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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문인협회 진도 문학 기행을 마치고
전근표
임진년 4월14일
핸드폰 알람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아침 여섯시, 벌써 창가엔 동녘의 새벽빛이 환하게 스미고 있었다.
늦은 새벽기도를 하면서 오늘도 살아 숨 쉼에 그리고 좋은 하루를 맞이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오늘의 의미 있는 전북 문인협회의 전남 진도 기행에 하나님의 축복과 무사 은총을 기원하였다.
나보다 일찍 일어난 아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 간편식( 깨죽, 피망, 토마토, 치즈, 우유)을 기분 좋게 먹고 나니 벌써 일곱 시가 넘어 있었다.
늦겠다는 아내의 독촉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벙거지 모자에 운동화 차림으로 “잘 다녀 오세요”라는 아내의 전송을 받으며 현관문을 열고 지하 주차장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막상 집을 나서니 20~30m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였다. 나는 비상 깜박등을 켜고 방어운전으로 익산에서 30km 떨어진 집결 장소인 전주 종합경기장을 향했다.
집합 장소에 도착해 보니 출발시간 5분전이었다.
이미 그 곳엔 관광버스 3대가 우리 회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미 도착하신 정군수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회원님들께서는 버스에 승차하신 상태였다. 반갑게 맞아주는 회장님과 인사를 나눈 후 나는 1호차에 올라 이미 자리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며 뒷 자석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 옆 자석 메이트와 “반갑습니다” 하며 인사를 나누고 보니 노년의(83세)수필가 정장영 선생님이셨다. 나보다는 19살이나 위인 “어르신”이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만나시는 반가운 분들이라 서로 인사하며 나누는 담소모습은 정감 있는 모습 그 자체였다. 농 짙은 투박한 말씨마저도 더욱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정군수 회장께서는 차량마다 순회 하시며 회원님들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하며 일일이 인사를 하였다. 그렇게 하시는 모습 자체가 정감어린 모습이어서 좋아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일행이 탄 버스는 출발하게 되었고 차량마다 임명된 안내 도우미분들 4명의 인사 소개가 있었다. 도우미님들께서는 미리 준비한 간식을 나누어주며 여행지에관한 일정계획과
요약설명서를 나누어 주고 장성의 채선심 선생께서 가져온 삶은 밤과 문학사 사장께서 기증한 여행 기념 수건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으며 전북문학 관장이신 이운룡 선생님이외 여러분께서 협찬금을 내신 것도 알려 주기도 하였다.
모든 행사진행이 짜임새 있게 순조롭게 진행 되어 짐을 보면서 혹시나 행사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면 어찌될까 하고 내심 염려 했던 우려는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최초 목적지인 진도대교 까지 이동하는 동안 두 곳 휴게소에서 중간 휴식을 취했다.
이동 간 간식으로 제공된 삶은 밤 네 개와 백설기 등을 맛있게 먹었고 약주를 좋아 하시는 분들은 준비한 소주를 마시기도 하였으나 과음하시는 분은 보이지 않아 다른 모임의 관광과는 역시나 문인들의 수준 차원이 다름도 알 수 있었다.
차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는 아직도 찢겨 진 부채 살처럼 사이사이에 하늘 틈이 보이는데 가까이 스치는 들녘은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푸르름을 더욱 자랑하고 있었다.
골골이 암갈색 속에 희끗희끗 피어 있는 산 벚꽃 과 도로변 가로수로 심어진 만개한 흰 분홍색 벚꽃이 노랗게 핀 개나리꽃 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고 한식일이 지난 산 곳곳에서 조상 묘를 손질하는 등 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들리는 휴식처마다 겨우내 움 추렸든 동 장군이 물러난 뒷 끝이라 희뿌연 아지랑이 안개 속에서도 보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꽃 숲으로 충만함을 느끼게 하였고 간간히 지나치는 저수지나 바닷물은 파도 없는 잔잔함으로 장시간 지친 나의 눈꺼풀을 내려 깔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잠시 졸다가 깨어 옆의 장선생님과 고창, 부안지역의 인삼농사,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북한의 폐쇄된 세습체제와 비교도 해 보았고, 우리나라 교육의 실상과 백년대계, 인성교육이 무시되고 있는 현재 교육의 맹점 등을 얘기하다보니 지루함도 잊은 채 목적지인 진도 대교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도대교에 도착하였음을 알고 하차하여 보니 그 곳에는 사전에 진도군청 문화관광과와 협조된 <허상무>라 하는 해설사 한분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입담 좋고 지역 내 문화광광 명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전문가답게 역사적인 유래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행에게 정성을 다하여 소개하려는 모습이 훌륭해 보이는 분이었다. 진도는 현재 1개읍 6개면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참사이상 유배자 수가 157명에 이르는 한양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남쪽 끝 전형적인 유배 섬 이었던 곳으로 크기는 제주도, 거문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번째 큰 섬이라 했다( 1년 농사지으면 3년을 먹고 산다). 이러한 섬에 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도착한 진도대교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과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을 연결하는 다리로서 길이484m,너비 11.7m,왕복 2차로의 한국 최초의 사장교이었다.
1980년 착공하여 1984년 완공 되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 해협 위에 세워진 다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많은 교량이기도 했다. 이 해협은 해류가 거세어 당시 국내 기술력으로는 해상 구조물 시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 영국의 RPT사의 설계 및 감리아래 양쪽 해안에 교대와 교각 등 하부구조를 설치한 후 콘크리트 교각 위에 높이69m의 강제 주 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교량 상판을 지지하는 사장교를 건설하여 이 연륙교의 개통으로 진도에서 광주까지 4시간 걸리던 차량운행이 2시간30분으로 단축되어 수송비 절감은 물론 지역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2001년 12월부터 4년간 길이484m,너비12m의 2차 진도대교를 개통함으로서 쌍둥이 사장교로서 장흥 댐을 수원으로 하는 광역 상수도관이 통과하게 되어 진도지역의 식수난 해소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는 교량이기도 하였다 교량 옆에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면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함선이 있나이다”하며 왜선 200여척과 싸워 완전이 적선을 괘멸 시켜 대승을 거둠으로서 풍전등화 앞에 조국을 살려낸 이순신 장군이 더욱 위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시간의 재촉을 뒤로한 체 일행은 점심 식사를 위해 진도읍으로 향했다.
진도읍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진도에 살고 있는 막내 여동생 내외를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핸드폰 전화 해 보았다 마침 진도고교에서 영어선생을 하고 있는 홍서방이
휴일이라 집에서 쉬는 중이라 하면서 식사 장소로 바로 나오겠다는 반가운 대답 이였다.
일행과 함께 시내 중앙쯤 위치한 계살. 성계 비빔밥 집에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밖으로 나오니 홍서방은 벌써 도착하여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는 서로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여동생은 조금 늦게 도착하여 환한 미소를 연신 보내며 기뻐하는 모습으로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 왔다 나는 전북문학회원이기에 회원님들과 문학기행중임을 얘기하고 식사를 마치면 다음 코스는 <운림산방>이라 말하니 그 곳에 먼저 가 있겠다하여 혹시나 못 만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미리 준비한 용돈을 홍서방 손안에 쥐어 주고 만났으니 이제 됐다 하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행과 버스에 올랐다.
홍서방은 고향과 친인척을 떠나 외지인 진도에서 교편생활도중 암이 발병하여 대 수술을 하고 얼마간의 휴식기간을 거쳐 다시 교단에 복귀 후 이제야 겨우 건강을 되찾은 듯 보이나 우리 집안 식구 모두는 항상 염려스러워 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녀로서는 남매를 두었는데 하나는 이화여대를 재학 중이며 하나는 서울대를 목표로 제수 중에 있어 마음을 비우고 오직 건강만을 위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채로 살아가고 있기에 항상 고맙기만 한 사람이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운림산방에 가는 도중 진도군청사 옆에 위치한 소전 미술관에 잠시 들리게 되었는데 이곳은 사업비 5억원을 투자하여 2003년 5월31일 소전(손재형)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에 맞추어 소전 미술관으로 개관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 이후 서예대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의 작품과 그를 위해 작업된 국내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남도문화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곳 이었다.
특히나 소전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소전선생의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부친의 평생 역작과 소전선생을 위해 국내 거장들이 심혈을 기우려 그린 그림들을 진도군에 기증한 것은 물론 노산 이은상의 시비문등 손재형선생의 주옥과 같은 작품과 그림 300여점을 교대로 전시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남도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1전시실에는 선생의 청년시절 작품이, 2전시실에는 문인화, 3전시실에는 장년 시절의 작품이, 4전시실에는 양지니, 서희환, 박행보, 등 제자들의 작품과 의제 허백련선생 등 실로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나는 영방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해설사 허상무님의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조선시대 말엽인 1900년대 초부터 이름 하여 불리어 진 <진도아리랑>의 유래와 노래 속의 흥겨운 가락은 멋을 간직한 애절한 한이 깃들어 있어 비애를 사랑으로 승화 시킨 노래로 후렴 중의 응- 응- 응- 소리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켜 있는 것과도 같다고 설명 하였다. 특히 가사는 임을 그리는 애끓는 심사와 원망이 해학적으로 엮어진 내용이 많으며 그때마다 노래하는 사람이 지닌 정서를 전래의 가락에 맞춰 즉흥적으로 불리는 극히 서민적인 민요로 장단은 세마치이고 선율은 시나위 형으로 중모리 장단에 맞추어 불려 지며 가사와 함께 가락에 독특한 흥취가 있어 남도민요의 진수로 일컬어진다 하였다.
진돗개의 유래 설은 4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남송시대 무역선이 진도 근해에서 조난당할시 상륙한 개가 시조를 이루었다는 설이며
두 번째는 고려 원종 때 삼별초군이 강화도에서 관군과 몽골군에게 항거하려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길 때 몽골군이 난을 평정하기 위해 관군과 함께 진도에 원정 시 남기고 간 개의 후손이라는 것, 세 째는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하였던 국영(관마)목장의 병견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당시 몽골에서 수입했다는 설, 넷째 우리나라 고유견이 있어 번식 유지해 왔는데 진도에 분포했던 개만이 육지와 격리되어 타견과 혼혈됨 없이 순수 번식으로 고유의 혈통을 보존하여 오늘의 진돗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였다.
<관매리>에 있는 18m높이의 후박나무와 <임회면>에 있는 600년 된 비자나무는 약재로서 뿐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문화적 가치와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는 말도 해 주었다.
드디어 운림산방에 일행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였다. 해설사의 말대로 식자의 눈에도 과연 <봉황포란형>의 지세답게 아늑하고 포근함이 밀려 오는듯한 높은 <첨찰산>을 주산으로 뒤에 두고 둥글둥글한 두 봉우리의 작은 안산을 옆에 끼며 나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 운림산방, 과연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연무가 “운림”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이라는 당호가 걸맞았을 것이었으리라는 말에 공감이 일었다.
이곳에서 소치는 미산인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며 초대 : 소치(허유 또는 허련) -2대 : 미산(허형) - 3대 : 남농(허건)과 임인(허림) - 4대 : 임전(허문)에 걸쳐 찬란한 전통 화맥을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허유 또는 허련)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 했다 한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호를 붙여준 것이며 젊었을 때는 <련>이라 했고 자는 <마힐>이다.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각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하였으며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 서, 화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재에서 헌종을 만날 수 있었고 헌종이 쓰는 벼루의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한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던 분으로 1856년 추사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한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 면이 35m가량 되는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아직은 피지 않은 채로 우람히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시, 서, 화, 창에 능했던 소전을 비롯한 소치 가족들, 강강 수월래가 아닌 강강술래라는 원뜻, 보는 사람이 보기 좋아야 한다하여 서도를 서예라 칭하고 그림에 토를 달지 않았던 지혜, 황토 흙으로 일본 시재전에서 토점화로 이름을 떨쳤던 창조적 화법 등을 연결시켜 볼 때 가히 거명된 모든 분을 높이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옥죄어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 민영익은 소치를 “묵신”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였다하여 “삼절”이라 하였고 추사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망공을 “대치”라 했는데 그와 견줄만하다고 하여 허련을 “소치”라 했다고 한다.
나는 소전미술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이곳까지 나와 준 여동생 내외에게 촬영을 부탁하기도 했다.
운림산방을 뒤로하고 버스에 오르기 전에 매표소 내에서 판매하는 소치 <허련> 탄생2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발간된 화집 한 권을 5만원에 구입하여 버스에 오르려 하니 동생이 진도 특산물인 자연산 미역, 홍주, 울금차 등 사전 준비한 선물을 한보따리 전해 주었다 고맙다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이 하랴 “그래, 고맙다 바쁜데 나와 주어 감사하다, 홍서방, 아우님 건강이 최고 일세 우리 모두 다 내려놓고 사세나 잘 있게나” 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연신 되돌아보며 버스 뒷자리에 가 앉았다.
다음 코스인 용장산성으로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 했다.
버스는 단차로인 좁은 벗 꽃이 만개한 아스팔트길을 따라 조금은 외곽지역이다 싶은 산골짜기를 지나고, 넘어 삼별초군의 한이 서려 있는 대몽 항쟁 터인 용장산성에 도착하니 16:40분 이었다.
우리 일행에게 보여 지는 용장산성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였으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성내의 용장사지와 행궁지가 보존 되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러나 전시관에는 몇 점 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유물을 발굴 보존하고 있었고 삼별초군의 마지막 대몽항쟁지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잘 기록하고 있어 이해하기가 쉬웠다. 발견된 12km이상 되는 성터에 걸쳐 결사 항쟁 했던 그들, 어린아이까지 포함한 모든 남자를 죽이게 하여 씨를 말리려 했던 몽고군의 잔학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치를 떨 수밖에 없었고 제주도까지 점령당할 수밖에 없었던 왕조의 나약함과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항쟁 했던 삼별초군의 충성심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다시 한 번 강성한 자주국방과 안보의 교훈을 되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워진 삼별초군들의 동상 앞에서 일행은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마지막 코스인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를 향해 버스는 이동하기 시작 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쳐 저 가고 땅거미가 일기 시작할 즈음에야 우리는 전첩비 견학을 마칠 수가 있었다.
전첩비는 반반한 바위 동산위에 거대한 거북 좌대를 조각하여 그 위에 높이 3.8m,폭1.2m
두께 0.58m의 비석을 세워 놓은 후 다시 그 위에 높이 1.2m, 폭1.2m,길이2.1m 크기의 머릿돌이 올려 진 모습으로 시비는 노산 이은상 시인이 1956년 11월 29일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여 시를 짓고 이 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는 점에서 문화 교육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있는 전첩비라 할 수 있었다.
전첩비를 마지막으로 살펴본 우리 일행은 도보로 해변 가 가까이 내려와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전주로 돌아 가기위해 처음 도착지였던 진도대교 쪽으로 향했다. 진도대교에 다다르자
도우미님들께서 사전에 준비한 찰밥과 김치 그리고 구운 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는 새참이 아닌 저녁식사로 대신하게 되었다. 진도여행을 무사히 마친 안도감에서 인지 많은 회원들께서는 특산품 가게에 들러 자연산 미역이며 다시마, 홍주 등을 구매하는 모습들 이었다.
최종 탑승 인원을 파악 확인하고 나서야 진도를 출발하여 돌아오게 되었고 오는 동안 피곤에 지쳐서인지 모두는 조용한 잠에 취하는 모습들이었고 전주에 도착해보니 저녁 8시가 다되어 있었다. 회원님들 모두는 유익한 역사적 배움과 새로운 창작의 의미 있는 봄 향기를 듬뿍 마시고 돌아 오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앞으로도 금번과 같은 좋은 문학기행이 반복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2. 4. 14. 전근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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