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 위원회 문정인(文正仁) 위원장(연세대 교수)은 8월 27일(2004년) “주한 미군 감축은 기본적으로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 변화에 따른 것이지만, 우리의 사소한 실수에 의해 앞당겨졌다”고 말했다. 문 위원장은 전경련 국제경영원(IMI) 초청 월례조찬회에서 “작년 12월 30일 미국 NBC뉴스가 용산기지에서 미군 헌병이 한국 학생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장면을 3~5초 가량 방영했으며, 이 장면을 지켜본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격분해 ‘God damn it!(갓 뎀 잇․제기랄), Get them out!(겟 뎀 아웃․주한미군을 한국에서 빼 와라)’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러하다. 두 여중생 사고가 16대 대선을 앞두고 반미 열풍을 일으키기 직전에 한국인이 미군 병사를 살해한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 언론은 이 사고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8군은 미군 사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한국 정부로부터 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까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북한군 장갑차 남침 저지 훈련을 파주군 미군 장갑차 훈련장에서 하던 중 일어난 과실 사고에 대하여는 관계자 전원의 중징계와 4억원의 보상금 지급으로 오래 전에 완료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반미 활동이 극에 달해 있었다. 미군 중령이 대낮에 칼부림을 당했으며, 여군들이 시민들 폭행의 표적이 되어 미8군 병사들에게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용산기지에서 미군 헌병에게 한국 학생이 던진 돌을 던진 사건이 주한미군 감축 사태를 빚어내었다. 미군 헌병이 한국 학생이 던진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서 있는 장면은 겨우 3~5초 가량 방영되었으나, 이 장면을 지켜본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격분해 ‘God damn it!(갓 뎀 잇․제기랄), Get them out!(겟 뎀 아웃․주한미군을 한국에서 빼 와라)’이라고 지시했다. 돌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데도 위병은 피할 수 없었다. 위병은 상관이 지시가 있기 전에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돌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제 자리에 서있는 미군 헌병의 모습은 우리에게 광주사태의 발단을 연상케 한다. 1950년 5월 18일 아침에도 전남대 정문 앞에서 위병 근무를 하던 국군 병사들은 학생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18일 아침은 여느 봄날의 휴일처럼 무등산에서 떠오른 봄날의 햇살이 光州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시민들은 17일밤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 채 휴일의 노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1980년 5월19일자 全南日報(지금의 光州日報) 사회면 머리기사로 작성된 18일 오전 全南大앞 충돌사건기사를 그대로 실어본다. 이 기사는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18일 아침 光州시내 각 대학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계엄확대조치와 함께 풀가동된 당시 全南日報 사회부 기자들이 작성했던 18일 아침 光州시 전남대학정문 동정은 다음과 같다.
[朝鮮大=정문에 공수부대 7-8명이 집총하고 출입을 금지시킴. 기자가 학 교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자 일체 안된다고 함. M16과 기관총 설치. 光州교대=7-8명의 공수부대 집총. 교문앞에 블록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설치. 군인이 학교앞 통과차량에게 멈추지 말고 가라고 계속 신호함. 全南大=M16 집총군인 7명 출입통제. 교문앞 다리위에서 보니 종합운동 장에 대형막사 20여개 설치됨. 대학앞 상점은 거의 셔터를 내리거나 문을 닫았고 지나가는 행인도 거의 없어 살벌한 분위기] 16년전 작성된 취재수첩에서 보듯 18일 아침 아직 시내 대학교는 외견상으 로는 조용했다. 그러나 全南大앞 충돌사건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全南大에 주둔한 7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權承萬 중령) 병력은 정후문의 출입을 일체 통제하고 있었다.
全南大정문에서 약 30m 떨어진 용봉교를 사이에 두고 [일요일이라 학교에 올 일이 없음에도 시위를 목적으로 온]학생들과 공수부대원들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학생들이 다리 를 넘어서면서 공수부대원들이 나와 밀어내는 대치상황이 한참 계속됐다. 군의 첫 경고 방송이 나오지만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높아져갔다. 일부 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마이크를 들고 앞에 나섰다. [우리는 상부 지시로 全南大에 왔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졌다. 즉시 귀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해산시키겠다] 장교의 말이 끝나자 정문양편으로 공수부대원 4명씩이 2열 종대로 대열을 이뤘다. 학생들이 돌을 던졌으나 공수부대원들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아침 10시부터 10시 30분 사이에 벌어진 일]
위에 인용된 이 기사는 학생들이 국군 위병들에게 돌을 던졌기 때문에 폭동진압작전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증언한다. 아무리 돌을 던져도 국군 위병들이 별반응을 보이지 않자 학생들은 11시에 금남로에 모였는데, 이때 불순세력이 가세하여 11시 30분부터 돌과 화염병을 파출서에 투척하며 순경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광주의 파출서들이 불에 타 파괴되며 순경들이 폭도들에게 끌려가 집단 폭행 당하므로 치안이 공백 상태가 되자 전남 도지사와 광주시장의 요청으로 광주사람 정웅 장군이 2개 대대의 공수부대원들에게 폭동진압작전 명령을 내린 시간은 오후 4시 40분이었다.
2002년 12월 15일 광화문 시위 때 성조기를 찢었던 학생들이 한총련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 즈음에 미군 위병에게 돌을 던진 학생들도 한총련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국가단체 한총련의 뿌리는 전대협과 삼민투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다시 그 뿌리는 광주사태로 거슬러올라간다. 한총련의 전신인 삼투위나 전대협이 등장하던 때에 반미감정의 표출로서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들이 터졌다. 왜 미국문화원에 방화하였는가? 그들은 광주사태 때 미국이 국군 계엄군의 폭동진압작전을 막지 않았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한국군의 폭동진압작전 책임을 미국에 물으며 미국문화원들에 방화하는 좌파 운동권이 광주사태 이후 등장하게 되었는가?
그 배경은 이러하다. 5월 21일 서울과 호남에서 전국적 민중 봉기를 일으킴과 동시에 예정된 김대중의 쿠데타 거사일에 때맞추어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전시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남침하려던 김일성의 계획은 미 제7함대의 부산긴급출동으로, 그리고 5월27일 국군의 폭동진압작전이 성공함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면, 정부는 왜 북한군의 남침 전야의 사실을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던가. 5월 17일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의 밤샘 회의 후에 “국민들의 동요 및 경제지표 폭락에 따른 나라공동화상황을 모면하고자 전쟁 위기의 특종을 보도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5.17긴급조치를 발표하였다.
따라서 미 항모 미드웨이와 기함 블루릿지 등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사실을 국무위원들과 군부 지도층 외에는 그 누구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폭도들이 광주 방송국들에 방화하여 파괴하였음에도 유독 광주시민들만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불가사의이다. 당시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광주시민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당시 광주의 좌익서점이었던 녹두서점 주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괴전화가 걸려와 미 항모 미드웨이와 기함 블루릿지 등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도청궐기대회 때 미 항공모함의 부산항 입항 사실을 광고한 것으로 보아 폭동 지도부는 보다 정확한 정보 출처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미 항공모함의 부산항 입항 정보를 받은 폭동 주동자 윤상원은 처음에는 광주시의 외국인들을 인질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다. 광주사태는 폭동은 윤상원이 주동했으나, 시민군 총지휘권은 딴 인물에게 넘어가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무장 시민군이 등장하기 전의 폭동 지도부는 의외로 들불 야학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항간에 전남대 학생들이 유혈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순수한 들불야학 청소년들이 윤상원에게 선동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들불야학 청소년들 중에 현명한 이들이 있어 외국인 납치를 반대하였다. 이유는 외국인을 납치하는 반미 행동은 광주의 민심을 등돌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윤상원은 방침을 바꾸어 미 항공모함이 국군의 진압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는 거짓 광고를 하였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에 도청진압작전이 성공함으로 폭동이 실패하자 윤상원 추종자들은 미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하고도 계엄군의 광주사태 진압을 막지 않은데 책임을 미국에 물어야 한다는 이론을 꾸며냈다. 그리고 이 이론의 시각에서는 광주학살의 책임은 미국에 있게 된다. 사실, 광주학살은 없었다. 군인 희생자의 수가 삼분의 일이요, 그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의 폭도들의 총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좌파가 광주학살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엄청난 반미감정을 폭발적으로 일으킨다.
이런 반미감정이 1980년 대 초에 전대협이 결성되게 하였으며, 그 후신이 한총련이었으며, 2002년 16대 대선 기간 중에 노사모와 야합하여 노무현이 당선되면 한총련을 합법화를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성조기를 찢는 등 반미시위의 선봉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2002년 12월에 용산기지의 미군 위병에게 돌을 던진 학생들은 한총련 소속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을 지키던 국군 위병들에게 전남대 학생들이 돌을 던진 것이 그 발단이었던 광주사태는 한국에서 반미운동의 뿌리가 되었으며, 2002년 12월에 미군을 상대로 그런 투석전이 재현되게 하였으며, 결국 주한미군 감축 사태를 빚어내고 말았다.
http://cafe.daum.net/issue21
http://www.theology21.org/ko/518.htm
첫댓글 지난 8월 27일 경에 쓴 칼럼 같은데, 이틀전 미국대사관 카페에 올려놓고 보니 여기에서는 안 보이기에 지금 올렸습니다. 왜 제가 여태껏 여기 안올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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