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륜 16호 2005년 겨울 】
무량광불과 바른 신앙 Ⅰ
지금 여러 불자님들 손에는 ‘무량광불’이라고 쓰인 쪽지가 있습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문자 그대로 한량이 없는 광명의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오늘 만등불사는 여러분이 협조하고 동참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무량광불과 만등불사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것부터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에서 진리는 항시 광명이나 빛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고, 진리의 반대인 사악이나 부정적인 부조리는 어둠이나 암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암흑을 밝혀서 보다 더 광명한 마음으로, 또는 광명한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느 종교나 다 공통으로 추구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광명가운데서 가장 근원적인 광명, 가장 본바탕인 광명이 아까 말씀드린바 무량광불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님입니다. 만등불사는 비록 만등이라 하는 수치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은 만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만등 백만등 또는 무진등, 끝도 가도 없는, 한없는 등불을 켜서 무량불토에 가는, 우리 스스로 무량광불이 되고, 천지 우주가 모두 다 무량광명토가 되기를 기구하는데서 만등불사의 참뜻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근본번뇌가 있습니다. 대부분 다 아시지마는 우리 번뇌를 가장 간추리면 하나의 무명이나, 조금 더 부연시키면 그때는 탐진치 삼독심이고 조금 더 부연시키면 탐진치만의(貪瞋痴慢疑)라. 탐욕심을 부리고, 노여워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품고, 아만심을 내고, 또는 참다운 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을 내고, 이러한 오번뇌가 보통 말하는 근본번뇌입니다.
이러한 번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무량광명을 못봅니다. 무량광불을 못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교를 위해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바른 신앙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우리 신앙대상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면 바른 신뢰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현하 우리 종교계가 성찰을 거듭하고 있고 또는 우리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 빛나는 공헌을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사부대중이 바른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어떤 것이 바른 신앙인가.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확실히 우리가 알고서 믿어야 합니다.
불교는 너무나 광대무변합니다. 마치 하나의 양을 모는데 양이 도망가는 길이 한 갈래 밖에 없으면 그냥 한 갈래로 쭉 가서 잡을 수가 있지만, 길이 여러 갈래면 어느 길로 양이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양을 못 찾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행하는 방편도 많고, 가지가지의 경전도 많이 있는 광대무변한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을 바로 못두면 우리 행이 따를 수가 없습니다. 행이 못따르면 우리한테 가피도 올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성불이라 하는 불교인의 구경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 신앙대상인 부처님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부처님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서 본바탕을 보기 전에는 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우리 불자는 부처님을 우러를 앙 믿을 신자, 앙신(仰信)이라, 신앙적으로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헌데 부처님께서나 또는 그 뒤의 무수도인들의 말씀을 빌어서 부처님의 개념을 정의한다면 우리 인간성의 본질인 동시에 바로 우주만유의 본바탕이 부처님입니다.
우리 인간은 각 현상은 보지만 일체존재의 본성은 못 봅니다. 허나 본성을 본 분들 말씀으로 해서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 인간성의 본질, 우주만유의 본질, 이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물리적인 표현으로 말씀할 때 무량광명입니다.
불교란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일체 모든 학문과 종교철학을 다 거기에 포섭해 있어놔서,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우주만유의 본질인 동시에 우리 인간성의 본질인 부처님을 이렇게도 표현하고 저렇게도 표현합니다. 과학적인 표현도 있고 또는 철학적인 표현도 있고 그때그때 중생근기에 따라서 달리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우주의 본바탕인 그 무엇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입니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법신 부처님입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진여, 여래, 또는 제일의제, 법성, 불성입니다. 헌데 물리적 표현을 한다고 할 때는 무량광이라,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광명은 우리가 보는 색광이 아닙니다. 광명을 우리 불교에서는 색광(色光)과 심광(心光)으로 구분합니다. 우리 인간의 제한된 안목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광명은 색광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볼 수 없고 마음의 본질, 우주의 본질인 불성을 깨달은 분만이 볼 수 있는 그런 광명은 마음 심자, 빛 광자 심광입니다.
허나 광명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단지 성상(性相)이라, 성(性)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심광(心光)이고 상(相)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색광(色光)입니다. 우리가 보는 전등불 또는 등불 역시 그것의 본바탕은 본질은 심광(心光)입니다. 이러한 심광 색광 다 합해서 무량광(無量光)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광명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부처님 참배할 때 보면 탱화부처님이 계십니다. 후불탱화부처님은 가만히 보노라면 부처님 정상에서 빛이 나와서, 비록 탱화는 좁아서 미처 못보이지만 그 빛이 무량세계로 몇 바퀴 돌아가지고 다시 부처님 정수리로 딱 들어오도록 돼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자성, 우리 본성, 우주의 본성을 인격적으로 표현해서 부처님인데 그런 부처님의 광명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빛이 나온 것을 우리한테 보이도록 그린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앞 현판에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광명변조는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내내야 무량광불하고 같은 뜻입니다. 광명이 천지우주에, 불교말로 하면 삼천대천세계에 조금도 흠축이 없이 조금도 간극이 없이 다 충만해 있는 것을 가리켜서 광명변조라 합니다. 천지우주를 두루 다 비추고 있단 말씀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의 지혜, 이런 것을 뜻하는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요, 또는 그 뒤에 나오신 무수한 도인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바탕인 그런 불성, 인격적 표현으로 하면 부처님, 철학적으로 하면 진여 또는 하나의 물건,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마는 열반이나 도나 그런 것도 역시 다 철학적으로 부처님을 표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님 그러한 불성은 대체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비록 그러한 부처님이 우리의 본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이라 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성이 별로 가치도 뭣도 없고 그저 한 무리나 또는 요새 말하는 소립자라든가 원자나 그런 정도밖에 안되면 그것은 별로 신통한 가치가 없습니다. 허나 우리 본질, 본바탕인 불성이나 우주 만유의 본질인 불성은 무량의 무한의 모든 지혜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도를 통한 통달무애한 그런 도인들이 몇수만년을 두고서 헤아리고 찬탄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다 말할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량공덕을 간추려서 우리 불교에서는 상락아정이라는 말씀으로 요약합니다.
상(常)은 무엇인가. 상은 항상 상자, 상(常)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영생해서 항시 상주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나 일체만유의 현상은 비로 그때그때 무상해서 변화하고 또는 소멸한다 하더라도 본바탕인 불성 이것은 영생상주(永生常住)합니다. 이것보고 항상 상자 상 그럽니다.
그 다음은 락(樂)이라 즐거울 락자 락(樂)입니다. 락, 이것은 일체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고생은 눈꼽만치도 없고서 모든 행복을 원만히 다 갖추고 있단 말씀입니다.
그 다음은 아(我)라. 나 아자, 이것은 조그마한 제한된, 번뇌도 일으키고 또는 죽기도 하고 생사를 거듭하는 그런 조그마한 소아만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다 자재할 수 있는, 신통이나 지혜나 일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도 그때는 아(我)입니다. 불교말씀으로 해서 이러한 아를 가리켜서 삼명육통 그럽니다. 즉 다시 말하면 진아(眞我)인 동시에 대아(大我)인 셈입니다. 우리같은 범부 아는 소아고, 소아의 껍데기를 벗어버려서 참다운 자기인 불성을 성취한 그런 아(我)를 가리켜서, 대아 또는 진아 그럽니다. 그런 대아에서 일체공덕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상락아정(常樂我淨)가운데서 아(我)입니다.
그 다음은 정(淨)이라, 맑을 정(淨)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번뇌라 하는 것은 조금도 없고 우리 마음은 광대무변해서 천지를 다 비추는 그러한 광명스러운 마음을 가리켜서 정(淨) 그럽니다. 흐림이 있고 또는 구름이 있고 그림자가 있다고 하면 천지를 못비추는데 조금도 흠축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그러한 광대한 청정한 경계, 이것보고 정(淨) 그럽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이것이 우리 본성인 불성에 갖추어져 있는 무량공덕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성불을 서두르고 있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먼저 이러한 나한테 갖추어있는 내 부처님, 일체만유의 근본인 부처님은 원융무애합니다. 나한테 있는 부처님, 내 본질인 부처님이나, 또는 박가한테 있는 부처님이 다른 부처님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 불성이나 부처님이나 그때는 원융무애합니다. 조금도 어떠한 차별도 없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원융무애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넓은 바다에서 바람의 연 따라서 천파만파 파도가 생기고 물거품이 생깁니다. 그 파도나 거품이 좀 낮은 것도 있고 높은 것도 있고 대소의 차별도 있고 여러 가지 차별이 있지만 물이란 점에 있어서는 똑같은 물이듯이, 현상적인 사람도 비록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또는 일반 다른 동물인 개나 소나 돼지나 또는 돌멩이나 산이나 냇이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그와 같이 천지만유가 천차만별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그 본성인 부처 불성인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원융무애합니다. 상(相)은 천차만별이나 성(性)은, 불성은 똑같습니다.
이러한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무량공덕, 이것이 상락아정입니다. 영생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일체 행복을 원만히 다 갖추어 있는 것이고 또는 일체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고 또는 청정해서 천지우주를 다 비추는 것이고 이러한 끝도 가도 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의 불성공덕입니다. 이렇게 불성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 무진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보물도 많이 있고 또는 가치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것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가치, 영원히 변치않는 가치 이것은 역시 우리한테 있는 불성입니다. 이러한 보배를 위해서 무수한 분들이 생명을 천번만번 다 희생을 시킨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 빈비사라왕이 부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천이백 대중을 거느리고 궁중에 가셨단 말입니다. 가셔서, 부처님자리를 장엄하게 만들어드리니까 부처님께서 걸터앉으시기 위해 발을 이렇게 턱 올린단 말씀입니다.
인도의 풍습은 맨발로 다닙니다. 신을 안 신습니다.
우리 교주인 부처님께서 맨발로 다니시고 어느 때나 모자도 안 쓰고서 다니셨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할 때 우리 같은 중들이 이런 옷을 입는 것도 실은 송구스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상호가 삼십이 대인상(三十二 大人相)이라, 중생이 따를 수 없는 서른두가지의 아주 원만무결한 상호가 있습니다. 또는 팔십종호(八十種好)라, 여든가지의 소소한 상이 있단 말씀입니다. 그런 가운데 부처님 발바닥은 천복륜(千輻輪)이라, 일천천자 바퀴살복자 바퀴륜자, 천복륜이라. 바퀴살모양으로 돼있는 부처님의 발의 천복상으로부터 광명이 나와서 광명이 삼천대천세계, 온 우주를 다 비춘단 말씀입니다.
이렇게 막막한 때에 부처님 같으신 그런 도인들이 계시면 얼마나 우리가 행복스럽겠습니까. 부처님의 발에서부터 나온 광명도 그와 같이 천지를 비추거니 하물며 부처님의 미간백호(眉間白毫)라, 부처님의 정기가 모여있는 미간백호에서는 얼마나 찬란스런 광명이 비추겠습니까. 그와같이 부처님의 발바닥상, 천복륜으로부터 광명이 나와서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고 있으니까 그때 빈바사라왕이 아주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말씀드리기를 “대저 세존께서는 어떠한 공덕이 계셨기에 금생에 나오셔서 그와같은 무량광명으로 인해서 중생의 번뇌를 다 비추시고 또한 중생의 고해를 다 구제하십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부처님말씀이 내가 과거 보살행을 닦을 때에, 부처님께서 닦으신 기간은 삼아승지겁이라, 우리 중생의 산수로 해설할 수 없는 그런 무량세월입니다. 이런 세월동안 닦고 보시도 하고 인욕도 하고 지혜도 닦고 한량없는 육바라밀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러한 등등의 모든 좋은 행을 닦아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와같이 과거에 보살행을 닦을 때 어떤 때는 새끼를 낳고서 먹이가 없이 기아에 헤매는 하나의 주린 범을 위해서, 내 스스로 내 가슴을 찔러가지고서 피를 내고 심장을 뽑아내서 보시를 했고 또한 어떤 때는 한 마리의 매한테 쫓겨서 어디로 갈 바를 모르는 비둘기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내 살을 베어주다가 나중에 종당에는 내 몸을 몽땅 바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구차한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저 바다에 가서 바다 속에 있는 마니보주 같은 훌륭한 보배를 캐기 위해서 내 옷자락으로 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쪽박으로 바닷물을 품기도 했고, 꽤 큰 샘은 샘하나 푸기도 두레로 몇 두레는 들어야 합니다. 하물며 바닷물을 푼다는 것은,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무진의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바닷물을 푸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헌데 중생을 위해서 내 모두를 바치고자 하는 정성 때문에 바닷물을 품었다는 말입니다. 바다가운데에 무진의 보배가 있다고 하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바다 가운데는 용왕이 마니보주라는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니보주는 일체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보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불성처럼 일체 모두를 할 수 있는 보배가 마니보주입니다. 마니보주를 용왕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것을 얻어서 가녀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바닷물을 품는단 말입니다. 그 바닷물을 품는 정성이, 비록 내가 금생에 못하면 내생에 품고 내가 몇만생 몇천생을 되풀이한다 하더라도 지금 다 품어야 하겠다, 바닷물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으나 우리 생명은 한계가 없습니다. 이 몸뚱아리는 금생에는 사라진다 하더라도 몇만생 몇천생 한계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생만생 다시 태어나서 거듭해서 품는다 하면 비록 바닷물이라 하더라도 안품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바닷물을 품으니까 하늘에 있는 천신들이 감동해서, 천신들이 나서서 바닷물을 품는단 말입니다. 천신들이나 신중들은 우리 사람 수와 같이 이렇게 적지 않습니다. 몇십억 몇백억 몇천억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천신들이, 바닷물을 품으니까 마니보주를 가진 용왕도 그때는 겁이 나겠지요. 용왕도 겁이 나고 또는 감탄을 해서 그냥 이렇게 바다해변으로 나와서 마니보주를 내주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중생을 구제도 했고 이와 같이 나는 몇천번 몇만번 내 몸을 바치고 희생해서 공덕을 세우고 더러는 육바라밀 더러는 계정혜 삼학도(戒定慧 三學道) 더러는 십선이라, 일체계행을 다 지키고 이러한 모든 선행을 다한 이런 공덕으로 해서 내가 금생에 나와서 이렇게 삼십이대인상으로 돼있고 내 발모양 또한 천복륜이라, 바퀴살 같은 그런 모양이 되어서 거기서 나오는 광명이 천지우주를 비춘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바른 신앙,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은 무엇인가. 그러한 부처님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믿고서 부처님의 공덕을 알고 그와 동시에 부처님한테 가기 위한, 부처가 되기 위한, 성불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
<1983년 10월 22일 백장암 만등불사 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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