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균형의 영성 ★★★ 페이지 : 278
저 자 : 토미 테니 역 자 : 이상준
출판사 : 토기장이 독서 기간 : 2007.11.14
1.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 이것은 기독교 영성에서 오래 된 주제이다. 토마스 그린의 [세상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성바오로)이 그 부분을 전통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고, 조안나 위버는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좋은씨앗)에서 현대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조는 전통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 개인을 놓고 볼 때는 지나친 양극화(兩極化)가 아닐까? ‘균형’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차이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르다와 마리아 본인도 그것을 인정할까? 저자가 122페이지에서 지적했듯이 모든 사람 안에는 두 성향이 다 ‘놓여’ 있으며, 그것은 마르다나 마리아 자신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즉, 마르다에게도 마리아적 성향이 있고 마리아에게도 마르다적 성향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상대의 성향은 전혀 없는 극단적인 존재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190페이지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편재’와 한 장소에 ‘집중’하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편하기는 하지만(=집중),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성향이 다 들어있음(=편재)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2. [균형의 영성]이 제시하는 ‘균형’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 물론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추신(균형!) 분이시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 마르다와 마리아는 두 가지 영성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가지 영성을 ‘각각’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아닌가! 왜 두 사람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굳이 두 사람을 ‘대립’시킬 것도 없지만, ‘균형’의 명목으로 ‘통합’시킬 것도 없지 않을까? 그냥 그대로 인정한다면…
3. 결론은 명확하다. ① 둘 다를 각자 인정할 것! ② 서로를 배워갈 것! 이의를 제기할 건덕지가 없다. 그럼에도 시비를 걸고 싶은 건 왜일까? 너무도 ‘매끄러운’ ‘균형’이라는 개념에 대한 거부감? 섬김이 없는 예배는 영적 비만을, 예배가 없는 섬김은 탈진을 가져온다. (이것은 하용조 목사가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에서 한 말이다).
4. 지나친 도식화! 저자가 본문 가운데서 말하는 것을 추천사를 쓴 이들이 다시 언급하며 설명하는 부분.. ‘마리아의 영성=십자가의 수직, 마르다의 영성=십자가의 수평’(강준민), ‘열정=수직, 긍휼=수평’, (고형원, 본문 144p). 그리고 근거 없는 전제! ‘하나님은 균형을 가장 기뻐하신다’고?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단언’하는가? ‘마리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마르다는 사람을 섬긴다’고? 이것이 맞는 도식인가? 두 사람의 차이가 과연 ‘대상’의 차이인가? ‘방식’의 차이가 아니고?
5.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듣도 보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해석과 적용!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셨던 것이 그분의 신성과 인성 모두 대접 받으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저자의 ‘묵상’이나 ‘상상력’에 근거한 주관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경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그의 주장은 그의 주관적인 해석에 근거한 일방적인 주장과 추측일 뿐, 객관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6. 예배와 섬김… 연합… 양쪽 다 끌어안기(52p). “빵과 복음”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로잔 대회 이후로 ‘빵이냐 복음이냐’하는 논쟁은 많이 해소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저자의 입장은 ‘연합 지상주의’적으로 보인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나처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나처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이다!
7. 상상력! 작가적 상상력이 유익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김성일 장로의 [제국과 천국]에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상에서 요한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맡기셨는가를 다루는 부분은 성경을 보는 시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순전히 상상에 의한, 주관적인 해석은 곤란하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에, ‘마리아는 직감으로 마르다가 힘들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68p)는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인가? 반면에, 112페이지에 나오는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가까이 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법한 반응에 대한 묘사는 신빙성이 있다.
8.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다는 마르다대로 놔둬야 한다(83p)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각각의 특성에 맞추어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서로 돕도록 해야 한다(88p)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저자는 267페이지에서도 각자를 놔두어야 한다고 다시 주장한다.
9. “교회가 소금을 잃어갈수록 세상은 갈증을 잊어버리게 된다”(87p)는 말은 참으로 멋드러진 문장이다! ‘교회’라는 ‘소금’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느끼게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그 ‘갈증’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아닌가!
10. 마르다가 집중하는 것! 성경의 마르다는 예수님의 필요에 집중했다(109p)! 그러나 일반화 된 마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러한 대상의 변화는, 일반화가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보다 보편적으로 상황과 대상을 깨우쳐주지만(장점), 본문과는 좀 동떨어진 해석과 적용으로 연결되는 것(단점)이다.
11. 영적 감수성 지키기(110p). 정말로 필요한 부분이다! 나쁜 영화만이 아니라 감상적인 것도 피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김남준 목사의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김남준 목사는 ‘포르노를 보는 것은 물론 나쁘지만 할 일 없이 쇼핑 목록을 보는 것은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또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이 ‘불륜’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종류의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은 지독히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경고와 저자의 이야기는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적 민감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결국 우리를 범죄로 밀어 넣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114p)!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12. 내 안에 넣어 두신 마리아와 마르다(122p). 정도와 비율의 차이는 있다. 어떤 이는 마르다에 아주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다른 이는 마리아에 아주 가까우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중간 또는 1/3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주어진 성향 그대로 행할 것인가 아니면 중심을 향해 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13. 가인과 아벨 이야기… 피가 있고 없고를 기준으로 삼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저자는 다윗의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피 없는 ‘감사와 구원 요청’ 또는 ‘상한 심령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더 선호하심을 보여준다. 전에는 서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깨달음이다.
14. 손 마른 자에 대한 해석(134p)은 지나치게 극(comedy)화 되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 주고자 하신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고, 예수님도 그들의 그런 생각을 아셨다. 손 마른 자가 저능아가 아니라면 어느 손을 내밀라는 것인지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15. 마르다의 약점에 대한 언급(135p)은 논리적인 모순과 함께 저자의 ‘편애’를 보여준다. 마르다에게 ‘행동하는 것’이 강점이요 ‘마음의 열정이 없는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에게는 ‘마음의 열정’이 강점이요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르다의 약점만을 ‘약점’으로 인정하고, 마리아의 약점은 약점으로 여기지 않는 듯이 말한다. 물론 책의 곳곳에서 자신이 공평한 위치에서 마르다를 인정하고 그녀를 더 온전하게 하고자 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저자의 ‘마리아에 대한 편애’를 보여준다. 야곱이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혀준 것처럼… 게다가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할 때에, 그리고 많은 경우에 ‘단정적’인 표현(“~이다.”)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유보적’ 표현(“~으로 보인다”, “~인 것 같다”)을 사용하는 것이 더 옳아 보인다.
16. 스데반과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149p)는 저자의 기본 시각과 전제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지나치게 양극화 된 시각을 독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인격 안에 자연스레 들어가 있는 두 성향을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대립’시킨 후에, 다시금 ‘균형’이 필요하다며 그 둘을 ‘봉합’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둘을 묶어서 하나로 보는 전일(全一)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어땠을까?
17. 마음에 와 닿는 좋은 문구들… “열정은 논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도록 만든다.”(167p)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드리는 그 자체보다 예배를 위한 마르다의 ‘사전 준비’를 더 편하게 생각한다. 물론 둘 다 중요하다. 하지만 예배는 예배 준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168p) “우리의 실수는 마르다의 그것처럼 주님의 분명한 임재가 나타났을 때도 그분의 발 앞에 앉지 않고 여전히 준비에 몰두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시면 준비를 멈추고 주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68p)
18.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면서도 정작 그분이 오시면 오래 머물지 말아 주기를 요구하는 우리의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인 태도에 대한 저자의 지적(174p)은 정곡을 찌른다!
19.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은 이유에 대한 그럴듯한 상상(177p)은 유쾌하다! ‘날마다’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20.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커져도 사람을 향한 긍휼이 커지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232p)라고 말하는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말을 보면서 토저가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올랐던 그는 과연 실패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저자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마리아)과 ‘사람을 향한 긍휼’(마르다)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분법적이다! 바로 뒷 페이지에 나오는 “확실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만 지적해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233p)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문제만 지적’, ‘사람을 향한 긍휼=확실한 해법을 제시’라는 공식을 보여준다. 왜,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문제 지적에 그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선입견은 매우 뿌리 깊어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정은 사람을 향한 긍휼을 가져오고, 문제의 지적과 함께 확실한 해법도 제시하게 한다.
21. 저자의 결론적인 주장은 두 갈래로 나뉜다. ① 하나는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다는 마르다대로 놔두라. 양자 간의 자연적인 상호작용으로, 환대함으로 만들어내는 집안에 균형을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267p)라는 것이다. ② 다른 하나는 “이제 마르다를 격려하여 주님 발 앞에 함께 앉으라”(275p)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론적으로 마르다를 마리아의 자리로 끌어들이는 것이요, 첫 번째의 결론 즉, 그들을 그대로 놔두라는 결론과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저자는 이 두 주장 사이의 부조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간과하는 것일까? 이 책의 주제를 감안한다면 이 부분을 정리해주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