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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는 인구가 3백 만에 지나지 않는 작은 공화국이지만 유고 연방 내에서는 가장 서구화된 나라였다. 물론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전통적으로 서구에 편입되었던 결과다. 때문에 전혀 이질적인 요소를 갖춘 세르비아와의 연합 그 자체가 비극적인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다.
현재의 슬로베니아 조상인 슬라브 족은 다른 발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 사바 강의 상류 계곡에 그 첫 모습을 나타낸다. 제대로 모양을 갖춘 부족 국가를 세우지 못했던 그들은 한동안 이곳을 지배했던 아바르 족의 휘하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사모 제국(오늘날의 체코)’의 일부로 잠시 편입되기도 했지만 가장 획기적인 일은 프랑크 제국의 영토로 편입된 일이다. 이때가 748년이었다.
프랑크 제국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슬로베니아 역사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때부터 슬로베니아 지역은 사실상 확고한 서구로 분류되었다. 과학 혁명, 르네상스, 종교 개혁, 나폴레옹 등 서유럽사에 빼놓을 수 없는 모든 요소가 슬로베니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 아래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개종이 이루어진다. 당시 이 지역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잘츠부르크 교구에 소속되었다. 이와 함께 프랑크 제국으로부터 독일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토속적인 슬로베니아 귀족들이 별볼일 없는 자리로 계속 밀려난 반면 제국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중요 직책을 완전히 장악했다. 독일어가 공용어가 되었으며 고유어인 슬로베니아 어의 사용 지역은 드라바 강 남쪽 지역으로 극히 제한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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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바 강
10세기에 동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는 중앙 아시아 쪽에서 차츰 서진해 온 마자르 인이 트랜실바니아의 대평원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오늘날 헝가리의 직접 조상인 이들은 일단 정착해 지위가 높은 사람부터 토지를 분배했다. 귀족이라고 으스대던 계급들은 더욱 많은 땅을 차지했으나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은 전사 계급에게는 도대체 농사를 지을래도 땅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그나마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서유럽에 쳐들어가 약탈하는 것이었다. 마자르 군대는 955년 레히펠트에서 재기불능의 참패를 당할 때까지 서구에서는 악몽으로 여길 만큼 악명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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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르 족 레히펠트 전투
슬로베니아에도 마자르 인의 여파가 밀려들었다. 952년 서유럽의 실권자인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마자르 인의 약탈을 막기 위한 방파제를 슬로베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했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카란타니아 공국으로 불렀다. 이것이 슬로베니아에 건설된 최초의 자치국이었다. 그 후 마자르 군대가 격파되면서 이 공국의 설립 목적이 상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국은 크르니올라(10세기), 스티리아(11세기)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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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1세 부다의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마자르족 전사의 모습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제국 창건의 꿈을 가지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휘하에 잠시 들어갔으나 1278년 신성 로마 제국에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한 뒤 몰락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282년에는 당시 신흥 제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에 넘어갔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루돌프 4세 재위시(14세기) 행해진 사민 정책에 따라 많은 독일인들이 슬로베니아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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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
15세기에 들어서는 이곳 역시 다른 발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공을 받았다. 그런데 영주나 귀족들은 외적에 대항키 위해 농민들을 다독거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더욱 착취했다. 본래 영주는 계약에 따라 농민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댓가로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심지어 결혼이나 주거 제한 등의 인권 유린도 합법적으로 했는데, 정작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쳐들어오자 농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수수방관하였다. 게다가 영주들의 착취마저 더 혹독해지자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농민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지역의 농민 반란은 1478년부터 1573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영주들은 무력으로 잔인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나라가 온통 뒤숭숭하던 16세기 초에는 종교 개혁의 열기가 슬로베니아를 덮쳤다. 영주들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일반 평민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신교 쪽으로 기울어 갔다. 슬로베니아의 프로테스탄트는 전래 초기부터 철저히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모든 신교회 용어는 슬로베니아 어를 사용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때 구교의 아성이었던 슬로베니아 교회의 대부분이 구교 간판을 내리고 신교 간판을 달았다. 거의 모든 지역에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학교가 개교했다.
이런 가운데 1555년 프리모즈 트루바르라는 학자는 신약을 슬로베니아 어로 번역했으며 다른 종교 서적도 슬로베니아 어로 출간했다. 이 출판물의 인쇄는 당시 신교의 아성인 독일의 튀빙겐과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히 이 작업은 당시 발칸의 여러 문자 예컨대 키릴 문자, 혹은 구(舊)글라골리트 문자로까지 인쇄되었으며 그 작업의 협력자도 이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세르비아 등 발칸의 각 지역에서 골고루 몰려들어 이 작업 자체가 남슬라브 인의 단결을 도모한 연대의 끈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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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지폐에 그려진 프리모즈 트루바르
이 작업의 결과는 물론 슬로베니아 언어 연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켰다. 그 기념비적인 작품이 1584년 아담 보호리치(Adam Bohoric)가 펴낸 <슬로베니아 어 소문법 사전>이었다. 이와 함께 <슬로베니아 어 사전>도 출간되었다. 이 무렵에는 트루바르에 이어 달마틴(J. Dalmatin)이라는 사람이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까지 슬로베니아 어로 번역하는 역사적 작업을 끝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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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보호리치
종교 개혁 운동이 민족주의와 결합해 실천적 독립운동으로 변절하자 구교의 보루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진시황이 수많은 서적들을 불태워 버린 것처럼 많은 프로테스탄트 문헌과 서적이 압수돼 재로 변해 갔던 것이다. 더욱이 보호리치가 만들었던 문법서의 사용도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강경한 정책 때문에 슬로베니아의 프로테스탄트는 완전히 몰락하고 카톨릭이 다시 등장했다. 그 후 카톨릭이가 지금까지 슬로베니아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 문자의 부활과 이를 계기로 한 민족 문학의 고양은 슬로베니아 민족주의를 형서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기간: 1740~1780)나 요셉 2세(재위 기간: 1780~1790)의 통치 시기에 제국의 중앙 집중화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언어는 슬로베니아의 독자성을 인정받게 된 까닭이다.
이 시대에 민족 의식을 고취한 대표적인 인물은 카톨릭 성직자이면서 시인, 학자, 그리고 언론인으로까지 그 영역을 넓혀 간 발렌틴 보드니크(1758~1819)였다. 그는 일생을 슬로베니아 역사와 언어 연구에 헌신했다. 1797년 그는 류블랴나에서 슬로베니아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을 창간했다. 그는 슬로베니아 역사서를 저술했으며 언어 운동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겨 놓아 슬로베니아 민족주의가 20세기로 이어지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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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틴 보드니크
이에 앞서 슬로베니아의 평민이었던 안톤 린하르트(Anton Linhart)는 오스트리아 남쪽에 있는 모든 슬라브 인을 언급하면서 발칸 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슬로베니아 민족사를 서술했다. 이 책은 1788년 독일어로 출간되었는데 독일과 이탈리아의 영향 속에서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유고 내의 다양한 사람들의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선도자의 위치에 놓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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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린하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