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는 1971년에서 1973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다.
[쿠마장]에서 시작된 각설이의 방랑과 구도에의 편력은 [유리장]에서 다시 [쿠마장]으로 귀환하여 돌아오는 원환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각설이
들의 고행과 구도의 길은 동시에 [죽음의 한 연구]에서 걸승이 40일에 걸
쳐 유리라는 사막에서 겪게 되는 수도에 해당하는 세속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의 상징이기도 하다.그리고 그 각각의 장에서 얻어진 귀
결은 재생과 부활을 이루어내기 위한 요나의 고랫속 3일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구도의 여정에 해당하고 있다.죄과에 대한 형벌로 주어진 <마른 늪
에서의 고기낚이>와 최후로 나무 위에서 7일간에 걸쳐 죽어가는 과정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예수와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이한 예수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수락하는 과정이나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각설이의 나이가 33세에,제17일에서 성서의 <창세기>3장 1~7절에 이르는
내용과 <요한계시록> 6장 1~8절의 내용을 예로 들어 원죄와 예수의 죽음
및 부활 그리고 성육신에 대해서 50여 페이지에 걸쳐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해석의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사유체계가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작가 자신이 새로이 <변절>과 <개종>을 감행하기까지
그 뒤로 17년이 더 걸려 [칠조어론]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이렇듯 박상륭의 소설 전체는 개종과 변절의 역사며 그 과정을 통
해 우주적 작용력을 보여주고자 한다.
박상륭 소설의 특징은 주제의식의 깊이, 그 심호함, 독보적인 형이상학
적 소설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춤추는 듯 물흐르듯 흘러가는 마력 같은 문
장, 운문 같은 산문, 최면에 걸린 듯 만들어버리는 문장에 있다.
하나의 죽음이, 처음에 아주 느리게 살아나고 있었는데, 그때는, 가얏
고 위를 나르거나 춤추는 손은 손이 아니라 온역이었으며, 청황색 고름
이었으며, 광풍이었고, 그것은 병독의 흰 비둘기들을 소금처럼 흩뿌리는
것이었다. 내가 흩뿌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저 소리에 의해 병
들고, 그 소리의 번열에 주리틀려지며, 소리의 오한에 뼈가 얼고 있는
중에 저 새하얗게 나는 천의 비둘기들은 삼월도 도화촌에 에인 바람 람
드린 날 날라라리리루 루러 러르르흐 흩어지는 는 는 는느 느등 등드 드
등 등드 드도 도동동 동화 도화 이파리 붉은 도화 이파리, 이파리 흩날
려 하늘을 덮고 덮어 날을 가리고, 가려 날도 저문데, 저문 해 삼동 눈
도 많은 강마을, 강마을 밤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내, 사내 떠 흐르는
강흐름, 흐름을 따라 중몰이의 소용돌이 잦은몰이의 회오리 회몰아치는
휘몰이, 휘몰려 스러진 사내, 사내 허긴 남긴 한 알맹이의 흰소금 흰소
금 녹아져서, 서러이 봄 꽃질 때쯤이나 돼설랑가, 돼설랑가 모르지, ...
계면하고 있음의 비통함, 계면하고 있음의 고통스러움, 계면하고 있음의
덧없음이, 그리하여 덧없음으로 끝나고, 한바탕 뒤집혔던 저승이 다시
소롯이 닫겨 버렸다.
- pp.338~339
놀라운 문장이다. 가야금소리와 문장이 한데 어울여 물결치듯이 출렁이
며 그 감동을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야금소리는 읽는 이의 영혼을
공명시키고 있을 뿐만아니라 소리의 흐름, 글의 유연한 흐름의 굽이 굽이
에 따라 흔들리며 함께 나부끼고 있다. [칠조어론]의 문장에 대해서 김현
이 박상륭 문체가 갖고 있는 기묘한 환상감이 <육체 없는 육체적 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죽음의 한 연구]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약동같은 것
이 [칠조어론]에서는 서사구조의 약화와 관념의 승함에 따라 다분히 환상
감으로 채색된 결과라고 본다.
[죽음의 한 연구] 이전의 모든 작품들이 이 작품에서 수렴되어 대해를
이루었다가 [칠조어론]에서 사유의 영역을 더욱 깊이 심화 확장시키고 있
는 것이다.이 작품으로 비로소 한국문학은 한 단계 우뚝 올라서게 된 것
이다.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나이가 대개 33세라는 것은 예수가 죽음을 맞
이한 나이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죽음의 한 연구]를 완성한 나이이기
도 하다. 예수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부활을 설파하고 죽
은 것처럼 이 작품을 통해 작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죽음>의 의미의 통
종교적인 탐색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과 구원의 여정을 묘사해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변절과 개종을 시고하여 [칠조어론]을 통해 새로운 칠조를
낳게 되는 것이다.
박상륭의 소설들은 대개 이름이 없고 인물의 어떤 특징에 의해서 명명되
곤 한다. 이를테면 <독장수 영감>이나 <꼽추> <외다리> <촛불중> <노파>
<장로> <수도부> 등으로 말이다. 이러한 문명의 존재에게 이름이 부여되
는 유일한 장면이 바로 [죽음의 한 연구]에서 나오고 있다. 자신의 운명
과 죽음을 수락하면서 공간으로서의 유리가 하나의 몸을 입고 육화되는
것이다.
[칠조어론]은 [죽음의 한 연구]에서의 촛불중이 7조가 된다는 가상적 계
보를 설정하여 인신적인 구도의 편력을 묘사해내고 있다. 3부로 이루러진
[칠조어론]은 [죽음의 한 연구]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를
그 동안 일관되게 천착해온 삶과 죽음의식에 대한 심오한 형이상학적 사
유를 바탕으로 장장 3부 4권에 걸쳐 펼쳐 보이고 있다. 6조가 스승살해라
는 구도적 살인 이후에 유리의 촌장이 되었듯이 7조도 6조의 전기인 [죽
음의 한 연구]의 속편으로서 연장선상에 있지만 역시나 선대에 대한 개종
과 변절을 보여주고 있다. 박상륭은 살육과 성욕, 삶과 죽음이라는 상극
적 질서의 세계가 진화를 가능케 하며 마음, 말씀, 몸의 세 차원으로 이
루어진 우주에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은 마음의 우주라고 보고 있다.
[칠조어론]과 [죽음의 한 연구]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우주는 마음의 우주, 말씀의 우주, 몸의 우주로 이루어 졌다고 봅니
다.신이 인간과 짐승의 아름다운 부분만 닮은 희랍신화의 우주는 몸
의 우주랄 수 있고 예수가 등장하면서 말씀의 우주가 도래했습니다.그러
나 인간이 최고로 도달해야 할 곳은 마음의 우주가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소설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중략)... 저는 글쓰기를 통해 종교나 샤
머니즘과는 다른 어떤 <원형>을 찾아가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겠지요.
- [조선일보], 1999.5.11
박상륭에 대해서 일반독자들이 낯설어하는 것은 그의 소설이 고급 독자
들을 겨냥한 것이어서 무척 난해하기도 해서지만 극소수의 평론가들을 제
외하고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박상륭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데도
기인한다. 그의 작품의 완성도나 규모 그리고 사유의 깊이와 그것의 소설적 구현을 염두에 둘 때 그 동안 박상륭은 거의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채 그야말로 극히 소수집단의 문학으로서 존립해왔다. 의도적이든 의도적
이지 않든 박상륭과 박상륭의 작품은 문단과 문학사에서 배척되어 고립되
소외되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석처럼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사회의 모순들에 대해서 육성으로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현실 반영
적인 작품들, 당대성을 띠고 있는 작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오면서
세상과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은 역사적인 퇴행 내지는 탈역사적인
공간에 위치지으려 했다. 박상륭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고 김현이 <그것이
야말로, 내 좁은 안목으로는 70년대 초반에 씌어진 가장 뛰어난 소설이었
을 뿐 아니라, [무정] 이후에 씌어진 가장 좋은 소설 중에 하나였던것>이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작품인 [죽음의 한 연구]에 대한 평가도 당대의
몇몇 평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러한 박상륭의 작품이 정당하게 편가받지 못한 것은 우리 문학계의 고
질적인 경직성과 불행한 민족현실과 관련된 지사적 문인들이 갖는 근거없
는 적대의식과 파벌의식 그리고 대중추수주의와도 관련있다. 70,80년대의
이른바 민중적 리얼리즘 일색이었던 우리 문학의 현실에서 또 다른 의미
에서의 필자가 <우주적 리얼리즘>이라고 감히 붙여보고 싶은 박상륭의 소설이 갖는 의미는 그러므로 더욱 확장 증폭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
은 굉장히 외로운 작업이었을 것이며 고독 그 자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순수문학에서는 이미 불모지로 변한 상업주의 문학만이 판치는 이국땅에
서 일상어는 영어로 하고 글은 한국어로 써야 하는 이중언어생활에서 오
는 극심한 실어증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한 획 한 획 써 내려간 글쓰기
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거의 목숨 내놓고 썼을 전장과 같았을 거임에 틀
림없다.
박상륭의 소설쓰기의 과정은 작가 자신의 구도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주인공의 구도의 과정, 탐색의 과정이기도 하면서 작가 자신의 모습
이 전적으로 투영된 것이다. 자신이 고군분투하며 하나의 우주를 작품 속
에 품어내고 출산하면서 단순한 문장가로서의 작가, 현실의 모사 내지 반
영이라는 소박한 의미의 리얼리즘이 아닌 이 모든 것을 이미 넘어서 있는
근원에의 통찰을 감행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글쓰기가 아니
었다면 작가 자신이 갖고 있던 의문과 혼돈과 교조적인 온갖 이념에의 저
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편적인 사상의 편린들이 점
점 살을 입어 생명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곧 소설쓰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부에 가득한 주체할 수 없는 열망, 일종의 문학적 메시아의 도
래를 갈망하며 스스로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고 본다.
또한 그것이 종교적 메시아의 출현이 변형된 것으로서 문학이 종교를 대
신하리라는,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출발했음이 분명하다. 그 결
과 그의 소설의 주제가 종교에의 탐구가 되었고 전 시간을 통해 불변하는
원리를 추출해내고자 했다.
그가 주장하는 <음기의 유전>이란 개념을 차용해보건데 이젠, 그 동안의
음지에서 벗어나 정당하고 온당한 평가가 그의 작품에 내려져야 할 때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