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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
"옛날에는 후미진 내해가 훨씬 넓었단다." 스텔라 프란더스가 증손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여름, 망령을 보게 되기 전의 일이었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텔라를 쳐다보고 있었고, 스텔라의 아들 올던은 나무토막을
깎고 있던 나이프질을 멈추고 포치의 의자에서 돌아다보았다.
일요일이었다. 올던은 바다가재가 아무리 비싸게 팔려도 일요일에는 배를
내지 않기로 했다.
"후미진 내해가 넓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할머니?"
증손인 헐이 물었으나, 스텔라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슬리퍼로 가볍게
마룻바닥을 치며 안락의자를 흔들고 있었다. 헐은 어머니 로이스에게 물었다.
"엄마, 무슨 뜻이에요?"
로이스는 고개를 옆으로 젓고는, 아이들에게 바구니를 들려주며 딸기를 따오라고
했다.
스텔라는 생각했다. 아마도 로이스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을까?
옛날에는 내해가 훨씬 넓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스텔라 프란더스이다. 1884년생인 스텔라는 고트섬 초연장의 주민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 번도 본토에는 건너가 본 일이 없었다.
'사랑하고 있어?' 언제부턴지 스텔라에겐 이 물음이 붙어 다니게 됐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말의 뜻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을이 됐다. 그 해 가을은 춥고, 또 비가 잦았기 때문에 고트섬에서도,
건너편 라쿤곶(山甲)에서도 나무들은 단풍진 모습을 볼 새도 없이 낙엽이 지고
말았다. 을씨년스럽게 길게 꼬리를 물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스텔라의 마음을
떨게 했다.
11월 19일, 스텔라는 생일을 맞이했다. 그 해 겨울 처음으로 나뭇잎을 흩날리는
찬바람 속에, 마을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축하를 하러 모여들었다.
해티 스튜더드도 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1954년에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보다 먼저 41년에 홀연히 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리처드와 메어리 닷지 부부. 리처드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샛길을 걸어
올라왔다. 굽은 등에 관절염을 업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물론 사라 하브록도
왔다.
사라의 어머니인 아나벨과 스텔라는 섬학교에 함께 다녔던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결혼했다. 아나벨은 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그녀를
울리곤 했던 토미 프레인과, 스텔라는 그녀의 책가방을 물구덩이에 던지길
잘하던 빌 프란더스와 결혼했다. 아나벨도 토미도 벌써 세상을 떠났고, 그들
7명의 아이들 가운데 섬에 남아 있는 것은 사라 한 사람뿐이었다.
사라의 남편 조지 하브록은 흉어가 계속되던 1969년, 본토에서 무참하게
죽었다. 손에 들고 있던 도끼가 미끄러졌는지--출혈과다로--그리고 사흘 후
섬에서 장례를 치렀다.
"생일 축하해요, 할머니."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린 사라를 스텔라는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스텔라는 울지 않았다.
해티와 벨라 스플즈가 만든 커다란 케익에는 95개의 양초가 꽂혀 있었다.
바람 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이 일동은 목소리를 높여 '해피버스데이 투 유'를
합창했다. 올던까지 노래를 했다. 수줍음을 잘 타는 그는 찬송가 외에는 절대로
노래하는 일이 없었다. 말할 때에도 목을 움츠리고 귀가 빨개지면서 우물우물할
정도였다.
스텔라는 그때 노래 소리에 섞인 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만이 특별한 건 아니지."
로이스의 아이들에게 될 수 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섬에서 나서 섬에서 죽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때는 정기 우편선도
없었지만, 뭐 있으면 부르 심즈가 맡아서 갖다 줬지. 페리도 없었지만, 본토에
볼일이 있으면 누군가 배를 내줬지. 화장실도 1946년까지는 수세식이 아니었지.
그걸 처음 시작한 것은 부르의 아들이었지. 부르가 죽은 바로 다음해였어.
부르 심즈는 그물을 잡고 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지. 모두가 부르를 방수천으로
둘러싸서 싣고 왔는데, 퍼런 장화가 삐져나와 있었지. 그리고……."
그러면 아이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재촉할 것이다.
"그 다음은 또 무슨 이야기예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또 해줄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생일날에서 한 달쯤 지난 어느 추운 날, 장작을 가지러 가던 스텔라는 뒤쪽
계단에 참새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천히 허리를 굽혀 참새 한쪽 다리를
집어 들어올렸다.
"얼어죽었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어죽은 참새를 본 것은 40년만이다--그것은
1938년. 그 해 내해가 얼어붙었다.
스텔라는 몸을 떨며 코트의 깃을 여미고 구식 소각로에 참새를 버렸다.
기온은 조금도 올라가지 않았고, 맑은 하늘은 얼어붙은 듯했다. 생일날 밤에
4인치의 적설이 있었지만, 그 후 눈은 오지 않았다.
스텔라는 한아름 가득히 장작을 안고 뒷문으로 돌아왔다. 얼어죽은 참새를
발견했던 계단까지 왔을 때, 갑자기 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1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스텔라!" 그녀의 옆으로 그림자가 내려선다. 실제보다는 조금 크게 보이지만,
그 그림자는 틀림없이 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모자의 챙이 굽은 모습까지
똑같다. 스텔라는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스텔라!" 다시 빌의 목소리가 말했다. "언제가 되면 본토에 건너올 생각이야?
이쪽에 오면 노옴 졸리의 똥차 같은 포드를 빌려서 프리포트의 빈의 가게도
갈 수 있을 거야. 재미있을 텐데 그래!"
스텔라는 놀라서 돌아다보는 순간, 안고 있던 장작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다름없는 풍경이다. 앞마당의 가파르지
않은 언덕. 거기 마른 풀이 우거져 있고, 그 저쪽에 펼쳐진 후미진 내해……
그리고 그 멀리에는 본토가 보일 뿐.
"할머니, 내해라는 게 뭐예요?"
로나라면 그렇게 물어봤을 테지. 그러면 스텔라는 고기잡이들의 말투를 빌려
이렇게 대답을 했을 것이다. 내해라는 것은 두 군데 육지에 끼어서 한쪽이
밖으로 향해 열려 있는 바다. 고기잡이들이 하는 말에 이런 게 있지--안개가
끼어도 당황하지 말아라. 존스포트와 런던 사이에 어딘가 내해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단 말이다.
"내해라는 것은 섬과 본토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는 거야."
그녀는 꿀을 넣은 쿠키를 내놓고 홍차에 설탕을 넣어주며, 조금은 각색을
해서 이렇게 대답을 한다.
"그 이상은 할미도 모르지. 너희들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이 빌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그렇다는 거야."
"할머니, 할머니는 왜 한 번도 내해를 건너지 않았어요?"
"그건 말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랬지."
1월. 생일 파티가 있은 지 두 달만에 내해가 동결됐다. 그것은 1938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라디오는 섬사람과 본토 주민들에게 얼음에 대한 주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스튜이 맥랜드와 럿셀 보위가 그 경고를 안 들었을 리가 없다. 아니면 낮부터
계속 마시고 있던 와인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간에 그들은 스튜이의 소형
설상차를 끌어내서 내해로 타고 들어갔다. 스튜이는 간신히 얼음이 깨진 사이에서
기어나와 동상으로 다리 하나를 잃게 됐지만, 럿셀은 내해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1월 25일, 럿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스텔라는 올던의 부축을 받고
참석했다. 올던은 찬송가를 따라 여전히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간단한 고별 파티가 있었다. 회장은 공회당의 지하실로, 스텔라는 장작을
핀 스토브 옆에 사라, 해티, 베라와 함께 앉아 있었다. 크림치즈의 샌드위치와
펀치가 나왔지만, 펀치만으로 셈이 차지 않은 남자들은 더 센 술을 찾아 중도에서
자리를 떴다.
목사 옆에는 눈이 붓도록 울고 난 갓 미망인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기를 가진 7개월의 몸이다--벌써 다섯 번째의 아이지--난로의 열기로
반은 졸면서 스텔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애는 필경 내해를 건너가고 말 것이다. 프리포트나 루이스톤에 가서 웨이트리스나
되겠지…….'
그녀는 베라와 해티에게 시선을 옮겼다.
"난 못 들었단 말이야." 해티가 말하고 있었다. "프레디가 뭐라고 그랬는데?"
프레디 딘즈모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섬 안에서는 제일 가는 장로(그러나
내가 두 살이나 위인걸, 하며 스텔라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로 1960년에
래리 맥킨에게 가게를 팔아넘긴 이후로 은거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튼 이런 겨울은 처음이라니까." 베라가 뜨개질감을 꺼내면서 말했다.
"다들 이러다간 정신이 이상해질 거라고 말이야."
사라 하브록이 스텔라를 쳐다보면서 전에도 이런 겨울이 있었냐고 물었다.
처음에 조금 눈이 온 다음에 눈은 전혀 오지 않았다. 노출된 땅은 말라서 갈라졌다.
스텔라는 어제 뒷마당을 조금 걸어봤지만 발밑에서 마른 풀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냐." 스텔라가 대답했다. "내해가 언 것은 38년 이후 처음이야. 하지만
그 해엔 눈이 왔지. 해티, 부르 심즈를 기억하고 있나?"
해티가 웃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내 엉덩이를 꼬집어서 생긴 파란 멍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게 53년의 신년 파티 때였어요. 얼마나 아프게 꼬집었는지.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떡했어요?"
"그 해에 부르와 우리집 영감이 본토에 걸어서 갔지." 스텔라가 말했다.
"38년의 2월이었지. 둘이서 눈신발을 신고 본토에 있는 '도리트 주점'에 갔지.
거기서 한잔씩 하고 돌아와서, 또 한 번 간다고 나한테 그랬다구. 마치 애들처럼
떠들어대면서 말이야."
모두들 스텔라의 이야기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베라까지도…… 지금의 베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에게도
소녀 시절이 있었고, 그때는 부르와 함께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한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가지 않았죠?" 사라가 물었다.
스텔라의 마음속에는 그때의 내해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차갑게 해맑은 하늘빛이 비쳐 파랗게 보이는 수면. 햇빛에 빛나는 눈의 결정.
반대편 기슭은 손이 닿을 듯 가깝게 보이고 거길 걸어갈 수가 있었지.
그래, 호수 위를 걸어가는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발로 바다를 건너간다--.
"그래." 스텔라는 그렇게 말하며 뜨개질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가지 않았지."
"왜 그랬죠?" 해티가 따지기라도 하듯 물었다.
"세탁을 하는 날이었으니까." 스텔라는 내뱉듯이 말했다.
바로 그때 방 한구석에서 럿셀 보위의 미망인이 둑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스텔라의 시선이 빌 프란더스(죽은 남편)의
모습을 발견했다. 빨강과 검정 무늬의 자켓. 삐뚜름하게 쓴 모자. 피우고 있는
담배는 하버트 탈레이튼. 그리고 언제나 하고 있던 식으로 다음의 한 개비를
귀에 꽂고 있다. 스텔라의 심장이 방망이질을 한다.
그녀는 느닷없이 기묘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난로 속의 장작이
튀면서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에그, 불쌍한 아이지." 사라가 눈물겹다는 듯이 말했다.
"속만 썩이더니 잘 갔지 뭘 그래!"
해티가 가차없이 말했다. 럿셀 보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호되게
할말은 하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도무지 일을 할 생각도 않고, 저 앨 위해선 잘된 일이라구요.
그런 쓸모없는 사람이 없어진 건 말예요."
주변의 떠들썩한 소리가 스텔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빌이 있다. 맥라켄
목사 바로 가까이, 조금만 움직이면 손이 닿을 데 앉아 있다.
눈가에 잔주름이 보인다. 40세 때의 얼굴일까? 프란넬의 바지, 고무장화,
회색 양말을 단정히 신고 있다.
"다들 기다리고 있다니깐, 스텔라." 그가 말했다.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라구. 금년엔 눈신발도 필요없을 것 같애."
난로 속에서 또 장작이 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빌의 모습이 사라졌다.
맥라켄 목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보위 미망인에게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날 밤, 벨라는 애니 필립스와 전화로 노닥거렸다. 그 속에서 스텔라 프란더스의
용태가 매우 나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스텔라가 병이라면, 올던이 어떡해서라도 본토로 데리고 갈 텐데."
애니는 철저한 금주주의자로, 올던이 맥주보다 강한 술은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아들에게 들은 후로는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다.
"본인이 혼수 상태라도 되지 않는 한, 섬에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을 거야."
베라가 자신있게 말했다. "올던은 어머니가 개구리라고 하면 뛰는 시늉이라도
할 사람이거든. 스텔라를 거역하는 일은 어림도 없다구."
"어머! 그러니?" 애니가 말했다.
이때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전화의 말소리가 끊어졌다. 강풍에 케이블
타워가 쓰러지고 말았다.
베라는 생각했다. 고도린의 호수나 볼로 근처일 것이다. 늘어진 전화선이
물 속에 잠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쪽 기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아마 누군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럿셀 보위가 차가운 손을 내밀어
전화선을 잡아당겼을 것이라고. 그건 물론 농담이겠지만.
베라의 집에서 7백 피트도 떨어져 있지 않은 침실에서, 스텔라는 킬트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올던의 방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얼어붙은 내해를 건너오는 바람 소리가. 폭 1마일 반의 물이 널려 있던 곳이
지금은 모두 빙판으로 변했다. 그 속에 바다가재며 물고기들을 가두고. 그리고
럿셀 보위의 시신도. 그는 매년 봄이면 구식 경운기를 갖고 와서 스텔라의
앞마당을 갈아주었는데.
'이제부턴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할까?' 스텔라는 킬트를 쓴 채 차가운 몸을
웅크리면서 생각했다. '사랑하고 있어?' 꿈결의 귀가 그 말을 들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바깥 창문을 흔들고 있다.
그 바깥 창문까지 뭐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스텔라는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로나가 말한다. 그녀는 결코 단념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저희 어머니나
눈앞에 있는 할머니를 닮았다.
"섬에서 한 발도 안 나간 이유를 아직 이야기 안 했어요."
"이 고트섬에도 필요한 건 다 있으니까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좁지 않아요. 포틀랜드에 오세요. 버스가 달리구요, 할머니!"
"도시의 모습은 텔리비전에서 봐서 나두 다 알아. 하지만 할머닌 여기가
좋아."
동생 헐은 날카로운 데가 있다. 누이처럼 물고 늘어지지는 않지만, 그 질문에는
핵심에 와 닿는 데가 있었다.
"그럼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어요, 할머니? 정말 한 번두요?"
스텔라는 몸을 굽혀 헐의 작은 손을 잡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텔라의 부모가 결혼 후 얼마 안 있어 섬으로 건너왔을 때의 일. 부르 심즈의
할아버지가 스텔라의 아버지를 제자로 해서 배에 태우게 됐을 때의 일. 그리고
스텔라의 어머니 일. 그녀는 네 번 임신했으나 한 아이를 유산하고, 또 하나를
생후 1주일만에 잃었다--그 애를 구할 수가 있었다면 그녀는 기꺼이 본토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었었다.
그리고 빌이 로나와 헐의 헐머니인 제인을 받아냈을 때의 일. 그러나 빌은
그 후에 화장실로 가서 토해냈으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는 안 한다. 제인은 열네 살 때 섬을 떠나 본토의 학교로 들어갔다.
그때엔 여자들이 열네 살 때 시집을 가는 일은 없어졌다. 제인은 브랫드리
맥스웰의 배로 출발했다. 브랫드리는 섬과 본토를 왕래하는 아이들을 배에
태우는 그 달의 당번이었다.
제인을 배웅하면서 스텔라는 생각했다. 가끔 돌아오는 일은 있겠지만, 저애는
영구히 섬을 떠나는 것이라고.
올던이 태어난 것은 훨씬 후의 일로, 빌과 스텔라가 거의 단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기대를 보충이라도 하듯 올던은 독신을 지키며
스텔라 곁에 머물렀다. 스텔라는 그 일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아들이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머리가 좀 나쁘고 선량한 남자를 밥으로
아는 여자가 많았다. (이것도 아이들한테는 말할 필요가 없다.)
"너희들한테는 섬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할머니가 어째서 섬을 떠나지 않는지
조금은 알겠니? 본토는 너무 멀단 말이야. 거긴 좋아했지.
전부터 좋아했지. 적어도 좋아하려고 했지. 하지만 여긴 추억이 너무나 많아.
그래서 내해를 건너가지 못하는 거야."
그해 2월은 기상대 관측사상 가장 추운 2월이 됐다.
그 달 중순경에는 내해에 언 얼음이 갈라질 위험이 없어지고, 스노우모빌이
다니게 됐다. 때로는 얼음이 몰린 곳에서 뒤집히는 일도 있었다.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타고 나갔지만, 얼음의 표면이 너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다시
고도린의 연못에서 놀게 됐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전기가 있었다. 목사의
아들 재스틴 맥라켄이 얼음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 발목이 골절되어
본토의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런 일이 있은 사흘 후, 프레디 딘즈모어가 갑자기 죽었다. 그는 1월 말경부터
독감에 걸려 있었는데, 의사를 찾아갈 생각을 안 했다.
"그냥 감긴데 뭘. 편지를 가지러 나갈 때 마후라를 하는 걸 잊어버린 게
나빴나봐."
그는 본토의 병원으로 옮길 틈도 없이 갑자기 죽은 것이다. 아들 조지가
발견했을 때, 프레디의 한 손에는 신문이, 다른 한 손의 옆에는 총알을 뺀
권총이 있었다. 총의 손질을 하려고 한 모양이다. 아들 조지는 68세나 됐는데도
세상에 드문 술고래였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3주일 동안이나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떠들었다. 그 돈은 조지에게 아버지의 보험금이 나올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내주었다는 것이다. 해티 스튜더드가 조지는 개만도 못한 늙은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독감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결석하는 학생이 너무 많아 2주
간 휴교 조치를 내렸다.
"눈이 오지 않으니까 세균이 들끓는 거라구!" 사라 하브록이 그렇게 말했다.
올던이 독감에 걸린 것은 그 달도 끝날 무렵, 3월을 목전에 두고 사람들
마음에 봄을 기다리는 기분이 움틀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일어나서 돌아다니더니,
1주일째엔 38도2분이나 되는 열을 내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도 프레디처럼
의사를 싫어해서 스텔라는 심로와 초조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프레디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올던도 5월이면 60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눈이 오기 시작했다.
성 발렌타인데이에 6인치, 20일에는 다시 6인치, 29일(그 해는 윤달이 들었다)에는
1피트. 하얗게 쌓인 눈이 내해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말았다.
매년 겨울마다 회색의 물이 있던 그 장소가 지금은 양을 치는 목장처럼 보인다.
본토까지 걸어서 건너는 자도 있었다. 눈이 얼어서 암반처럼 돼 있어 눈신발도
필요 없었다. 저 사람들도 저쪽에서 한잔 걸치고 오겠지, 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빌과 친구가 갔던 도리트의 술집은 아니다. 그 집은 1958년에 불타버렸으니까.
스텔라는 그때까지 네 번 빌을 보았다. 어느 때는 이렇게 말했다.
"빨리 와, 스텔라. 춤을 추러 가야 하니까. 자, 서둘러요."
스텔라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움켜쥔 주먹이 입을 막고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이나 필요한 것은 뭐든지 여기 있었거든." 그녀가 말했다.
"라디오도 있었고, 지금은 텔레비전도 있어. 그것만 있으면 내해 저쪽 세상도
다 알 수 있는걸. 게다가 내 뜰이 있지. 바다가재? 언제든지 냄비 가득히 바다가재의
요리가 가득 들어 있었지. 하지만 목사님이 오셨을 땐 재빠르게 냄비를 숨겼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만 먹는 수프를 먹고 있다는 걸 목사님한텐 숨기고 싶었거든.
그야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지.
가령 늘 카탈로그만 보고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어즈의 가게에
가보고 싶었지. 크리스마스 때의 닭이나 부활절의 햄을 올던이 사주는 것이
아니라 텔리비전에서 본 쇼의 시장에 가서 자기 눈으로 고르고 싶다고 말이야…….
사람들도 많이 있는 델 가보고 싶다든가. 하지만 일단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이것 저것 한정도 없이 탐이 날 거란 말이야. 어머니가 늘 그러셨거든.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은 일과 욕심에 대한 마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란다.'
나는 늘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왔지. 그러니까 넓게 땅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깊이 갈라고 말야. 여기가 내가 있을 장소, 그리고 나는 여길 사랑하고
있어.'
3월 중순쯤. 잔뜩 찌푸린 하늘은 손이 닿을 만큼 낮게 깔려 있었다.
부엌에 앉아 있던 스텔라는 부츠의 끈을 매고 빨간 울의 스카프(3년 전 크리스마스
때 해티가 선물한 것)를 목에 둘렀다. 겉옷 아래에는 올던의 내의를 껴입었다.
바지는 그녀의 마른 가슴까지 올라오고, 셔츠는 무릎까지 찰 것 같았다.
밖에서는 다시 바람이 거세지고, 라디오에 의하면 오후에는 눈이 올 것이라고
했다. 스텔라는 코트를 입고 장갑을 끼었다. 잠시 망설인 다음 올던의 장갑을
그 위에 겹쳐서 끼었다. 올던은 이미 회복이 돼서 그날은 아침부터 헐레이
브래드와 함께 보위 미망인 집의 바깥 창문을 수리하러 나갔다. 그녀는 딸아이를
낳았는데 아버지를 놀랄 만큼 닮았다.
창가로 가서 내해를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빌의 모습이 있었다.
섬과 본토와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호수 위를 걷는 그리스도처럼. 그는
몸짓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전하려 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본토로 건너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스텔라는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하지만, 빌." 그녀는 초조한 듯 중얼거렸다.
"그럴 생각은 없다니까."
그러나 바람 소리가 그녀의 거짓말을 지워버렸다. 스텔라는 가고 싶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 발로 내해를 건너고 싶었다.
견디기 어려운 겨울이었다. 관절염이 심해지고, 손가락이나 무릎에 통증이
찾아왔다. 한쪽 눈이 침침해지고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라가--약간은 망설임--말한
바에 의하면, 60을 넘었을 때부터 스텔라의 눈에 나타난 붉은 반점이 요새는
눈에 띄게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심한 위통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2일 전의 이른 아침, 그녀는 토혈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선혈과 함께 썩은 냄새가 나는 시커먼 덩어리를 토해냈다.
위의 아픔은 5년 전부터 시작됐다. 몹시 아플 때가 있는가 하면 전혀 아프지
않을 때도 있었으나, 스텔라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할머니도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니, 웬 식욕이 그렇게 대단하세요?" 올던이 이렇게 말하며 놀린 일이
있었다. 스텔라가 위통을 느끼고 처음으로 토혈한 얼마 후의 일이다. "노인네들은
참새만큼 드시는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말하면 때린다."
스텔라는 백발의 아들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올던은 목을 움츠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더 이상 안 그럴게요."
사실 스텔라는 허겁지겁 먹었다.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암에게 충분한
모이를 주어두면 악화는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의 세대는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던지 오랜 동안
토혈이 멎은 적도 있었다. 결국 올던은 어머니가 대식가가 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스텔라의 체중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암은 극히 중대한 사태로 진행한 듯했다.
현관으로 나온 스텔라는 올던의 모자가 눈에 띄었다. 털로 된 귀가리개가
붙어 있다. 그것을 들어 머리 위에 얹히니 챙이 눈썹 위까지 흘러내렸다.
잊어버린 것은 없나 하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돌아보았다. 난로의 불이 너무
센 것 같았다. 올던이 또 통기공을 다 열어놓았다--스텔라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이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올던, 내가 없어지면 넌 장작깨나 낭비하게 생겼다."
스텔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로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짓눌린 듯한 비명을 지르고 얼른 난로의 뚜껑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통기공을 조절했다. 불꽃 속에 아나벨 프레인(섬학교에
함께 다니던 옛날 친구)이 있었다. 한순간의 일이지만 볼의 사마귀까지 그대로였다.
게다가 아나벨은 윙크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스텔라는 올던에게 몇 자 적어놓을 생각을 했으나 그만두었다. 그애는 자기
나름대로 깊이 생각하고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올던에게 적어놓으려고 생각한 말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겨울이 찾아온 그날부터 나는 네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됐다. 죽는다는
것은 그리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스텔라는 하얀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바람 속에서 그녀는 온 몸을 떨며 올던의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쳐 썼다. 폭설을 예감하는 축축한 3월의 냉기가 옷 틈새로 가차없이 들어와
살을 여민다.
스텔라는 내해를 향해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지 딘즈모어가 석탄재를
깔아서 만들어놓은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조지는 전에
내해 건너편 마을에서 제설기를 운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7년,
술에 취한 나머지 제설기로 전주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닷새 동안 내해 건너편 곶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스텔라는
캄캄해야 할 내해 건너편 곶에 여기저기 불이 몰려 있는 듯한 이상한 광경을
본 기억이 있다. 조지는 그 후에 섬에서 일하게 됐는데, 다행스럽게도 섬에는
전주가 없어서 두 번 다시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
럿셀 보위의 집 앞을 지날 때 창 너머로 창백한 얼굴을 한 미망인과 눈이
마주쳤다. 스텔라가 손을 흔들자, 미망인도 손을 흔들어 대답했다.
잔교까지 내려온 스텔라는 맞바람에 치마를 날리면서 좌우를 둘러봤다.
가까이 사람이 있었으면 더 걸어가서 얼어붙은 암벽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그녀는 잔교 위를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잔교 끝에 이르렀다.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젖혔다. 올던의 모자 귀가리개가
바람에 날려 볼을 때린다.
빌이 손짓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 있는 교회의 첨탑은 하얀 하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스텔라는 입으로 숨을 쉬며 잔교 끝에 걸터앉아 얼어붙은 눈 위에 발을 내렸다.
부츠가 조금씩 빠져들어간다. 올던의 모자를 다시 한 번 눌러쓰고 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돌아다보려고 생각했으나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부츠가 얼음을 밟는 소리를 들으며 스텔라는 걸어갔다. 빌은 좀 뒤로 물러선
것 같았으나 여전히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침을 했다.
눈 위로 선혈이 튄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지금 눈앞에는
내해가 널려 있었다. '스탠톤 낚시점'의 간판이 보인다. 그 글씨는 올던의
쌍안경 너머로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곶의 큰길을 왕래하는 차를
눈앞에 봤을 때의 스텔라의 놀라움!
'저걸 타면 어디든 가고 싶은 데 갈 수가 있는데…… 보스톤…… 그리고
뉴욕시티까지! 어쩌면…… 어쩌면!'
그리고 그녀에겐 세계의 국경을 넘어 연연히 이어지는 길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눈 한 송이가 눈앞에 날린다. 또 한 송이. 그리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로 표정을 바꿔 가며 나타나는 하얀 눈부신 세계 앞에 스텔라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엷은 베일과 같은 안개 저쪽에 라쿤곶의 거리가 보인다.
스텔라는 다시 모자를 잡았다. 챙이 올라가서 눈에 눈송이가 날아든다. 바람에
불리는 눈송이들이 갖가지 모양을 하고 날 듯 춤을 춘다.
차츰 눈이 심해지면서 하얗고 빛나는 세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곶의 큰거리가 차차 흐려지고, 교회의 십자가도 사라졌다. 마치 으시시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끝내는 '스탠톤 낚시점'의 노란색과 검은색의
글씨까지도 사라졌다.
스텔라는 빛깔이 없는 세계로 발을 들여 놓았다. 눈이 짜내는 회색의 꿈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호수 위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 같을 거야.' 그리고
처음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섬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게 바로 <화이트아웃>이라는 거야.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영구히 본토엔
갈 수 없게 돼.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안에 지쳐서 얼어죽을지도
몰라.'
스텔라는 언젠가 빌이 가르쳐 준 것이 생각났다. 숲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오른발이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반대 발을 앞으로 내놓는다.
오른발만 앞으로 내놓으면 어느샌가 원을 그리고 있게 되지. 게다가 출발점으로
돌아갈 때까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때 스텔라는 자기가 그렇게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들었다. 오늘, 오늘 밤, 내일도 눈이라고. 거기다가 이
화이트아웃이다. 바람과 눈으로 발자국이 지워지고, 이렇게 가다간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간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두 겹으로 겹쳐서 낀 장갑 속에서 손의 감각이 사라져 간다. 발은 이미 마비돼
있다. 그러나 어느 모로는 그것이 다행이었다. 적어도 관절염의 통증만이라도
느끼지 않으니까.
스텔라는 오른쪽 다리를 끌며 걷기 시작했다. 빌이 말한 대로 열심히 왼쪽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에 무릎의 관절염이 도지고, 드디어 통증이 그녀를
괴롭힌다. 백발이 바람에 날린다. 스텔라는 입술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고는
앞을 노려본다. 그리고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그 노랑과 검정의 글씨를 찾으려
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얀 세계가 어느덧 빛을 잃고 어둠침침한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마도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눈은 더욱 심하게 쏟아진다. 스텔라의
발은 아직 얼음 표면에 닿아 있었지만, 새로 쌓인 5인치의 눈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멈춰져 있었다. 아침에 태엽 감는
것을 잊었기 때문일까. 이 시계만큼은 수리를 위해서 한 번은 본토에 다녀온
시계다.
스텔라는 눈 위에 쓰러졌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지 15분이 지났다.
엎드린 채 잠시 생각을 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얼마나 편할까. 몸을 웅크리고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러나 의지의 힘에 충격을 받은 듯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바람 속에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앞을 본다.
그 눈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기를 빌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 어두워질 텐데.'
그래, 역시 방향이 틀린 모양이다. 어딘가에서 틀어진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본토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토와 평행으로 걷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토섬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크게 방향이 틀어진 것일까. 속에서 항해사가 속삭인다. 왼발을
너무 썼다. 그래서 왼쪽으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스텔라는 자신이 본토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시간이 걸린 것은 좀 느릿느릿하게 걸어갔기
때문이겠지.
오른쪽으로 가라는 항해사의 말을 듣지 않고, 스텔라는 오직 똑바로 갔다.
갑자기 기침의 발작이 일어나고 또다시 눈 위에 피를 토했다.
10분 후--더욱더 진해져 가는 회색과 몰아치는 하얀 폭설 속에서, 그녀는
기묘한 고요에 휩싸이고 있었다--스텔라는 다시 넘어졌다. 일어나려고 하다가는
다시 쓰러지고 하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눈과 바람에 흔들리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때마다 몸이 무거워졌다 가벼워졌다 한다.
귀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올던의 모자를
빼앗아간 것은 바람의 짓이다. 스텔라는 필사적으로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모자는 바람에 날리고 눈 위를 굴러가며 멀어지더니, 마침내는 선명한
오렌지색의 점이 되어 어둠 속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바람이 스텔라의 머리를
날리고 헝클어뜨린다.
"아무러면 어때, 스텔라?" 빌의 목소리가 말했다.
"내 걸 쓰면 되잖아."
스텔라는 숨을 죽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손이 무의식중에 가슴에 닿는다.
장갑에 싸인 손가락이 예리하게 가슴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흩날린다, 라기보다 뭉쳐서 쏟아지는 것처럼 내리는 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눈의 장막이었다--이때 회색의 터널 속에서 악마처럼 소리를 지르며 으르렁대는
바람과 함께 그가 모습을 나타냈다. 처음에는 눈 속에서 움직이는 색깔이었다.
빨강, 검정, 그리고 진한 그린색. 잠시 후 그 빛깔은 제각기 모습을 바꿔,
프란넬의 자켓으로, 바지로, 그리고 그린색의 장화로 변한다. 빌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시늉으로 모자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그 얼굴은 틀림없는 빌의 얼굴이다.
그를 빼앗아간 암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스텔라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살이 빠지고 뼈에 달라붙은 피부, 그리고 푹 들어간 눈. 강제수용소의
포로처럼 쇠약해져 눈 뜨고 볼 수 없는 남편의 유령을 상상하고, 스텔라는
겁을 먹고 있었던가?)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빌! 정말 당신이오?"
"물론이지!"
"빌!"
스텔라는 반가운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며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넘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빌의 몸을 뚫고
나가 넘어진다--어찌 됐건 그는 유령이니까. 그러나 그의 팔은 스텔라를 받아
안았다. 힘있게, 그리고 몹시 자연스럽게. 그의 팔은 신부 때의 스텔라를 안고
집안으로 들어가던 그 팔이었다. 빌은 스텔라를 받쳐주며 그녀의 머리에 단단히
모자를 씌워주었다.
"정말 당신이 빌이오?"
스텔라는 다시 같은 말을 하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리 깊게
패이지 않은 눈 밑의 주름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늘 입던 체크 무늬 자켓의
어깨에 쌓이는 눈물. 그리고 숱이 많던 다색의 머리를.
"그렇구말구." 그는 말했다. "자, 잘 보라구."
빌은 스텔라를 안은 채 몸의 방향을 바꿨다. 어둠이 차츰 짙어가며 내해를
건너오는 바람이 옆으로 눈을 몰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스텔라는 보았다.
눈 속에서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을. 기쁨과 공포가 뒤섞인 외침이 그 입에서
나왔다. 저것은 해티의 어머니, 마디란 스튜더드. 푸른색의 드레스가 바람을
안고 부풀어 있다. 그 손을 잡고 있는 것은 해티의 아버지이다. 증발한 다음
어딘가에서 썩어간 해골이 아니고 기운찬 젊었을 때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사람 뒤에 있는 것은--.
"아나벨!" 스텔라는 미친 듯이 기뻤다. "아나벨 프레인! 당신이지?"
틀림없이 아나벨이었다. 눈에 덮인 어둠 속에서도 그 노란 드레스는 잘못
볼 리가 없다. 스텔라의 결혼식 때 아나벨이 입고 있던 것이다. 빌의 팔을
잡고, 지금은 없는 옛 친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때 스텔라는 장미의
향내를 맡은 것 같았다.
'아나벨!'
"거진 다 왔어, 스텔라."
아나벨은 그렇게 말하고 스텔라의 비어 있는 팔을 잡았다. 그녀의 노란 드레스는
당시 매우 대담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아나벨은 어깨가 드러나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나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금발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조금, 조금만 더."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에 덮인 어둠 속에서 차례차례로
사람이 나타났다. 스텔라가 알고 있는 얼굴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토미 프레인이 아나벨 곁에서 따라온다. 빌의 뒤에는 숲 속에서
무참한 죽음을 한 빅 조지 하브록. 그리고 20년 가까이 곶의 등대지기를 한
사람--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프레디가 있고, 조금 떨어져서 힘없이
혼자 걷고 있는 것은 럿셀 보위다.
"이봐, 스텔라." 빌이 말했다.
스텔라의 눈에는 어둠 속에 돌출한 검은 것이 비쳤다. 뱃머리가 부서진 배가
무수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배는 아니다. 그것은 갈라진 틈과 균열이
진 거치른 바위였다. 곶에 도착한 것이다. 내해를 건너온 것이다.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것이 거기 있는 사람들의 목소린지 아닌지
그건 알 수가 없다.
'내 손을 잡아줘, 스텔라--.'
(당신은……?)
'아나벨…… 프레디…… 럿셀…… 존…… 에티…… 프랑크…… 내 손을 잡아줘,
손을 잡고…… 내…….'
"내 손을 잡아주지 않겠어, 스텔라?" 다른 소리가 말했다.
돌아다보니 부르 심즈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 스텔라를
몸서리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스텔라는 뒤로 물러나 빌의 손을 꼭 잡았다.
"인제--."
"인제 때가 됐다는 거야?" 부르가 물었다. "그렇지, 스텔라?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도 인제 괴롭진 않지. 산다는 게 훨씬 괴로운 게 아니겠어."
스텔라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지금까지 참아온 눈물이 모두 말라버릴
때까지 울었다--그리고 부르의 손을 잡았다.
고트섬의 사자(死者)들은 눈보라 속에서 둥글게 둘러섰다. 그들의 주위에서는
바람이 외치고 눈을 쏟아붓는다. 스텔라는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바람에 말려 멀리 실려간다. 이윽고 모두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처럼.
여름 밤에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어린 시절처럼. 사자들은 노래를
계속한다. 그리고 스텔라는 그들의 손을 잡고 드디어 내해를 건너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눈보라 속에서 사자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노래한다. 그들은
노래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리고 올던 프란더스는 로나와 헐에게 이야기했다.
스텔라가 세상을 떠난 그해 여름, 여늬 때처럼 2주일의 예정으로 섬에 온
로나와 헐에게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겨울에 큰 폭설이 있었을 때, 바람
소리가 사람들이 노래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주를 찬양하라. 아들들아, 너희들의 아버지인 하느님을 찬양하라……."
그러나 그는 아이들에게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감히 이야기하려고
생각도 않는 것이 있다.
스텔라가 본토에서 발견된 것은 눈보라가 지나간 다음날이었다.
라쿤곶의 마을 경계에서 남쪽으로 백 야드쯤 떨어진 곳으로 바위 위에 앉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죽은 모습은 너무나 깨끗했다. 의사는 그저 놀라울 뿐이라고.
스텔라는 4마일 이상이나 걸었다고 생각된다. 그녀는 변사체로서 해부를
했다.
해부 결과, 그녀가 말기암에 걸려 있었다는 것이 판명됐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녀의 늙은 몸은 온 몸이 암에 침식돼 있었다.
그리고 모자의 일이 있었다. 스텔라가 쓰고 있던 것은 올던의 모자가 아니었다.
랠리 맥퀸도 존 벤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올던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챙이 구부러진 것이며 헐어
있는 데까지도.
"이것은 천천히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야."
아이들이 배를 타고 본토로 돌아간 다음, 밤이 되면 올던은 긴 시간을 두고두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후미진 내해의 일, 그 밖의 많은 일들, 그리고 아버지의 모자에 관한 일.
죽은 자는 노래를 하는가? 그들은 사랑을 하는가?
어머니 스텔라 프란더스가 세상을 떠나고, 긴 밤을 혼자 지내게 되면서 올던은
때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죽은 자는 노래를 하고, 죽은 자는 사랑을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