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적비연수
2000년 우리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하반기 최대의 블록버스터로 누구나 강제규 필름의 [단적비연수]를 꼽았었다. 그만큼 45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단적비연수]는 영화계 안팎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우량주였다. 적어도 시사회에서 영화가 공개되기 이전까지는.
[단적비연수] 흥행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가 개봉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이면에는 영화계 주류 세력의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영화계 최고의 강자는 수년 동안 왕좌를 고수하고 있는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이다. [투캅스] 시리즈의 성공으로 배급권을 쥐게 된 강우석 감독은 이후 서울극장의 곽정환 사장과 제휴하여 충무로 주류 세력의 배급권을 흡수하면서 명실공히 무림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243만(서울 관객 기준) 관객동원의 대기록을 세운 [쉬리]의 힘으로 단숨에 영화 권력의 핵심부에 등장한 강제규 감독은, 강제규 필름을 설립하고 강남역 네거리에 있던 기존의 동아극장을 장기 임대하여 ZOOOOZ(주공공이)라는 복합극장을 개관하는 등 국내외 투자자들의 투자를 끌어내 사업을 확충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산업이 힘을 받으려면 흥행 영화가 있어야 한다. 시네마서비스가 특별한 흥행작 없이 주춤거리는 사이 수년동안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 오던 명필름이 [공동경비구역JSA]로 최고수 자리를 넘보는 강자로 성장해버렸다.
강제규 필름은 첫 작품으로 [쉬리]의 각본을 썼던 박제현씨의 오리지날 시나리오 [단적비연수]를 선택했다. [단적비연수]는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의 속편격이다. [은행나무 침대]에 등장했던 진희경, 한석규, 신현준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그의 전생이 까마득한 고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만약 [단적비연수]가 적어도 [공동경비구역JSA]에 버금가는 관객동원을 한다면 [쉬리]의 후광까지 힘입어 영화계 힘의 중추는 급격하게 강제규 감독에게로 이동할 것이다. 또 이 영화를 배급하는 CJ엔터테이먼트는 겨울 영화 배급시장을 둘러싸고 시네마서비스와 맞서고 있는데, [단적비연수] 성공한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시네마서비스 주도의 배급시장이 빠른 속도로 CJ쪽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렇게 영화계 안팎에서 [단적비연수]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 지난주 주공공이에서 개최된 일반 시사회에 출연배우가 아닌 전도연, 진희경, 정우성, 장혁 등의 배우들을 비롯해서 사이더스의 차승재씨 등 영화
거물들이 대거 참석한 것만 봐도 [단적비연수]에 쏟아지는 시선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적비연수]는 기대 이하였다. [쉬리]에서도 알 수 있지만 강제규-박제현 팀의 시나리오는 사실 대중들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무서운 흥행감각을 갖고 있다. 나쁘게 말하자면 3류 신파의 구도지만, 상업적으로는 그만큼 응전력이 강하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시나리오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박제현 감독의 역량이 이 정도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소화해낼 정도로 충분하지 못했다. 감독은 대규모 셋트에서 군중이 동원된 몹씬을 찍거나 속도감 있는 액션씬을 찍을 때 허둥거린다. 자신이 직접 쓴 소재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영상으로 표출하는 연출력이 떨어진다.
[단적비연수]는 네 명의 젊은 남녀에 얽힌 사랑 이야기이다. 제목의 각 글자는 네 남녀의 이름들이다. 원래 제목은 단적비연이었는데 수 역을 맡은 이미숙이 자신의 이름을 제목에 넣어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서 [단적비연수]가 되었다. 시대적 배경은 까마득한 옛날, 매족과 화산족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신의 노여움을 받은 매족들은 척박한 땅으로 쫒겨난다. 매족의 여족장 수(이미숙 분)는 천하를 지배하기 위해서 화산족의 한을 유혹해서 비(최진실 분)를 잉태한다. 비를 제물로 바치면 매족은 다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 한의 도움으로 구출된 비는 화산족이 살고 있는 마을로 가서 단(김석훈 분), 적(설경구 분), 연(김윤진 분)과 함께 자란다.
연은 화산족의 왕손이고 적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적은 비를 사랑한다. 하지만 비가 사랑하는 사람은 단이다. 그리고 단과 적은 제일 가까운 친구 사이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엇갈린 네 남녀가 각각 사랑을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서로를 배신하게 되고 애증이 뒤얽히게 된다.
그러나 [단적비연수]의 이야기 구조는 너무 장황하다. 두 시간으로 압축해서 그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잔가지를 쳐냈어야 하는데, 너무 큰 욕심을 갖고 방만하게 내러티브를 끌고 가고 있어서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네 인물의 어긋난 운명과 사랑을 지켜보지만 그 속으로 동화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기본적인 줄거리 전달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가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지만, 그 세밀한 내면까지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사실 시나리오 자체만 가지고 본다면 [단적비연수]의 상업성은 지극히 높은 것이다. 이 정도의 대중적 구도로 사랑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끌고 나갈 시나리오 작가는 우리 나라에서 몇 안된다. 하지만 박제현 감독의 불행은 아직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만한 연출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두 번의 시사회를 보았는데, 하루 시차를 두고 본 영화가 각각 달랐다. 역시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편집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지루한 쇼트를 걷어 내고 강렬한 쇼트를 삽입함으로써 전혀 다른 리듬감과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현재 [단적비연수] 개봉까지는 일주일 정도 남았기 때문에 제작팀에서는 밤을 새워 재편집을 하고 있을 것이다. 후반 작업의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사회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보완 수정 편집해서 극장 개봉용영화는 훨씬 완성도 있는 필름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9개월 동안 일반 영화의 3배 가까운 촬영회수 105회, 촬영컷수 2,500컷의 촬영을 했기 때문에 충분한 물량이 확보되어 있으므로 편집에 따라서 얼마든지 완성도 있는 영화가 나 올 가능성은 있다.
적 역의 설경구는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은 [박하사탕]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재현할만한 적역을 맡고서도 전작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절규하는 씬이 아닌 일상적 대사를 할 때는 톤마저 불안정해서 그의 연기력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김석훈은 TV 트랜드 드라마에서 익힌 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김윤진의 비극적 연기는 [쉬리]의 그것을 맴돌고 있다. 최진실의 순진가련형 캐릭터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미숙 역시 [정사]에서 보여준 일상 뒤의 가려진 모습까지 전율적으로 표현해내는 섬세한 연기에는 턱없이 못미친다.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놓고도 그들의 잠재적 역량까지 끌어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