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은 외로움과 고통과 비극이 충분히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꼭 이런 소설을 써서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확인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던져버렸다는 후배의 말이었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기묘한 일 아닌가.
또 한 선배는 이 책을 읽고 분개하여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편지를 썼다.
"이 책은 청년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의식도 책임감도 없는, 무의미한 내면으로의 침
잠"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에게
와타나베의 우유부단하고 게으른 방황은 정신적 사치로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답장이 왔고 그후로 그는 그 책에 대해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태평스럽게 자기 만족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낙천적인 나의 친구들은 아무리 권해
도 이 책을 읽는 것을 미루고 바쁘게 살아갔다. 이 모든 유형의 독자들이 1999년의 가을에
한 캠퍼스에 공존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며, 당구을 치며, 조각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2. 서사 문학으로서의 틀--"여행"
문학 작품으로서 일본에서도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전대미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을 단순히 센세이션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SF니, 환타지
니, 하이퍼 픽션이니 하는 새로운 장르들이 기라성처럼 대중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는 지금
2001년 가을에도 본격 문학이 꾸준히 독자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것도 1987년도에 출간된 책을 100쇄이상 찍어내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만)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내용이 대단히 재미가 있고 오락적인 것도 아니고 하품이 나도록 진지하다. 혹
시 야한 장면이 대중에게 어필해서 뜬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정
도의 인기를 끌 수 없다. 무엇보다 내적 긴장이 떨어진다. 1인칭 주인공의 시각이 지나치게
정적이며 (마치 50년대 소설 『금각사』처럼) 박력이 없다. 서사 문학을 읽을 때 독자는 작
가에게 플롯을 제공 받으며 줄거리가 흘러가는 방향을 탄다. 그 흐름을 타면서 예상을 하고
불안해하며 한 층 더 재미있게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서사 구조는 엄격한 제약 하
에서의 긴장되는 흐름도 없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가 있기 위해 설정된 현실의 제약
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줄리 델피가 나오는 "비포 선라이즈"라는 영화에서의 시간의 제약도
그렇다) 작가가 독자에게 플롯을 제시하는 방법은 제멋대로다. (기즈키와 나오코의 죽음은
작가의 비밀로 남겨져 있다. 좋게 말하자면 뉘앙스고 나쁘게 말하면 작가의 횡포다) 그야말
로 우리는 밋밋하고 긴장 없는 플롯들을 저마다 머리 속에서 다르게 짜맞추어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서사 구조를 "여행"이라고 하고 싶은데 물론 공간적인 여행이 아니라 인
생이라는 긴 여행을 말하는거다. 도중에 여러 가지 사건을 만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인생이 성장해가는 궤적을 담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 길의 끝자락에서는 자신이 무언가
변화하고 성장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헤르만 헤세의 『데미
안』,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텔레비전에서 본 <은하철도 999>가 이러한 "여행"의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이 여행을 통하여 성장하고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3. 멋지지 않아? 여기는 노르웨이의 숲
그것은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주인공 와타나베가 쉽게 결정
치 못하는 거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중년의 회사원인데 독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bgm으로 깔리는 노
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이 노래에 얽힌 추억의 60년대 말의 자신의 청춘을 회상한
다. 1968년, 동경의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수학 중인 스무살의 청년 와타나베에게는
여러 친구가 있다. 고지식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룸메이트 돌격대, 명석하고 매력적이지만 바
깥 사회엔 마음의 문을 닫은, 왠지 냉소적인 친구 기즈키, 기즈키의 여자 친구이며 다정하고
친철하고 온순한 나오코, 기숙사에서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유능하며 바람둥이고 방탕한 나
가사와. 그들의 청춘은 젊은이다운 놀이와 이야기와 연애로 충만한 듯 하지만 어딘지 냉담
하다. 자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지 못한채 속물이 되는 것이 두렵고, 경박한 바보처럼 세
상에 맞장구 치며 살아가는 것이 두렵고, 당시 대학가의 진보적 청년 학생들이 보여주는 깊
이 없는 실천도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존
재의 본질적 외로움을 이길 수 없는 청춘의 병이 있는 것이다. 기즈키는 예고 없이 돌연 자
살해버렸고 와타나베는 남은 나오코의 곁에 있어준다. 그러나 나오코에게 드리운 그늘을 환
하게 밝혀 줄 수는 없었다. 나오코는 교토의 정신 병자를 위한 요양소로 가게된다.
이런 와타나베의 생활에 등장하는 히로인은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후배 미도리
다. 와타나베가 호감을 가지는 미도리는 나오코와는 정반대의 캐릭터-강하고 적극적이고 생
명력이 넘치며 건강하다. 마치 구원의 기적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삼각 관계의 모양이 탄생
한 것이다. 편지를 교환하고 있는 교토의 나오코는 어두움, 발작, 극복하지 못할 슬픔, 바깥
에 대한 냉소 그 자체이며 동경의 미도리는 밝음, 강인함,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인 것이
다. 그리고 이 두 여성은 삶의 진정성을 위하여 고민한다는 점에서 둘 다 진지하고 착한 사
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붙잡지 못했는가? 분명히 그는 기즈키가 죽
고난 후 나오코를 지켜주고 싶어했고 슬픔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고자 했고 또 사랑하게 되었
다. 중요한 이야기인지 몰라도 그래서 섹스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우울한 것이 되고 마는 결말을 보자. 나
오코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와타나베는 집을 나서서 한달 동안 거의 폐인적인
여행을 한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의 여행, 자책하는 여행, 그러면서도 독자에게는 눈부신
낭만으로 가득한 여행을... 아내를 잃었다는 어부 아저씨와 바닷가에서 거지 꼴로 술을 나누
고 헤어진 뒤 지나간 삶의 여행길에서 만나고 상처 입히고 소중히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생
각하고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나오코의 요양소 동료였던 레이코 아주머니와 함께 음악과
섹스의 의식으로 나오코를 보내는 와타나베.
그리고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대답을 준 그 때 그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둘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러나 긴 여행 길의 끝에서 와타나베가 되돌아보는 성장의 궤적은 눈부시다고 아니할 수
없다. 아무리 상처 받는 것이 두렵고 혹은 지쳤더라도 사람이 내딛어야 할 유일한 도피처는
단절(detachment)이 아닌 관계 맺음(commitment)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슬픔의 여행이었던
것이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노르웨이의 숲>은 서로의
차이에 힘들어하고 상처 입어 단절(detachment)을 택하는 인간의 비극적 숙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4. 사람은 상처받아 거짓말을 배우지만
이 발제문을 쓰면서 귀에 레시바를 끼고 엠피쓰리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되풀이
해서 들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다는 비틀즈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노르웨이의 숲>의 싸늘한 고독을 나이 들어서 극복해내었을까? 놀랍게도
1965년에 나온 <노르웨이의 숲>이후로는 비틀즈는 비극적인 연애를 소재로 한 곡을 쓰지
않았다. 정치와 철학과 베트남전 반대와 음악적 실험에만 열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이 작품 이후에 죽음과 어두운 섹스와 관념적 사유로 점철된 소설은 쓰지 않았고 엔터테인
먼트가 넘치는 스토리 텔링의 재미에 빠져버렸다. 와타나베가 성장하고 변해갔듯이 이 위대
한 예술가들도 어제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간걸까? 아니면 삶에 상처 받아 거짓
말 하는 법을 배운걸까? 그리고 나이 서른에 우리들의 생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질문1. 우리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나라는 존재의 깊이를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야구장에
서 야구를 응원할 때, 열 명 이상의 술 자리에 참석할 때, 집회에 나가 같이 움직일 때, 과
행사나 공연에 앉아있을 때 이런 것을 느낀다. 내용물 없는 관계 맺음 이라면 차라리 빠져
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대학 다녀봐서 아는데 혼자서도 대학 생활 할 수 있다.
질문2. 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전술한 선배의 말 대로 사회적 책임
을 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의 세계에 침잠하여 그 깊이를 보여 주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당신은 왜 문학을 읽고 공부하고 있는가?
질문3. 이 소설의 서사 구조는 여행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전에 연구했던 "오월
의 신부"나 "살아있는 늪", "빨간 피터의 고백", "모든 나무는 얘기를 한다", " 내가 살았던
집"의 서사 구조는 어땠는지 생각해보고 분류해보자. 그리고 그 차이점을 말해보자.
질문4. 소설에서 본 것처럼 두 명의 히로인, 나오코와 미도리는 실은 지난날 사람과의 사귐
에서 고통을 느끼고 상처 받았다는 점에서 같다. 그래서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마음에는
그늘이 있다. 미도리라고 해서 단순하고 태평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살아가
는 방법이 다르다. 에고이즘(내향 지향적인 것)과 앨트뤼즘(바깥 지향적인 것)의 차이...둘다
쉽게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한 양태다. 도대체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가? 아니면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있는 걸까?
질문5.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968년은 일본에 "전공투"라는 진보적 청년 학생들의 투쟁이
극심했다. 동경대 야스다 강당 점거 농성을 진압 당한 이후 일본의 운동권은 점점 작아지다
지금은 소수 집단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재단과의 트러블이나 등록금 투쟁 조차도 거의 앖
는 실정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과 비슷한데 그래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이
유가 그러한 유사성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한일 젊은이들이 이념적 목표, 이상을 상실한
시대라는 해석인 것이다. 그래서 방황을 한 것이라고...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에 대해서 다른
이유를 생각했다면 그 이유는?
질문6. 상실의 시대가 좋든, 싫든 이 작품은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유일한 일본 소설
이 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슈퍼 스타인 무라카미 류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도 우리나라에서
전부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제목이 알려진 작품이 없다. (토파즈나 한없이 우울에 가까운
블루라는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상실의 시대는 누구나 안다) 무슨 이유로
상실의 시대만이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일
본 대중 문화 작품을 보면 영화는 광고비도 못 건진 것이 대부분이고 토토로나 나우시카같
은 애니메이션만이 성공했다. 반면에 쉬리나 공동 경비 구역은 일본에서 크게 성공했다. 일
본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란 기우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