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강하면서 구름도 낀
가늠하기 힘든 날씨입니다.
오늘은 10명의 회원이 참석하였습니다.
류건진, 권정현 님은 가사 사정으로
복수박 한덩이로 인사를 하고 답사를 대신했습니다.
와룡 통로에 계시는 회원들은
명성웨딩(구) 뒤 주차장에서 합류하였습니다.
오늘도 꿈나무독서실 손경식님께서
우리의 이동을 책임지십니다. 감사^^
먼저 예안 높은 다리를 건너
보광사(普光寺)에 들렀습니다.
대웅전도 없고 관음전만 있는 조그만 사찰입니다.
문화재청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보광사를 조사하다가 13세기 목조관음보살좌상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불상은 현재까지 알려진 목조불상 중 제작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어서 고려 미술사 연구의 획기적 자료가 될 전망이다. 불상 안에서는 1007년(고려 목종 10년)에 목판으로 찍어낸 보협인다라니경도 함께 발견됐다. [문화재청 제공] 2008년
이러한 인연으로 보광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소백산 희방사에서 훈민정음이 나온 것처럼
퇴락하여 사람의 발길이 적은 사찰에 있는 보물이
세상의 이목을 피해 오랜 세월 간직되나 봅니다.
주지 스님께서 친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연두님과의 인연으로...
머리에 쓴 화형보관(花形寶冠)은 원래 금속 재질로 만든 것인데 두꺼운 금칠을 해놓아 눈으로 보기엔 떡칠을 해놓은 것 같으나 X-선(?) 촬영한 모습을 보면 그 섬세함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칠을 해서 그 원형을 감추었기 때문에 세상에 숨어 지내다가 이제 나오게 되었습니다.
복장유물로 함께 나온 보협인다라니경은 목판 인쇄한 것으로 앞부분에 불경내용을 요약한 그림인 변상도도 실려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목판화라 할 수 있습니다.
발길을 돌려 용수사(龍壽寺)로 향합니다.
출발하는데 빗방울이 듣기 시작합니다.
걱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이런 비는 잠깐 따루고 지나간다 하여 내심 걱정을 덜어봅니다.
용수사는 신라시대 암자 몇칸을 시작으로 고려 의종 18년 왕명으로 '용수사'로 사액을 받아 90여칸 규모로 완성하였습니다. 고려 왕실의 국지대찰로 국가의 무사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던 국왕의 원찰로 서산대사, 사명대사,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등 영남학파 학자들이 공부했던 곳입니다.
탑3기가 보이는데, 다보탑, 석가탑, 정혜사지 다층석탑입니다. 왕실의 원찰이므로 왕의 상징인 옥돌로 만들었다 합니다. 아마도 탑은 근년에 조성한듯...
고려 의종 연간은 무신정권 시절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려 왕실과 관련이 깊은 이곳에 절을 지었다 합니다. 이런 관계로 왕실의 후원을 입어 이곳은 차나무를 재배한 시배지였으나 기후가 맞지 않아 따뜻한 남쪽 밀양 표충사로 차나무를 옮겨갔다 합니다.
탈북자가 모시고 왔다는 북한 개풍군 개풍사의 미륵부처님입니다.
선성현은 조선시대 고종 때 예안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일제 때 안동에 편입됩니다. 그러므로 선성의 문화와 안동의 문화는 같다고 할 수 없으며, 본래 예안의 사람들은 안동과 차별하여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합니다. 도산 12곡 중 3곡의 이상의 세계이고 9곡은 실재하는데, 9곡마다 명문의 종택이 있고 이들이 곧 선성 문화의 주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산의 4대 명문가는 토계의 진성 이씨, 분천의 영천 이씨, 오천의 광산 김씨, 봉화 금씨입니다.
진성 이씨는 퇴계 선생님 이름만 해도 더 이상 부언할 필요가 없고,
영천 이씨도 농암 선생 이름으로 가늠하고...
영천 이씨는 경북 영주의 옛이름이 영천으로, 영천이라는 본관은 곧 영주를 의미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永川李氏의 영자는 영주의 榮자가 아닌 영천의 永자를 쓰며, 시조는 고려초 평장사 이문한이라 하는데, "영천은 신라 땅 切也火郡을 경덕왕 때 臨皐로 고치고 고려 때 道同 臨川 두 고을을 합쳐 영천으로 하였다. 현종 때는 慶州에 소속되고 조선 태종 13년 永川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영주가 아닌 永川이 맞는 것 같습니다.
광산 김씨는 시호를 받은 분만 47명을 배출하여 이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어 마을 이름을 군자리라 칭했다 합니다. 그리고 마을을 흐르는 개울의 돌이 검다고 하여 烏川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광산 김씨 종택은 댐 건설로 이건한 것이고 원래는 방잠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군요.
재미난 이야기는 퇴계 선생의 맏며느리가 봉화 금씨인데, 이 혼사 때 토반(土班)인 봉화 금씨 집안에서 퇴계 선생의 집안이 진보의 아전 집안이라 하여 혼사를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혼사가 이루어지면서 봉화 금씨의 젊은이들이 퇴계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정진하여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매헌 금보는 퇴계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필체가 특출하여 스승이 돌아간 뒤 그 비문을 직접 쓴 사람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대유 퇴계가 돌아갔을 때 그의 문인들은 “기고봉(대승)이 아니면 비문을 지을 수 없고 금매헌이 아니면 글씨 쓸 사람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합니다.
안동에서 예안에 갈 때는 예안에 올라간다고 하고, 예안에서 안동에 갈 때에는 안동에 내려간다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합니다. 여기서 올라간다는 단순히 북쪽으로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화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른다는 뜻이지요. 또한 안동은 예안의 동쪽이어서 안동이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명 유래로 보면 틀린 말이지만 그만큼 예안인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내앞(川前) 독립운동기념관에 독립운동가 ‘1000人 추모의 벽’을 세웠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안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입니다. 그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은 하계리(도산면)라 하는군요. 하계리는 퇴계 선생 종택이 있는 상계리 바로 아랫마을입니다. 퇴계선생 집안도 원래 하계리에 살았는데 아이들이 국법으로 금했던 은어잡기를 하기 때문에 강에서 먼 윗마을로 이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용수사 상운(祥雲)스님의 달변으로 포장된 이야기를 감사히 듣고 농암종택으로 향합니다.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서원 보다 낙동강으로 봤을 때 약간 하류쪽인 분천리에 있었습니다. 안동댐으로 인하여 지금의 가송리로 옮겨 왔습니다.
도산면소재지에서 청량산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가송리로 들어갑니다. 가송리(아름다울 가(佳), 소나무 송(松)),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은 마을입니다. 입구부터 주말인지라 래프팅하는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퇴계 선생님이 청량산을 갈 때 지나던 이곳은 정말 경치가 아름답고(절벽과 굽이쳐 돌아가는 강물에 부서지는 햇살의 아름다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움), 고적하고, 명상에 잠긴 철학의 길이었을 텐데 이 시대에는 수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느낌을 말하는 것입니다.
긍구당입니다. '조상의 유업을 잘 이어가라'는 의미의 당호입니다.
이곳에서 수박파티를 했습니다.
종택의 견공은 순하기 그지없습니다. 외로움을 타는지 말없이 사람을 잘 따릅니다.
연두님은 카메라 버려 두고 견공에 관심을 혹 된장 생각을...ㅎㅎㅎ
농암 각자의 일부입니다.
애일당입니다. 농암 선생은 이름난 효자로 당호인 애일당은 부모님이 살아게신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답사팀이 안동의 여러 종택을 방문해 보았는데 농암종택은 크게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민박을 위한 시설들이 종택의 각 건물에 혼재해 있었습니다. 종택의 상업화라는 부정적 시각을 가진 분도 계시고, 이 시대에 옛 모습만 지키고 있는 것이 과연 전통이고 문화인가?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변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옛 것만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도포자락 휘날리며 짚신신고 물마시며 살아보시지... 이념이 강했던 성리학적 사유(思惟)의 문화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에 기반한 현실과의 괴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회 탈놀이도 자나깨나 조선 시대의 각본만 되풀이 한다면 생명력이 없지 않느냐, 오늘 이 순간의 문제도 비판하고 풍자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는 쉽게 동의했는데, 글쎄 이 문제는 섣불리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사진 찍느라 김정일님의 견해를 충분히 듣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류건진님이 제공한 수박을 먹으며 농암종택이야기가 깊었습니다.
조목 선생의 월천서당에도 가보려했으나 열공하느라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일정을 마치기로 합니다.
사진 상 가운데 청국장과 밥그릇, 국그릇 만 빠졌네요.
저녁은 콩밭에서 산채 정식을 먹었습니다. 다음 달을 기약합니다. 음주가무로 여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의 문화 공부 참 좋은 활동이라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칩니다.
오늘은 처음 출석한 류시대님의 문화 내공을 느끼게한 하루였습니다. 특히, 안동의 조선시대 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오늘 글 좋습니다. 사진과 글이 매우 좋습니다. 김명환님 안 오시면 큰 일 나겠습니다. 이런 멋진 답사기도 못 보고... 감사합니다. ^^
늘 자세한 설명과 안내에 감사 드립니다. 더운 여름 함께한 회원 여러분과 맛잇는 수박과 떡 청국장 등 모두를 즐겁게 하였습니다.
사진과 글 올리시느라 수고많으십니다. 다음 답사시엔 약주 한잔 더 드릴께요.
선생님 답사기는 꼭 봐야 하는게... 답사 간다고 다 보고 아는게 아닌것 같더군요^^* 이렇게 답사기로 정리를 해야 최종 답사의 마무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읽어주신분,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