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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 젊은 낭만주의자
1. 낭만주의와 각성한 시각을 펼치는 렌 젠셀
70년대가 끝날 무렵 평론가 더글라스 데이비스는 이 시대에 등장한 일군의 젊은 컬러 사진가들을 ‘젊은 낭만주의자(young romanticist)’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조엘 메이어로윗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사진 속에 진하게 감추어진 낭만주의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 후 메이어로윗츠를 좌표축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풍경을 주제로 하는 젊은 세대의 사진가에게 대소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요소가 보인다고 하는 점에서 볼 때 이 명명(命名)에 감탄할 뿐이다. 일군의 젊은 컬러 사진가들을 낭만적인 요소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전 세대에는 없던 요인으로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그들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색체의 측면에서 루미니스트인 점도 공통적이다. 이 두 가지의 요인은 미국 예술의 전통적인 지향성과 깊은 곳에서 연결되고 있는 것 같다. 메이어로윗츠가 1938년에 태어난 것에 비해 ‘젊은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이들 사진가들은 194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이중에서도 대표적인 작가를 열거하면 존 팔(John Pfahl)을 선두로 조엘 스턴펠드(Joel Sternfeld), 미치 엡스타인(Mitch Epstein), 마이클 비숍(Michael Bishop), 렌 젠셀(Len Jensel)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이후의 60년대의 사진가들, 리 프리들랜더, 게리 위노그랜드로부터 다이안 아버스에 이르는 사진가들은 35밀리(아버스는 6×6cm의 이안 리플렉스)의 소형 카메라로 도시와 그 속의 인간을 촬영하였다. 물론 낭만적이라 말할 수 있는 요소는 조금도 없다. 만약에 이들 사진에 대해 ‘아름답다’고 하면 작품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의 젊은 사진가들은 8×10″의 대형 카메라에 삼각대를 세워서 거리, 시골, 교외의 주택지, 사막, 해변 등의 풍경을 회화적으로 촬영하였다. 이 사진들에게는 ‘아름답다’거나 ‘낭만적’이라는 형용사가 무리 없이 어울린다. 그러나 그림엽서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사진으로서의 복잡한 의도가 있으며, 현대의 시각 영역을 확대하려고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가 렌 젠셀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국제사진센터(ICP)에서 개최된 「뉴 컬러 포토그라피」전에서 십여 점의 작품을 보았을 때부터이다. 솔직히 그 이전은 메이어로윗츠의 아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사진에서 받은 인상은 낭만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또한 그것을 넘어서 풍경에 대한 비평, 현대생활에서의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였다. 확실히 메이어로윗츠를 넘어서고 있었다.
렌 젠셀의 대표작 <캘리포니아 주 사우스 샌프란시스코>는 신개척지의 교외 주택을 촬영한 것이다. 새로운 건축 재료로 집짓기놀이처럼 만든 집, 거미줄같이 복잡한 전선, 원경의 빨간 산의 표면, 그 위의 고압선 철탑 등 모두 원색으로 빛나고 있다. 여기에는 자연을 응시하는 19세기 루미니스트와는 다른 또 하나의 루미니스트의 눈이 있다. 이 눈은 풍자적이지만 결코 고발적이거나 염색적인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는 작가의 각성된 시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황혼의 등대를 찍은 <메인 주 요크비치>는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전방에 두랄루민의 번쩍번쩍한 전화 부스가 들어가 있다. 풍자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그 불균형적인 일상성에서 그는 시정(詩情)을 찾아내고 있다.
그의 사진에는 해변에 서있는 여자의 뒷모습이나 뉴포트에 늘어선 오래된 거리를 찍은 낭만적인 것도 많지만, 동시에 쓸쓸한 생활감이 스며 나오는 풍경도 있다. 더욱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 옥상>과 같이 유리에 비친 석양과 경보기의 빨간 램프를 같은 차원에서 촬영한 작품도 있다. 젠셀의 시선은 주제에 의해서 바뀌는 일이 없이 항상 조용하고 일정하다.
60년대의 사진가들이 ‘깊은 상실감’을 표현한 것에 비해서 ‘충실’이라고 까지 말하지 않아도 ‘젊은 낭만주의자’의 시각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 버린다. 그들은 우선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진이라는 괄호로 묶어 버리며,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보는 사람 각자가 그 내용을 판단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60년대의 작가의 작품이 ‘깊이’와 ‘진지한 사랑’을 추구하는 무거운 사진이라고 하면 렌 젠셀의 사진은 순진한 미의식으로 ‘표면’을 솔직히 제시하는 가벼운 사진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괄호 안에 넣어진 풍경에서 현대의 격변하는 상황을 우리들은 느낄 수 있다.
한편 예술은 혁신적인 운동을 일으키며 역동적으로 전진해 왔다. 적어도 근대예술은 이러한 개념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젊은 낭만주의자’도 60년대의 급진적인 사진을 근거로 삼은 풍경사진이고, 그 인식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사진을 전위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그들에게는 과거의 것을 부정하는 진취적인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구도적(求道的)인 어두움과는 관련이 없다. 사실 이들 ‘젊은 낭만주의자’에게는 현대 미국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지향(志向)과의 관련을 간과할 수 없다. 비록 생태학의 입장에서 자연보호 등 ‘보존’이 외쳐지고 있지만, 그들은 똑같은 지향 하에서 훌륭한 문화와 예술을 진보시킨다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없이 좋은 것은 남겨두려고 하는 자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러한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다. 컬러 풍경사진가가 과거 유산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언뜻 고풍스러운 표현을 즐기는 것도 이러한 기류와 무관하지는 않다.
끝으로, 렌 젠셀은 1947년 뉴욕의 브룩클린에서 태어나 쿠퍼 유니온을 졸업했다. 현재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2. 존 팔의 대지예술
존 팔의 사진을 바라보면 미국 예술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낭만주의의 계보 속에서, 그 중 한 사람의 계승자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저녁 노을지는 유타 주 솔트 레이크에 두 개의 봉을 설치한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의 앵글(Great Salt Lake Angles)>, 병풍과 같이 세워 펼쳐진 암벽 앞의 초원에 오렌지색 끈을 늘어뜨린 <빨간 암벽의 반복(Red Rock Repeat)>, 에메랄드색의 바다 가운데 솟아오른 바위에 로프를 건너질러 맨 것처럼 보이는 <트라이앵글, 버뮤다(Triangle, Bermuda)>라는 사진에는 스케일이 큰 미국의 낭만주의가 있다. 이 낭만주의의 감각은 비록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메이어로윗츠에서도 진하게 보여진 것이다.
트라이앵글, 버뮤다 페이펜의 달 풍경, 해변
필자는 이 두 사람의 사진, 구분하여 존 팔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19세기 중엽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Concord)의 초월론자로 불리는 에머슨과 소로오(Henry David Thoreau)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특히 소로오의 낭만적인 행동에 이 사진들이 겹쳐서 보인다. 소로오는 일반적인 일상생활로부터 뛰쳐나와 월텐 호반 숲속의 통나무집을 자신의 손으로 세우고 자급자족의 간단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연 속에 몰입하여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사색하는 생활을 시도했다. 그리고 근로와 사색, 세계와 자신과의 사이의 특유한 관계를 『숲의 생활』이라는 저서에 나타냈다. 이 실천의 원리는 스승인 에머슨의 저서 『자연』 속의 “모든 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소로오 자신은 “내가 숲속에 들어간 것은 신중하게 살면서 생활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하기 위해서이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자연과 정신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존재함과 동시에 미국인이 관계를 맺어온 자연과 인간의 낭만적인 전통적 사고의 전형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1960년대 후반의 미국은 격동이 한창일 때였다. 젊은 세대는 체제에 등을 돌리고 더 나아가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 히피가 되었던 시기였다. 미국에 막 건너온 동양인의 눈에 기묘하게 비친 것은 그들이 표방하는 하나의 귀착점이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생활촌(commune)’이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라는 미국 인디언의 전통적인 사상을 슬로건으로 삼고 공동생활촌에 들어가기 위해서 뉴욕을 떠나는 미국인들의 감상이 다소 지나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광대한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의 낭만주의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사고의 원점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20년대의 피츠제럴드, 헤밍웨이를 위시로 하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환멸감에서도 일종의 허술함을 느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청춘을 잃은 환멸감이라 하기에는 미국의 참전은 겨우 다섯 달에 채 미치지 못했다. 환멸감은 오히려 정면에서 참전한 유럽의 청년들일 것이다. 그 후의 ‘비트 제너레이션’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의 환멸감에는 어딘가 청춘의 낭만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다.
미국의 예술을 바라보고 있으면 환멸감과 절망감의 뒤에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낭만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존 팔의 사진도 70년대 스토이시즘(stoicism) 사진의 끝 무렵에 출현한 것은 사실이지만, 존 팔의 사진을 논하려면 또 하나의 핵심어 즉, 현대미술의 조류인 대지예술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존 팔의 사진은 어떤 주제가 찍혀져 있는지가 문제인 이상 사진에 의한 사진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트라이앵글>, <버뮤다>, <빨간 암벽의 반복> 등의 작품은 웅대한 풍경에 로프와 끈을 설치하여 풍경을 게임장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미술 용어를 빌리면 대지예술의 다큐멘트이다.
예를 들면 대지예술가로 불리는 미술가들이 이러한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윌터 드 마리아의 <길이 1마일의 데생>은 네바다 사막에 두 줄의 평행선을 1마일이나 긋고 그것을 항공사진으로 제작하였다. 데니스 오펜하임의 <자석성 인력>은 뉴욕 주 브리지 햄프턴 바다에 아크 등으로 500피트의 기호를 쓰고 이 역시 항공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이클 하이저는 네바다 사막에 거대한 도랑과 구멍을 뚫었고, 로버트 스미슨은 솔트 레이크에 소용돌이의 제방을 만들고 이를 사진으로 찍었다. 그들은 광대한 자연을 캔버스로 여기고 그 과정이나 결과를 사진으로 기록하여 제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예는 필자의 독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지예술가들은 소로오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동하는 낭만주의자들이다.
크게는 존 팔도 이들 대지예술가들 속에 포함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그의 개인전에 대한 평은 사진잡지보다 미술잡지 쪽에서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대지예술가들과 존 팔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대지예술가들이 행위와 그 과정을 중요시하며 사진은 단순한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에 반해서 존 팔은 완성된 사진의 질을 우선으로 하며 사진의 맥락 속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그의 사진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페이펜의 월출(Moonrise over Pie Pan)>과 같이 순수한 사진적인 작품도 있다는 것이다. 월출의 아름다운 풍경과 빈 깡통에 달빛이 반사되어 또 하나의 달이 대지에서 빛나고 있는 듯 한 풍자적인 작품이다. 1980년 뉴욕의 로버트 프레이더스 화랑에서 개최된 존 팔의 사진전은 지금까지의 경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개인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개인전은 창 너머의 풍경을 찍은 22점의 <창(Window)>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풍경은 저녁노을에 타는 바위산, 강과 정박된 모터보트, 교외의 주차장, 도시의 빌딩으로 이루어져 있다.
쉐리 라이스는 『아트 포럼(Art Forum)』지(紙)에서 <창>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존 팔의 외계와 사진과의 관계는 그의 주의를 감싸고 있는 어둠에 의해서 지켜지고 있으며, 그것을 들여다보는 렌즈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 확실히 그의 <창> 시리즈는 렌즈를 통해서 외계를 들여다보는 사진의 구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조화를 이룬 바위산>에서는 실루엣의 창틀 속에 바위산이 보이고 있다. 검은 틀에 이해 잘려 나간 듯 한 바위산은 현실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사진 속의 사진 즉, 2차원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일종의 ‘속임수 그림(trompe-l'oeil)’의 방법으로 사진의 구조를 감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사진은 더욱이 작가의 의도를 암시하고 있다. 즉 창문 아래의 책상 위에 폴라로이드로 찍은 바위산의 테스트 사진이 놓여 있다. 이러한 조작을 즐긴다는 면에서 80년대에 들어와서 커다란 물결이 된 구성사진과 일맥상통하는 감각이 보인다.
그러나 대지예술적인 시각이든 <창> 시리즈이든 이들 사진에서 공통적인 것은 사진에 의한 사진론이라는 관념적인 주제를 무미건조한 구조 속에 빠지는 일 없이 신선하고 아름다운 미국의 전통적인 낭만주의로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 팔은 1939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시라큐스 대학 및 동대학원에서 미술을 배우고, 1968년부터 로체스터 공과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초기의 작품은 투명한 플라스틱판에서 사진을 인화하고, 이것을 여러 장 겹쳐서 입체사진으로 만든 것이다.
현대사진의 이해 - 고쿠보 아키라 지음, 김남진 옮김,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