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찔레
-오창익-
“저게 찔레 아니야?”
“미쳤어, 저런 걸 다 심고!”
꽃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걸 심었다는 비아냥이다. 삼십대 전후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조깅을 하며 바람처럼 던진 말이다. 그로 인해 모처럼의 신선한 아침, 산책길이 무거워졌다. 며칠 전의 일이다.
나는 아침마다 경의선 철길 옆으로 난 산책로를 걷는다. 일산 신도시가 들어설 때 외곽 순환로를 따라 국제 규모로 조성된 숲길이다. 주목과 오엽송, 은행과 꽃단풍, 은사시와 플라타너스가 줄을 서고, 융단을 펼친 듯 파란 잔디도 깔려 있어 한 시간 남짓 걷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런데 그 날은 ‘꽃도 아니고…’란 한 마디가 자꾸만 발길에 걸렸다. 하기야 그 젊은 남녀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큰 맘 먹고, 큰 돈 들여 조성한 산책공원에다 볼품없는 가시나무꽃, 그것도 잡초나 잡목이듯 산야에 버려져 자생하는 찔레를 심었다는 것 자체가 잘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심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설사 심었다 해도 장미로 착각한 오식은 아니라는 믿음에서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이 곳은 분명 논이었고 밭이었을 터. 더구나 산책로가 닦인 여기는 철길이 휘돌아간 지형으로 보아 찔레가 대를 이어 살아오던 야트막한 산자락이었을 것이다.
하면, 이 찔레야말로 포크레인이 산자락을 갈아엎을 때 운좋게도 지표 가까이에 묻혔던 유일한 생존자, 먼 먼 자기 조선祖先으로부터의 유일한 대이음이, 아니 배꼽 떨어진 제 탯자리에 뿌리내린 유일한 고향 지킴이가 아닌가.
그도 아니라면, 이 찔레야말로 주어진 제 명命을 펴지도 못하고 요절한 장미 대신 그 잔명殘命을 이어주는 봉사와 헌신의 넋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본시 꽃 중의 꽃이란 장미는 생장력이 아주 강한 찔레에 접목하여 영화를 누리는 꽃이 아니던가. 전문 조경사가 어찌 찔레와 장미를 구분하지 못했겠는가. 필시 접목 부위가 부실했거나 아예 윗부분이 떨어져나가 어쩔 수 없이 장미를 대신 살아주는 찔레일 것이다.
하면, 꽃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얼마나 가상하고도 갸륵한, 아니 슬프기까지 한 ‘가시나무꽃’인가. 그래서 어느 가인歌人도 이렇게 노래했던가. ‘찔레는 슬퍼요… 그 향기도 슬퍼요… 그래서 목놓아 울었어요’라고.
십 여 년 전이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 주변엔 찔레가 유별났다. 오월만 되면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장미 있던 자리에 하얀 찔레가 피어나 눈이 부셨다. 그도 역시 노쇠한 장미가 제 구실을 하지 못 하자 접목 하단부에서 찔레가 돋아나 영화를 대신하던, 잔명을 이어주던 갸륵한 날갯짓이었다. 하지만 그 깊은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는 비정한 관리인은 ‘꽃도 아닌 것’이란 생각으로 피기가 무섭게 베어 버리곤 했다. 하여 계절의 여왕이란 오월이지만 번번이 그 한 자락을 애끈하게 접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여 걷다 보니 되돌아가야 할 육교 밑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그때다. 멀리까지 뛰어갔던 좀 전의 젊은 남녀가 내 옆을 비켜가며 가벼운 눈인사를 한다. 말투와는 달리 꽤나 선한 얼굴이었다. 그랬다. ‘꽃도 아닌 것’이란 비아냥은 그만 접기로 했다. 장미 대신 살아주는 갸륵함이나 외롭지만 제 땅에 뿌리내려 고향을 지키는 그 깊은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젊은 그들이니까.
하지만 예의 그 찔레에게만은 뭔가 한 마디를, 사과이든 위로이든 해야 할 것 같아 돌아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찔레꽃 무덤 앞에 다가섰다. 자잘한 꽃잎들은 어젯밤에 살폿 내린 가랑비로 신선했다. 해맑았다. ‘미안하다’ 인사라도 하듯 나는 꽃무덤에 조심조심 코를 묻었다. 그때, 코끝을 간지르며 울컥 쏟아내는 살 냄새, 고향 냄새……. 뿐인가, 그 냄새에 묻어나는 찔레의 속삭임이 환청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오 선생, 난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대로 고향에서 피붙이와 살 비비며 살고 있으니까요.”
살 비비며? 얼굴을 들어 다시 보니 정말로 만만찮은 가솔이었다. 공원을 조성한 지가 십수 년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장정 예닐곱이 팔을 벌려야 둘러설 만치 꽤나 번성한 일가一家였다. 찔레 일가. 공원 한 모서리에 보일 듯 말 듯, 숨은 듯 나선 듯 살고는 있지만, 아직은 꺾이지도 베어지지도 않고, 어찌 보면 의연하게 일가를 이루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 아닌가.
나 또한 예외가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향 가기는 아직이지만, 낯선 땅에 발 붙이기 반백 년에 아들에다 딸에다 손자 손녀까지 열을 넘게 두었으니 그런대로 일가를 이룬 셈 아닌가. 장미처럼 미색이 출중하여 화려한 조명은 받지 못했어도 시샘이나 꺾임도 없이, 이렇다 할 영욕榮辱의 부침浮沈도 없이, 나선 듯 숨은 듯 찔레처럼 살고 있으니 이 또한 행이 아닌가. 그러니 너도 찔레 나도 찔레, 찔레 일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아침 산책길에 나서면 으레 그 찔레 일가를 찾는다. 찾아 아침 인사를 한다. 상련相憐이 아니라 상생相生의 관계임을 감사하는 눈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 오늘도 무사히!”라고.
첫댓글 봄비님 잘 지내시죠? 참으로 오랫만에 카페에 들어왔습니다. 요즘 왜그렇게 바쁜지..... 오 교수님의 <나도 찔레>는 저의 <산책로의 봄>과 같은 장소입니다. 지금은 개발로 많이 변했지만요. 그 산책로 건너편 산이 깎끼고 그자리에 지금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섯답니다.
그렇군요. 교수님께서 이 수필 초고 쓰셔서 여의도 목요반에 가지고 오셨었지요. 그날은 서로 의견들도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께서 홀로 월남하셔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크셨으면, 젊은이들의 말한마디에... 그래서 그러신지 '소나무와 담쟁이'에도 소나무가 받는 땅의 혜택을 넣으라 하시는데, 제가 말을 안듣고 있지만 더 생각해 보려합니다.
하얀 찔레꽃에는 배고픔이 있고요 하얀 달빛아래 흰 광목옷을 입고 계신 어머니가 거기 있었요. 애잔한 한국의 정서가 숨어 있는 고향의 꽃입니다. 고향친구 냄새도 나고요...^^
우공님이 답글을 주셨네요. 찔레꽃을 생각하면 왜 서러운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대전에서 나서 자라서 고향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는데도...
한국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집단무의식'과 동의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도시에 살았든 시골에 살았든 아님 세월이 많이 흘러 앞으로 살아 갈 미래의 한국인들에게도 약간의 변형이 있다 하더라도 그 원형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