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 비보이 <킬라 몽키즈> 리더 양문창 님
자기 세계를 가진다는 건 선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결단과 최선을 요구한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는’ 세계. 살아있다는 건 바로 그런 자유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또 최선을 다하는 일은 자기뿐만 아니라, 타자들의 행복까지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새해, 새로운 출발이다. 허나 막 캐어낸 광석처럼 새로움은 현재의 내 속에 예비된 보석이 아니던가. 새롭다는 건 결국 최선의 다른 이름일 뿐. 새해 아침에 만난 한 비보이는 그 진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젊은 최선이었다.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지요. 계획이야 일 년 내내 같아요. 항상 업그레이드되는 삶이지요. 어떤 것이든 가치를 높여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에 닫혀있지 않기 위해 뭘 하든 뭔가를 배워야지요.”
문창씨는 지금 스물셋. 비보잉을 좋아하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비보잉인 줄도 모르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그냥 따라 즐겼다. 1990년대 후반에 전개되기 시작한 한국 비보잉의 역사에 문창씨는 자연스럽게 흡수된 셈.
“처음엔 놀이로만 생각하던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어요. 인문계에 진학했는데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춤을 출 수 없었죠. 그러던 중 경성전자정보고등학교 댄스부 연습실을 보고, 거기 매료되었지요. 아주 떼를 써 전학을 했습니다.”
그가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부모님 속을 어떻게 썩였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공부와 춤을 병행하기는 어려운 노릇. 춤이라는 순수한 자유를 선택한 문창씨가 주어진 타성을 뛰어넘는 데는 지독한 노력밖에 없었으리라.
“연습실이 생기자 회원을 모으고 함께 연습했어요. 그러다 만든 팀이 <킬라 몽키즈>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지요. 그러다 다리를 다쳐 수술 받고 열 달을 쉬어야 했어요. 절름발이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다시 춤출 수 있을 것을 희망으로 삼았습니다. 영상자료나 음악편집을 공부하거나 깁스를 한 채 동작도 연습하며 재기를 준비했죠. 목발 짚고 공연장도 다니면서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아마 그때 부모님이 저를 믿어주신 것 같아요. 춤추다 다리까지 다쳤으니 포기하려니, 했는데 오히려 더 열심인 걸 보고, 제 의지를 이해해 주셨죠.”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 인정받는 게 사람의 능력이지만, 그게 그냥 그렇게 쉽기만 했을까. 자기 씨앗을 틔운다는 건 뜨거운 열망과 성의 있는 행위가 절대적이다. 그 와중에도 부모님이 다시 공부를 설득, 한 공연예술과에 지망했다가 비보잉을 배울만한 환경이 아닌 듯해 포기했다. 허나 계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간곡한 뜻을 받들어 동명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부모님 당부로 한 공부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춤 말고 다른 세계도 제게 중요하다는 걸 이해한 거죠. 그전엔 학교 다니는 다른 이유를 잘 몰랐지요. 경영과 관리에 재미를 느꼈어요. 지금의 리더 활동에도 그 공부와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됩니다.”
모든 체험과 발견은 내 안에서 섞이면서 자양분이 되는 법. 그래서 앞을 내다보고 꾸준히 공부를 권고한 부모님의 지혜에 그는 지금 감사한다. 현재 <킬라 몽키즈>의 식구들은 20명. 부산 비보이팀 중 가장 성실한 팀이지만, 그 운영과 유지를 염려하는 눈길이 많다. 춤을 돈으로 생각한 적 없지만 현실이 느껴지면서 도전의지가 생겼다. 자기가 좋아하는 삶을 스스로 살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상업적인 건 싫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했어요. 돈을 벌만한 기대가 없었지만, ‘해봐야겠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싶어 닥치는 대로 접근했습니다.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공연을 하고 강사를 확보하게 되었지요.”
춤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인식을 목표로 뛰었다.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이 바로 몸으로 꾸려야하는 현실 때문이 아닌가. 그는 지금 재송중, 반여중, 등 많은 학교와 댄스스쿨에 비보잉 수업(스쿨)을 주러 일과가 바쁠 정도. 스쿨을 하면서 배운 게 더 많다. 춤을 그냥 재미로 했지만 가르치는 데는 실력이 중요하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고민하다보니 저절로 공부하는 삶이 되었어요. 비보잉문화의 개념과 이론에도 제대로 접근하게 되었구요. 춤은 어떤 장르보다도 자신감을 줍니다. 성격도 많이 바뀌지요. 힘든 동작을 해내었을 때의 성취감은 참 큽니다. 기본동작은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한 게 어떤 느낌을 끌어내기까지가 어렵고, 헤드 스핀 같은 파워 무브는 육 개월 연습도 모자라죠. 어쨌건 춤추는 아이들에게 당당한 가치를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리더하면서 크게 느낀 건 선생님과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다. 학생들의 고민을 상담하면서 선생님과 부모님의 입장과 심정을 이해하게 된 것. 무조건적으로 반항하며 우기던 예전의 자신을 학생들에게 자주 본다. 가장 듣기 싫었던 ‘백댄서 할 거니’라는 비난에서부터 인정받는 자신을 획득하는 데까지 그는 아이들의 고민을 이해한다. 스물셋이지만 춤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그는 아빠노릇, 선생님 노릇도 진실한 애정으로 해낸다.
“가장 중요한 가치도 능력도 사랑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관계든지요. 가족 간이건, 팀 간이건, 사랑이 개입해야죠. 혼자 슈퍼댄서를 꿈꾼 적도 있지만 이젠 그런 것보다 팀원들이 중요한 걸 압니다. 처음에, 같이 춤추는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걸 기억합니다. 팀은 바로 가족이예요. 팀이 없었다면 나도 없고, 아마 춤을 포기했을 지도 모르죠.”
사랑은 삶을 열어주는 것이다. 문창씨가 말하는 사랑은 그렇게 상대방을 발견해주며, 충실한 집중을 요구하며, 자유로운 영혼이 결합하는 하나의 이름일 것이다. 모여 춤춘다는 이유 하나로 핍박받고, 양아치나 불량서클 취급을 받던 그 억압을 극복하게 해주고 싶은 바탕도 바로 사랑이리라. 이 또한 그가 받은 사랑의 능력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부산의 비보잉 문화에 나름대로의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느낀다는 문창씨.
“자연스럽게 길거리 공연이 지속되었으면 좋겠어요. ‘서울 가야 성공한다’라는 말이 가장 싫어요. 예전엔 오히려 서울에서도 보러올 정도로 부산이 더 풍요로웠어요. 없어진 팀들 반은 서울로 가버린 경우입니다. 이전엔 용두산공원이나 사직운동장, 지하철역 등에서 춤추는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죠. 자꾸 통제받으니 결국 스튜디오나 학원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가 떠나버리면 그런 공간의 가능성은 더 희박해지죠. 아이들이 춤출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어요. 지금 서면 1번가나 해운대 문화존처럼, 열린 공간에서 굳이 전문 댄서가 아니라도 삶을 즐길 수 있는 문화 만들고 싶습니다.”
원래 힙합이나 비보잉은 길 위의 춤판이 아닌가. 리듬을 꿈꾸는 영혼들이 평범한 몸의 일상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춤을 통해 소통하려는 의지. 문창씨는 그곳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킬라 몽키즈>는 얼마 전에 개관한 <아트팩토리 숨>에 공간을 마련했다. 그곳은 예술활동과 연습을 위해 장림공단 속 낡은 공장을 문화적 공간으로 창출해낸 자리. 거기서 자신의 선택을 향한 문창씨의 도전은 더 당당해진다.
“비보잉 안에 머무르기보다 춤에 관련된 것 다 배우고 싶어요. 후배들에게 다 가르쳐주고 싶구요. 퍼포먼스, 연기, 음악기획, 공연기획, 안무가, 강사 등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개척하고 싶어요.”
역동적인 표현으로 세계를 찬탄시킨 비보이 문화는 다양한 장르와 연결되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잠재력으로 놓여있다. 춤이나 추고 다니던 말썽쟁이들이 아닌, 강한 리듬과 화려한 몸동작, 스텝과 옷차림 등 큰 폭발력을 가진 문화에너지들. 그 무한 가능성의 꿈에 몰두해 있는 그의 새해계획은 무엇일까.
“어떤 청사진보다는 저로 인해 무언가 새로운 길이 보였으면 합니다. 춤을 통한 다양한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올해는 실용음악을 공부할 겁니다. 그러나 욕심도 중요하지만 죽기살기로 밀어붙이는 식보다는 삶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가 더 가치 있고 무서운 의지가 아닐까요.”
떠나오며 ‘삶은 매순간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떽쥐베리의 말을 떠올렸다. 삶은 이미 태어나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도 태어나는 중이다. 새해 아침에 그 문구를 기억하는 건 행복한 일. 그 하루하루는 얼마나 보배로운가. 옆 고철하치장에서 쏟아지는 소음이 내내 힘들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새해 첫걸음은 새로운 여운으로 한동안 반짝일 것 같은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