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중에서-
소서노(召西奴)는 졸본부여의 왕 연타발의 둘째공주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던 연타발은 희망을 소서노에게 걸고 어려서부터 제왕의 수업을 가르쳤다.오녀산성은 불과 다섯 명의 여인이 500명의 적군을 물리쳤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소서노는 영특했고 기개가 대단했다.
소서노는 자라서 북부여 해부루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에게 시집가 비류(沸流)를 낳았으나 우태가 전쟁에서 죽자 졸본으로 돌아와 홀몸으로 지냈다.
소서노(召西奴)는 졸본부여의 5부족 가운데 하나인 계루부의 공주였다.
일설에는 유력자인 연타발의 딸이었다고 한다.
나이는 [삼국사기]에서는 서른 살 즈음이라 하고, [조선상고사]에서는
그보다 일곱 살 정도 많았다고 전한다.
그는 아쉬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소서노는 안주하지 않았다.
새로운 땅을 찾아온 주몽을 만나 다시 사랑과 삶을 시작했다.
당시 주몽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쫓겨 도망친 스무 살 가량의 청년이었다.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을 맞히는 등 무예가
뛰어났고 총명했다고 하나, 낯선 땅에서 의지할 것이라고는 몇 명의 부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동부여를 도망칠 때 함께 온 오이, 마리, 협보와 모둔곡에
와서 만난 재사, 무골, 묵거가 그들이다. 지혜와 무예,
그리고 야망을 지닌 젊은이를 알아본 것이 소서노의 아버지인 연타발인지
소서노 자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몽이 소서노에게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다.
주몽을 본 소서노는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임을 간파했다.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주몽은 자연스럽게 홀본부여의 세력을 접수했다.
이것은 북부여 동부여 홀본부여가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북부여계와
홀본부여계가 연합한 것이므로 일종의 혼인동맹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이 바로 ‘비류’와 ‘온조’다(삼국사기).
주몽은 남만주 일대는 물론이고 압록강을 넘고 백두산, 두만강 하구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때 부인 소서노의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이 절대적이었다.
소서노는 뛰어난 정치가였다.어쨌든 졸본지역의 토착세력이었던 소서노와 능력 있는 주몽이 만났다.
소서노는 자신의 재력을 기반으로 주몽을 왕으로 성장시켰다.
주몽은 소서노의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를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원전 37년 마침내 고구려를 세웠다. 당연히 소서노는 고구려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주몽은 이후 말갈을 물리치고 불류국, 행인국을 복속하는 등 나라를 안정적으로 성장시켰다.
소서노와의 사이도 좋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주몽의 첫 번째 부인과 친아들이 등장하면서 불거졌다.
부여를 떠날 때 주몽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부인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 주몽은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만일 사내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시오.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둔 유물을 찾아 나에게 오라고.”
예씨는 아들을 낳아 유리라 이름을 지었다. 성장한 유리는 일곱 모로 되어 있는 주춧돌과 기둥 사이에서
부러진 칼 한 토막을 찾아 들고는 주몽을 찾아왔다. 주몽이 왕위에 오른 지 19년 되던 해였다.
주몽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예씨가 원후, 소서노가 소후가 되었다.
소서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과 함께 만든 나라였고 당연히 자신의 아들 비류가 왕위를 이을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주몽의 친아들에게 나라를 고스란히 빼앗기게 되었다.
남편의 배신 앞에 선 소서노는 침착했다. 그리고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
사실 주몽이 20년 동안 세력을 키웠다고는 하지만 토착세력인 소서노를 따르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유리와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서노는 두 아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능력과 야망만 가진 젊은이를 왕으로 키워낸 경험이 있었기에 두 아들을 믿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소서노는 불확실성 속에서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
이들에게 권력투쟁 대신 한반도 남쪽 지역의 신천지를 개척하게 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경기만과 서울지역을 장악한다면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한강 물류망과 비옥한 농토를 이용하여 한반도의 남쪽을 장악할 수 있다”며
“중국 지역과 바다로 교류할 수 있고, 남북 연근해 항로를 이용하면 일본열도까지도 교류할 수 있으니
밖으로 나가 영토를 개척하라”고 했다. 비류와 온조는 각각 남으로 내려가 소서노의 지원에 힘입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위례성에 도읍지를 둠)를 건국해 시조(始祖)가 된다.
첫째 아들 비류가 소서노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어마마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마마마께서는 아바마마를 도와서 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리라는 자가 나타나서 태자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어마마께서는 이용만 당하신 것입니다."
온조도 분개하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어마마마가 두 번째 부인이라고는 하나 고구려의 건국에 큰 역할을 하셨으니
비류 형님이 태자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아바마마께서 어찌 저희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소서노 왕후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나도 배신당한 기분이다. 페하께서 우리를 이렇게 저 버리실 줄은 몰랐다.
그러나 너희들은 폐하의 친아들이 아니고 유리는 친아들이니
폐하로서는 자신의 친아들에게 이 나라를 맡기고 싶겠지.
그렇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롤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하자."
"새로운 나라라고요?"
"그래, 남쪽으로 가자. 따뜻한 남쪽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내가 모든 힘을 쏟아서 너희들을 돕겠다."
소서노 왕후는 분노를 참으며 주몽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유리를 태자로 삼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저를 버리셨으니, 저를 따르는 무리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주몽은 자신이 죽고 난 이후 유리와 비류,온조 형제간에 피를 보는 다툼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래서 소서노 왕후가 차라리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서노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소서노는 어느덧 청년으로 자란 비류, 온조와 자신을 따르는 10명외 신하들과 백성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났다.
남쪽을 향해가다가 지금의 한강유역에 이르렀다. 소서노가 말했다.
"이 부근은 기후도 좋고 땅이 기름져서 새 나라를 세우기에 알낮겠구나.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온조는 소서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주변을 살펴보기 위해 무아악(지금의 북한산)에 올라갔다.
산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신하들이 소서노와 비류, 온조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생각할 때, 저 강 건너의 남쪽 땅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북쪽으로는 아리수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 높은 산에 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판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해 있다. 이러한 좋은 땅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나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닷가에 도읍을 정해야 다른 나라와 사귀기도 쉬울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겠다."
비류의 말을 듣고 소서노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이곳은 나라의 도읍으로 적당한 곳이다. 이곳에서나라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소서노는 비류를 말렸다. 하지만 비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소서노는 비류를 더 이상 말릴 수 없다고 여겨, 비류를 따르는 무리들로 하여금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떠나게 했다.
주몽의 부인. 유교사관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최초의 왕비가 있었다는 사실만을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를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이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이”로
높게 평가했다. 그는 압록강변 졸본부여 연타발왕의 딸이었다. 실제 소서노는 ‘과부’로 알려졌다.
그는 혈혈단신 무일푼의 망명자였던 연하의 주몽을 만나 재혼한 뒤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탠다.
기원전 18년 주몽의 친아들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그리고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협상으로 무혈 건국한다. 그것이 백제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두 나라를 세운 여성이었던 셈이다.
차배옥덕 회장은 5년 전 소서노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소서노 재평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표적 여성 향토사학자다. 그는 10여년 전부터 소서노의 존재에 대해 연구를 해오고 있다. 당연히 고구려나 백제 건국에 기여한 소서노의 구실도 일반 학계보다 더 높이 산다.
차배옥덕 회장은 “소서노 여왕은 그 자체로 이미 제왕 수업을 한 여성”이라며 “마한 왕에게 땅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무혈건국을 하는 수완과 역량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장을
맡으며 서울 정도 시기를 600여년 전이 아니라 2020여년 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운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소서노가 기원전 18년에 도봉산 밑 중랑천변 우이동 일대에 터를 잡은 것부터 서울의 역사를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 회장은 “당시 모계사회에서 여성은 물리적인 방어력도 뛰어났다”며 “한 많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보려는 시각이 많지만 실제 우리나라 고대 여성들은 강인한 힘과 생명력과 포용력을 품고 있었다”고 풀이했다. 활을 다루고 말을 타는 등 무예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재물을 모은 창고를 갖는 등 경제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 회장은 또 소서노와 같은 진취성과 적극성이 고구려 여성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본다. “중국 현지에 지금도 남아 있는 오녀산성(졸본성)만 보더라도 다섯명의 여성이 적군 500여명을 물리친 뒤
이름붙여져, 고구려 여성들의 기개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