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화된 화면이 끝날을 때 대통령은 머리를 들고 비서실장 유종수를 보았다.
“그렇군.”
대통령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야.”
그들은 방금 김정일 위원장의 의견을 녹화 테이프로 본 것이다. 이 테이프는 외교부 직원이 하바로프스크로 날아가 김명천으로부터 받아온 것인데 특급 작전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의 철통같은 보호하에 테이프를 공수해 온 것이다. 김명천이 빠진 것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러시아나 일본 정부측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며칠후에 열리게 될 남북간 장관 회담에도 영향이 있을 것 같은데요.”
동석했던 외교부장관 이동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납북자 문제와 경협 관계를 합의하기로 했거든요.”
“아마 거부하거나 트집을 잡아서 보류시키겠지요.”
그렇게 말한 것은 통일부장관 강윤택였다. 그러나 강윤태의 얼굴은 활기에 차 있었다.
“하지만 한랜드에 대한 김정일 위원장의 의지를 알게 되었으니 대단한 소득입니다. 이제 한랜드는 명실공히 한민족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렇군.”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위원장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는 한랜드에 새로운 한국을 건설할 수가 있지요. 위대한 한국을.”
눈을 가늘게 뜬 대통령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때 방안으로 비서실 직원 하나가 들어서더니 유종수에게 쪽지 한장을 건네 주고 돌아갔다. 쪽지를 읽은 유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에게 내밀었다. 유종수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대통령님, 북한 평양방송에서 조금전에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이 읽고 있었지만 유종수가 말을 이었다.
“북한은 테이프에서 미리 김정일 위원장이 말한대로 한랜드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흐음.”
쪽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통령도 쓴웃음을 지었다.
“한랜드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 정부가 북한을 제압하기 위해서 임대한 땅이라고 했군.”
대통령이 시선을 들고 둘러앉은 각료를 보았다.
“한랜드에 대한 공작을 중지하지 않으면 남북간 회담과 협력은 중지한다고 했어요. 따라서 이번 장관 회담도 취소가 되었습니다.”
방금 통일부장관이 예상한 내용이었으므로 모두 대통령과 비슷한 웃음을 띄웠다. 그때 비서실장 유종수가 말했다.
“대통령님, 요즘 시중에는 한랜드 붐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경제에 큰 영항은 없지만 저변에 활기가 쌓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국정원장 한경수가 나섰다.
“민심에 새로운 활력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국가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인데 그 이유는 한랜드 때문입니다.”
“그렇습니까?”
대통령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우리 국민이 무섭지. 한번 탄력이 일어나면 세계 제일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요.”
그러자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난 한랜드로 가겠다.”
김문호 씨가 선언하듯 말하자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촌끼리 장난질을 하던 초등학교 2학년까지 손자 영석과 같은 학년 종석도 분위기에 압도당해 눈동자만 떼굴떼굴 굴렸다.
“아니, 아버님.”
먼저 입을 연 것은 장남인 김석규였다. 남대문 시장에서 꽤 큰 의류 도매상을 하고 있는 김석규는 한때 종업원을 여섯이나 두고 아파트를 세 채나 소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 내보내고 다 팔았다. 남은 것은 가게와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였는데 은행담보를 빼면 5000만원 정도나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가서 뭘 하시겠단 말입니까?”
목소리를 높인 김석규가 방안에 모인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동생 철규와 여동생 미연이 각각 식구들을 데리고 와 있었으니 애들까지 합해서 14명이다. 모두 둘 씩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냥 이곳에서 지내시지 그 추운 곳에는 뭐하러 가신다고.”
그러자 둘째 철규가 나섰다.
“하긴 그 곳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만요. 500만명이 이주해도 모두 취업할 수가 있답니다.”
“광부로? 경비원으로?”
석규가 비꼬는 듯 물었을 때 김문호씨가 헛기침을 했다.
“난 새 나라에서 일하다 죽을란다. 그것이 이제는 내 꿈이 되었다.”
정색한 김문호 씨가 자식들을 둘러보았다.
“그래, 광부도 좋고 식당 주인도 좋아. 나는 한민족의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데 내 남은 인생을 바치고 싶다. 그렇게 죽는 것이 보람이 될 것 같구나.”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한 지 7년이 지났으니 김문호 씨는 이제 곧 70이다.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을 때 이제는 어머니 나현자 여사가 나섰다.
“나도 네 아버지하고 같이 갈란다. 그래서 이 집도 팔아서 너희들 셋한테 나눠 주기로 했다.
“아니, 어머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철규가 정색하고 말했다.
“어떻게 갑자기 그러실 수 있습니까? 저희들하고는 상의도 안하시고.”
“우리는 새 인생을 살란다.”
김문호 씨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곳이 춥긴 하겠지.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거기에다 세계 각지로 이민을 떠났던 한국인들이 몰려들게 되면 활기찬 땅이 될 것이다. 북한과 한국에서도 쏟아져 들어올 것이고, 나는 그 곳에서 아무 일이나 하겠다. 남은 인생을 보람있게 바치게 될 것이다.”
“아버지.”
그때 딸 미연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미연이 힐끗 남편 양동수에게 시선을 주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 식구도 따라 가겠어요.”
“어허.”
놀란 석규가 탄식했을 때 양동수가 입을 열었다.
“저희들도 한랜드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저같은 자동차 기술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알아보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님께서.”
“허, 그래?”
김문호 씨가 반가운듯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석규가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차근차근 상의를 하십니다. 나도 가게를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이 기회에 같이 떠나든지.”
그리고는 석규가 마누라 최봉숙을 보았다.
“애들 학교 문제도 있으니까요.”
그러자 철규가 불숙 말했다.
“아, 그 곳에는 학교가 없겠습니까? 여기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세르게이 말로비치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 일성전자가 한랜드를 임차한 한달 후였으니 다분히 정략적인 분위기가 풍겨졌다.
말로비치는 진급과 동시에 러시아 극동군 부사령관에서 사령관으로 영전하였는데 특히 한랜드 방위로 중앙아시아의 중러 국경지대에서 1개 군단이 증파되었다. 따라서 한랜드 방위에는 2개 군단 6개 사단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그 중 3개 사단은 기갑사단이었다.
러시아는 동북지역의 중러 국경 지대보다 한랜드 방위에 더 많은 기갑사단을 배치한 것이다. 말로비치 대장은 처음부터 한국의 임차지 응찰에 비우호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방해 공작을 해 온 인물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말로비치는 애국자였고 한국인이 러시아 동북부의 거대한 땅을 임차하면 고려인, 조선족, 재외동포에다 남북한의 이주민이 집결하여 한민족의 새로운 영토가 형성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말로비치가 한랜드 방위 책임까지 맡은 극동군 사령관으로 영전된 것이 러시아 수뇌부에서 그의 주장에 동감하고 있다는 증거로 봐도 될 것이었다.
말로비치가 사령부 내의 접견실로 들어섰을 때 기다리고 있던 동양인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6시여서 사령부의 일상 업무는 끝난 시간이었지만 참모들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말로비치가 아직 퇴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전혀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말로비치가 무뚝뚝한 말투로 말하자 나이들어 보이는 동양인이 웃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말로비치는 참모장 미카엘 중장과 대동해 왔으므로 악수를 나눈 넷은 마주보고 앉았다. 동양인 둘은 일본의 러시아주재 대사관소속 무관인 사쓰마 대령과 부관으로 소개된 미우라 대위였다. 정색한 사쓰마가 입을 열었다.
“북한은 남북한 장관회담을 무기 연기시켰고 개성 공단에 대한 한국측 통행인을 어제부터 제한했습니다. 이런 일은 개성 공단 설립후에 처음입니다.”
“그래요?”
말로비치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위장 아닐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사쓰마가 옆에 앉은 미우라에게 눈짓을 했다. 미우라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말로비치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건 우리 정보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어제 북한의 특무조가 하바로프스크 시내 인투리스트 호텔 근처의 카페에서 탈북자 3명을 체포해 가는 사진입니다.
말로비치가 사진을 꺼내자 사쓰마가 말을 이었다.
“어제 체포된 탈북자들 세 명이 탈북자 모임의 주도적 인물들이죠. 여기 이 사람은 탈북자 모임의 회장입니다.”
사쓰마가 손끝으로 사진 속의 한 명을 짚었다.
“이자는 김명천의 아무르 교역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탈북자의 한랜드행을 주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북한 특무조가 그 현장을 기습해서 탈북자 모임의 주모자 셋을 체포해 간 것입니다.”
“흐음.”
이제는 긴장한 말로비치가 눈을 가늘게 떴고 사쓰마의 말이 이어졌다.
“북한 최고위층에서 한랜드에 대한 한국측과의 협상을 거부했다는 소문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리가 없지요.”
사쓰마가 다시 손끝으로 사진을 가리켰다.일본 대사관의 무관 사쓰마 대령과 부관 미우라 대위입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볼펜으로 짚으며 신해봉이 말했다.
“사복 차림으로 극동군 사령부 정문 초소에는 납품업체로 신고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머리를 든 신해봉이 김명천을 향해 웃어보였다.
“이자들은 우리가 사령부 출입자 전원을 체크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겠지요.”
그러나 팔짱을 끼고 선 김명천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어쨋던 이것으로 일본 정부측이 적극적으로 러시아 극동군 사령부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명천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옆쪽에 서있던 강철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야마구치조를 앞에 내세웠지만 방법은 바꿀지도 모릅니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강철규가 말을 이었다.
“한랜드는 아직 헛점 투성이입니다.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이주 대열에 러시아나 일본측 방해 세력이 침투되어 있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방안은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김명천에게로 모여졌다. 하바로프스크 외곽에 위치한 김명천의 안가 응접실 안이었다. 방안에는 7,8명의 사내가 모여 있었는데 모두 김명천의 측근들이었다.
“만일 내부에서 무장 반발이나 강력 사건이 일어난다면 극동군이 한랜드에 진입할 근거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강철규가 낮게 말했을 때 김명천은 머리를 들었다. 이미 여러번 그 문제를 검토 해온터라 새로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전에 철저히 대비를 해놓아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와의 임차 계약에는 한랜드 내부 치안은 임차 당사자인 일성전자가 맡되 외부는 러시아 정부 소관이었다.
그러나 내부 치안이 불안하다고 판단 되었을 때 러시아 정부는 한랜드측의 동의없이 극동군을 진입 시키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무기는?”
불쑥 김명천이 묻자 뒷쪽에 서있던 사내가 즉시 대답했다.
“일정에 차질 없습니다. 내일 오후 6시에 제 27지점에서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랜드 내부치안용으로 러시아 정부는 오직 300정의 소총과 500정의 권총, 700정의 가스총만 반입하도록 허가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 무기는 모두 러시아 정부로부터 구입해야만 했다.
그래서 김명천은 북한측으로부터 1000정의 소총과 2000정의 권총, 거기에다 300정의 기관총과 수류탄, 지뢰, 통신장비등 다량의 무기를 비밀리에 구입했다. 그 무기가 내일 한랜드의 국경지역인 27 지점에서 인수되는 것이다.
“당분간은 철저히 위장하고 진행시키는 수 밖에 없어.”
심호흡을 한 김명천이 말을 이었다.
“안전부 체제가 굳혀지는 것이 우리들의 최우선 과제야.”
“알고 있습니다.”
안전부 제1국장을 맡게된 심해봉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는 정보 책임자인 것이다. 한랜드의 치안은 이제 안전부가 관리하게 되었으며 안전부장은 김명천이다. 심해봉이 말을 이었다.
“훈련 성과는 좋습니다. 1주일 후에 제1기생 500명이 배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2기생 500명도 한달후에 배출될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 한랜드 내부 깊숙한 오지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고려인과 조선족 동포로만 편성되었다. 그리고는 그 훈련은 한국측 교관들이 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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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이 열리고 대좌 계급장을 붙인 사내를 선두로 일단의 군인들이 들어섰으므로 홍태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곳은 나진 외곽의 보위부 건물 지하 취조실 안이었다. 옆에 나란히 앉은 이경만과 김운창은 머리를 들 기력도 떨어졌는지 상반신을 굽히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좌가 테이블 앞 쪽에 앉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홍태수를 보았다.
“동무, 식사도 안하고 있다던데.”
억양없는 목소리로 물은 대좌가 홍태수의 앞에 담배갑을 던져 놓았다.
“담배 태우시오.”
홍태수는 잠자코 담배를 집었다. 미제 말보로였다.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자 뒷쪽에서 손이 뻗어 나오더니 라이터 불이 담배끝에 닿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체포된지 15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기차와 자동차를 번갈아 타고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오는 동안 홍태수는 물 몇 모금만 마셨을 뿐이다. 식욕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경만과 김운창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당국은 탈북자가 체포되면 예전처럼 심하게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수용소 행이다. 거기에다 홍태수는 탈북자 모임인 조선해방회 회장인 것이다. 처형 당할 것이 분명했다. 홍태수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을 때 대좌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동무는 열차 기관사였으니 대우도 좋았을텐데 왜 탈북했소?”
지하실 안에는 10여명이 앉거나 서 있었지만 조용했다. 대좌의 시선을 받은 홍태수가 쓴 웃음을 지었다. 체포되고 나서 지금까지 아무도 그들 셋에게 이야기를 걸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지도 한시간이 되었는데 그저 끌고와 집어넣었을 뿐이다.
“조금 더 잘 살아보려고 나왔습니다.”
다시 담배 연기를 뱉고 난 홍태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사람 욕심 아닙니까?”
“그렇지.”
의외로 대좌가 머리를 끄덕여 보였으므로 이경만과 김운창도 시선을 들었다.
“하긴 쌀밥 먹고 나면 고기 먹고 싶고 고기 먹고 나면 더 좋은 음식 생각이 나지. 나도 이해할 수 있어.”
대좌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사람 욕심은 한이 없지.”
홍태수는 외면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여서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시간 만이라도 잠을 자게 해준다면 자고나서 죽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사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때 대좌가 말을 이었다.
“동무, 조선해방회 회원은 몇 명이나 되오?”
“모릅니다.”
자르듯 말한 홍태수가 담배를 시멘트 바닥에 버리고는 신발로 문질러 껐다. 지금부터 취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회원 1257명을 팔아 목숨을 연장 시킬 수는 없다. 홍태수는 혀를 깨물고 죽을 작정이었다. 그것은 이곳까지 끌려 오는동안 생각해 낸 방법이다.
“아니, 회장이 모르다니, 말이 됩니까?”
대좌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홍선생.”
정색한 대좌가 홍태수를 똑바로 보았다.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은 당연한데.”
“……”
“우린 곧 홍선생과 일행을 석방시켜 드릴 겁니다.”
그래도 눈만 껌벅이는 홍태수를 향해 대좌는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몇달 동안은 러시아에 가시면 안됩니다. 그 놈들이 눈치를 채면 안되歐?”
대좌의 말이 이어졌다.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실거요. 그럼 우리에게 협조해 주시겠지.” |
한랜드의 자치정부가 수립된 것은 그로부터 5개월 후인 7월초였다. 그때는 이미 한랜드의 인구가 600만에 달했으며 러시아와 구 소련 연방에 흩어져 있던 고려인 대부분의 이주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자치정부의 수반인 수상에는 일성그룹의 회장 안재성이 취임했으며 정부 각료 대부분은 명망있는 한국인으로 채워졌다. 선거에 의한 선출이 아니었고 모두 일성그룹 자체에서 결정한 일이었지만 적재적소에 훌륭한 인재가 기용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랜드는 한국기업인 일성그룹의 임차한 땅인 것이다. 김명천은 자치정부의 안전부장 이었으므로 중요한 각료였다. 가장 젊은 각료이기도 했다. 김명천이 한랜드의 제2 도시인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경이었다. 평양은 한랜드 서북방에 위치한 도시로 러시아인과 한민족의 인구 비율이 반반이었는데 이곳은 경공업 중심도시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숙소로 정한 이층 벽돌집의 응접실에는 김명천을 중심으로 7, 8명의 사내가 둘러앉았다. 모두 안전부의 간부들이다.
“어제 총격사건에 대한 러시아 측의 문의가 계속해서 오고 있습니다.”
먼저 평양의 안전부 책임자인 하경일이 보고했다. 그는 한국의 경찰서장 출신으로 제1차 이주민이다. 하경일이 굳어진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어느 놈이 현장에서 바로 러시아 정보기관에게 보고를 한 것입니다.”
“러시아 정보기관은 현장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서요?”
김명천을 수행해 온 강철규가 묻자 하경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현장에 러시아측 정보원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러시아 측에서는 사건 10분 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한테 상황 보고를 요구해 왔지요.”
김명천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어제 오후에 평양시 외곽에서 공장 건설 현장으로 향하던 현금 수송차량 대열이 습격을 받아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마스크를 쓴 괴한들은 2대의 경호차를 전소시켰고 현금 트럭에 실린 미화 35만불과 한국돈 8억여원을 강탈해 갔다. 근로자들의 월급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러시아 정부측에서는 상황 보고를 요청해 왔는데 평양의 안전부보다 정보가 빨랐던 것이다. 강철규가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놈들의 기동력이나 무장을 보면 분명히 조직이 움직인 것입니다. 부장님.”
김명천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부상자의 증언에 의하면 습격자는 차량 3대에 분승한 10여명이었고 모두 기관총으로 무장한 조직이었다.
“평양시 외곽을 봉쇄하도록.”
마침내 김명천이 지시하자 방안은 긴장감으로 덮여졌다. 한랜드에는 한반도의 지명과 도시명을 그대로 옮겨 붙인 곳이 많았는데 평양시도 그렇다. 그러나 한랜드의 평양시 인구는 아직 4만명이 안되었고 그중 1만7000명이 한민족이었다.
“러시아 치안군이 한랜드로 진입할 명분을 만들어 주면 안됩니다.”
김명천이 정색하고 말했다.
“안전부원을 증원시켜 범인을 색출할 때까지 검문을 강화하세요.”
“알겠습니다.”
긴장한 하경일이 대답했을 때 강철규가 다시 말했다.
“놈들이 다른 도시로 도망칠 여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도시 사이가 수백키로가 되는데다 인구 밀도도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김명천은 서울과 대전의 안전요원 200여명을 이끌고 평양에 온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전쟁이나 같다.평양에 경계령이 발동되었습니다.”
수상 비서실장은 일성그룹 비서실장이었던 박수근이다. 집무실로 들어선 박수근이 보고하자 안재성은 입맛을 다셨다. 평양의 사건은 이미 한국에도 뉴스로 보도된 것이다. 테이블 앞으로 다가선 박수근이 말을 이었다.
“김부장은 당분간 평양에 머물면서 사건을 해결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방송에서는 북한측 강도단의 소행으로 보도되었다던데.”
안재성이 정색하고 박수근에게 물었다.
“외교부장한테서 보고를 받았는데 사실이요?’
“예, 수상님.”
박수근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부상자 두 명이 습격자가 한국어를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람에.”
그것은 바로 한 시간 반 전에 일본 방송기자가 피해자들이 수송된 병원에서 얻은 정보였다. 일본 방송은 정보를 얻자마자 대특종으로 보도를 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 반응은 어떻소?”
안재성이 묻자 박수근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극동군 참모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상님.”
“흠.”
쓴웃음을 지은 안재성이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보았다. 한랜드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시는 면적이 한국의 수도 서울보다 10배 이상이 되었지만 아직 인구는 10만명도 안되었다. 그러나 수상 집무실이 위치한 서울시 북쪽의 고원 지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울시는 장관이었다. 흰눈이 덮인 광대한 대지위에 수백개의 거대한 크레인이 끝없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수상님.”
박수근이 방안의 무거운 정적은 깨뜨렸다.
“한국에서 이민 지원자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티오를 늘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북한측 티오가 줄어들테니 전체를 늘이는 수 밖에 없어.”
혼잣소리처럼 말한 안재성이 머리를 돌려 박수근을 보았다.
“우리가 언제까지 러시아 눈치를 봐야만 할까?”
인재성의 시선을 받았지만 박수근을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랜드의 이주민 할당량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1000만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남은 이주민 티오는 400만 뿐이다. 현재의 600만 한랜드 인구중 러시아인은 320만이었고 나머지 280만이 한민족이었는데 대부분이 러시아와 구 소련 연방에서 이주해온 고려인과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이었다. 중국 정부는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뿐만 아니라 전국에 흩어진 조선족 동포들에게 한랜드로의 이주를 권장했다. 그것은 고구려사 문제로 남북한 정부와 아직도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남은 400만 티오중 러시아계와 한국계가 각각 200만 이었는데 그 200만을 한국과 북한이 각각 100만씩 나누었다. 그런데 한국의 지원자가 현재 300만이 넘는 상황인 것이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비서실 직원이 들어섰다.
“실장님.”
직원이 박수근을 불렀지만 시선은 안재성에게 향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맛살을 찌푸린 박수근이 물었다. 비서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으므로 안재성도 어느덧 긴장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을 받은 직원이 말을 더듬었다.
“저, 대구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는 보고입니다.”이번에도 습격자가 한국어를 썼다는 것입니다.”
강철규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의도적입니다. 놈들이 일부러 한국어를 사용한 겁니다.”
소리치듯 말했지만 김명천은 물론이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한랜드 남쪽의 도시 대구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정확히 25분 전이었다. 이것도 평양 사건과 유사했는데 10여명의 일당이 은행을 습격하여 무차별로 총기를 난사하고는 미화 60만불과 한화 9억원 가량을 강탈해 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놈들은 총격을 하는 도중에 한국어로 소리치고 답했다. 그것을 은행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들은 것이다.
“부장님,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말을 그친 강철규가 시선을 돌렸고 방안은 무거운 정적에 덮여졌다. 그 뒷말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두가 아는 것이다. 불안한 치안 상태를 회복시킨다는 이유로 극동군이 진주할 수 있도록 임차 조건에 명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방을 들어선 사내 하나가 신해봉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신해봉이 김명천에게 말했다.
“부장님, 수상님의 전화입니다.”
김명천이 잠자코 앞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귀에 붙였다.
“예, 김명천입니다.”
“대구 사건의 보고를 금방 비서실장 한테서 들었는데.”
안재성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이어졌다.
“부장 생각은 어떤가? 대구에서도 한국어를 사용했다는데.”
“음모인 것 같습니다.”
자르듯 말한 김명천이 얼굴을 굳히고는 주위를 둘러 보았으므로 방안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명천의 말이 이어졌다.
“극동군의 진입 구실을 만들어주기 위한 계획적인 행동입니다.”
“누구 소행이라고 생각하나?”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인종은 알수 없지만 한국어를 할수있는 부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양인입니다. 수상님, 그렇다면 고려인, 조선족, 그리고 남북한인, 재일동포등으로 구분이 되겠습니다. 중국인이나 순수 일본인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 테니까요.”
“그렇다면.”
“재일동포가 유력합니다.”
안재성이 듣기만 했고 김명천의 말이 이어졌다.
“야마구치조에는 재일동포가 많이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한국어는 유창하지요.”
“……”
“일본과 극동군의 강경파가 제휴한 작전일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심호흡을 한 김명천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수상님,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도 러시아 정부쪽과 접촉해 볼테니까 너무 서둘지 말고.”
안재성도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시련을 겪었지 않나? 기운을 내게, 김부장.”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명천이 어깨를 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김명천의 얼굴을 본 모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명천은 웃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쪽 통화만 들었지만 웃을만한 내용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김명천이 입을 열었다.
“극동군과 일본 정보기관은 우리의 통화 내용을 모두 들었겠군.”
그리고는 김명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리가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322지역은 아직 지명이 붙여지지 않아서 기호로만 표기 되었는데 한랜드의 남동지역으로 근처에서 석유 시추 공사가 한창이었다.
만일 석유가 매장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면 H-322지역은 당장에 전주나 광주, 또는 원산 등의 한반도 고유 지명을 배정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석유 매장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H-322지역의 분위기는 활기에 차 있었다. 마치 옛날 서부 개척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비슷해서 포장도 안된 도로에 통나무집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한 몫을 노리고 각지에서 흘러 들어온 개척자 군상들이 우글거렸다.
물론 소동도 많이 일어나서 보안관 역할을 하는 보위부 파견대 유치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오늘도 파견대방 주경호는 술집에서 싸움을 벌린 러시아인과 조선족 출신 동포 두명씩을 유치장에 집어 넣었는데 이로써 수감 인원은 43명이나 되었다. 수용 한계가 30명이었으니 50%정도나 초과한 것이다.
“3급 이상은 67지역으로 보내야겠는데요. 대장님.”
보안대원 안대식이 말하자 주경호는 머리를 저었다.
“안돼. 조금 전에 연락했는데 그 쪽도 만원이야.”
67지역은 322지역의 상급지역으로 이른바 한국식으로 말하면 면소재지가 된다. 면소재지의 보안대가 있는 67지역의 유치장도 가득 찼다는 말이었다.
“이거 야단났는데, 더 이상 유치장에 넣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안대식이 투덜거렸다. 322지역의 보안부 파견대는 보안부의 가장 하부 조직으로 파견대장 휘하에 7명의 대원이 있다. 그러나 그 8명이 사방 700㎞의 면적에 6000명이 넘는 주민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거친 뜨내기여서 몇배나 더 힘이 드는 종자들이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대원 강민수가 들어섰다. 모자를 벗어 눈을 털어낸 강민수가 주경호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12지점 아리랑 싸롱에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조선족 하나가 칼을 던져 고려인의 팔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강민수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고려인이 고발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냥 놔뒀습니다. 큰 상처도 아닌 것 같아서요.”
“역시 고려인들의 수준이 높아.”
안쪽에 앉아 있던 대원 하나가 말했고 안대식도 동의했다.
“잘했군. 유치장도 만원인데.”
그때 주경호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강민수를 보았다.
“그 칼 던진 조선족놈 소재는 파악해 놓았나?”
“예, 일행 둘과 함께 합숙소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합숙소에 연락을 해서 확인을 했습니다.”
“그래?”
“상처를 입은 고려인은 서울여관에서 묵고 있다는군요.”
“흥, 돈이 많은 놈이군.”
“일행이 여럿이었습니다. 싸롱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순찰을 돌다가 그자가 일행 10여명하고 함께 차를 타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러자 안대식이 다시 머리를 들고 거들었다.
“대장, 그 놈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칼을 맞았다는 고려인 말입니다. 뭔가 찔리는 점이 있으니까 칼을 맞고도 고발을 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일행이 그렇게나 많은데 말입니다.”
“하긴 그러네.”
안쪽의 대원이 동의했고 강민수도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렇긴 합니다.”다음날 오전 10시가 조금 지났을 때 H-322지역에서 20㎞쯤 떨어진 기후관측소의 건물 안에는 10여명의 사내가 모여 있었다. 건물 밖의 공터에도 40, 50여명의 사내가 제각기 부산하게 움직였는데 그들을 싣고 온 러시아제 대형 수송 헬리콥터 2대가 아직도 로우터를 회전시키고 있다.
“놈들의 정찰 위성이 체크한다고 해도 우리를 석유 시추단으로 볼 겁니다.”
둘러선 사내중에서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말했다. 그는 이번 작전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박강일이다. 40대 중반의 박강일은 러시아 공군소속 특수기동대 중령 출신으로 지금은 한랜드 보안부의 기동대장이 되었다. 박강일이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지도를 손끝으로 짚었다.
“H-322지역은 이미 포위되었습니다. 놈들은 한명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김명천은 박강일이 짚은 H-322지역을 내려다 본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제 H-322지역의 파견대장 주경호가 성실하게 올린 보고서 한 장으로 한랜드에 침투한 일본의 행동대가 밝혀진 것이다. 어제 조선족이 던진 칼에 상처를 입은 사내는 고려인이 아니었다. 본명이 김인구인 재일동포로 야마구치로의 행동대원이었으며 그와 함께 있는 사내들은 모두 조직원이었다. 아니, 조직원이라고 하기보다 일본 정부의 비밀 기동대라고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중에는 자위대에서 퇴역한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는데다 현역 정보국 요원들도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H-322지역이 바로 일본 정부의 한랜드 공작 본거지였던 것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일본 요원은 모두 72명이다.”
김명천이 주위에 둘러선 작전의 간부들에게 말했다. 주경호가 찍어보낸 일당들의 사진을 한국과 북한 정부에 보내 판독시킨 결과 일본 행동대는 72명이 되었던 것이다. 기후관측소 건물은 구소련 정부시절에 세웠지만 꽤 오랫동안 비어져 있었으므로 지붕위의 하늘이 보였다. 김명천이 말을 이었다.
“오늘자로 한랜드에 대한 방해 세력은 일망타진 될 것이다.”
그리고는 김명천이 팔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작전 개시는 12시 정각이다. 이미 H-322지역 안으로 침투한 3개로 45명의 대원이 주변에 잠복해 있었으며 밖으로 통하는 6개 도로와 4개의 탈출 가능 지역도 봉쇄되었다. 마지막 간부 회의를 마치고 간부들이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이곳까지 김명천을 수행해온 신해봉이 말했다.
“부장님, 러시아 극동군 참모회의 결과가 아직 발표되지 않은 이유는 모스크바 정부에서 보류시켰기 때문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신해봉이 말을 이었다.
“국방장과 알렉세이비치가 미코얀 수상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국방장관 알렉세이비치는 떠오르는 실세인 극동군 사령관 말로비치의 유일한 견제자였다. 말로비치는 군에 대한 영향력이 부족한 미코얀 수상의 지원을 받아 급부상을 했지만 알렉세이비치의 반발도 상대적으로 증가되었다. 건물 안에는 신해봉과 박강일 둘 뿐이었으므로 김명천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대장이 러시아 쪽은 맡겠다고 했으니까 지켜보겠다.”
그리고는 김명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던 지금 우리들의 작전도 남북한 합동 작전이야. 우리는 한국측 기동대로 볼 수가 있지 않겠나?”
한국측 기동대는 고려인과 조선족 병력까지 포함시킨 혼합 세력이다. 일본 외무장관 와타나베는 보좌관이 넘겨주는 전화기를 받았다. 오후 1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는 지금 수상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다가 전화를 받으려고 복도로 나온 것이다.
“예, 와타나베올시다.”
걸직한 목소리로 와타나베가 응답했을 때 수화구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 당했습니다.”
순간 몸을 굳힌 와타나베가 무의식중에 주의를 둘러보았고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본부가 기습을 받은 겁니다. 오가와씨, 곤도씨, 모리씨 모두 죽거나 잡혔습니다.”
“이런.”
이를 악물었다가 푼 와타나베가 으르렁 대듯이 말했다.
“마쓰다군, 자넨 지금 어디에 있나?”
“본부에 있습니다.”
“그럼 자네만 당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럼 뭐야? 오가와, 곤도도 다 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자넨 도망친건가?”
“아닙니다.”
그러자 와타나베가 버럭 악을 쓰려고 입을 벌렸을 때 수화구에서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와타나베씨, 마쓰다도 우리가 생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한테 연락을 하도록 한겁니다.”
놀란 와타나베가 전화기를 귀에서 멀찌기 떼어냈다가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붙였다.
“당신 누구야?”
“한랜드의 보안부장 김명천이요.”
와타나베가 숨을 들이켰을 때 김명천의 말이 이어졌다.
“와타나베씨, 당신이 한랜드에 파견된 일명 시베리아조인 특수공작대로부터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 이것으로도 증명이 되었어. 지금 이 통화는 녹음이 되고 있거든.”
“빌어먹을.”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린 와타나베가 앞에 서 있는 보좌관을 노려보았다.
“앞으로 전화는 안받는다.”
“예, 장관님.”
“한랜드의 시베리아조가 당했다.”
몸을 빳빳하게 굳힌 보좌관에게 전화기를 던져준 와타나베는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수상 하마모토는 관방장관 요시다와 이야기 하면서 웃고 있었는데 와타나베를 보자 물었다.
“와타나베씨, 요시다씨가 같이 필드에 한번 나가자는데.”
그러나 자리에 앉은 와타나베의 어두운 표정을 보자 곧 정색했다.
“와타나베씨, 무슨 일이 있소?”
“아무래도 한랜드 공작은 포기해야 될것 같습니다.”
와타나베가 웅얼거리듯 말했을 때 수상이 눈을 치켜떴다.
“사고가 일어났소?”
“그렇습니다.”
길게 숨을 뱉은 와타나베가 상황을 설명 하는 동안 방안의 정적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윽고 와타나베가 말을 그쳤을때 하마모토가 입맛을 다셨다.
“더럽게 되었군 그래.”
“현 상황에서는 작전을 보류 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와타나베가 말하자 요시다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 셋은 이번 시베리아조 편성에서부터 간여를 해온 것이다. 이윽고 하마보토 수상이 탄식하듯 말했다.
“일본 열도 바로 옆쪽에 거대한 조선인의 영토가 또 하나 생기다니, 이게 무슨 운명인가?”아니, 이거 왜 이러시요?”
질색을 한 김문식씨가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오경호는 당황했다.
“김 과장님 앉으시지요.”
김문식의 팔을 잡아 겨우 다시 앉힌 오경호가 정색하고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잘 봐달라고 이러는게 아닙니다. 이미 제가 맡은 공사는 다 끝났고 검사에도 합격했지 않습니까?”
“그럼 됐지. 뭐.”
김문식이 뱉듯이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으므로 오경호가 서둘러 말했다.
“그래서 제가 떳떳하게 인사를 하려는 겁니다. 아직 일이 덜 끝났다면 봐달라고 하는 것이 되겠지만.”
“이봐요. 오 사장님.”
말을 자른 김문식이 똑바로 오경호를 보았다. 김문식은 한랜드 건설부 소속의 도로공사팀이었으니 공무원이나 같다. 그리고 오경호는 한국의 고속도로 전문 건설회사인 일양건설의 사장이다. 그들은 지금 일양건설의 현장 사무소인 콘테이너 박스 안에서 단 둘이 마주앉아 있는 것이다.
“오 사장님, 여기는 한국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고 계셔야 돼요.”
김문식이 또박또박 말하자 오경호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압니다. 김 과장님.”
“그럼 그 가방 치우세요.”
“아니, 김 과장님.”
“어서요.”
김문식의 기색을 본 오경호가 앞에 놓인 검정색 비닐가방을 들어 발 밑에 내려놓았다. 가방 안에는 미화로 30만불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번 오경호가 150억짜리 도로 공사를 마친 후에 공사 대금까지 받고나서 김문식에게 인사로 가져온 돈이다.
“아, 이것 참.”
쓴웃음을 지은 오경호가 김문식을 보았다.
“이건 관행인데, 그리고 다 끝난 후의 인사라 서로 개운한 상황인데 과장님이 너무 하십니다.”
“아닙니다.”
정색을 한 김문식이머리를 저었다. 그는 한국에서 건설부 사무관으로 있다가 퇴직한 후에 한랜드 정부에 취업했으니 나이가 60대 중반이다. 오경호의 시선을 받은 김문식이 말을 이었다.
“오 사장님, 앞으로 한랜드에서는 그런 인사는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랜드에서는 모두가 깨끗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공무원들이 솔선수범을 하겠지만 사업자들도 새로운 각오로 임해야 될 겁니다.”
김문식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 나이에, 새로운 조국을 위해 초석이 되겠다고 이 추운 땅에 온 내가 뇌물을 받아 챙기면 되겠습니까?”
열띈 목소리로 말하던 김문식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내 후손들에게 내가 한랜드를 건설하는데 조그만 봉사를 했다는 자랑 한마디라도 남기고 가야지요. 안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침내 오경호도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개발과의 7급 공무원 하나는 석유시추를 체크하다가 어제 동사했습니다.”
김문식이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도 한국에서 광업진흥공사에 다니다가 이 곳으로 자원해온 사람인데 일에 몰두하다가 죽었지요. 우리는.”
심호흡을 한 김문식이 말을 이었다.
“행복합니다. 목숨을 바쳐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조국이 있어서, 우리 손으로 만드는 새로운 조국이지요.”김명천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민경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은 청주라고 이름 붙여진 이 곳은 한랜드의 남서쪽에 위치한 고원지대로 순록의 사육지에 적합했다. 그래서 수백만마리의 순록떼가 광대한 고원위에 방생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어서 관광객이 몰려왔다. 한랜드의 관광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지나다가 들렀는데.”
김명천이 시선을 민경아와 사무실 직원들의 중간쯤에다 두고 말했다.
“이야기 할 것이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김명천이 누구인가? 매일 3개의 한랜드 방송은 물론이고 신문에 보도되는 보안부장이다. 한랜드가 탄생된 지 이제 1년이 가깝게 되어서 인구는 1200만이 되었고 그 중 한민족은 700만이었다. 남북한 이주자는 400만이 되었으며 300만 정도가 고려인과 조선족 등 해외동포들이다. 그리고 지금도 남북한 정부는 2000만명의 이주민을 더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각각 1000만명의 남북한 주민이 이주해 가면 한랜드는 명실공히 한민족의 새로운 조국이 될 것이다. 물론 그동안 한랜드 정부는 러시아 정부를 설득시켜 한랜드가 이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이미 봇물이 터지듯이 한랜드로의 이주 열풍이 불고 있는 터여서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사무실에 남아 있던 서너명의 직원이 자리를 피해 주었으므로 곧 김명천과 민경아의 둘이 남았다. 민경아는 정색한 채 김명천을 바라보고만 있다. 이곳 청주에 정착한지는 6개월째가 되어가는 중이었는데 그동안 김명천으로부터 세 번인가 전화가 왔을 뿐이다. 김명천이 선 채로 사무실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사업이 잘 된다는 소문을 들었어.”
시선을 든 김명천이 민경아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민경아는 아무르 교역을 나와 이 곳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오면서 관광 팜프렛을 보았는데 좋은 상품이 많더구만, 특히 순록 썰매 여행이 인상적이었어.”
“무슨일로 오신거죠?”
김명천의 말을 자른 민경아가 물었다. 그러나 시선은 부드러웠다. 민경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한테 부담 느끼실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혼자 잘하고 있으니까.”
“어쨌던 한랜드에서는 혼자 살아가기가 어렵지, 특히 개척지에서는.”
김명천도 부드럽게 말했다.
“자식이 곧 재산이고 노동력이니까.”
시선을 내린 민경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명천은 곧 한랜드의 총리인 안재성의 딸 안세영과 결혼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이미 진작부터 기정사실화 된 일이어서 요즘은 잘 보도도 되지 않는다.
“내가 제의를 하려고 왔는데.”
다시 시선을 든 김명천이 이제는 정색했다.
“사업 제의야.”
잠자코 눈으로만 묻는 민경아를 향해 김명천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여행사에 내가 투자하면 안될까? 자본금의 반 정도를 말이야.”
“……”
“그래서 설원용 차량도 몇 대 구입하고 통나무 모텔도 짓는거야. 내가 오면서 모텔용 부지 좋은 곳을 봐 두었어.”
그리고는 김명천이 민경아“?바짝 다가섰다.
“내가 보안부장을 그만두면 이곳에서 당신하고 같이 사는거야. 자식들과 함께.”
김명천이 민경아의 어깨위에 두 손을 얹었다.
“당신하고 둘이서 우리 인생을 개척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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