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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담▪성공회대 교수/ 중어중국학과
1. 마오쩌둥 백십세 탄신일, 천안문에 가다
2003년 12월26일은 마오쩌둥(毛澤東) 탄신 110주년 기념일이었다. 27일부터 북경에서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제2차 국제학술문화회의가 있었다. 중국친구들이 말했다. “26일이 마오주시(毛主席, 모택동을 중국인들은 아직도 그렇게 부른다) 탄신일이라서 27일 포럼회의를 시작하는 거지?"
자신들보다 내가 더 마오쩌둥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물음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대학교 중문과에 입학한 날, 선물로 받은 중국혁명과 마오에 관한 영어원서, 거기에 또렷하던 Maozedong, 스무살 봄, 그렇게 나는 마오를 만났고, 그에게 혁명을 사숙했다. 그뒤 내 젊음의 시작과 지금에 이르기까지 삶의 판을 다시 짤 때마다 목숨줄처럼 쥐고 있었던 마오라는 끈. 그것은 아마 앞으로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한, 결코 놓을 수 없는 삶의 미제괘(未濟卦)일 터이다.
26일 아침 일찌감치 천안문에 갔다. 우리나라 같으면 10시부터 무슨 국가적 행사가 있을 터이기에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그러나 국가박물관에서 마오쩌둥당안전(毛澤東檔案展)을 열 뿐 예의 그 모습이었다. 천안문에 걸린 마오주시(毛主席) 얼굴 한번 보고 당안전을 보러 국가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다. 당안전I, 모주석이 썼던 편지며, 시며, 글씨들을 모아놓은 기념전시회, 중국은 기록의 나라이다. 그 역사의 기록물들을 당안이라 부르며 기록학으로서의 당안학이 발달해 왔다. 거기 이른 아침부터 그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에 가까웠다. 기념우표를 사기 위해 줄지은 사람들, 글씨 하나하나를 새기는 촌로들.
중산복에 모자를 쓴 노인의 눈빛이 모택동의 편지에 가닿아 떠날 줄을 모른다. 그 또한 모택동에게 묻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마오주시(毛主席), 당신이 바란 나라가 지금 이것이었습니까?"
1935년 10월 이만 오천 리 대장정은 중앙홍군이 민산(岷山, 四川‧淸海‧甘肅‧陝西 사이에 있는 산맥, 약 4,500미터의 높이로 산정에는 사시사철 눈이 있어, 大雪山이라 불린다)을 넘음으로써 성공했다. 마오는 그날을 기념하여 <칠률‧장정(七律‧長征)>이란 시를 지었다. 아래 사진은 그 시를 마오가 1961년 2월14일 다시 쓴 것이다.
長 征
一九三五年十月
紅軍不怕遠征難, 萬水千山只等閑。
五嶺逶迤滕細浪,烏蒙磅礴走泥丸。
金沙水拍云崖暖,大渡橋橫鐵索寒。
更喜岷山千里雪,三軍過后盡開顔。
장정 1935년 10월
홍군은 원정의 고난을 두려워않고,
숱한 물길과 산들은 한가해지길 기다릴 뿐
구불구불한 다섯 봉우리 연면히 솟은 모습 미세한 파도가 용솟음치는 듯,
우멍산의 기세는 높아 돌이 떨어져 뒤섞이는 것이 진흙탄환을 내쏘는 듯.
금사강물은 구름도 쉬어가는 깍아 지른 절벽을 어루만지고,
대도교(濾定橋, 四川省 濾定縣)에 가로놓인 철줄 다리가 차구나.
민산 천리길 내리는 눈 더욱 기쁘고야,
삼군이 행군한 뒤, 모두 희색이 만면.1)
중국공산당의 “삼십육계 줄행랑작전, 도망은 가지만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고 다음 싸움을 준비한다는 이만 오천 리 대장정, 그것의 성공을 자축하는 칠률‧장정(七律‧長征)을 왜 1961년의 시점, 섣달 그믐날 다시 쓴 것일까?
1961년 2월,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중국. 그해 춘절, 곧 설날은 2월15일이었다. 2월12일 마오는 고향인 후난성 창사(湖南省 長沙)에서 인민공사에 관한 보고를 받고 후난성위원회(湖南省委員會)의 조사팀과 논의를 끝낸 뒤 광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설을 보냈다. 이 시는 설 전날 세모에 다시 쓴 것이다. 열흘간의 휴식 뒤, 마오는 2월25일 타오주(陶鑄), 후챠오무(胡喬木), 천버따(陳伯達), 자오쯔양(趙紫陽), 랴오루옌(廖魯言), 티엔지아잉(田家英)을 지징컹(鷄頸坑)으로 불러 회의를 개최한다. 농촌인민공사공작조례의 초를 잡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인민공사의 규모와 체제를 조정하는 문제를 놓고 각기의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마오는 평균주의의 문제를 제출했다. 사(社)나 대(隊), 하나의 인민공사 안에 큰 단위(大隊)와 작은 단위(小隊)가 있을 때, 규모를 크게 하면 대대와 대대 사이의 차이는 줄어들겠지만, 작은 단위 소대간의 평균주의,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균주의가 이루어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제출한 문제의 요지였다. 이 두 가지 평균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방식은 인민공사체제와 분배폐단에 대한 중요한 개괄이라고 훗날 평가된다. 2월6일 항저우(杭州)와 10일, 11일 창사(長沙)에서의 토론에서 평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들이 개진된 바 있었다. 기본단위 내에서 생산소대에는 부유한 부류, 중간, 가난한 소대의 구별이 있는데, 통일적으로 분배하니 그러한 평균주의에 대해 군중들은 불만이 있다는 것이다. 광저우(廣州)조사팀은 마오의 담화내용을 들은 뒤, 마오가 생산소대의 명칭을 생산대로 개칭할 것에 대해 동의를 표시했다. 천버따는 2월19일 이미 마오에게 <광둥농촌인민공사 생산대 조사기요 (廣東農村人民公社幾個生産隊調査紀要 designtimesp=3680>를 보냈다. “우리는 마오주석의 생산소대를 생산대로 일률적으로 개칭하는 문제와 생산대대, 생산대, 관리구 등으로 불리워지는 일정단위를 생산대대로 일률적으로 개칭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지금 어떤 생산대대는 부촌과 궁촌을 열심히 하나로 합쳐서, 하나의 기본산정단위로 하고, 원래 수입이 비교적 많았던 사원들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각기 다른 경제조건, 자연조건과 군중의 의견에 근거한다면, 상이한 기본산정단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사 각급의 관계는 위로부터 아래로 어지러운 ‘공산풍’문제를 해결한 이후 대대와 대대, 사원과 사원간의 분배문제상의 어떤 평균주의를 보다 적절히 해결해야 한다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마오는 <광저우조사기요 designtimesp=3683>의 이러한 의견을 중시한다. 그 후 25일 중요인사들을 소집한 가운데 두 가지 평균주의 문제의 해결을 제기한 것이다. 그해 설 전날 밤, 마오는 새로운 혁명을 고뇌했을 것이다. 그 즈음 <장정 designtimesp=3684>의 싯귀는 마오의 새로운 의지를 삼십년의 세월을 넘어 북돋아주었을 것이다.
2. 마오의 문화변주곡
지금은 인민공사도 평균주의도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담금질했던 그의 문화혁명의 기획은 십년동란으로, 중국현대사의 블랙홀로 먹칠되었다. 돌이켜보면 근 30년 동안 치룬 혁명전쟁, 1945년까지 항일민족전쟁, 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종군해야 했던 항미원조투쟁(抗美援助鬪爭, 6.25 한국동란을 중국에서는 그렇게 명명한다)까지. 종국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쟁의 연속으로 드넓은 대륙이 말 그대로 폐허에 다름 아니었을 터, 사회주의중국의 성립으로 세계냉전체제는 강고하게 구축되고, 중국은 오직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이루어야 했다. 농민혁명인 탓에 대다수 농민이 혁명의 주력을 이루었지만, 농촌에서는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지주들의 횡포가 여전했고, 무엇보다 혁명 이후의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彭德懷)의 눈물이 입증하듯이 농민주체와 지식인중심의 선진세력과의 간극을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실패, 있는 것, 믿을 구석이라고는 노동력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의지만 발동한다고 해서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마오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낮은 수준의 평등과 언어의 통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법률적․제도적 보장 등 봉건적․종적 질서의 혁명적 해결, 소수민족의 규합, 대중노선을 통한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의 결합, 그것들일까? 마오의 사회주의가 이루어낸 것들.
지난여름 자금성 뒤 인공호수 호우하이(後海), 토요일 밤의 그곳은 여름밤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수변을 따라 즐비한 카페들, 피서여행을 꿈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휘황한 서구식 카페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밤하늘조차 나누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혹서의 밤. 그러나 그 밤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뒤적여본다.
길게 물이 누웠다. 황제를 위하여 파헤쳐진 인공의 바다, 호후하이(後海). 호수이름에 바다이름을 붙인 저의를 잠시 생각한다. 중난하이(中南海), 베이하이(北海), 시하이(西海), 자금성 주변은 온통 바다이다. 물이 그리운 황제를 위하여, 바다를 만든 사람들, 그 맨땅을 파헤치던 사람들은 바다의 정령이 되었을까?
숱한 사람들이 오간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여자들은 날아갈 듯한 옷을 입고 물가를 오간다. 바람, 강바람이라고도 호수바람이라고도 바다바람이라고도 이름붙일 수 없는 물바람. 물가를 둘러 카페가 집촌을 이루었다. 작은 배들이 물 위에 떠있고, 즐거운 사람들의 환호가 바람을 타고 물보라처럼 튀어 오른다.
그즈음 불화살처럼 타는 듯 쏘아오는 고음, 등나무 아래 어둠 속,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른다. 40대 후반의 동네아주머니들이 아저씨의 아코디언반주에 맞추어 맑게 뽑는 음색, 빠르면서도 물살을 타고 넘듯이 하늘로 오른다. 문화대혁명(문혁) 때 조선족의 노래라고 같이 간 선생이 말한다. 그녀 역시 감동어린 눈길, 그것은 빨려들 듯 그들 곁에 섰다. 이들에게 문혁은 무엇이었을까. 저 그리움의 선율 속에 기억의 소재는 무엇일까. 넋 놓고 바라보는 뒤켠에서 함께 부르는 소리, 웃통을 벗어제낀 불뚝배의 아저씨 역시 그 회억(回憶)의 바람을 불러 하늘로 오른다. 아이들이 뛰놀고, 이제 대학생이 되는 선생의 딸이 묻는다. ‘무슨 노래야? 미국이 미워서 코카콜라를 안먹는다는 가냘픈 몸매의 그에게 문혁은 어떻게 다가올까? 그 또래들은 문혁 당시 지식인으로 대부분 동북의 황량한 벌판 베이따황(北大荒)으로 오지로 상산하향(上山下鄕)했었다.
다시 물길을 따라 걷는다. 어둠 속에 흰 의자들, 앉으면 무언가 마시고 돈을 내야 한다. 콩이지(孔乙己)주점이 거기 있다. 화려한 등광, 회향두(茴香豆)에 황주(黃酒)를 마시길 즐기던, 눈 속에 얼어 죽은 루쉰(魯迅)의 콩이지는 어디 있을까? 밤은 깊고, 반짝이는 불빛에 달이 높이 뜬 줄도 몰랐다.(호후하이만감, 2003.8.20, 북경)
그랬었구나. 이들에게 문혁은 결코 아픔만은 아니었구나. 차원쉬엔(曺文軒)의 《빨간 기와 紅瓦》 류의 소설 속에서 십대들에게 문혁은 세상과의 난생 처음 접하는 또다른 세계로의 열림이었고, 잔치였음을 절감한 바 있으되, 40대 중반이후의 이들에게 있어서도 문혁이 일상의 문화로 열려있었다니. 우리는 부박한 상업주의문화가 중국을 점령했다고 한류 한류, 법석여대지만, 이들에게는 집체의 기억과 문화, 집단적 삶의 내력이 있는 것이다. 급속한 자본화과정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내용들을 만들어내고 있지 못한 채 한류 등으로 자기 문화의 빈 공백을 대체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엄연히 집단적 단위적 즐김의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생소한 만큼 전율스러웠다. 북경의 철거일로에 있는 골목길에 아직도 연탄과 두부봉지를 들고 대다수 라오바이싱(老百姓, 보통사람들의 중국어)이 수굿수굿 살아가고 있는 사실처럼, 그들의 일상이, 일상의 문화가 저리 엄연하게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합창으로 무더위와 땀 내음이 밤을 타며 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3. 변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혹은 회귀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중국선생에게 물었다. 단위체제(중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단위에 소속이 되어 있고, 의식주를 그 안에서 해결해왔다. 직장, 주택, 학교, 병원, 육아 등등)의 해체로 인한 문화적 변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집체적 삶으로부터 개체적 삶으로의 전화가 가져온 정신적 혼란과 맞딱드린 시공간의 변화를 대다수 중국인들은 어떻게 감내 혹은 내재화하고 있는가. 미처 고민하지 못했다고 했다. 중요한 문제제기라고도 했다. 새로 등장한 서취(社區)들. 아직은 그 새로운 주거형태와 관리체제가 잘 파악이 되질 않는다. 북경이고 상해고 날마다 늘어나는 서취지구들. 이들의 일상은 우리와 거의 다를 것이 없다. 대부분 아파트지역이고, 개인소유가 거의 인정되는 선에서 개별적 삶들을 가족단위로 영위한다. 서취는 더 이상 단위 안의 집단주거지가 아니다. 노동과 휴식의 분리,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사람들은 더 이상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마오는 단위간의 평등을 고민했었고, 개인과 개인의 차별해소문제를 고민했었다. 요즈음 우리 문화연구자들은 누구나 말한다. 다양성, 차이.
같음보다 다름이 강조될 때,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자본의 세계화에 따른 문화의 세계화, 그것이 만들어낸 전지구적인 획일문화에 대한 대항논리로서 차이와 모방, 탈식민주의 기획들이 힘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의 세계화를 뒤집는 문화다양성으로, 전지구적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서구에의 추수는 모방과 주변문화를 양성했고, 우리는 그 반주변부적 삶을 참 어렵고도 지난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자본의 세계분할구도에 어떻게든 배제되지 않고 하위순위에라도 끼어보려고 안간힘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중한 제3세계적 비판성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냈다. 그것이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역동성의 실질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중국도 동아시아도 하루에도 수십 번 매일매일 하루만큼씩 희망과 절망이 명멸하는 이 척박한 사면초가의 공간성과 21세기라는 시간성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물론 우리의 절박감,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생존의 가파른 줄타기가 곧바로 세계사 진보의 희망이기도 하고 절망이기도 하다.
중국, 실상 나의 뇌리 속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 중국이 사라졌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겠지. 그 넓은 땅덩어리와 그 많은 사람들과 그 좋은 자원 가지고, 그 오랜 세계주도의 역사적 경험과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주체적인 힘으로 나라를 일구어본 저력과 낮은 수준이지만 평등을 이루었던 공통의 경험들이 무엇보다 소중한 사회적 잣대를 이룰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더 이상 중국을 선망하되 조급해하지 않은 지 오래다. 문제는 우리다. 정말 기댈 곳도 더 이상 물러날 설 곳도 없는 우리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너무 힘겨웠는데, 갈 길이 아직 너무 멀어서 아득한 이 심경을 중국이, 일본이 어찌 헤아리누.
참여정부가 문화국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문화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좋은 말이고 좋은 기획이다. 왜 문화를 말하는가. 문화산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런 상상을 자아냈다고 긍정하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중요한 고비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류가 가져다 준 문화국가의 상상은, 실상이기에는 아직 채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문화국가의 이미지를 제고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실질이 담보되지 않는 이미지, 허상의 생명력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생산능력을 믿는 사회가 되는 것, 마오는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문화대국의 전통을 체득하고 문화적으로 혁명을 사고하고 실행한 장본이니까. 인간밖에 없었고, 그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던 마오. 그는 시인이었다, 드넓은 천지를 일별로 거머쥐는 통찰의 눈을 가진 마오. 시와 정치,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 언젠가 마오를 조물주로 형상한 적이 있었다.1) 사회주의인간형을 빚어낸 20세기 여와(女娃, 중국신화 속에 나오는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 세상을 만든 조물주), 마오. 그러나 그가 빚어낸 사회주의 인간형들은 루쉰이 예언했듯이, 나신으로 누운 여와의 사타구니 위에 올라와 전혀 생경한 어법으로 여와인 마오에게 퍼붓는다. 왜 옷을 입지 않았느냐고? 이는 예(禮)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봉건통치 질서로서의 예(禮),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자본의 예(禮), 그 사회질서는 부익부 빈익빈. 신조물주 여와인 마오가 찢어진 하늘을, 푸른 옥돌을 구워 깁고, 거북이다리를 잘라서 무너진 하늘기둥을 받치고, 진흙으로 숱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너무나 많은 노동에 지쳐 쓰러져 죽어가며 물끄러미 자신의 사타구니 위에서 댁댁거리는 인간군상을 본다. 여와인 마오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인류가 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마오보다 40년전에 죽은 루쉰은 <하늘을 깁다(補天) designtimesp=3743>이라는 소설에서 마오의 마지막을 그렇게 예언했다.
루쉰이 예견한 여와, 마오의 죽음, 그러나 공교롭게도 조물주 마오는 영면하지 못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대다수 중국민의 가슴에 애증으로 엄연히 살아있는 마오, 눈을 부비고 다시 보아도 엄연하다. 죽은 마오가 새로운 중국의 그 모든 새로운 일에 거대한 잣대가 되고 지향이 되고 있는 이 기막힌 역설. ‘마오 시절에는’, ‘마오주시가 살아계실 때는’, 대다수 중국사람들은 그들이 외면했던 마오의 시대를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떠올린다. 천안문에 해마다 다시 걸리는 마오의 초상, 그 맞은편에 거대한 기념관, 그 사이 광장과 인민영웅탑. 칭화대의 쾅신니엔교수는 지적했다. ‘마오는 오늘날 중국의 관료‧지식인 그리고 노동자‧농민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심각한 분열과 엄청난 사상적 거리를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최근 그 거리가 한편으로 더욱 멀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좁혀지는 광경을 자주 목도하곤 한다. 루쉰으로부터 마오로 간 길이, 마오에서 다시 루쉰으로 회귀되는 이 경천지동의 정경이라.
4. 인민의 영광
마오의 서재 앞에 선다. 침실과 서재의 차이는 침대와 소파의 차이일 뿐 책이 쌓여있다는 점에서 서가의 다른 모양새일 뿐이다. 일본수상 다나까가 공산주의 원전들만 있을 줄 알았던 그 방에 중국고전들만 가득 차서 기암했던, 그 모택동이 다나까에게 건넨 선물, <초사 楚辭>.
굴원(屈原)의 우국충정의 시편들을 감히 아시아를 먹겠다고 중국을 침략했던, 그리하여 마오의 젊은 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항일투쟁, 그 침략의 장본에게 건네는 마오의 심사를 그 방 앞에서 헤아리며, 그 실존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묻는다, 마오주시, 당신의 미국인 친구, 에드가 스노에게 당신은 대답했지요. “나는 찢어진 도포를 입고 쏟아지는 폭우 속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구도자에 불과할 뿐이라오.” 포르말린 속에 누워있는 당신과, 천안문에서 내려다보는 그대, 그 어느 쪽이어든 대답해주시오. 당신이 그리고자 했던 세계상, 지금 중국이 그 도정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번 겨울 북경엔 유난히 거지가 많았습니다. 천안문 근처뿐만 아니라, 만성서점이 있는 서북쪽 난치잉, 우다커우까지 도처에 젊고 늙은 거지들이 구걸을 하고 있었지요. 마오주시, 저 헐벗음과 저 도저한 첨단의 풍요와 발전, 이 양립할 수 없는 평행의 모순을 통과해야만 당신의 거대한 동선회가 한 획을 그을른지요.
마오의 영원한 전우 주더(朱德, 1886-1976)장군 환갑날, 마오가 보낸 글귀, ‘인민의 영광' 1946년 대내전의 치열한 전장에서 인수(人壽)의 축하편지를 받아든 주더, 노장은 공산당의 승리를 고투하던 마오의 심사를 어떻게 헤아렸을까?
1976년 마오는 세상의 끈을 놓았다. 그해 1월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세상을 떠났고, 마오가 죽기 두 달 전 주더(朱德)장군 또한 눈을 감았다. 평생의 동지들이 그렇게 사라진 탓에 영욕의 세월을 그리 뒤로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더, 중국공산당의 승리의 날, 1949년 9월30일 주더는 마오주시 만세로 연설을 마쳤다. 그리고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천안문 위에서 마오에 의해 선포되었다. 1946년 장지에스(張介石)는 정전협정과 정치협상회의의 결의를 파기하고 30만 대군을 4로로 나누어 중원의 해방구를 대거 협공하였다. 이로써 전면내전이 발발하였다. 다시 닥친 어려운 시기에 주더는 환갑을 맞았고, 마오는 인민의 영광이라는 글귀를 써 보낸다. 다시 불붙는 전쟁, 혁명의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했으리라. 1893년 생 마오, 주더장군보다 7살이 어렸지만, 주더장군은 준의회의(遵義會議)부터 줄곧 마오노선을 지지했다. 주더장군의 영원한 벗 미국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연안시절 마오보다 주덕의 인품에 더 매료되었었다. 스메들리는 중국혁명의 정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지원물자를 조직했다. 그로 인해 미국정부로부터 스메들리가 마녀사냥을 당하고 모든 글쓰기를 비롯한 모든 생계수단을 탈취 당했을 때 주더는 스메들리에게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스메들리가 평생 소원하던 중국에서 잠들지 못하고, 영국병원에서 수술을 받다 끝내 회생하지 못하자 주더는 그의 시신을 중국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중국혁명열사묘역에 중국인민의 영원한 벗으로 안치하였다. 그 국경을 넘은 관계의 지향, 그리고 혁명 속에서 맺어진 뜻을 같이 한 동지. 인간과 인간이 맺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지고한 관계지향들, 당시 그것은 곧바로 인민의 영광으로 돌려졌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가치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지향이 아니라 발전주의모델로 한없이 치닫고만 있다. 인민이, 인민의 미래가 사라져버린 듯한 중국, 국가주의와 자본의 영광. 그 중국의 선택에 사람들, 중국의 인민들은 항거 대신 저 창공에 푸른 연들을 띄워 올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묻고 있을 것이다. 마오주시, 지금은 이것이 최선입니까?
5. 문(文), 문화(文化), 문화혁명
단언컨대 마오는 문(文), 문화의 힘을 믿었었다. 그의 문화기획, 문화혁명, 나는 그것이 결코 환상이 아님을 여전히 확신한다. 인간의 자기실현, 그 빛나는 가치생산으로 빚어질 세상, 마오는 그를 위한 도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중일, 동북아, 동아시아, 아시아, 세계자본의 하위단위가 아니라 다원적이고 평등한 문명세상으로 나아가는, 일국단위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오늘의 보편적 삶의 아픔을 넘어가는 그 길이 문화로 열릴 수 있을까? 마오주시, 그 길이 과연 문화로, 문화로만 열리는 것이 맞습니까?
“문의 덕됨(속성)은 크도다, 그것은 천지와 더불어 생겨났으니, 어째서 그러한가? 천지에는 검은 빛과 누른 빛(玄黃)의 빛깔이 다 다르고, 원형과 방형의 구분이 있고, 해와 달이 중첩된 옥돌처럼 하늘 위에 붙어 있는 형상이며, 산과 강은 금실로 수놓은 듯, 땅 위에 널리 퍼져있는 형상이니, 이것이 대개 대자연의 문장(文章)이라. 위로는 해와 별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아래로는 산하에 문채가 있음을 보며, 위아래의 위치가 확정되어 있는 것은 천지가 나은 것이다. 다만 사람과 천지가 서로 짝을 이루어 신령한 성질(靈性)을 품어 길러내니, 사람만이 천지간에 참여하고, 성령이 표현되는 바, 이것을 일러 천지인 삼재라고 한다. 오행의 수려함, 그것은 실은 천지의 마음이라. 마음이 생기면, 말이 따라서 확립되고, 말이 확립되면 문장이 선명해지니, 이것이 천지자연의 도이다.”1)
당신의 광장에 놓인 그 꽃, 마오주시, 당신의 예지와 고뇌, 그 웅혼한 기운생동의 동아시아적 회통을 위해 여기 올립니다.
* 이 글은 진보평론 제19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