반과 잘 못하는 반 2개 반을 만든다. 중학교에서의 선생님 평가와 학군 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서 미리 테스트한 결과를 가지고.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런 반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학부모를 위한 저녁모임을 준비해서 각기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에 그 반에서 담임선생님이 그 반에 속한 아이의 부모들에게만 그렇다고 알려줄 뿐이다. 아이들은 늘 공부 잘 해서 상 타는 아이들이 주로 몰려 있는 반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짐작을 하고. 그러나 두 해가 지나고 나면 그냥 다 섞어 놓는다. 수학만 빼놓고. 왜 세 번째 학년부터는 우수반을 만들지 않느냐고 어떤 키위 엄마가 물었다. 그 질문을 들으니 여기서도 우수반에 들어가면 부모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기는 하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 편의상 그리고 아이들의 능력에 따라 반을 구별하기는 했지만 이 반에 속한 아이들만 공부 잘 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다른 반에도 여기 이 반에 속한 아이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학년부터는 과목을 모두 학생이 선택하기 때문에 우수반을 따로 만들 수 없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어느 학교가 더 좋은 학교인지는 각자 자기의 교육관에 따를 일이다 싶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공부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기술을 아이가 체험한다면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훨씬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성숙한 인간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을 하지만 먼저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학교를 선호할 수 있다. 각자 교육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 이것은 이래야 하느냐 저래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뿐. <2003.08.23>
담임선생님 면담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8> 학교이야기 2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시간을 언제로 하면 좋을지 적어 달라는 통신문을 아이가 가지고 왔다. 그날은 특별히 오전 수업만 하고 담임과 부모가 면담을 하니까 아이들을 일찍 데리고 갈 것과 만일 여의치 않으면 학교에서 정상적인 하교시간 3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원하는 부모는 그 여부를 체크해서 보내라는 추가사항과 함께. 적당한 오후 시간을 적어 보내고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냥 내 몸만 가면 되는가. 뉴질랜드에 와서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에서 나는 부적응 학부모였다. 어떻게 학부모 노릇을 할 건인지에 대해 거의 매일 밤 남편에게 하소연했었다. 남들 다 한다고 하는 대로 하지는 못하겠고, 아이가 학교가기 싫어하고 늘 겉도는 것은 마음 아프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직 아이들 청소시키기는 어려우니까 시간이 있는 부모들이 와서 일주일에 한번 청소해주면 좋겠다는 통신문을 받고 자원했다. 한 학기 내내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열심히 청소를 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 오면서 나는 나름대로 궁리를 했다. 남들처럼 봉투 줄 용기는 없고 학기가 끝나는 것은 우리 옛날에 했듯이 일단 책을 뗀 셈이니까 책걸이 떡을 선생님께 드리자고. 그래서 마지막 청소하는 날 부지런히 신촌 이대 앞의 유명한 떡집(지금도 유명한지 모르겠지만) 호원당에 가서 떡을 한 상자 샀다. 내 나름대로는 큰 배짱을 가지고 큰 상자 가득 샀다. 선생님과 그리고 같이 청소한 엄마들이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또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끼리도 들 수 있게.
책걸이 떡이라고 하면서 상자를 건네는데 선생님이 그것을 나눠 먹을 생각 안하고 슥 책상 속으로 넣는 순간 나는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차마 함께 나눠 먹으려고 가지고 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 7월 더운 여름 날 따끈한 떡이 상자에서 쉬지나 않았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일이다.
2학년이 되었다. 그 전 해 일년 내내 거의 매일 선생님에게 봉투를 주어야 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했던 나의 문제가 다시 시작되었다. 남편이 주는 충고는 한 반에서 한 두명 준다면 그것은 뇌물이지만, 모두 줄 때 안 주는 한 두명은 학비 안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말 아파트 앞 뒤 동을 통틀어 나밖에 없었다.
모든 엄마들이 진지하게 우리 아이를 염려하며 충고를 했다. 우리 아이의 소원은 그 때 칠판지우개를 밖에 나가서 털어오는 일을 한 번 해보는 것이었다. 학년 초에 학부모 면담하는 날이 정해졌다. 시간은 아무 때나 적당히 가면 되었다. 교실에 가니 누군가 엄마가 나오고 있었다. 연달아 내가 들어갔다. 옆집 엄마에게 배운대로 했다. 도대체 어떻게 봉투를 건네주냐고 걱정하는 나에게 그 엄마 하는 말 그냥 내밀면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하니까 그냥 내밀기만 하라는 거였다. 그 엄마 말대로였다.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봉투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당황하여 아이가 칠판지우개 털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알았다고 했고 그리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1,2 분도 안 되어 집에 돌아오면서 이건 완전 코메디다 그런데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애는 그 다음 일주일 지우개를 털며 분필가루 마시며 행복해했다. 적어도 학기 초와 말 이렇게 일년에 네 번, 부지런하면 달마다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의 학부모노릇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3학년 일학기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뉴질랜드로 왔다. 면담할 때 여기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가면 될 건가 꽃이라도 사들고 가야 하나 생각만 하다 그냥 갔다. 선생님은 미리 약속되어 있는 순서대로 아이들에 관한 자료를 챙겨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쓴 글, 그린 그림 등을 보여주고 교실 벽에 붙은 것이 있으면 그것도 보여주고 (거의 모든 아이의 것이 다 붙어있다). 그러니까 면담 시간은 선생님이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아이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첫 면담하는 날 나는 초등학교에서처럼 열심히 교실을 찾아 갔다. (한국의 학교처럼 2,3층의 커다란 건물이 아니라 단층의 작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교실 배치도를 보아야 교실을 찾을 수 있다.) 아무도 없었다. 이게 웬일인가, 옆 반을 들여다보아도 아무도 없다. 아이가 가져온 면담에 대한 통신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장소가 강당으로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 경험 있다고 장소에 대한 설명은 읽지 않아 헛다리 품만 팔았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강당으로 갔다.
커다란 홀을 빙 둘러 선생님들이 책상 위에 이름과 반 표시를 하고 앉아 있고 중앙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부모들로 약간 복잡했다. 나도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어디 있나를 찾아서 그 근처에서 기다리는 다른 부모들 옆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아이의 학습결과 자료를 과목 별로 설명해주고 공부에서 걱정할 일은 없다고 선생님이 말하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없냐고 했다. 학교생활은 어떠냐는 나의 물음에 친구들이 주변에 늘 모여 있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염려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붙이는 말, 사실 부모 면담할 필요가 없는 아이들의 부모는 면담하러 오는데, 말썽을 부리는 아이의 부모는 꼭 면담하러 오라고 부탁해도 안 온다고.
고등학교에서도 학부모 면담이 있다. 다른 점은 담임선생님을 만날 일은 아이가 선택한 과목 중 어느 하나를 담임선생님이 가르치지 않는 한 없다는 것이다. 학기 중간에 면담하는 날이 정해지면 방과 후부터 밤 9시까지 학부모가 편리한 시간을 과목별로 적어주면 아이가 선생님의 사인을 받아온다. 5분 내지 10분 간격으로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선생님을 찾아 다니며 면담을 한다. 과목 별로 선생님들이 한 방에 서너명씩 둘러 앉아 있는 것은 중학교의 강당을 축소해 놓은 셈이다. 미리 받은 중간 성적표를 가지고 가서 선생님이 보여주는 자료를 함께 보면서 아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중학교와 마찬가지이다.
Form 4 때 지리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이었다. 환갑이 다 된 분인데, 학급 사진 찍을 때 반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신었듯이 편안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그 분이 우리 아이에 대해서 하는 말, 전형적인 십대이다. 매사에 비판적이다. 과목 시간 외에도 선생님과 이야기를 잘한다. 공부를 조금 더 하면 좋겠는데, 딱 필요한, 최소한만 한다. 그러나 걱정 안 한다. 알아서 계속 잘 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우리 아이에 대해 잘 아냐고 감탄하자, 자신 있게 그 분이 대답하는 말, 내가 당신 아이를 아주 잘 안다고. 나는 그 선생님의 말에 감동했다. 내가 당신 아이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난 게 우리 아이에게 뿐 아니라 나에게도 축복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선생님과 아이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사실은 둘이서 아이 흉을 보면서, 십대들의 심리를 이야기하면서 즐거웠다.
이곳에 온 이후로 학기 초가 되면 언제 면담하는 날이냐고 챙기는 나를 보고 남편과 아이는 선생님과의 면담이 나의 취미생활이라고 놀린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선생님과 아이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아이가 잘 한다는 칭찬을 듣는 일이 어느 부모인들 즐겁지 않으랴. <2003.08.25>
상(賞)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19> 학교이야기 3
이곳 선생님에 대하여 모두 즐거운 기억만 있느냐, 그건 아니다. 이곳에 온 지 두 해가 지나 아이가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미술이 전공인 분이었다.
뉴질랜드에는 교과서가 없다. 그것이 이곳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처음 놀라는 일이다. 노트 몇 권과 연필 한 두 자루만 들고 다니면 된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 나름으로 학습자료를 만들어 학생들이 구입하게 하지만 우리 개념의 교과서는 없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책보다는 먹을 것이다. 1시에 먹는 점심 말고도 10시 반에 ‘모닝 티’라고 우리로 말하자면 간식 먹는 시간이 있다. 먹을 것만 확실하게 챙겨주면 교과서 빼뜨려먹고 갔는지 준비물 잊어버리고 갔는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서 다 주니까, 아니 주는 게 아니라 학교에 다 있어서 사용하고 그 자리에 놓고 오면 된다. 크레파스까지도. 교과서가 없으니 배우는 것도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배울 것을 배우지만 선생님의 취향에 따라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는 각각이다. 이 선생님 반에서는 하루도 미술 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그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일년 내내 무엇인가 명분을 만들어 손바닥만한 크기의 상장을 주고 그것이 5개 모이면 Gold Certificate 라고 보통 상장보다는 약간 큰 황금빛 나는 상장을 주었다. 상장이 공부를 잘 해서만 주는 것도 아니고 거의 골고루 일년 내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셈이었다. 물론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 잘 듣는 아이들이 먼저 받기 시작하지만 일년이 끝나도 그 금색 종이를 받지 못하는 아이는 한 반에서 한 두명 있을까 말까 정말로 어쩔 수 없이 막무가내로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는 한 누구나 다 받는 종이였는데, 우리 아이가 그것을 그 해에 받지 못했다. 학년이 다 끝나 가는데, 자기는 아직 5개를 못 모았다고 한탄하는 아이를 보면서 속이 상했지만 아직 몇 주 남았으니 한 개만 더 받으면 되잖아 위로를 했었는데(한 주에 한 번씩 나눠준다. 한 번에 한 아이에게만 주는 것은 아니다.) 끝내 그 한 장을 더 받지 못해 황금종이와 바꾸지를 못했다.
그 해에 그 반에서 그 황금종이를 두 개 받고도 그냥 상장을 몇 개 더 받은 아이가 있었다. 같은 한국 아이였는데, 미술을 잘 했다. 미대 나온 엄마 닮아서. 거기까지는 내가 인정을 해 줄 수 있는데, 그 엄마가 미안해 하면서 설명하는 말이 그 아이가 담임선생님에게 미술 과외를 한다는 거였다. 면담시간에 과외 활동 하는 것 없냐고 해서 동네 아트센터에 다닌다고 하니까 자기에게 과외하지 않겠냐고 해서 할 수 없이 시킨다는 거였다. 아트센터 등록비의 몇 배나 주면서, 그만 두고 싶어도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열이 났다. 학년 마지막 주에는 짧은 영어로라도 가서 따질까, 왜 우리 아이에게 안 주는가를 물어볼 뻔 했다.
한국에서도 아이가 불공평하게 느끼는 것을 알아듣게 설명하느라고 애를 썼었는데,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를 다시 설명하기가 구차했다. 몇 년 지나 우연히 그 때 일을 아이와 이야기했다. 내 마음이 그랬었다는 것을 들은 아이가 하는 말, 엄마가 안 그러길 잘했어. 내가 선생님께 따졌거든. 왜 그 애만 자꾸 주냐고. 그랬니? 그랬더니 선생님이 뭐라고 했는데? 잘 하니까 주는 거라는데, 뭐라고 더 말을 하겠어. 그렇지만 애들은 다 알거든. 그래서 아이들이 그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Teacher's pet 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 아이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하지 않게 편애를 하는 것을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이들이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 결코 아니니까. 그리고 내 아이가 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놀라왔다.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하도 말이 없어 집안에 문제 있는 아이 같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자기가 부당하다고 느낀 것을 선생님께 말을 했다니, 그런 말을 해서 끝까지 한 장을 더 못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그런 말을 물어볼 수도 없는 분위기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선생님에게 어쩌면 고마워해야 할 일일 수도 있다.
사족으로 우리 아이는 그 다음 해 중학교에서 판화를 잘 만들고 찍어서, 미술 선생님이 그것을 오클랜드 시 전역에서 뽑힌 중학생 작품을 전시하는 행사에 보냈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세종문화회관 같은 아오테아 센터에 걸린 아이의 작품을 보려고 남편과 나는 자랑스레 관람을 갔고 나중에 그 작품을 학교 기금을 만들기 위한 학교 전시회에서 음악 선생님이 사는 바람에 우리 방에는 다른 판본이 걸려있다. 그래서 아이는 상관 안했지만 나 혼자 상처받았던 마음이 조금 위로를 받았고. <2003.08.26>
인종차별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0> 학교이야기 4
같은 동네에 사는 한국사람 집에 놀러갔다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어 길에 나섰지만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 길은 학교에서 오다가 우리 집으로 내려가는 길과 만나고 있어서 아이가 오는가 살피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키위 남자애들이 Hello, Mrs Gook 이라고 말하면서 낄낄거렸다. 같이 이야기 나누던 아주머니가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인사로 받아들이는데, 나는 소리 질렀다. "What did you say?" Gook 이란 니그로라는 말처럼 중국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그 말에 Mrs 라는 말을 붙여서 얼핏 듣기에는 그냥 인사 같았지만 사실은 욕을 한 거였다.
아이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흥분해서 그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들이 인종차별 하는 거라고. 그랬더니 아이가 하는 말 "뭐 그런 것 가지고 화를 내고 그래, 화를 내면 엄마가 지는 거야. 그런 애들은 어디나 있어." 나는 이 나라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일을 당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아이가 하는 말에 놀랐다. "너도 그런 일을 당해보았니?" 하는 나의 물음에 아이가 대답하는 말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어."(그러니까 이 일이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뭐라고 그랬는데?"
"미끄럼 탈 때 내가 타고 있으면 Chinese girl 비켜 뭐 그런 식이지."
"그건 별로 욕하는 것 같지 않은데?" 하는 말에 우리 아이는 아니라고 그게 욕이라고 했다.
"지금 중학교에서도 그러니?" 아까 그 아이들도 중학교 아이들이었다. 우리 아이와 같은 학교의.
"응 동양 아이들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동양 아이들이 지나가면 욕을 하는 아이들이 있어, 그런데 사실은 동양 아이들 대부분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냥 웃기 때문에 그런 애들은 재미있으니까 계속 그러는 거야. 여기 아이들은 동양애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영어를 못하니까 바보라고 생각해."
"너한테도 그러니?"
"학교에서는 반 아이들이 나한테 그러지 못하지, 그런데 집에 올 때 건너편에서 걸어가는 남자애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애들이면 잘 그래, 나를 향해 욕을 할 때가 있어. 그러면 난 그냥 안 있지, 그 아이들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욕을 해주면 멍하니 쳐다보다가 도망가. 어떤 때는 내 친구들이 같이 나랑 소리 지르면서 욕을 해주거든."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지 않았니?"
"하면 뭘 해, 엄마가 기분 나빠할 텐데, 그리고 거의 날마다 있는 일이니까 집에 오면 다 잊어버리거든. 그리고 그런 애들은 어디나 있어, 한국에서도 있었고, 자기들끼리도 약한 아이들에게는 강하고, 강한 아이들에게는 약하고 그러니까 무시하는 게 최고야, 그러다가 정 기분 나쁘면 나도 같이 속사포로 욕을 해주면 돼. 지네들보다 더 말 잘하는 줄 알면 못 그러거든."
아이는 그런 일을 특별히 인종차별이라고 느끼기보다는 어디나 있는 못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에게도 그렇게 생각하라고 권하는 게 나보다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키위 아이들이 욕하는 것보다 같은 한국 아이들이 욕하는 것을 더 괴로워한다. 우리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같은 학년에 여자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남자 아이가 하나 있었을 뿐. 그러니까 거의 1년 반 동안을 친구 없이 지낸 셈이다. 키위 아이들과도 친구 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아이 생일에 초대하기도 하고, 너그러운 키위 엄마들이 자기 아이와 우리 아이를 친구 만들어 주려고 우리 아이를 초대하기도 했지만, 아이들끼리 성격이 맞아야 친구가 되는 거지 억지로 어른들이 분위기를 만든다고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잠시 친구해 줄 뿐. 이미 친한 친구들이 있는데, 말도 잘 못하는 아이와 호기심으로 몇 번 놀아주는 것도 잠시다. 아이가 아직 친구가 없이 혼자 논다는 게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아이는 걱정하는 나에게 자기는 혼자서도 재미나게 노는 법을 아니까 염려하지 말라, 자기는 심심한 적이 없다고 내 마음을 찡하게 만들면서, 다행히 정말 혼자 잘 지냈다. 책하고 아니면 가끔 끼어주는 키위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나서 이민 붐과 함께 한국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친구가 없었다. 어째 한국 아이들 하고도 놀지 않는지 궁금해 하는 나에게 한국 아이들이 노는 자리에 갔더니 너는 왜 여기에 왔니 하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동급생이 다른 아이들보고도 우리 아이랑 놀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왕따를 당한 셈이다. 그래서 한국 아이들과는 안 논다고 했다. 그렇게 씩씩하게 이쪽저쪽 진짜인 친구 없이 2년 이상 버티더니 친구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고 선생님이 표현할 정도로. 그 친구들이 지금까지도 친구다, 7,8년 된. 가끔 한국 친구 없는 걸 걱정하는 나에게 아이는 말한다. 한국 아이든 키위아이든 서로가 좋은 친구가 되면 친구이고 아니면 아니라고.
사실 우리 아이는 키위 아이와 친해지기 위해 그 아이들 하자는 대로 다 받아주지는 않았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학용품이 이쁘고 풍부한 한국아이에게 그런 것을 얻어 갖기 위해 일부러 친한 척하면서 이용하는 영악한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과는 친할 수가 없고 못되게 구는 키위와는 싸움도 불사한다. 어쨌거나 학교에서 키위 친구들과 다니는 우리 아이를 한국 아이들은 이쁘게 보질 않는 모양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와서 들려준 이야기.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한국 애가 있다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친구에게 "누구야, 그 년 들어왔다."고 하면서 자기 듣는 데서 욕을 하더란다. "내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이런 일이 반복되다가 한 달쯤 되면 스트레스가 쌓여 울고 싶어질 정도라고 했다. "키위 애들은 전에처럼 그러는 애들이 없니?" "키위 애들도 여전히 그러는 애들이 있지. 그런 애들은 무시하다가 나도 같이 욕해주면 되는데, 그래도 한국 애들이 그러는 게 더 속상해."
집에서 영어로 말을 하지 않으니, 영어로 욕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영어로 욕하지 못하게 만들 기회조차 없어서 그런가, 우리 아이는 영어로는 욕을 할 줄 안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는데, 한국말로는 욕을 듣고도 그냥 속상해만 하고 가끔 집에서 그 이야기하면서 훌쩍이는게 한국말 욕을 몰라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2003.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