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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마불교학당 원문보기 글쓴이: 문문
붓다의 까삘라밧투 방문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1) 계율 제정의 배경
붓다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다섯 고행자를 교화하고, 붓다가야로 되돌아가서 까싸빠(Kassapa) 삼형제를 개종시킨 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로 돌아와 교화를 펼치고 계실 때, 승단에는 이미 천 명이 훨씬 넘는 출가자가 모인 큰 집단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와 같은 뛰어난 제자들도 있었지만, 질서를 지키지 않고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도 더러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승단에는 사성(四姓)의 계급차별 없이 누구나 출가할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구의 수가 점차 많아지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공동체의 통제상 여러 가지 규칙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규칙을 계(戒, sīla)라고 하는데, 계의 조항은 교단 안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제정하여 실행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총괄적으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1) 처음에는 붓다께서 가르친 생활상의 대원칙인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는 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가르침만으로는 교단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외부적인 구속적 계율로 발전해 갔던 것입니다.2)
먼저 새로 들어온 비구들은 각자 일상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감독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규정되었습니다. 물론 최고의 스승이 붓다인 것은 사실이지만 옷을 입는 법, 식사하는 법으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일상적인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같이 가르쳐주는 스승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도 처음에는 삼보에 대한 귀의를 선언하는 간단한 것이었는데 점차 복잡하게 제정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많은 귀의자(歸依者) 가운데 혹시 결심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3)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질서 유지를 위해 계율이 제정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사회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다국은 그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동시에 종교 활동이 특히 융성했습니다. 불교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교단과 종교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연 종교 활동에 대한 사회적 요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달마다 정해진 날에는 사람들이 사원에 모여 설법을 듣는다거나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하는 것 등입니다. 또 교단에 속한 출가 수행자에 어울리는 태도나 비난받을 행위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통념이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계나 율로 정해진 것도 이와 같은 요청에 따르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4)
2) 최초의 까삘라밧투 방문
붓다는 일생동안 고향인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를 몇 차례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 성도(成道)한 뒤 고향을 찾게 된 최초의 방문이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 후 첫 겨울을 라자가하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에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한 뒤 6년쯤 지난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붓다께서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고, 후자는 꼬살라(Kosala)의 수도 사왓티(Sāvatthī, Sk. Śravastī, 舍衛城)에서 고향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붓다의 아들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출생과 출가 시기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후자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성을 나와 고행하기 6년이 지난 다음에 성도하고, 그 후 다시 6년이 지나 고향 땅을 밟게 되는 것이므로 부왕과의 대면은 12년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5)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붓다의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는 아들이 성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방문해 달라고 수차례 사신을 파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좌부 권에서는 대체로 전자의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성도 직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최초로 고향 까삘라밧투를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제 토마스(Edward J. Thomas)는 “붓다는 까싸빠 삼형제를 개종시키고 한겨울에 라자가하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달 동안 머물렀다. 붓다의 다음 방문지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이것은 정전(正典)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장로들이 읊은 게송들의 모음집[Theragāthā, 長老偈]에 씌어진 깔루다이(Kāludāyī, 迦樓陀夷)6) 장로의 게송7)에서 이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을 제외하면 이해하기 어렵다.”8)라고 말했습니다.
숫도다나 왕은 자기 아들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를 까삘라밧투로 초청하기 위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신하들을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붓다의 설법을 듣는 순간 아라한이 되어 그들의 임무를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은 깔루다이를 파견했습니다. 붓다께서 그의 출가를 허락할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9) 그는 붓다께로 가서 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대지에 꽃과 잎들이 피어날 때, 깔루다이는 붓다께서 그의 혈족들을 방문하기에 좋은 때라고 느끼고,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초청의 뜻을 아름다운 시의 형식으로 노래했습니다. 라자가하에서 까삘라밧투까지는 거리적으로 60리그(1리그는 3마일)였는데, 붓다는 60일이나 걸려 까삘라밧투에 도착했습니다. 깔루다이는 매일 공중으로 숫도다나의 왕궁으로 가서 여행의 진행과정을 왕에게 말하고, 발우 가득히 특별한 음식을 왕궁에서 붓다께로 날랐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친척들은 붓다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깔루다이가 이러한 재주로 그것을 성취했으며, 붓다께서는 종족을 기쁘게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이라고 전했기 때문입니다.10)
이처럼 붓다의 최초 고향 방문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는 약간 과장된 듯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의 주석서에 의하면, 깔루다이는 숫도다나 왕의 궁전 신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생일날에 태어났으며, 붓다의 놀이 친구로 함께 자랐다고 합니다. 숫도다나 왕이 붓다께서 라자가하에서 법을 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초청하기 위해 천명과 함께 한 궁중 신하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붓다께서 법을 설하고 있는 동안 도착하여, 군중의 가장자리에 서서 교리를 듣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붓다는 곧바로 그들이 교단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로들의 모습으로 바뀌어서 발우와 가사를 걸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들은 세속의 일에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메시지를 붓다께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숫도다나는 다른 신하와 천명을 보냈지만 결과는 동일하였습니다. 그는 아홉 차례나 반복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깔루다이를 붓다께 보냈습니다. 만일 붓다께서 그의 출가를 하락하신다면, 고향 방문의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승단에 들어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라자가하에 두 달 동안 머물고 팍구나(Phagguna, 2월-5월) 달의 보름인 봄이 될 때까지 숫도다나 왕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미루었습니다. 갈루다이는 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때가 되었음을 알고, 『테라가타』에 나오는 다음의 게송을 읊었습니다.11)
거룩한 분이시여, 이제 진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으면서 화염을 일으키며 불타오르듯 찬란합니다. 거룩하고 당당하신 분이여, 지금은 가르침을 음미하며 즐겨야 할 때입니다.<527게>
아름다운 나무들은 꽃을 피워 사방에 널리 향기를 날리면서 잎을 떨구고 열매를 맺습니다. 당당하신 분이여, 이제 길을 나서 행각해도 좋을 때입니다.<528게>
춥지도 않고 또한 덮지도 않습니다. 즐거운 계절, 여행에 알맞습니다. 당신이 서쪽을 향해 로히니 강을 건너시는 모습을 사캬족 콜리야족이 뵐 수 있도록 하소서.<529게>
꿈을 안고 밭을 갈았고, 꿈을 안고 씨를 뿌렸습니다. 상인들은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내게도 꿈이 있거늘, 부디 저의 꿈을 이루어 주소서.<530게>
사람들은 되풀이하여 씨를 뿌리고, 신들은 때맞추어 비를 내린다. 농사꾼은 되풀이하여 밭을 갈고, 수확물을 어김없이 나라에 바친다.<531게>
걸인들은 변함없이 방랑을 하고, 시주(施主)들은 되풀이하여 보시를 한다. 그들은 되풀이하여 보시를 해서 거듭 천계(天界)에 태어난다.<532게>
지혜롭고 당당한 사람이 어떤 가문(家門)에 태어나면, 실로 7대(代) 조상까지 업이 소멸된다. 석가모니(釋迦牟尼)시여, 실로 당신은 신(神) 가운데의 신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석가라고 불리는 성자가 당신의 탄생으로 오셨기에.<533게>
위대한 선인(仙人)의 부친은 숫도다나라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붓다의 모친인 마야 부인은 보살(菩薩; 깨닫기 전의 석가모니)을 잉태하신 분으로서, 돌아가신 뒤에 삼십삼천계(三十三天界)를 두루 노니셨습니다.<534게>
고타미 부인은 죽어 세상을 떠난 뒤 天界에 태어나, 신들에 둘러싸여 오욕락(五欲樂)을 즐기고 계십니다.<535게>
나는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견디어낸 비할 바 없이 훌륭하신 붓다, 그리고 앙기라사의 자손입니다. 석가모니시여, 당신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이십니다. 고타마여, 당신은 진리에 관한한 나의 할아버지이십니다.<536게>12)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까삘라밧투에 도착했을 때, 석가족들은 그들이 니그로다(Nigrodha) 동산에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석가족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붓다께 경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공중에 떠올라 쌍신변(雙神變, yamaka-pātihāriya)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석가족 친척들은 붓다의 발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13)
다음날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도시의 이집 저집을 돌면서 탁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싯닷타(Siddhattha) 태자가 걸식을 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붓다의 탁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붓다의 아내 역시 그를 보고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은 흥분하여 붓다께로 달려가 “왜 우리의 가문을 부끄럽게 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것은 우리의 관습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리의 가계(家系)는 마하삼마따(Mahāsammata)의 끄사뜨리야(kshatriya) 가계이며, 끄사뜨리야는 단 한번도 걸식을 행한 적이 없소.”라고 왕은 말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왕계(王系)는 당신의 가계(家系)이지만, 나의 가계는 디빵까라(Dīpamkara, 燃燈佛), 곤단냐(Kondañña, 憍陳如佛)에서 까싸빠(Kassapa, 迦葉佛)에게로 전해져 온 붓다의 가계입니다. 그 분들과 수천의 붓다들은 걸식에 의해 삶을 유지했던 것이오.”14)
숫도다나 왕과 붓다와의 이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숫도다나는 자기의 아들이 끄사뜨리야의 왕계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붓다는 결코 왕계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는 거리의 중간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나 일어나 게으르지 말고,
법을 잘 실천하시오.
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 속에 안락하리.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나.
왕은 곧바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흐름에 들어감’[預流果]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붓다의 발우를 들고 붓다와 그의 제자들을 왕궁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라훌라의 어머니를 제외한 왕궁의 여인들은 붓다께 다가와서 존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때 붓다는 앞서 설한 시구와 비슷한 내용의 시를 읊었습니다.15)
그러자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는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고, 숫도다나는 두 번째 단계인 ‘한번 되돌아 옴’[一來果]을 얻었습니다. 『마하바스투(大事)』에서는 그 뒤 라훌라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다음 날은 붓다의 이복동생이자 마하빠자빠띠의 아들인 난다(Nanda)의 왕실 성별식(聖別式)이 거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붓다의 경우처럼 16세가 되면 별도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또한 난다가 결혼할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날 붓다는 자신의 발우를 난다에게 주고 축복의 게송(mangala)을 읊으시고, 발우를 돌려받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난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발우를 들고 붓다의 처소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만일 그가 출가한다면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를 그만두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난다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붓다는 난다를 출가시켰습니다.16)
Notes:
1)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