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인 여의도 비행장이다.
1916년대에는 일본이 간이비행장으로 사용하였고, 1924년 정식으로 공항으로 승인되어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이 1922년 12월 귀국해 비행시험을 보인 여의도비행장이다.
1945년 광복군의 이범석 장군이 귀국한 곳도 여의도 비행장이었다.
해방 뒤에는 미군 비행장과 한국 공군 훈련장으로 사용됐다.
1950년 6·25전쟁 뒤 잠시 국제공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58년부터 공군기지로만 사용되다 71년 2월 폐쇄됐다
1968년 개발 이전 여의도는 양말산과 비행장, 모래톱으로 이뤄진 200만평의 땅이었다.
1960년대의 여의도는 지금과 같은 타원형의 섬이 아니었다.
여의도는 현 여의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비행장의 이름으로만 존재했었다.

'너벌섬' 여의도는 200만~250만평의 경계가 불분명한 모래밭에 가까웠다.
여의도(汝矣島)는 옛날에 한자로 잉화도(仍火島), 나의주(羅衣洲)라고도 적었다.
‘너(나)벌(불)섬’ ‘너섬’으로 풀이한다. '너벌섬'은 ‘너른 모래벌판 섬’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잉화도(여의도)가 서강 남쪽에 있고 목축장이 있다. 사축서·전생서의 관원 한 사람씩을 보내 목축을 감독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기록에서 조선 초부터 이곳이 말이나 양, 염소 등을 기르는 국립 목축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말산(養馬山·洋馬山)이라는 이름도 목축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김현욱 서울시장은 밤섬의 돌과 흙, 백사장의 모래를 가져다 110일 만에 여의도의 둘레 둑 7.6㎞를 완공했다.
67년 ‘불도저 시장’이란 별명의 김현옥 서울시장은 한강 개발에 시동을 걸었다.
그 첫 사업이 바로 ‘여의도 윤중제 공사’였다.
김 시장은 68년 밤섬의 돌과 흙, 여의도 모래톱의 모래를 가져다 높이 16m, 둘레 7.6㎞의 둑을 쌓고
110일 만에 그 안쪽에 87만여평의 ‘새 여의도’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의도 주민 1200여명(200여가구로 추정됨)은 봉천동과 신정동으로 강제 이주됐다.
봉천동에서는 한 가구당 8~10평 정도의 땅을 제공했으나, 소유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천동·신정동으로 옮아갔던 사람들은 그 뒤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1968년 여의도 서쪽에 자리한 양말산을 헐어내고 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여의도에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일본군용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 일대에 민간인들의 주거를 금지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미 군정은 양말산 기슭에 20평 남짓한 살림집 50채를 지어 만주·일본에서 귀국한 50가구를 살게 했다.
이들이 여의도의 첫 정착자들이었다.
여의도 1세대 주민 가운데 일부는 군용지나 공유수면 등 60만~70만평을 빌려 땅콩과 옥수수 농사를 지었다.
대다수 가구들은 영등포 쪽으로 막노동을 나갔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사방에 밭이 많아서 땅콩·옥수수·파 농사를 많이 지었고, 먹는 데 구애받지 않았다.”
“여의도 백사장에서 민들레, 냉이를 캐서 나물을 무쳐먹고, 밤섬과 서강 사이를 흐르던 한강가에서
소쿠리로 재첩과 조개를 잡아 끓여먹기도 했다.”
“비가 오고 나면 한강철교 아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팔뚝만한 잉어도 자주 잡혔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여의도에서의 삶이 맘 편하고 자유로웠다고 기억했다.

여의도 윤중제가 완공된 뒤 여의도에서 지면이 제일 높은 양말산(32m)자리에 국회가 자리를 잡았다.
비행장과 땅 콩밭에는 방송사과 증권거래소, 증권사들, 63빌딩 등이 들어섰다.
당시 인구가 1천명 남짓이었던 여의도에는 2004년 말 기준으로 1만165가구 2만9591명이 살고 있고,
낮에는 6610개 법인의 4만245명이 일을 한다.
활동인구는 1일 평균 50만명 이상으로 주거인구의 10배 이상이며, 세금수입은 1년에 3천억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