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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인, 성년을 꿈꾸는 늙은 18세 | ||||||||||||||||||||||||||||||||||||
인의현의 불씨가 재생할까?, 백산과 백산 사이에 신태인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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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ejw0255@naver.com" target=_blank>ejw0255@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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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애 중에서 가장 왕성한 나이는 언제일까? 아마도 스무살 무렵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는 어떨까? 광주를 비롯한 광역시 등이 스무살을 넘어 욱일승천하는 기세라면 정읍은 성년을 넘어 잘 나가다가 조금씩 힘이 빠지는 형편이고, 신태인읍은 스무살을 향해 내달리다가 18살에 성장을 멈춰버린 영원한 소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태인읍은 백제시대에는 빈굴현, 통일신라시대에는 太山群, 고려시대에는 泰山群, 조선시대에는 인의현을 거쳐 태인현에 속하였고 1914년 3월 1일에 정읍군 용북면, 1933년 1월 30일에 신태인면, 1940년 11월 1일에 드디어 신태인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에 정읍시 신태인읍으로 변경되었다. 정읍의 산업구조 바꾼 분계점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정읍의 농경 산업적 질서와 현대 산업적 질서를 가르는 분기점은 무엇일까? 고부군과 태인현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정읍현이 정읍군을 아우르게 된 1914년 행정구역대개편이야말로 그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읍과 신태인의 급성장, 고부와 태인의 쇠퇴 흔히 우리는 일제에 의한 정읍역과 신태인역의 생성을 예로 들어 고부와 태인의 쇠퇴를 말하고, 정읍과 신태인의 급성장을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는 현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으니 맞는 말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읍(한때의 정주읍을 지칭)과 신태인은 초산도비리국과 빈굴현이라는 근원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그 역사적 시작은 더 빨랐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지역이든지 되살아날 가능성이 항상 예비되어 있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읍역과 신태인역은 1910년 10월에 기공하여 1914년 1월 11일에 전선개통과 동시에 역사가 완성되어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신태인역은 1950년 7월에 전란시의 화재로 소실되어 1957년 1월에 신역사가 준공되었다. 1963년의 총수입고는 18억 2812만 4240원이었고, 승차인원은 9만2972명이며 하차인원은 36만8357명이었다.{주1} 태인의 대체하는 태산군의 인의현, 신태인 신태인읍이라는 이름에는 세가지의 역사적 지명이 담겨 있다. 인은 인의현을 말하고 태는 태산군의 태를 말하며, 신은 태인을 대체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장봉선의 정읍군지에 의하면 신태인은 `정읍의 관문`이요, `호남선의 중요역`이다. "기왕은 한산한 一촌락에 지나지 못하더니 대정원년에 호남건철도가 개통됨으로부터 날로 발전의 운을 보게 되었으니 당지를 중심한 교통은 서는 태인부안선, 동은 태인갈담선이 개통하여 물산의 운수기 지극히 편리하고 또한 동진평야를 앞에 두어 곡물산의 이출로 가장 유명하며 부근시장의 물화가 여기서 취산하여 본군 제2의 도회지로 호수는 구백여, 인구는 사천사백여 명이다. 동북부의 시가는 좌우에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우편소, 곡물검사지소, 금융조합등 관공서가 기포하고 남은 점포가 즐비하여 시가의 설비가 완전한 저명지이다." {주2} 신태인읍의 3대 거점은 백산(잣매)과 화호와 읍소재지 신태인읍을 구성하는 3대 장소는 인의현의 고을터로 알려진 백산(잣매)과 화호,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신태인읍소재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태인읍소재지가 백산(잣매)에 가까운 위치라면, 화호는 부안 백산에 가까운 위치이다. 화호는 김제 부량, 부안 백산, 정읍 이평의 광활한 들판을 두르고 있는 곡창의 중심지로서 동진강의 물길을 이용한 유통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평의 두전진, 부안 백산의 원천나루, 백산(성) 옆의 회포가 그 증거이며 화호시장의 성쇠는 그 산 역사를 보여준다. 장봉선저 정읍군지에 의하면 "신태인으로부터 태인부안선3등도로로 약1리쯤 서북을 행하면 (신태인에 이은)또한 시가를 형성하였으니 이것이 옛날로부터 유명하던 화호진이다. 배(舟)편이 있어 해륙교통을 겸하였으므로 현대초까지도 본도의 주요지였더니 호남선철도가 개통한 이후로 신태인에 양두하게 되었으나 호수 사백여, 인구 2천여 명의 저명지로 경찰관주재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고등소학교 등의 관공서가 포열하였으며 상업으로는 시장이 유하여 일년간 매매고는 본군의 3위에 있고 교통은 태인부안선, 김제, 흥덕선이 丁자의 시가를 성하였다."고 한다. {주3} 다시 한번 영화를 꿈꾸는 신태인
재래시장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몇년 전에 그 앞 도로를 확충하고 나서 현대식 상가건물이 양 옆 도로에 새로이 조성된 경우가 많다. 역 앞에는 농협이 자리하고 있고, 읍사무소 건너편에는 낡은 창고건물을 뒤로 한 채 종합 상가가 시설되었다. 5일마다 열리는 장날에는 역을 중심으로하여 T자형태로 노점상이 가판을 벌리며, 사람들이 붐벼서 장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평과 부안 가는 길목 신태인삼거리는 본래 정미소 길목 이평과 부안으로 이어지는 신태인삼거리는 정미소길목이다. 본래 이곳에서 신태인육교 옆 철길이 나오는 곳까지에는 8~9개소의 정미소가 가동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3개소만이 가동되고 있으며 떡방앗간도 2개소가 가동되고 있다. 한때 흥청이던 정미소거리는 이제 삼거리길목으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ㅎRPC는 대규모로서 단풍미인쌀을 도정 생산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일본식 건물이 개축되어 사용되는 것이 눈에 뜨이고 있다. 또한 삼거리에서 화호로 나가는 길쪽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농자재 판매점이 있고, 농기계대리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이 농업지역이라는 점과 연계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여러개의 하천이 만나는 두다리목은 삼거리가 되고... 신태인읍소재지의 배치상황을 점검해 보면 서쪽으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정미소길목이 있고, 북쪽으로는 공단이 자리하며, 역과 읍사무소의 연결도로 남쪽으로는 재래시장이 위치한다. 인교(신태인교의 약칭)를 넘어가면 왕신여중고가 있고, 석구지를 지나 정우교를 넘어 정우면으로 가는 길(정신선)이 이어진다. 동으로 이동하여 두다리길목이 위치하는 곳에는 도축공장이 있고(화호로 나가는 길에도 도축공장이 신설되고 있다), 유일하게 동네점방이 한 곳 자리하는데 이름이 삼거리슈퍼인 것으로 미루어 두다리목이 나중에 삼거리가 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두다리목`은 일명 `목천포`라 부른다는 증언도 있어 어쩌면 이곳이 옛 빈굴현과 인의현의 선착장이었을 개연성도 있다고 추정된다. 두다리목에는 구암배수장과 자수라는 글자가 새겨진 수막이 있고 대형의 도수로가 있다. 여러 개의 하천이 만나는 곳이며 태인- 부안간 도로와 신태인 내석-원평간 소로가 분기하는 곳이다. 신태인의 중심부는 폐허가 된 도정공장
일제가 낳고 일제가 남긴 흉물이 터를 누르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나는 늙은 18살이예요` 하고 신태인이 외치는 비명처럼 들린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화호에는 인상중고등학교가 있고 신태인읍소재지에는 왕신여중고와 신태인중.종합고가 각기 자리한다.청소년기의 그곳 학생들은 지금 성년을 꿈꾸리라. 그들이 꾸는 스무살의 꿈처럼 신태인도 스무살을 꿈꾼다. 마침내 좋은 운수가 돌아오기를, 신태인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제 신태인 여행을 마친다. 주1: 정읍향토편람 86~87면/ 주2 , 주3 : 장봉선저 정읍군지 143면/ 주4: 정읍시사 1353면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