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억6천의 회교국 파키스탄. 170개가 넘는 종족이 살고 있으며 국어는 우르드어지만 종족언어인 펀잡어, 신디어 등 많은 방언이 통용되고 있고 성경전체는 6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문맹률은 55%이다. 기독교인은 비공식적으로 3%정도로 추정되며 50여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 여름 인터콥의 단기선교팀을 통해 파키스탄의 상황을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땅, 기뻐하라 파키스탄
새벽 5시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기뻐하라 파키스탄을 외치며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에 서 있다는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항에 내려서 제일 먼저 간 곳이 화장실이었는데 국제공항의 화장실 수준이 마치 우리나라 10년 전 기차역 대합실 정도의 수준인 것을 보면서 이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던 거리의 거지들은 차 문을 통해 계속해서 돈을 달라는 몸동작을 했는데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아픔과 슬픔, 이곳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한지도 알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조금 당황했던 것은 그곳 주인 되시는 집사님께서는 선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교회를 다니셨고 집사라는 직분이 있으시지만 파키스탄에 계신 목적은 오직 비즈니스였다. 그 집사님께서 파키스탄에서 사역하고 계신 한 목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두 분의 공통된 말씀은 무슬림들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이며 시도도 하지 말라, 파키스탄은 변화나 도전을 거부하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단기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들을 많이 하셔서 일부분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가슴 한쪽만 갑갑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저녁쯤 집사님께서 한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그 친구가 우리의 단기사역에 주춧돌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샤히드와의 만남
이슬라마바드 도착 첫날 저녁 집사님께서 샤히드 라는 한 친구를 소개해주셨다.
한국 인천의 한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5년 동안 일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일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계신 한 교회의 여자 목사님께서 샤히드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를 품기 위해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사님께서 집사님과 연결을 시켜드리면서 샤히드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 하셨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의 사랑으로 무슬림의 한 청년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감사하게도 샤히드의 가족은 샤히드가 개종한 것에 대해 어떻게 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는 파키스탄의 현실 때문에 샤히드 역시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는 개종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친구와 함께 며칠을 다니면서 우리의 일정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묵상한 말씀은 사도행전이었다. 고넬료의 가정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며 복음은 선포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음을 함께 묵상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파이샬 모스크에 가기로 했다. 파이샬 모스크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자가 지어준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라고 알고 있었다.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그곳에 갔을 때 어떤 강력한 영적 실체는 느낄 수 없었다. 사람들도 거의 관광수준, 휴식수준으로 오고 가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보고 왔다. 거짓된 신을 섬기고 있는 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 모스크를 갔다가 점심때는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샤히드 삼촌의 식당과 가정을 방문했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현지인 가정이었는데 집 건물이 샤립 초등학교 건물 수준이었고 마당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그 가정에는 친척들이 모여 살아 총 3명의 가정과 17명의 아이들이 산다고 했다. 그 가정에서 저녁으로 과일을 먹고 집구석 구석을 구경하였는데 여자들은 집을 구경시켜줄 수 있지만 남자는 안된다고 해서 우리 팀의 형제는 계속 거실에 앉아있어야 했다. 파키스탄은 남자들에게는 집을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다음날 아침 집사님께서 한 한국인을 소개시켜 주셨는데 이름은 복마니로 통했다. 한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파키스탄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사랑하게 되어 공무원 생활을 접고 사업을 하기위해 파키스탄에 와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길 원한다는 뜻에서 파키스탄에서는 복마니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와 함께 샤히드의 집 덱실라로 이동했다.
덱실라, 샤히드의 가정과의 만남
샤히드의 집 덱실라라는 지역에 도착했다. 가는 도로가 옆 잔디밭에는 거지들이 천막을 치고 사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 마을의 경제적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샤히드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시낄라(큰 여동생), 이끄라(작은 여동생),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 샤히드 이렇게 6명이었는데 모두들 인상이 좋고 우리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끄라의 동네 친구들이 그 집에 놀러와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기타로 찬양하며 율동을 가르쳐 주면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팀장인 경민형제가 준비해온 복음큐브라는 것으로 샤히드의 아버지와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으며 그 죄 값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부활하신 것,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을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며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샤히드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영어로 이야기 하다 보니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못해서 조금 갑갑해 하시며 우르드어로 된 성경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경민형제는 그 가정에 머무는 동안 틈이 날때면 꾸란과 성경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샤히드의 아버지와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시도했다. 저녁때쯤 가족들과 함께 시장에 나가서 우리 팀이 입을 현지 옷을 한 벌씩 사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시낄라는 우리팀 자매들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렸는데 다른 파키스탄 여성들과는 틀리게 굉장히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우리를 굉장히 잘 따르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밤늦게야 집에 도착한 우리는 잠자리에 누웠다. 우리는 시낄라와 함께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우리팀 자매들이 준비했던 사영리(전도소책자) 그림책으로 시끼라에게 복음을 전했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구원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시낄라는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영접기도를 했다. 우리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흘렀다. 우리는 시낄라에게 이제 너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시낄라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알라에게는 딸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황스러웠다. 시낄라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만 알라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시낄라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해했든 이해하지 못했든 자신의 입으로 영접기도를 했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그 가정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샤히드와 함께 샤히드의 삼촌집으로 향했다.
핫산 아브달,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
이슬라마바드의 삼촌집이 아닌 핫산 아브달이라는 지역의 샤히드 삼촌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은 많이 낙후되었고 오래된 낡은 집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짐을 풀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마을 전체가 보이는 뒷산으로 올라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ㄷ’자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예배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을 중 특별히 한 마을이 굉장히 악한 영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그 땅을 향한 통곡하고 계신 하나님의 눈물과 마음을 부어주셨다. 샤히드 친척으로부터 그 마을의 한쪽은 펀잡인 (대부분의 파키스탄 사람들), 다른 한쪽은 빠딴족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많으며 강경 무슬림), 다른 한쪽은 기독교인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특별히 빠딴족은 강경 무슬림으로 여성들의 집단 강간과 명예살인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보고 울고 계신 것 같았고 마음이 아팠다. 밤에는 샤히드 친척이 다니는 대학교에 방문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방학이었기에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학교 교수님 자녀인 친척의 친구들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차를 마시며 우리는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그들을 향해 축복송을 불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곳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교내 정원을 거닐며 여러 대화들을 하는 가운데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그래도 생각이 많이 깨어있고,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크리스천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이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눌려져 그것을 밖으로 토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기독교인 마을과 빠탄족 마을에 갔다. 기독교인 마을은 샤히드 삼촌이 사는 동네보다 훨씬 가난하였다. 교회라고 하는 작은 건물로 들어갔는데 개신교보다 천주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목사가 되는 기준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교회 옆에 무덤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등 조금은 당황스러운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선교사님을 통해 현재 파키스탄 현지 기독교 사역자들은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이 돈벌이로 사역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마을 기독교의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빠탄족이 사는 곳으로 갔을 때 그곳 상황은 멀리서 봤던 것 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로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는데 샤히드의 친척이 그곳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아서 그 마을 입구에만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아이들이 몰려왔는지 그 마을아이들이 몰려와서 우리를 에워쌌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준비해온 풍선으로 왕관과 강아지 등을 만들어 주며 찬양으로 그들과 그 지역을 축복하였다. 그 땅을 묶고 있던 악하고 어두운 영들이 우리의 찬양가운데 벌벌 떨며 떠나가길 기도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참으로 친절했다. 우리가 작은 것을 하나 선물하면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우리는 우리가 준비해간 작은 것을 줬을 뿐인데 자신들의 자신들에게 있는 전부를 주는 것이다. 선교사님들이 늘 말씀하셨던 친절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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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년 파키스탄 일정이 방해에 막혀 일찍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그땅에 계속 되기를 기도합니다.
단기 선교가 어떤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이번 우리 태국간 친구들과 간사님들도 이런 전도와 은혜를 체험하고 오겠죠??? 하나님의 은혜를 팍팍 느끼고 오실 그분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그리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