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답의 참꽃마리님) '몽유설원도'를 그리며 -해남, 강진을 다녀와서-

[이종원]

작년 1월에 떠났던 답사였지요.
참으로 멋진 기억이 되었답니다.



'夢遊雪園圖'를 그리며


밋밋한 일상의 연속만큼 소중한 게 없지요.
온실 속의 날들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잘 알지요.
그러나 세상만사 시큰둥해져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그런 거창한 존재가 될만한 것을 찾아 더듬이가 움직일 때가 있지요. 영화 보는 일, 책 읽는 일, 동시 쓰는 일, 시외버스 타는 일, 실컷 자는 일.....
이런 사소한 것들은 심드렁한 기분을 별천지로 옮겨주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대단치 않은 것들이 내게는 피안에 가까워지는 일이라니 내 삶은 정말 별 볼일 없나 봅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탐스럽게 내리던 하얀 눈이 끝내 폭군이 된 겨울 한 가운데서 떠난 여행. '남도 답사 1번지'라고 일컬어지는 해남. 강진을 다녀와서 충천하는 사기를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지요.
83년도쯤인가 교수님, 선후배들과 떠난 곳이라서 더욱 가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일기예보는 위협 수준이었습니다. 차라리 답사가 연기되길 바랬습니다.
스스로는 기회를 놔 버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예약된 일, 어쩔 수 없이 강행하는 기분을 섞어서 해방구로 출발했습니다.
길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주 충분히 해방이었습니다.

<산사로 가는 길에는 은은한 달빛이 쏟아지고>

새벽 3시 40분쯤 되었나 봅니다.
우리 일행은 흑백의 세상으로 들어갔습니다. 실루엣만 확연한 달빛 속을 걸어 보셨나요? 세상이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홀로 깨어 머리에 달빛을 이고 대흥사로 향했습니다. 눈꽃을 활짝 피운 나무들은 하얀 길 위에 그림자로 누워 있었지요.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와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만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인공의 불빛이라곤 한 접도 없는 곳,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길을 걸으며 가슴 안이 얼마나 환해졌는지 모릅니다.
길 따라 가니 거기에 대흥사가 있었습니다. 법당 안에서 새어나는 스님들의 예불 소리가 경내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만 홀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 일행은 전등을 비춰가며 다소곳이 서 있는 삼층석탑과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가면서 썼다는 '무량수각'이란 현판을 보았습니다.
이광사의 필체 '대웅보전'은 그것도 글씨냐는 투의 추사 호통에 떼어졌다 다시 걸렸다고 하더군요.
추사가 제주도 귀양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다 그제야 진가를 보았다는 것이죠.
내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많이 내 잣대를 함부로 들이댔을까요. 그것도 설익은 잣대로요.
천불전의 꽃 창살무늬도 무척 아름답더군요.
화려한 그들도 깨어 있었습니다.
아니, 오랜 시간 전부터 지금까지 늘 깨어 있던 것일 테지요.
차 문화를 일으킨 초의선사가 상주하시던 절이 바로 대흥사입니다. 차 한잔 꼭 마시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인지라 닫혀 있는 어두운 창 너머로 아쉽게도 눈요기만 했습니다.
다음에는 찻집이 문을 여는 시각에 오리라, 태양 광선에 드러나는 꽃창살을 만나러 오리라 마음먹으며 수묵담채화의 한 귀퉁이에서 천천히 천천히 걸어나왔습니다.



< 눈보라 휘날리는 진도대교를 걸으며 >

진도의 아침은 몹시 추웠습니다.
버스 밖으로 나서기가 끔찍했지요. 잠은 쏟아지고 차가운 바람은 몰아치고. 눈까지 펄펄 날리더군요.. 그러나 진도대교를 걸어서 건너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명량해전의 격전지. 12척의 배로 일본 군함 133척을 물리쳤다는 불가사의한 대전투의 현장.
몇 백년이 지난 지금도 물살이 도도하게 흐릅니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일본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하지요. 탁월한 전략으로 일본 수군 함대를 연달아 패배시킨 명장! 이순신은 세계 해전사에서 손꼽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의 軍神으로 추앙 받는 도오고 헤이하찌로의 말이 걸작입니다. 그는 '나를 영국의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괜찮으나 조선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말아라. 그 분이 장성급 지휘관이라면 나는 한낱 하사관에 불과할 뿐이다'고 말했답니다.
우리 나라 장군이 왜국 장군에게 격찬을 듣다니 어깨가 으쓱해지더군요.
전술 능력뿐인가요? 모함을 받아도 아무런 원망 없이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 그 고매한 인격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지난 밤 차 안에서 아이들은 김남환 선생님이 들려주는 위대한 이순신 장군 이야기에 귀를 바짝 세웠더랬습니다. 우와, 그렇게 대단한 분이야? 그런 반응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들 마음 속에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 존경할만한 인물이 심어지고 그 인물을 닮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이저급 스포츠 스타와 최고 개런티 영화배우와 골든 디스크의 영예를 안은 댄스 가수만이 아이들에게 부각되는 건 곤란하지 않은가요.


<다산초당 댓잎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씻으며>

유배지를 완상하며 느긋한 기분에 젖으면 유배객의 심사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죄스러워집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철 없는 답사객은 초당 마루에 걸터앉아 울창한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쐬는 것도 호사요, 천일각에 나가 강진만 구강포의 유유한 물결을 눈에 담는 것도 호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합니까.
밀려난 자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대나무잎들 몸 뒤집으며 서걱거리는 소리에 얼굴이 환해집니다. 정약용 선생께 죄송스럽더군요.
하지만 다산 선생도 낭만을 아시는 분인지라 '다산 동암에서 조각달이 맑은 밤에 퉁소 소리를 들으니 이는 인간 세상의 광경이 아니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하네요.
양주 마현마을의 처자가 더 애절하게 그리웠을 텐데 그 그리움을 어떻게 삭히셨을지...
그는 진정한 학자의 면모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천여권의 장서를 쌓아두고 저술을 즐겼답니다. 무려 500권의 책과 2000편의 시를 남겼다지요.
정치, 언어, 실학, 과학, 건축, 의학, 농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통달하였다니 그 해박함과 정열에 놀라울 뿐입니다.
그 열정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숭고한 뜻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18년의 긴 유배 생활이 오히려 그를 학자답게 만들었던 것 아닐런지요. 고립된 현실이 달가울 리 없겠건만 때로는 혼탁한 세상과 격리되어 자신만의 일에 몰입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 것도 축복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황희 정승처럼 고위직 감투를 쓰고 청렴결백한 인물의 초상이 되는 것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이며 축복이겠지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넘어가는 길.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이 사그락거립니다.
하늘은 새파래서 마치 청명한 가을날 같더군요.
그 오솔길에는 대나무와 동백이 뒤섞여 자라고 있었습니다. 근묵자흑이라서 그런가요. 동백이 잔가지를 키우지 않고 대나무처럼 올곧게 위로만 뻗고 있더군요.
잡념 없이 한 길로만 치닫고 싶다면 대나무 숲에서 살아봐야겠습니다.


눈 감으니 그림들이 어찌나 풍성한지요.
그 그림이 희미해지는 것이 싫어서 답사에서 돌아오자마자 목도리도 풀지 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남도는 따뜻하였다'고 여흥 몇 줄을 적어 박물관회 홈페이지에 올렸었지요.
정말 꿈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꿈 속에 본 무릉도원이 '몽유도원도'로 남은 것처럼 잠깐 본 설경들은 내 마음 속에 '몽유설원도'로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초의선사, 이순신 장군, 정약용 선생님. 그리고 대흥사, 진도, 다산초당.
그리고 백련사 앞마당에서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백 한 그루까지, 영랑생가에서 봄날 기다리는 모란까지, 눈 내리는 무위사에 흩어지는 풍경소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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