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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금북정맥 6차 종주기
1. 산행일자 : 2006년 6월 4일 (일요일)
2. 산 행 지 : 충북 괴산, 음성
질마재(592지방도)-칠보치-칠보산(543)-595.5-송치재-344.1-모래재(34번국도)-보광산(539)-395.4-고리터고개-370-내동고개-377.9-보천고개(515지방도)-378.5-행치재(38번국도)
3. 날 씨 : 안개, 맑음(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
4. 참 가 자 : 강동규, 김명자, 박봉하, 안상경, 이용준, 이태인, 장현옥, 주선생님(8 명)
5.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1] 총 산행 거리 : 약 20.5km(질마재 ~ 행치재)
[2] 소 요 시 간
(1) 예정 소요 시간 : 8시간 30분 정도
(2) 실제 소요 시간 : 11시간 20분
6. 경유지 및 구간별 거리, 소요 시간
[1] 경 유 지
■ 질마재(330m, 592번 지방도) → 칠보치 → 칠보산(543m) → 596.5봉 → 솔티재→ 344.1봉(09:55) → 모래재(228m, 34번 국도) → 봉학사지 → 보광산(539m) → 395.4봉 → 내동고개 → 보천고개(515번 지방도) → 378.5봉 → 행치재(36번 국도)
[2] 구간별 도착 및 소요시간
(1) 예정 시간
■ 수원(04:00) ~ 영동, 중부고속 ~ 증평TG(05:00) ~ 증평(05:10/아침식사/06:00) ~ 592번 지방도 ~ 질마재(06:20)
■ 질마재(06:30) → 칠보치(07:30) → 칠보산(08:15) → 596.5봉(08:55) → 솔티재(09:30) → 344.1봉(09:55) → 모래재(10:10) → 봉학사지(10:50) → 보광산(10:53/점심식사/11:20) → 395.4봉(11:50) → 내동고개(12:30) → 보천고개(13:30) → 378.5봉(13:50) → 행치재(15:00)
■ 행치재(15:10) ~ 증평(15:40/저녁식사/16:30) ~ 증평TG ~ 중부, 영동고속도로 ~ 수원(19:00)
■ 탈출로 : 모래재(34번 국도), 보천고개(515번 지방도),
고향해장국(043-836-2277), 보광산관광농원(043-833-3333)
(2) 실제 산행시간(산악대장 측정 시간)
■ 총 산행 약 20.5km, 11시간 20분 정도
■ 산 행 거 리
질마재(330m, 592번지방도)--2.8km--칠보치--1.7km--칠보산(543m)--3.3km--솔티재--1.3km-- 모래재(228m, 34번 국도)--1.6km--보광산(539m)--1.8km--고리터고개--1.8km--내동고개--2.7km-- 보천고개(515번 지방도)--1.8km--가정자--1.7km--행치고개(36번 국도)
■ 소 요 시 간
○ 수원(04:18) ∼ 영동, 중부고속 ∼ 증평TG ∼ 증평(05:20/아침식사/06:00) ∼ 행치재 차량이동
○ 질마재(06:45) 질마재(06:50) → 칠보치(07:55/08:03) → 칠보산(08:45/08:55) → 596.5봉(09:35/09:50) → 솔티재(10:35) → 344.1봉(10:48) → 보광농원 정문, 모래재(11:05) → 신도로, 등산 안내판(11:15) → 점심식사(11:25/12:05) → 봉학사지탑(12:43/12:48) → 보광산(12:52) → 백마산분기봉(14:00/14:10) → 395.4봉(14:45) → 내동고개(14:13/14:25) → 보천고개(15:20/휴식, 식수보충/16:05) → 378.5봉(16:23) → 삼거리 세멘트도로(17:15) → 수렛길 따라 능선오름(17:50) → 행치재(18:10) 행치재(18:30/차량이동, 식사/20:20)
○ 증평TG ∼ 중부, 영동고속도로 ∼ 수원(22:40)
7. 산 행 기(山行記)
[1] 산 행 전
한남금북정맥 6구간 산행도 5구간과 마찬가지로 20.5km(지난 산행 : 19.3km)를 8시간 30분(질마재 ~ 행치재)에 완주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아 놓고 있다. 지난 산행 때도 장장 12시간 이상을 산 속에서 생활했는데 부지런히 걷는다 해도 11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6월 초인데도 삼복 더위 못지 않게 30도를 웃도는 기온을 감안하면 장시간 山行 苦는 따 놓은 堂上이지 싶다.
산행 전날까지 참가 회원을 보니 7, 8명을 넘지 않는다. 열 일을 제쳐놓고 참여하는 윤사장님, 결혼식 에 꼭 가야하는 어려운 여건임에도 중간 탈출을 하면서까지 참가하는 강동규 사장, 산행 능력이 日就月將하는 안교감선생님, 산나물에 맛을 들여 도심 가로수 잎도 山菜로 보인다는 노승애 부장, 몰래 카메라 맨, 산행 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표정과 행동을 잡아내는 장부장, 잊을까 말까 할 쯤 참여하는 박상호사장, 미적미적 산행 후미로 가다 번번히 길을 놓쳐 대원들에게 累를 끼치는 나를 비롯하여 산행에 둘째가라면 서러 울 산악대장 이용준. 한남금북정맥 종주에 참가하는 대원들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번에는 ‘민들레, 정말 오랜만에 갑니다. 근데 이 거리를 갈 수 있을 랑가? 걱정됩니다’라며 김명자부장 참가 의사를 밝혔고, ‘민들레 간다니까 보고싶어 따라갈까 하는데... 학교에서 시간을 내줄려나.. 고민입니다. 이젠 정맥산행이 겁나네요...,라고 이태인 총무도 이번 정간 산행을 해 보겠다고 한다. 그런데 ‘모처럼 민들레도 볼 수 있건만 저희학교 누리단 야영 날짜와 겹쳐졌네요. 어쩔 수 없어 빠집니다. 다들 재미있게 다녀오세요. 제부도 바닷바람을 마주하며 산바람을 그리워하겠습니다.’라며 이번 산행에 참여할 수 없다는 노부장. 그래서 이번에도 10명을 넘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 산행이 되는 것 같다.
더운 날씨를 대비하여 물도 꽁꽁 얼리고 점심 도시락 찬으로 부추煎과 풋고추를, 간식은 참여 인원만큼(2개 * 8명 + 3개) 삶은 계란으로 준비했다.
[2] 산행 출발
03 : 00시에 맞추어 둔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급히 일어나 산행 채비(差備)를 하다보니 03 : 30분. 윤사장님 전화. 전날(토) 酒席의 濃度가 짙어 산행을 할 수 없단다. 몇 번 함께 산행하기를 권했으나 어렵다고 한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04 : 10분경, 산행 출발지 『東水原 物流 센터』도착. 산악 대장을 비롯하여 김명자, 안상경, 이태인, 장현옥 대원과 백두산 산행을 함께 했던 주선생님도 나와 있다. 김명자, 이태인 부장 한참만에 봐 반갑고 기대하지 않았던 주선생님 참석은 더 없는 기쁨이다. 강사장은 아침 식사 장소로 나온다고 한다. 오늘 산행도 더하고 빼니 5구간 산행 때의 인원이 되고 말았다.
[3] 산행 전 준비
04 : 15분, 출발.
05 : 10분, 증평읍 교동리에 있는 『고향 해장국 ☎ 043-836-2355』 앞에 도착. 먼저 와 있던 강사장 반갑게 나와 반긴다.
각자 취향에 따라 선지, 콩나나물, 올갱이 해장국, 갈비탕으로 아침 식사. 오늘 산행의 목적지『행치재』로 차량 이동시키고 다시 되돌아 와 출발지 『질마재(해발 390m)』에 도착한 것이 06 : 50분.
[4] 질마재
신발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崔元龍功績碑』를 기점으로 오늘 산행을 시작했다. 잠깐 언덕길을 오르니 평지 같은 완만한 길로 이어진다. 한바탕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쉴 것으로 생각했는데 출발이 너무 가볍다.
완만한 오름 길을 따라 10여분 진행. TV안테나 앞을 지나고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오르막으로 올라붙는다. 오르다 보니 지난 구간에서는 보이지 않던 취나물이 자주 눈에 띄는데 다소 억세기는 해도 먹을만하여 부드러운 것을 골라 뜯으며 첫 峰에 올랐다(07 : 20분경). 앞서 온 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늘 산행에서의 採取 나물은 주부장에게 몰아주자. 모처럼 참여한 고마움으로 ---
07 : 40분, 樹種改良 아니면 솎음을 위해서인지 나무가 많이 베어져 있다. 희미하게 난 길을 자주 막아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내림 길, 평지. 길 옆 작은 웅덩이(07 : 45분), 싱그러운 숲의 전경이 담겨져 있다. 아마도 『목사동』안부쯤에 온 것 같다.
다시 오름 길, 묘 1 기(07 : 50분), 벌목지대(07 : 55분), 내림 길, 평지 길. 낙엽을 밟고 가는 길이 양탄자를 밟고 가듯 부드럽고 푹신하다.
[5] 칠보치와 칠보산
08 : 05분 칠보치 도착.
칠보치는 비포장 도로로 좌측으로 가면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도근이 마을이고, 우측은 문당리 진다리마을을 연결 시켜 주는 고개가 된다.
휴식도 없이 칠보산을 오르기 위해 비포장 도로를 가로질러 다소 급한 오름 길로 올라붙었다. 08 : 25분, 묘 1기가 있는 4거리를 지나고 08 : 30분, 3기의 묘가 있는 봉에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마을 인근에 있는 산이기 때문인지 묘지도 많고 갈래 길도 많아 표시기 등에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08 : 58분, 칠보산 정상(정맥 길에서 약 50m 우측에 있음), 해발 585m의 사각 표지석이 하나 세워져 있고 별다른 특징은 없다. 이 산은 일곱 가지 보배가 들어있다는 산이라고 하며 한강과 금강의 발원지가 된다고 한다.
※ 칠보산 :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 배나무골 마을, 옥구장씨의 집성촌
칠보산에 올랐다가 15분 정도를 더 진행하여 林道인 듯한 길을 지나고 묘 1기를 지나(09 : 20분)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이곳에도 많은 나무들에 베어져 흩어져 있다.
[6] 594.5봉 정상
09 : 45분, 두 가닥의 철사 줄을 따라 오르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준비해 온 계란으로 간식. 앉아 쉬는가 싶은데 다시 출발이다. 오늘 따라 강사장, 始終 선두를 가면서도 여유를 갖지 않는다. 결혼식 참가 때문에 무척 다급한 모양이다.
09 : 55분, 갈림길을 지나 칠보산 보다 더 높은 594.5을 오르기 위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급경사로 올라붙었다. 594.5봉 정상(09 : 58분). 나무가 잘려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잡목과 풀이 뒤덮인 정상에 동판으로 만든 원형 삼각점을 국방부지리연구소에서 설치해 놓았다. 좀 특이하다 싶은 삼각점을 확인하며 잠시 주춤하다 풀숲을 빠져 나와 보니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7] 솔티재 구간
[7-1] 솔티재가 어디 인가?
10 : 30분, 능선 끝자락 갈림 길. 선명하던 길이 희미해지고 표시기도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듯하여 「한배」를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고 뒤따라 올 줄 알았던 김명자부장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태인, 산악대장의 전화, 가야할 길의 설명을 받았으나 현 위치를 가늠하지 못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능선을 따라 난 길을 내려서니 비포장 넓은 길이 나온다. 이쯤이면 선두 대원들과 만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려선 지점의 양 방향을 가 봐도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갈 방향을 몰라 난감해 하고 있던 차, 혼자서 걸어오고 있는 아주머니 만났다. 『솔티재, 보광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오늘 산행에 救世主를 만난 것이다. 중도에서 길을 벗어나기는 했어도 대원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큰 다행이라 생각하고 아주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되돌아 『普光寺』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모롱이를 돌고 작은 계곡을 지나다 보니 목장 진입구가 나온다. 조금만 더 가면 『솔티재』거나 『보광사』가 나올 것 같다. 어디쯤이냐고 확인하는 이태인 총무 전화, 때마침 ‘절’ 앞을 지나고 있어 보광사 앞을 지나고 있다고 했는데 위치가 가늠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보이는 절의 건축 연대가 오래되 보이지 않는다.
[7-2] 원수암(元水岩) 마을
5분여 더 진행(11 : 10분), 마을이 나오고 도로변에 『元水岩敬老堂』현판이 붙은 건물이 보인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마을 老人丈에게 『모래재』를 물으니 앞에 보이는 큰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한다.
『원수암』은 水岩里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물이 좋고 바위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조선 영조, 헌종 연간에 작성된 ‘충청도읍지' (淸安祿) 地圖에 松恃(솔티 : 비친골 오른쪽, 괴산군 사리면 방축,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쪽으로 통하는 고개 . 방축리 와 경계) 근처 즉 지금의 사리면 방축리, 청안면 조천리 쪽으로 수암(水菴 : 1571년 작성된 ‘충청도읍지 淸安綠 地圖에 水電寺라 표기)’이라는 절이 표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수암』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水岩이라 쓰고 마을에 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수암이라 부른다고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위의 내용이 와전 된 것 같다
<출처 :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홈페이지, http://www.myongdok.net/Suam/>
[7-3] 모래재
수암마을을 지나 34번 국도를 올라서 보광산광광농원 쪽으로 향하다 보니 버스 정류소가 있고 『보광사』입구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멀리 보광산광광농원 건물도 보이고 도로 개울 건너 쪽으로 대단위 농지 개량사업이 펼쳐지고 있는데 토질이 모래로 형성 되 있다. 그래서 보광산광광농원이 자리하고 있는 이 곳을 『모래재』라고 하는 모양이다.
모래재(괴산방면에서 증평으로 가는 고개)는 사담리 하도와 수암리 시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시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으로, 사담리 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으로 유입되어 분수령(分水嶺)이 되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기 전 왼쪽에 한봉수. 이정구(李正九)등 9명이 일본군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 사살하고 총기와 탄약을 노획한 공을 기리는 비(모래재 의병격전 유적 비, 1984년 건립, 출처 : 괴산군 사이버 타운)가 세워져 있다고 하는데 정맥 길을 벗어난 산행 탓으로 유적 비를 확인을 하지 못했다.
[7-4] 보광산 관광 농원을 지나
11 : 20분, 보광산 관광 농원 앞 도착하여 곧바로 수레 길로 접어들었다. 수레 길을 따라 가다 보니 신설 도로 아래로 긴 통로가 나 있다. 이 통로를 빠져 나가니 낚시터(수암)가 있고 서너 명의 강태공이 대형 우산을 받치고 낚시를 즐기고 있다. 낚시터를 뒤로하고 좀더 진행하니 보광산 방향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접어드니 墓地群이 있고 대형 文人石과 묘비는 오랜 風霜을 겪었는지 돌이끼가 끼었고 비문도 마멸 되 판독이 어렵다. 아마도 명망 있는 집안(구례 손씨)의 宗中山인 모양이다.
[7-5] 보광산 중턱에서의 점심 식사
선두로 간 대원들을 따라 잡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한 때문인지 약간의 경사면을 오르는데도 힘이 들고 땀방울이 모자 창끝으로 뚝뚝 떨어진다. 숲 속으로 접어드니 대원들이 자리를 잡고 점심 도시락을 펼치고 있다. 당초 계획으로는 보광산 정상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으나 질마재를 출발하여 4시간 30여분을 힘들게 걸었기 때문에 보광산 정상에서의 점심 식사는 무리인 듯 했다.
급한 데로 얼음물로 목을 축이고 각자 준비해 온 찬으로 밥을 입안에 떠 넣으니 山海珍味가 이보다 더 맛을 낼 수는 없는 것 같다.
[8] 보광산 오르는 길
[8-1] 보광사(普光寺)
12 : 00시 점심 식사를 끝내고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빡시게 보광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12 : 25분, 이정표가 세워진 능선 3거리 도착했다. 모래재 30분, 시동마을 40분, 보광산 20분이라 표기 되 있다.
이곳에서 50여 m룰 진행하다 넓은 길로 내려서니 「보광사 10분, 보광산 15분」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普光寺(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산1번지 소재)』는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 1년에 창건되고 조선 헌종(憲宗)때 弊寺 된 옛 봉학사 터의 아래쪽에 건립한 사찰이다.
1967년 사찰 위쪽에 있는 봉학사지를 답사한 기록에 의하면 봉학사지 5층석탑 2층 옥개석 사리공에서 조선 세조 때 탑을 보수한 기록문이 나왔다고 하며, 폐사지에서 수습한 암막새에 음각 된 당초문이 고려중기 이후로 보여 지는 것으로 밝혀져 봉학사의 창건과 중수 연대를 가늠하고 있다.
한편 충청북도지에 의하면 1925년 폐사지에 권봉주스님이 초막을 세우고 김봉삼스님이 1936년부터 폐사지에 있던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보광사 대웅전에 봉안하여 主尊佛로 모셨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에 보광사가 건립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출처 : 槐山의 文化財, 괴산군, p 59, 1998>
[8-2] 鳳鶴寺址의 5層 石塔과 金素의 墓
10분만 산행 시간을 더디 하면 『보광사』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었지만 산행 시간에 쫓겨 보광산으로 올라붙었다.
보광산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여 걷기를 10여분, 5층 석탑이 세워진 『봉학사지』에 도착(12 : 45분)했다. 弊寺된 절터는 세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찾는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잡초가 무성하다. 中央 壇에 5층 석탑이 있고 석탑 앞에는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석탑 뒤 상단에는 文人石과 望柱石(望頭石), 童子石 그리고 床石이 놓여진 커다란 묘 두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묘는 判書 金素(1602, 宣祖25 ~1666, 顯宗7)의 묘라고 한다.
이 묘 터는 본래는 鳳鶴寺 法堂의 主尊佛이 있었으나 헌종(1834~1849) 때 충청도 감찰사 金素의 후손들이 金素의 묘소를 쓰기위해 절을 허물고 석불을 파손하여 땅에 묻었다고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본래 금계가 알을 품는 명당 중의 명당인데, 김참판의 묘를 쓴 얼마 후 괴승이 나타나 ‘묘 자리는 明堂이나 맞은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보이지 않게 하면 더욱 흥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물길을 돌려 버리니 그로 인한 재력의 낭비가 심했으며 후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금계가 알을 품는 형상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알을 품다 내려와 물을 마셔야 하거늘 부근에 물이 없으니 물을 찾아 금계가 떠나게 되었고, 당연히 알은 곯아 버려 후손이 끊기는 형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 충북의 사찰을 찾아서 , 충북학연구소>
당시 세도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무덤이다. 아무리 명당이라 하더라도 순리를 역행하고서 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 天理인 듯하고 慾心이 過하면 禍를 낳는다는 理致 무덤에 얽힌 전설이 전해주는 듯하다.
[9] 고리티 고개 가는 길
봉학사지 5층 석탑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 촬영을 하고 다시 출발이다. 불과 2.3분 거리에 있는 보광산 정상은 오르지 않고(총무, 산악대장은 다녀 옴) 직진하여 4거리에 도착(13 : 05분)했다. 보광사 5분, 모래재 50분이라고 표기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평탄한 길을 따라 걷기를 10여분(13 : 15분). 사거리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보광산 40분, 둔터골 30분, 소암 30분, 백마산 40분. 앞으로 고리터 고개를 지나고 백마산을 비켜나가 내동고개를 넘고 보천고개까지 가면 오늘 산행의 큰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산행은 헷갈리는 길 말고는 기복이 심하지 않는 평이한 산행이다. 初夏의 해가 중천에 높이 뜬 탓인가. 터널 같은 숲 속을 걷는데도 열기가 점점 더하고 얕은 경사면을 오르는데도 등을 타고 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산행에서는 물도 작은 팻트병으로 두 병이면 충분했는데 오늘은 일찌감치 준비해 온 물이 바닥이 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그닥 달그닥 병 속의 얼음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13 : 20분, 삼각점이 있는 395.4봉에 도착했다. 국립지리원에서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삼각점에 대한 안내문 : 국립지리원에서는 측량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 국가 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분야에서 이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삼각점은 전국에 일정한 간격으로 16000여점이 설치되어 지도재작 지적측량 건설공사 각종시설물의 설치 및 유지관리 등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용되는 국가 중요시설물로서 국민 모두 소중한 재산입니다. 이러한 삼각점은 누구든지 파손하거나 그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되며, 만약 무단으로 훼손 하는 경우에는 이지역의 모든 측량을 실시할 수 없으며 관련자는 측량 법령에 따라 벌을 받게 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설치된 삼각점(음성 476)의 위치는 표주의 십자선 중심을 기준으로 하여 아래와 같습니다. 동경 127-00-51. 북위 36-49-52. 높이 395m. 2003년 8월.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장』라 되 있다. 한마디로 「삼각점」을 훼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삼각점에서 약 5분(13 : 25분), 절개지를 내려서서 비포장도로를 건너 숲으로 접어들면 『고리티 고개→, 백마산 →』이라 표기된 작은 표지판을 나무에 묶어 놓았다. 아마도 화살표로 보아 고리티 고개는 좀더 가야하나 보다.
비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5분여(13 : 30분)를 쉬엄쉬엄 내려서니 성황당 흔적(돌무더기)이 남아 있는 좁은 고개가 나온다. 이곳이 『고리티 고개』인가? 고리티 고개는 소암 서남쪽에 있는 고개가 된다.
「소암리는 괴산군 소수면 소재지에서 서북방 약 10km에 위치한 마을로 북으로는 몽촌리 남으로는 고마리 그리고 사리면 중흥리와 인접하고 있는데 옛날 평강 전씨 소유의 연못이 있었고 연못 위에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병인년(약 200년 전) 홍수 때 연못은 매몰되고 형금은 옛터와 연못 중앙에 위치했던 바위만 남아있어 그로부터 물 沼자와 바위 岩을 따서 소암리라 부르게 됐다하며 그 바위에는 "人岩洞口"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소수면 소암리 전호식>」고 한다.
<출처 : 산군 소수면 소암 2리, 지명유래>
돌무더기를 지나 경사면으로 올라붙는데 뒤따라오던 장부장의 카메라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흰색 초롱꽃이 언덕바지에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우리 눈에는 띄지 않던 초롱꽃이 장부장의 눈에 띄는 것을 보면 관심사가 남다르기 때문이리라. 이런 경우를 두고 「至誠이면 感天」이라하는가 보다. 탐낼만한 멋진 작품이 다음 카페에 오를 것 같다.
[10] 백마산 분기 봉
경사지를 올라 고만고만한 얕은 봉을 30여분 오르내리다 급하게 한 봉을 오르니(14 : 05분) Y자로 길이 갈라지고 소나무에 작은 이정표(↖白馬山 ◉ 현위치 ↓보광산, ↗주봉저수지(음성읍 주봉)를 매달아 놓았다.
『白馬山(백마산의 본래 이름은 지봉산임)』은 해발 379.2m로 충북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주봉리와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수석이 절기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명 음성의 소금강이라고 부른다. 남쪽에는 백운사가 있고 북쪽에는 주봉사가 있으며 백마산을 경계로 북쪽은 남한강 수계이고 남쪽은 금강수계의 분수령을 이루어 충북을 지형적으로 남북으로 둘로 구분하는 경계가 나누는 산이기도 하다 .
「한국여행정보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약 300여전(인조 27년)에 북록에 있는 동굴에서 백마가 나왔다 하여백마산 이라 했다. 지금까지 백마묘가 있어 가뭄이 심할 때면 무덤위에 맑은 물을 붓고 묘위는 파헤치며 농악을 치면 단비가 내리다고 한다. 또 백마산은 전체가 명당인데도 묘를 쓰지 못한 다고 한다. 이 산에 묘를 쓸 경우 그 해는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피해를 당한다는 것이다. 산 정상에는 상독암, 관창암, 장사바위, 맹몽바위, 고깔바위, 상좌바위, 소두방바위, 범바위, 매바위, 쌍동바위 등이 있으며 산의 북쪽에는 백마굴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좌측으로 약 1km 정도 가면 충북 음성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백마산』을 절경을 볼 수 있는데도 가야 할 방향이 다르고 시간과 筋力이 딸려 우측 주봉저수지라고 표시되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1] 내동고개
백마산 분기 봉에서 약 3,4분을 가다보니 상석이 놓여진 묘 1기가 나오고 林道 같은 넓은 길로 내려섰다(14 : 20분경). 미리 조사해 온 안내 글로 보면 이 곳이 『내동고개』인 것 같다. 내동 고개는 소암 서북쪽에서 음성군 원남면 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된다.
[12] 보천 고개
14 : 45분, 급하게 봉 하나를 올랐다 내려서서 넓은 길을 따르다 보니 길 가운데 삼각점((437복구 건설부74.10)이 있다. 대개 삼각점은 산 峰에 있는데 이 삼각점은 길 가운데 있는 것이 좀 특이하다.
다시 가파른 산봉을 오르는데 이태인 총무, 「한배산악회」꼬리표를 물병에 달아 길 가운데 놓아두고 있다. 뒤 따라 오고 있는 김명자 대원이 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2분여를 힘들게 오르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산 꾼 둘을 만났다(14 : 58분). 이 총무, 길에 놓아둔 물을 마시지 말라고 부탁을 한다. 대원들을 위하는 자상한 배려가 고맙다.
한바탕 숨을 몰아쉬며 봉에 올랐다 급하게 내려와 안부를 지나니 평탄한 길을 따르다 보니 능선이 분기하는 3거리가 나오고(15 : 05분) 전망이 툭 터지며 봉 아래로 포장도로가 보인다.
15 : 28분, 2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섰다. 도로 양쪽에「음성군 원남면」, 「괴산군 소수면」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에는 큰 느티나무 한 거루가 있다. 느티나무 앞 까만 표지석에 「보호수, 고유번호 : 괴산 85호, 지정일 : 1982. 11. 16, 수종 및 본수 : 느티나무 1본, 높이 및 둘레 : 12m 4.3m, 수령 : 450년, 소재 : 괴산군 소수면 옥현리」라 기록해 놓고 있다.
먼저 온 산악대장은 동내로 물을 구하러 가고 이태인 총무, 뒤로 오는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곳이 『보천고개』라고 한다.
『보천리』는 「본래 음성군 원서면 지역으로 보냇가에 있다하여 보내 보천이라 하였다. 「여지도서」음성현 조에 보천리(보천리 지역)는 음성현에서 남쪽으로 20리 거리에 있으며 호수 112호, 남자 211명, 여자 292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1914년 5월 19일 도령고시 제29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조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보천리라 해서 음성군 원남면에 편입되었다. 해방직후 1945년 11월 2일 법령 제21호에 의하여 일제 총독부 지방 관제를 그대로 이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고 보천3리 마을 홈페이지에 소개를 해 놓고 있다.
후미로 따라오는 세분 여자대원들은 우리가 도착해서 10여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를 않는다. 마을로 내려간 산악대장, 물을 구해오고 안상경 교감도 물을 더 보충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다 온 연후에야 여자대원들이 도로로 내려선다. 후미 팀 도착이 늦어 약 30여분을 느긋하게 휴식할 수 있는 복을 누렸다.
[13] 상로리, 과수원 길
후미 팀, 갈증을 풀자 곧 바로 출발(16 : 05분). 다소 가파른 봉 정상(378.5봉)에 올랐다(16 : 25분). 삼각점이 있고 우측으로 벌목이 되어 사야는 툭 터졌지만 허전하고 황량한 느낌이 든다.
16 : 55분, 고추밭이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지나(마송 터널이 가로지르고 있는 지점) 밭 가장자리를 따라 잣나무 숲으로 들어섰다(17 : 05분). 숲속을 빠져 나오니 또 하나의 시멘트 포장길이 나오는데 도로변에 「상로리ꀦ,ꀩ과수원 길」방향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동네 길이라 길 찾기가 어려운지 앞서 도착한 산악대장, 작은 언덕을 오르내린다. 상로리, 과수원 길을 지나 우회하여 길 가장자리에 앉아 후미로 오는 여자 대원들을 기다리며 잠시 휴식. 合流. 「光州潘氏壯節公柯亭派先塋合同祭壇」을 지나 農路를 따르다 표시기가 있는 숲속으로 들어섰다(17 : 25분). 앞서가던 대원들이 農路에서 불러 내린다. 보니 새까맣게 잘 익은 오디를 따 먹고 있다. 몇 십 년 만에 보는 오디인가. 한줌을 따 입에 넣으니 달콤새큼한 맛이 그저 그만이다.
[14] 행치재는 아직도 멀었는가?
허리춤 까지 자란 풀밭을 헤치고 앞서간 대원들의 흔적을 따라가니 더 굵고 많은 뽕나무를 만나 흡족하게 오디를 따 먹고 밭 끝자락에 올라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하마면 오늘 산행의 끝 지점 『행치재』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숲속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목장 철사 줄을 끝 지점. 앞에 큰 상이 가로막고 있는 절개지 도착(18 : 15분)했다. 몇 개의 단으로 되 있는 절개지 높이가 100여 m는 족히 될 것 같다. 절개지 도로 건너로 『행치재 휴게소』간판이 보이고 오른 쪽으로 석물공장(달성석재)도 있다. 한참 공사 중인 절개지를 조심스럽게 내려와 36번 국도의 지하도(36번 국도로서 증평군과 음성군을 연결하는 주 도로)를 통과하여 오늘 산행의 목적지 행치재 휴게소에 도착(18 : 20분경)했다.
『행치재』는 「삼신산(큰산) 주변과 고개마루 정상에 수백년 묵은 몇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이미 서낭으로 모셔져 정월 대보름 밤이면 정한 수를 떠다 놓고 제를 올렸다 한다. 이를 보고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는 고개라 하여 살구행자(杏) 고개치자(畤)를 따서 행치라 이름하였고 들판이름은 살구징이라 이름지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상 명칭으로 상당리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 고개의 물이 한강과 금강으로 갈라지는 분수령 고개라 하여 한금령이라 이름지어 부르고 있는데, 행치고개란 지명이 퇴색될까 염려스럽도다.」라고 상당리 마을 비에 소개를 해 놓고 있다.
[15] 함께 산행하지 못한 한배 산 꾼 생각
이번 구간(질마재 ~ 행치재)도 11시간 30분 간 20. 5km를 산행을 했다. 5,6구간에 걸쳐 다음 구간에서 넘을 『큰산』을 뺀 한 구간을 앞당긴 산행이었다. 모처럼 산행에 참석한 김명자, 이태인 총무, 주선생님 무리 없이 산행을 했고 바쁜 일정이 있음에도 보광산관광농원까지 동참했던 강동규사장님의 열성도 놀랍다. 늘 함께 했던 노승애부장과 윤희원사장이 빠져 아쉬웠고 20명이나 되는 한배 회원들의 모습을 자주 못 보는 것은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바쁘지만 잠시 짬을 냈으면 좋겠다.
비교적 굴곡이 심하지 않았지만 초여름의 더위로 어느 때 보다 많은 땀을 흘렸던 산행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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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모래재
모래재 : 사담리 하도와 수암리 시동 사이에 있는 고개 신라시대(新羅時代) 사애점촌(沙涯漸村)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
모래재(沙峴 ' 조선 영조 헌증연간에 작성된『충청도읍지」 (청안록) 지도에 沙峴l 1871년 작성된『충청도읍지』 (청안록) 지도에도 沙峴이라 표시되어 있다 )는 모래가 많이 흘러내려 붙여진 이름 시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으로, 사담리 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으로 유입되어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일본(日本)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에 사애점촌(沙涯漸村)이란 지명이 보인다. 집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곳 모래재 일대가 사애점촌이 아닌가 추정해왔다.
그 문서에 살하지촌(薩下知村)등의 지명과 마전(麻田)의 존재도 기록하고 있다 괴산으로 향하다 모래재 정상 못 미쳐 왼편 골짜기에 사기를 굽던 사기점(沙器店)골 또는 사기장골(沙器場)이 있다 여기서 괴산 방향으로 약 1km 가다 석촌 옥방골에 통일신라 후기의 광구병 파연이 수습 된 가마터가 있다.
이곡리 마전(麻田)부락이 있고, 방축리에 방축(方丑), 불당(佛堂)골 등의 지명이 있는데 , 이와 관련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 문서에 우마(牛馬)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방축(方丑)이란 지명은 마을이 소의 형상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 소를 놓아 방축(方丑)이었을 가능성도 배재 할 수 없다.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소와 관련 있는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사담리(沙潭里)에 모래 못이라는 마을이 있다. 사담리 하도에 군(郡)이나 현(懸)에 축조 한 읍성(邑城)의 유형으로 보이는 축조연대 불명의 석성이 잔존해 있다. 모래재는 한자(漢子)로 사애점(沙涯漸)이라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애점(沙涯漸)을 우리말로 표기하여 모래재라 할 수 있다. 이 일대는 민둥산으로 모래가 많은 산이라 모래가 흘러내렸다. 일제시대에 사방림을 조성하여 지금은 송림이 울창하다. 구체적인 고증자료는 탐색중이다.
<참고자료 2> 모래재의병격전지유적비
모래재의병격전지유적비는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던 한봉수는 군대가 해산된 후 의병들을 모아 1908년 5월 이곳 모래재를 지나가는 일본군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하여 이들을 사살하고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여 일본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는 것이다. 또한 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는 것이다. 국권회복과 민족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선열들의 우국충정을 길이 전하고자 높이 3m 너비 2.5m 크기의 유적비를 1984년 충주보훈지청에서 설치한 것이다.
모래재 의병격전지유적비
<참고자료 3> 詩 : 모래재 고개, 김명학 지음
이쯤에서 / 되돌아보면 / 지난 / 내 인생 길도 / 저렇게 / 굽이굽이 / 돌아서 왔을까? / 분명
곧게만 온 것 같지는 않다
<참고자료 4>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
○ 위치 : 本面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水岩里 水岩마을, 서는 壽城마을과 道安面 남은 淸安面, 북은 三巨里마을에 접하고 있다.
○ 연혁 : 본래 槐山郡 西面의 지역으로서 방죽이 있었으므로 방축골 또는 方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鎭岩里와 國士堂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方丑里라 해서 沙梨面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壽城, 三巨里, 元方丑, 松五로 분할 관리하다 1985년 元方丑과 松五를 합하여 方丑으로 개편하였다
○ 방축 : 방축리의 중심마을 마을의 형상이 소처럼 생겨서 방축이라 한다고 함
<참고자료 5> 충북 괴산군 사리면 시동리(수암리)
○ 위치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시동리(수암리)
本面의 중남부에 위치하며 동은 篁山마을, 서는 沙潭里 荷島을, 남은 水岩마을, 북은 梨谷里 蒲洞마을에 접하고 있다.
○ 연혁 : 본래 槐山郡 西面의 지역으로서 냇가에 바위가 많으므로 수암골 또는水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梨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水岩里라 해서 沙梨面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水岩, 柴洞, 篁山으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1914년 부터 沙里面 사무소가 위치해 있었으나 1938년 사담리로 이전 하였다.
○ 자연마을
○ 산우물(山井) : 도람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샘이 있음.
○ 시궁골(柴洞. 심골) : 元水岩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부터 마을과 주위에 나무가 많이 자라서 유래된
이름. 시동에 거주하는 尹聖達은 딸기나무가 많아서 딸기나무시(柴)자를 써서 시동이라 했다하나.
柴는 땔나무시. 따라서 땔나무의 와전 이라 여겨짐 .
○ 안심골(安柴洞) : 시궁골 안쪽에 있는 마을
<참고자료 6-1> 보광산(539m)
○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 보광산은 산세가 뛰어나거나 경치가 좋고 바위가 있다던가 하는 산은 아니다. 나즈막한 육산에 불과하나 정상의 봉학사지에 얽힌 전설 같은 현실에 인간의 욕심이 무상함을 일깨워 주는 곳이기도 하다. 접근이 용이하고 험하지 않아 가족단위로 등산할 수 있는 좋은 산이다.
산행의 시작은 모래재 고개에서 800미터 괴산쪽으로 위치한 수암리 시동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래재 고개에는 보광산 관광농원이 있어 휴식을 취하고, 특색있는 먹거리와 농원 뒤의 방가로식 숙박시설과 각종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사육시설이 있어 가족단위로 찾기에 좋다. 사동마을에서 보광사까지는 차도가 닦여있다. 시동마을 앞 승강장옆에 있는 보광사 안내표지판을 따라 비포장 길을 5분정도 오르면 왼쪽으로 조그만 소류지가 있고, 오른쪽엔 새농심 유기질 비료공장이 보인다. 계속되는 길은 5분정도 더 가면 가파르다. 걸어서 오르기에도 힘이 드는데 차가 오르내리고 있다. 승용차는 가지 못하고 찌프차만 통행할 수 있는 길이다. 시동마을을 출발한지 50분정도면 보광사에 도착한다. 보광사는 없어진 봉학사의 후신으로 그 명성을 간직해오고 있으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대웅전에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대웅전 처마끝에서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낮은 산들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해 보이며, 마음까지도 시원해 지는 곳이다. 대웅전 오른쪽 바위 밑에선 석간수가 샘솟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넘쳐 나는 샘물이 맛 또한 그만이다. 요사체 뒤의 화장실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은진송씨 묘가 있는데, 묘 앞으로 잘 나 있는 길을 버려두고 일단 묘로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길이 잘 보이고 5분정도 가면 나뭇가지 사이로 봉학사지 5층석탑이 보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터에 홀로 남은 5층 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지방유형 문화제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있다. 탑에서 30미터정도 가면 큰 묘가 두 개 나타나는데 이것이 봉학사와 관련있는 묘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묘자리는 봉학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이 터가 "금계포란형"으로 천하에 드문 명당자리라 김아무개의 자손들이 세도를 등에 업고 절을 허물어 이 명당 자리에 묘를 썼다 한다. 봉학사가 철거된지 여러 해 지난 후 괴승이 나타나 앞산의 물길을 둑을 쌓아 돌리도록 하여 후손을 잇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묘의 바로 뒤로 주능선이 얕으막하게 지나가고 능선에 올라보면 길이 네갈래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으로 200미터정도가 정상이지만 뚜렷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다. 왼쪽길은 모래재로 갈 수 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 좋지 않다. 정면으로 난 내리막길을 택하면 백마산까지의 능선 종주나 소매저수지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차를 시동마을이나 모래재에 두고 왔을 경우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하겠지만 백마산으로 가는 능선의 고리테 고개에서 소매리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좋다. 능선 사거리에서 내리막길를 따라 난 키 큰 철쭉 터널길을 40분정도 내려오면 고리테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소매저수지로 40분정도내려오면 사리면의 둔터골 마을로 내려온다. 둔터골에서 15분정도 더 가면 백마초등학교가 나오고 넓은 포장길에 닿게 된다. 고리테 고개에서 백마산까지는 산불이 난 후 벌채로 인해 잡목이 무성히 자라 길도 찾기 힘들고 벌채 후 잔재물이 온통 길에 널려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참고자료 6-2> 봉학사지 안내문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봉학사지 5층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4장의 지대석 (地臺石) 위에 세워진 것으로 초층탑신 만이 2장의 돌로 되어 있고, 각층의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부는 없어지고, 넓직한 지대석 위에 기단갑석으로 보이는 부재를 얹고 탑신을 쌓았다, 각층 탑신의 면석에는 아무런 수식이 없고 모퉁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상륜부(上輪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1개가 있고, 옥개석은 5단받침과 2단의 탑신괴임으로 되어 있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한편이고,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약하여 고려 초기의 작품을 보이고 있다이 탑은 현재 사담리 보광사(普光寺) 뒷편 옛 절터에 있는데 1966년에 이 석탑은 2층 옥개석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된 청동합(靑銅盒)에 들어있던 청동불상에서 '鳳鶴山 鳳鶴寺'라 쓰여진 시주문(施主文)이 발견되었다 보광산 폐사지에 있던 것을 아래쪽에 새로 지은 보광사(普光寺) 대웅전(大雄殿)에 봉안하여 1935년부터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다
<참고자료 6-3> 봉학사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
청주에서 증평을 지나 괴산방면으로 가다보면 모래재(228m)를 지나 좌측으로 천혜의 기도도량 보광사 1.5km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마을을 지나 임도를 따라 한참을 가면 다시 차도와 인도를 알리는 팻말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다시 좌측에 보광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에 차를 세워두고 우측편으로 급경사의 산길을 2~3분 올라가면 보광사 대웅전이 보인다.
본래 폐허였던 봉학사지의 아래 쪽으로 1925년 봉주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법등을 다시 밝혔고, 1936년 봉삼스님이 봉학사지에 있었던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면서 중창하였다. 항마촉지인으로 결가부좌를 한 높이 95cm인 좌불은 나발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있고 원만한 얼굴은 약간 숙였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고 우견편단의 법의는 태조의 의대가 직선으로 처리되었으며 등뒤까지 주름을 조각한 수법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1976년 충북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는데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항마좌는 드문예에 속한다. 본래는 봉학사 법당의 주존불이었으나 헌종(1834~1849) 때 충청도 감찰사 김소의 후손들이 김소의 묘소를 쓰기위해 절을 허물고 석불을 파손하여 땅에 묻혀 있던 것이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본래 금계가 알을 품는 명당 중의 명당인데, 김참판의 묘를 쓴 얼마 후 괴승이 나타나 '묘자리는 명당이나 맞은편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보이지 않게 하면 더욱 흥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물길을 돌려 버리니 그로 인한 재력의 낭비가 심했으며 후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금계가 알을 품는 형상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알을 품다 내려와 물을 마셔야 하거늘 부근에 물이 없으니 물을 찾아 금계가 떠나게 되었고, 당연히 알은 곯아 버려 후손이 끊기는 형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1991년부터 지금의 운산스님이 주석하면서 1993년에는 낡은 법당을 헐고 새로 법당을 지었다. 대웅전의 신중탱화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한 천룡탱화로 매우 간결한 구도를 갖고 있으며, 영동 천마산 보덕암에서 조성된 것이다. 사찰측에 의하면 17~18세기에는 100명의 스님이 거주할 정도의 큰 사찰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대웅전 뜰 아래에는 대형 맷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근래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에 '봉학사'와 '지원경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봉학사의 창건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지원은 중국 원나라의 연호이고 경진은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해당되는데, 전하는 유물중 이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보이지 않아 대략 1340년경을 창건연대로 추측하고 있다.
보광사를 끼고 좌측편 산길로 조금만 오르면 본래의 보광산 봉학사지에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층석탑이 고고한 자태고 서 있다. 1966년에 이 석탑의 2층 옥개석 사리공에서 발견한 청동합에 들어있던 청동불상의 시주문에 '봉학산 봉학사'라 쓰여 있어 봉학사지 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탑신부로 2개의 돌에 우주를 조각한 옥신에 5단 받침과 2단 괴임이 있는 5층탑이다. 낙수면이 평단이고 전각의 반전이 약하여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탑은 넘어져 있던 것을 1967년 수암리 주민들에 의해 복원되었던 것을 1983년 괴산군에서 탑지를 발굴하여 원위치를 찾아 새로 복원하여 놓았다.
풍수에 의하면 보은 속리산의 낙맥으로 용이 100리를 가서 청주의 주봉인 상당산이 되고 상당산 낙맥이 북쪽으로 가서 보광산이 되었으며 다시 보광산은 동편으로 30리가서 괴산의 주봉인 선요봉이 되었으니 우측으로 오봉산을 백호로 삼고 좌측으로 명덕산이 청룡이 되어 보광산의 정기를 받은 괴산땅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전한다.
<자료출처 : 충북의 사찰을 찾아서 , 충북학연구소>
<참고자료 7> 삼각점에 대한 안내문
국립지리원에서는 측량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 국가 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분야에서 이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삼각점은 전국에 일정한 간격으로 16000여점이 설치되어 지도재작 지적측량 건설공사 각종시설물의 설치 및 유지관리 등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용되는 국가 중요시설물로서 국민 모두 소중한 재산입니다. 이러한 삼각점은 누구든지 파손하거나 그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되며, 만약 무단으로 홰손하는 경우에는 이지역의 모든 측량을 실시할 수 없으며 관련자는 측량 법령에 따라 벌을 받게 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설치된 삼각점(음성 476)의 위치는 표주의 십자선 중심을 기준으로 하여 아래와 같습니다. 동경 127-00-51. 북위 36-49-52. 높이 395m. 2003년 8월.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장.
<참고자료 8> 괴산군 사리면 송오리
○ 위치 : 本面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笑梅里 鷹岩마을, 서와 남은 老洞마을, 북은 陰城郡에 접하고 있다.
○ 지명유래 : 본래 槐山郡 西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老松里와 松五里를 병합하여 沙里面에 편입되었으며 행정마을 老洞, 松五로 분할 관리하고 있다. 노송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언덕위에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
<참고자료 9-1> 백마산
○ 위치 :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 소개 : 해발 379.2m의 백마산은 원남면 마송리, 주봉리와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수석이 절기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명 음성의 소금강이라고 부른다. 남쪽에는 백운사가 있고 북쪽에는 주봉사가 있으며 백마산을 경계로 북쪽은 남한강 수계이고 남쪽은 금강수계의 분수령을 이루어 충북을 지형적으로 남북으로 둘로 구분하는 경계가 나누는 산이기도 하다 .
백마산을 오르다 보면 백마굴을 발견할수 있는데 이굴에서 백마가 나왔다고 해서 백마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명산이다.
이산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면 이 근방의 작은 산을 모두 백마산을 보고 엎드려 절하는 것 같은 형상을 볼 수 있으며 주변에 백은사 암자가 있는데 암자에서 나오는 석가수가 산객을 맞아주고 있다.
<참고자료 9-2> 백마산
○ 위 치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 산 20
○ 관 리 청 : 사리면사무소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043-836-7301)
○ 개 요 : 괴산군 사리면과 음성군 원남면 경계에 솟은 자그마한 산이다. 조선 인조 27년에 백마가 나타나서 이 산기슭 일대를 돌아 다니며 살다 죽어 백마산이라 했다 하며, 이 백마의 무덤은 지금 까지도 남아 있다.
농사철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이 말 무덤 위에 맑은 물을 붓고 말 무덤을 약간 파헤치면서 농악을 울리면 단비가 쏟아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백마 묘의 봉분은 움푹하게 파헤쳐져 있다. 산꼭대기(464m)가까이에는 상독암, 관창암, 장사바위, 맹몽바위, 고깔바위, 상좌바위, 소두방바위, 범바위, 매바위, 쌍동바위 등이 있으며 산의 북쪽에는 백마굴이 있다.
<출처 : iitech.shingu.ac.kr/%7E200225062/group/mt_025.html>
<참고자료 9-3> 백마가 나타났었다는 예사롭지 않은 절터 백운사
세속인의 혼잡한 심산만큼이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니 저만치 백운사가 보입니다. 일주문도 없고 사천왕문도 없지만 예사 터가 아닌 듯합니다. 굳이 풍수지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절터로는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백마산은 해발 464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조선 인조 27년에 백마가 나타나서 이 산기슭 일대를 돌아다니다 일생을 마쳤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산입니다. 또한 금강과 한강을 가르는 준령으로 백마산을 기준으로 백운사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금강으로, 정상 뒤쪽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한강으로 흘러드는 경계의 산이기도 합니다.
2006.05.01 | 블로그명 : vicone님의 블로그
<참고자료 9-4> 백마가 울다 죽은 백마산 전설
○ 주 소 : 충북 괴산군 사리면
○ 전 설 : 옛날 소매리 매바위에 한 사람이 살었는데 자식이 없어 늘 근심하다 절에 가서 백일 기도를 드렸더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이 지나 아들을 낳았어. 그래 좋아했는데, 보니 아이의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달렸어. 이건 장수여. 옛날 장수는 겨드랑이에 비늘이 달리거든. 그런데 그 때는 장수가 나오면 역적이 된다고 해서 죽였던 모양이여. 그래 근심이여. 아들 나았다고 좋아했는데 애가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나라에서 죽일 게 뻔하거든.
그래 그 부모가 그걸 숨기고 키우는데 이놈의 애가 낳으니 지 삼일만에 뒤집어. 한달 되니까 일어나 걸어 다녀. 한 일년 되니까 말을 해. 서너 살 되니까 힘이 장사여. 여느 애들하고 다르거든. 원래 장수는 그렇다네. 그리고 지붕에도 날라서 올라갔다 내려 와.
그러니 이게 소문이 안 날 턱이 없지. 소문이 퍼져서 나라에서도 알었어. 이제는 죽는 거여. 그때는 장수가 나왔다 하면 죽일 때니까. 그러니 그 부모 맘이 어떻겠어? 귀한 아들 하나, 백일기도 해서 겨우 얻었는데 그게 장수라고 나라에서 죽이러 온다니 환장할 일이지. 안 그려? 그래 그 부모가 궁리를 하는 거여. 지금은 하루면 거뜬히 오지만, 옛날에 서울서 사자(사자)가 올려면 며칠은 걸리거든. 그래 그 때까지 묘안을 생각해내지 못하면 죽는 거여. 그래 두 내외가 잠도 안 자고. 잠인들 오겠어?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그 겨드랭이 비늘만 떼어 내면 될 것 같애. 왜냐하면 그 놈의 힘이 그 비늘에서 나오는 것 같고. 또 사자가 와서 신체검사를 할 때 그 비늘만 없으면 장수가 아니라고 그냥 갈 것 같거든. 그래 그 애가 잘 때 그 아버지가 그 비늘을 뗄려고 하니까 아이가 벌써 알고서
"아버지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며칠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는 거여. 그래 아버지가
"알았다."
하고 그냥 나왔어. 억지로 땔 수가 있어? 힘으로 당할 수가 있어? 그런데 내일이면 서울서 사자가 도착한다 이거여. 부모가 몸이 달았지. 그 안에 비늘을 못 떼면 죽는 거니까. 그래 그 날 저녘에 술을 먹였어. 장수는 잘 먹거든. 그래 먹고 자는 걸. 그 부모가. 내외가 비호같이 달려들어 비늘을 떼 버렸어. 떼버리니까 이래 쳐다보더니 죽드래. 떼 버리면 죽지는 않고 힘만 빠질 줄 알고 떼었는데 그만 죽으니 얼마나 서러워. 그래 목을 놓고 두 내외가 우는 거지. 울고 있으니까 서울서 사자가 들어오더니
"참 충신이다. 나라를 위해 아들을 죽였으니 참 충신이다."
이러구 그냥 갔지. 그런데 그 때 백마가, 하얀 백마가 산에서 내려와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히힝 히힝´하고 울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참을 하더니 죽더래. 그 백마가 장수를 태우러 왔는데 장수가 없으니까 죽은 거지. 그래 그 부모가 장수하고 백마하고 같이 묻어 주었데. 그런데 그 말이 저 위에 가면 그 굴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 굴을 ´백마굴´이라 하고 백마굴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백마산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어.
<출전 : 괴산가이드>
<참고자료 9-5> 용마(龍馬)무덤
백마산에서 백마가 인조 27년에 이곳으로 내려와 죽어서 묻힌 곳이라 하여 白馬 무덤이라 하고 가뭄이 닥치면 이곳에 와서 우기를 고대하는 기우제를 올렸다 함.
<참고자료 9-6-1> 백운사
○ 유형 : 사찰
○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 산20
○ 상세설명 : 백운사는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8년(1321)에 창건되고 조선 영조(1725-76)때 폐사된 대흥사(大興寺) 옛터에 1930년 하장우(河長雨)스님이 초막 4칸을 세우고 '白雲寺'라 이름한 사찰이다.
백운사 창건 이후 수 차례에 걸쳐 화재로 소실과 중창이 거듭하였는데 1997년 현재까지 대웅전, 요사채 등의 중건이 진행되고 있다. 백운사에는 1941년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으나 1965. 12. 4일 증평에 주둔한 군부대장 金某가 가지고 갔다고 하며, 1952년 철제여래좌상이 발견되었으나 1953년 분실되었다고 전한다.
<참고자료 9-6-2> 백운사 부도군
○ 유형 : 문화재자료
○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 산20
○ 상세설명 : 백운사 부도군은 모두 5기의 石造浮屠를 모아놓은 것이다. 5기의 부도 중 1955년에 건립한 백운사 2차 중창주인 송운제(宋雲齊) 스님의 부도를 제외한 4기의 부도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부도들은 조선시대의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 4기는 방형 혹은 가옥형의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옥개석(屋蓋石)에는 기와 골 등이 생략되는 등 후기적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합각마루의 용두 장식과 상륜부(上輪部)의 보주(寶珠) 등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백운사는 사역에서 출토되는 명문기와로 볼 때, 고려시대 대흥사(大興寺)였으며 조선 영조(英祖) 년간(1725-1776)에 폐사된 후 1930년대초 하장우(河長雨) 스님이 중창하였다.
<참고자료 10-1>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 보천3리 연혁
본래 음성군 원서면 지역으로 보냇가에 있다하여 보내 보천이라 하였다. 「여지도서」음성현 조에 보천리(보천리 지역)는 음성현에서 남쪽으로 20리 거리에 있으며 호수 112호, 남자 211명, 여자 292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1914년 5월 19일 도령고시 제29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조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보천리라 해서 음성군 원남면에 편입되었다. 해방직후 1945년 11월 2일 법령 제21호에 의하여 일제 총독부 지방관제를 그대로 이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을비문안
우리 마을은 서기 1500년 중엽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신 반식평께서 청주 요봉참방으로 계실 때 충주 연원도를 오가시면서 백마산과 견두산을 둘러보시던 중 이곳에 신라 때 도선국사의 비지에 나오는 현실마파곡 화발견두산이란 句節과 일치하는 필경임을 아시고 당시 영춘계감인 아우 석건에게 알려 이 吉地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셨다.
희의대부 익습은 가산파조이시며 그 후 자손이 세세로 세거하고 있고 그 아들 윤기는 통훈대부로 호조 및 형조정랑, 흥양, 회덕현감,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내셨다. 통정대부 진홍과 그 아들 필순, 달순은 문장이 뛰어나 당시 사림에서 송나라 소순, 소식, 소철에 비유하여 삼소자라 불렀고 혁동유문예라 하였으니 학문을 중히 여겼음을 잘 알 수 있다. 우리 마을은 충효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사회각계각층에서 봉사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에 우리는 이 마을의 주민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우리 마을을 사랑하고 올바른 마음을 길러 부지런히 일하면서 선인들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영원히 복된 마을로 만들어 나가자는 다짐에서 이 비를 세운다.
○ 마을비현황
1997년 12월 14일 마을회관 앞에 총 높이 300cm, 비신가로 150cm, 비신세로 70cm 규모로 군비 200만원, 자부담 300만원의 예산이 소요되어 건립되었다. 기단부는 방형이며 비신은 화강암틀에 오석을 넣어 마을 유래를 기록하였다
<출전 : 음성군 문화관광>
<참고자료 10-2> 보천장의유래(甫川場의 由來 :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
음성군 원남면 普龍里 가자 마을에 가면 宋炳豹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 송병표와 甫川場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본래 高宗 22년(1885, 乙酉)에 원남면 보룡리터 마을에서 태어난 송병표는 대대로 幾百石을 이루는 財富를 이어받아 豊足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甫川酒幕을 나올 때마다 항상 불만스러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보천주막을 중심으로 시장이 하나 서게 되면 이 근처 사람들이 생산한 각종 농산물의 集散 유통을 하는데 얼마나 편리하고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까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곳 보천 지방에서 농산물 매매를 위해서 마을 사람들이 시장을 찾아가는데는 청안장이 40리, 괴산장이 50리, 가장 가까운 음성장만 해도 25리를 가야만 했다.
이토록 장터가 멀고 보니 노자가 필요했고 또 밤길을 걷는데 뜻하지 않는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때 송병표는 이곳에 장터를 개설할 목적을 세우고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더불어 보천에 장이 선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그토록 불편을 당하면서도 사람들은 모여들지 않았다. 송병표는 행상인들을 붙잡고 술대접을 하면서 보천에서 물건 거래를 해서 장이 서도록 해달라고 했으나 그 결과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송병표는 初志를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술대접을 하는 수법을 2년 동안 계속하는 가운데 적지 않은 散財를 하고서도 결과는 얻은 것이 없었다. 에에 宋公은 생각 끝에 한가지 妙案을 생각해냈다. 1914년(甲寅) 송병표는 엽전 오십냥을 둥구미에 챙겨가지고 하인과 더불어 보천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해상인들에게 술대접을 하다가 점심때쯤 되자 엽전 둥구미를 들고 주막 지붕에 올라가 ꡒ지금부터 내가 여기서 돈을 뿌릴 터이니 모인 사람들은 엽전을 주어 가시오. 주은 엽전은 주은 사람 것이니 그리 알고 가져가시오.ꡓ 하고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나서 사방으로 뿌렸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눈에 白銅色을 띄고 엽전을 줍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런 일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각 고을에서 송병표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나갔다. ꡒ보천장에 가면 술을 공짜로 마실 수 있다.ꡓ ꡒ보천장에 가면 돈을 마음대로 주울 수가 있다.ꡓ ꡒ보천장에 가면 橫財를 한다.ꡓ ꡒ새터 송부자댁에서 活人積德을 하느라 돈을 물 쓰듯 한다.ꡓ 등의 소문이 꼬리를 물며 퍼져나가면서부터 9일 보천장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해서 오늘의 盛市를 이루게 되었다.
첫댓글 이번 정맥산행도 그리 쉽지않은 긴 거리에 고생들 많이 하셨군요.그동안 한배 산학회 회원님들의 격려와 우정의 의하여 나의 인생만큼이나 정맥 산행도 "원.라운드"돌아온 셈인데 그 목표는 깨지고 앞으로 변명은 하지 않고 분기하겠읍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부도 갯벌에서 제 마음은 회원님들과 함께 푸르른 능선을 따라갔습니다.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