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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복음비판 스크랩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요약2)
한산 추천 0 조회 89 11.08.02 17: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비주의기독교2.hwp

 

레이 윤겐,『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요약2)

 

3 장 옹호자와 전파자

 

웨인 티즈데일의 말처럼 관상 수련에는 분명히 신의 임재가 느껴진다. “침묵 가운데 한 역동적인 임재가 거하고 있다. 이것이 신이다. 우리는 그에게 맞춰진다.” 그러나 이 임재가 진정 하나님이신가? 성경은 경고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이 문제는 진정으로 중요하다! 나는 기독교를 좀 더 깊이 탐구해 보려는 바람으로 시작했다가 아래 저자들이 권장하는 책들과 수련법을 따르다가 골수 뉴에이지 추종자가 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글에는 일면 좋은 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은 누룩이 전체 덩어리를 쉬게 만든다(갈5:9). 뉴에이지 저자인 마릴린 퍼거슨이 뉴에이지 추종자들에게 물으면 31퍼센트는 그것이 “기독교 신비주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콧 펙(1936~2005)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지난 수십 년 넘게 책 한권이 늘 올라와 있었다. 고 스콧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그것이다. ‘라이프’지는 이 책을 “나라의 제도”라고 칭했고, 책의 판매를 성경의 그것과 비교했다. 이 책이 수백만 권이 팔리고 숱한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도 이 책이 “영적 성장을 추구함과 정신적인 성장을 달성함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면에서 뛰어나다”는 찬사를 반복했다.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부문에서 스콧 펙의 책들은 서가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 펙이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그의 과장 없는 접근이다. “영적 성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조금 더 대담한 진술을 한다. “그것은 개인이 전적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펙은 “붓다, 그리스도, 노자 등 다른 많은 성현들이” 과거에도 “이 개념”을 전파해 왔다고 믿는다.

 

1980년 세례 받고 생을 마칠 때까지 펙이 받아들인 일종의 “기독교”는 어떤 것인지 보라.

 

1. 뉴에이지 잡지와 인터뷰에서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신이 내려주신 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지만 근본주의에 질려 버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펙이 “동방 신비 종교에서 기독교 신비주의(관상기도)를 향해 움직인 궤적 또한 보여준다.”

 

2. 신비 기도는 펙의 영성적 기초가 되기도 한다. 펙은 ‘열리길 기다리는 세계’라는 책에서 신비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마음 비움의 과정은 너무 중요해서 계속해서 의미 깊은 주제가 된다--- 따라서 마음 비움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 예기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들어올 것을 위해 마음에 공백을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의 음성이다”. 펙은 예수가 “하나님과 자신을 통합한 서구 신비가의 한 전형”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의 낮은 자아에 기대길 중단”하고 “우리의 더 크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상기도는 “최고의 각성에 바쳐진 생활이다.”. 미국의 전 부통령 엘 고어는 이 책이 “대단히 중요한” 책이고 “놀라운 가치를 지닌 안내서”라고 한다.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야 할 강력하고 새로운 이유”를 주었다고 찬탄한다.

 

3. ‘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책은 뉴에이지 지도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매튜 폭스가 “신비주의”는 모든 세계 종교를 연합할 수 있는 실천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폭스는 이것을 “깊은 의미의 에큐메니컬”이라고 칭했다. 폭스는 설명한다. “우주적인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성을 깊이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준” 분이다. 펙은 폭스의 진술을 철두철미하게 지원하고 나선다. 폭스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는 구원이 요구하는 가치와 실천”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폭스는 “역사적인 예수를 떠나” “우주적인 그리스도”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덧붙여’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 나는 20년간 선불교 수련자였다. 이것은 기독교로 향하는 준비였다.

2 “미국의 모든 초등학교는 5학년부터 선불교를 가르쳐야 한다”.

3 “기독교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잘못은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생각이다.”.

4 “뉴에이지 운동은 괴팍스러워보이지만 그 바탕은 매우 경건하고, 덕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5 “뉴에이지가 단지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면, 뉴에이지는 진정 거룩하고 절박하게 요청된다.”

6 그는 독자에게 질문한다.“스콧 펙은 뉴에이지 추종자인가?” 스스로 대답한다. “그렇다.”

“물병자리 시대의 모사로 인식되는 것이 자랑스럽다.”

7 그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 격려 재단이 “본격적인 뉴에이지 조직”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안토니오는 펙을 “뉴에이지의 빌리 그레이엄”으로 보았고 “뉴에이지의 굵직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토머스 머튼(1915~1968)

 

루터 킹과 인권 운동, 헨리 포드와 자동차가 연결된다면, 토머스 머튼은 관상 기도와 연결된다. 머튼은 이 기도를 수도원에서 꺼내어 대중에게 소개하고 대중 사이에서 유행시켰다.

 

인류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야 한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환영이 만질 수 없는 무가 놓여 있다. 이 지점에 순수한 진리가 있다.--이 작은 점--이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순전한 영광이다. 이 점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머튼의 진술이 신비교에서 규정하는 더 고양된 자아와 얼마나 유사한지 보라. 무슬림의 한 분파 수피는 이슬람의 신비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만트라로서 알라의 이름을 묵송하면서 황홀경에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서 신을 경험한다. 판매 카세트에 나오는 말이다.

 

머튼은 이슬람의 영적 교사이며 신비가인 수피들을 애호했고 그들과 깊은 영적 공감을 나눴다 여기 머튼은 수피들의 심오한 영성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한 수피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머튼은 말한다. “나의 기도는 여러분의 파나를 많이 지향하고 있다.” 파나는 “신적 일체에 합일하는 행위”라고 한다. 파나의 이 수피적인 개념을 무슬림과 기독교를 연합하는 하나의 촉매제로 보았다.

 

말에는 해결할 길이 없는 무한한 복잡성과 교활함이 도사리고 있기 쉽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적인 빛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유익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영역은 바로 여기다.

 

아시아, 선, 이슬람 등은 내 삶에서 함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배제하고 수도원에서 지내라면 내게는 너무 엄혹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수도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머튼의 신비 경험은 그 자신을 궁극적으로 다른 동양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영을 믿는 자 그리고 비슷한 신비가로 만들었다. 머튼의 통찰과 동양 종교의 통찰이 너무나도 똑같기 때문이다. 머튼의 전기 작가는 말한다.

 

머튼이 동양으로 간 이유를 알고 싶으면, 머튼의 신앙 전통(가톡릭)의 뿌리가 관상 기도임을 알아야 한다. 가톨릭은 그에게 동양에 합당한 지혜의 길을 깨닫는 데 필요한 영적인 준비(관상기도)를 해주었다.

 

이것은 사막 교부들이 심은 나무의 열매이다. 동양 종교에서 방법론을 빌려 올 때는 그들의 신 이해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머튼이 가톨릭교회와 주류 개신 교단에 남긴 영향은 상당히 강하다. 그리고 이제는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자라나기 시작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머튼의 겸손, 사회적인 의식 그리고 경건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아울러 그의 지적 역동성 역시 끄는 힘이 강력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머튼의 이단적 성향은 그의 특징을 중화하고 말았다.

“머튼이 남긴 작품 전체는 아시아적인 지혜의 중심 사상, 경험 그리고 비전에 녹아 있다.”

 

헨리 나우웬(1932~1996)

 

토머스 머튼에 버금갈 정도로 기독교 진영에서 인기와 존경을 얻은 인물이 있다면 가톨릭 신학자인 고 헨리 나우웬이다. 많은 목회자와 교수가 나우웬의 깊은 사색에 크게 매료됐다. 시적이고, 위안이 듬뿍 담긴, 그러면서도 지성적인 문체로 기독교 지식인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전기 작가 한 사람은 미국 장로교회 지도자 3,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1994년의 여론조사를 인용해, 영향력 면에서 빌리 그레이엄에 이어 나우웬이 2위를 차지했음을 말하고 있다.

 

나우웬은 그를 영감을 주는 인물로 꼽는 많은 평신도들에게도 인기가 있다. 따뜻한 위로로 감싸 안아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모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자주 인용하는 나우웬이 노년에 하나님을 보편 구원론자의 입장에서 주저함 없이 진술했다는 사실은 유감천만이다.

 

나는 이제 예수가 하나님의 집 문을 열기 위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인간 존재는 자신이 예수를 알든 모르든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제 내 사명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길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우웬은 만트라 묵상을 지도하는 힌두교 영적 선생인 에크나스 에아스와란의 책을 추천하면서 “이 책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썼다. 나우웬은 기독교를 힌두교 영성과 관련짓는 한 책에 서문을 달면서 이렇게 썼다.

 

저자는 불교,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선물에 활짝 열려 있다. 그는 기독교적인 영적 생활에도 유익한 종교들의 위대한 지혜를 깨내고 있다--- 저자는 자신 스스로 영적인 전통을 배우기 위해 인도를 여행했다. 그는 많은 보화를 가져왔고 그것들을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마음의 길’이라는 저서에서 나우웬은 권한다.

단어 하나를 조용히 반복하라. 생각이 마음의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다--이 단순한 기도의 방법이 -- 우리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로 열어 간다.

 

이 하나님의 “역동적 임재”는 정통적인 복음주의 기독교가 아니라 고전적인 힌두교에 좀 더 가깝게 서도록 가르쳤다.

기도는 “영혼의 노동”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이 하나인 곳의 중심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의 통합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안이다.

 

나우웬은 “만유가 하나다”라고 했다. 이것은 내재신론의 기본적인 신 인식이다. 온 세상 안에 있는 신이 만물을 통합한다는 인식이다. 나우웬은 머튼과 마찬가지로 신비 기도가 모든 기독교 전통 안에 자리 잡는 패러다임이 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나우웬은 복음주의 교회가 칭찬할 만한 많은 점이 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 약점을 위한 방법이 바로 신비주의다. 나우웬은 다음과 같이 힘주어 주장함으로써 이 약점을 치료하려고 애썼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침묵(관상 기도)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나우웬은 자신의 자서전적인 ‘안식의 여정’에서 1996년 저술가며 강연가인 앤드루 하비와 만난 일을 기쁨에 겨워 말하고 있다. “나는 영혼의 친구(멘토)를 만났다는 느낌을 가슴 깊이 느꼈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 나우웬의 신앙 체계를 깊이 엿볼 수 있는 것은 하비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 기반의 혼합 영성 옹호자라는 사실에 있다. 하비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신성의 자녀들이기에 여기 이 땅 위에서 그리고 하나의 몸 안에서 우리의 원천과 더불어 정체를 구현할 수 있다.

 

나우웬의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이클, 토머스 그리고 나는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나눴다. 우리는 엔드루의 신비주의가 어떤 감동을 우리에게 줬는지 제법 길게 토론했다.

 

토머스 키팅과 바실 페닝턴

 

이 두 사람은 ‘중심에서 은혜 찾기’를 같이 쓴 가톨릭 수사들이다. 이 책의 한 내용이다.

우리는 동양의 오래된 지혜의 열매를 취하고 그 열매를 그리스도에게 “갖다 바치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실로 우리 가운데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동양의 수련 방법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자기 것으로 습득하는 노력을 반드시 기울여야 한다.

기도생활을 충실히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요가, 선, 초월명상 그리고 이와 비슷한 방법에 크게 도움을 얻고 있는 바,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교사들이 이끎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견고하게 자라나 결국 경험에 이르는 내면의 형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자들에게서 그렇다.

 

이 두 사람은 기독교를 자신들이 ‘침잠 기도’라 하는 관상 방법을 통해 동양의 신비주의와 섞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감하기 위해 만트라를 사용합니다.” 참잠 기도를 하는 공동체가 오늘날 번창하고 있다는 말은 딱 맞는 말이다. 아주 활동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를 받아 들인다. 그들이 교회 안으로 새로운 활기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

 

키팅은 “신의 첫 언어는 침묵이다”라고 전파한다. 그는 1991년 한 해에만 모두 31,000명의 사람들에게 “신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쳤다. 한 번의 세미나에 보통은 수백 명씩이 참석해 “침잠”을 배운다. ‘뉴스위크’지가 2005년에 ‘영적인 것을 찾아서’라는 기사를 실었다.

수련자들은 하루에 두 번 20분씩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눈을 감고 마음을 신에게로 향한다. 키팅은 십여 권의 책, 많은 강연 그리고 수련회에서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키팅은 “신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자 찾는 허기진 사람들”이라는 말을 전 세계에 퍼드리고 있다.

 

틸덴 에드워즈와 제럴드 메이(1940~2005)

 

관상 기도 운동을 성장시킨 학교가 있다면, 워싱턴 DC에 자리 잡은 샬렘(영적 훈련) 연구소일 것이다. 1972년 설립 이후 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훈련했다. 에드워즈는 성공회 사제이다. 이 단체의 사명은 기독교 전체에 신비 기도의 수련을 퍼뜨리는 것이다.

일부 불교 전통은 매우 실용적인 행위 방법을 발전시켜 왔기에 많은 기독교인이 도움을 얻고 있다-- 참가자들에게 삶을 향한 새로운 시야와 가능성을 제공하고 살아가는 나날을 통해 빛나는 은혜의 임재 안에 좀 더 충만하게 거하게 한다.

 

기독교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있다면 정신과 의사이며 저자인 제럼드 메이다. 샬렘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며 연구원이었다. 그의 저서 ‘진짜 제 정신’의 서문에서 과감하게 기술한다. “이 책이 취하고 있는 탐구의 계보는 세계의 고등종교 경건이다.”그는 이어 두 명의 티베트 불교 라마(거룩한 자)와 한 명의 일본 선승을 향해 자신에게 “각별한 영향을 미쳤음을 감사하고 있다.

 

동양적인 영성의 영향에서 ‘중독과 은혜’라는 메이의 책은 기독교적 치유 분야에서는 고전으로 손꼽힌다. “우리의 중심--사람의 중심--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와 우리 각 사람의 본질적인 통합을 깨닫는 곳에 있다.” 물론 이 핵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침묵이다.

제시된 이미지 혹은 성구 묵상과 관련된 묵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좀 더 관성적인 수련이다. 고요히 앉아서 하나님과 더불어 깨어있는 것이다.

(요약자 주- 토저의 침묵 기도와 비슷하다.)

 

그에게 우주적 임재는 “우리 자신과 모든 창조 세계를 관통한다.”

힌두교의 인사인 자이 박완과 나마스테에는 우리 모두 안에 거하면서 동시에 모두를 감싸는 신성에 대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다.

 

메이는 스콧 펙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를 풍미한 선불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30년 후에도 여전히 선불교를 향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메이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선’이라는 책의 추천사를 썼다.

 

모턴 켈시

 

영국 성공회 사제이고 그의 ‘침묵의 다른 면: 기독교 명상 가이드’는 정말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내면의 길 동반자: 영적 안내의 기술’은 “영적 지도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책”라고 한다. 그는 관상 기도를 이렇게 말한다.

독자는 기독교의 심층에서 뉴에이지 수련법의 대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나는 거룩한 자가 모든 심령 안에 산다고 믿는다.

 

켈시의 말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뉴에이지가 한층 더 부각한 현대인들의 종교적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지금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 필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각 교회는 기도에 대한 강좌를 열어야 한다. 신학교가 목회자들을 기도, 사색 그리고 묵상, 아울러 소그룹 진행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교회는 선포하고 가르치고 치유할 때 뉴에이지를 꺼려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매튜 폭스

 

그의 저작 ‘원래의 축복’ 그리고 ‘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주적인 영성을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내재신론을 강렬한 제목으로 이만큼 간명하게 소개한 책이 없을 정도이다. 폭스는 가톨릭과 쥬류 개신 교단 모두로부터 상당한 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폭스는 머튼과 나우웬이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 안에 있는 신을 똑같이 선언하고 동양 종교에 공감한다.

신성은 모든 피조물에서 발견된다--우주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나”다.

 

신비주의가 없으면 “깊은 에큐메니즘”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에서 지혜의 힘이 터져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신비주의가 없으면 전 지구적인 평화 혹은 정의를 꿈꾸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류는 더 나은 자아를 깨우치기 위해 영적인 깊이와 훈련, 제의와 의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 “깊은 에큐메니즘”은 혼합 영성이라는 말의 동의어다. 표면을 넘어 모든 종교의 신비적인 핵심에 도달하는 일종의 연합을 의도한다. 그는 ‘창조영성 대학’을 세웠고 지금은 ‘지혜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잘못 앉은 좌석

 

머튼을 이해하면 이 운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머튼과 그의 옹호자들이 분명 신 앞에서 조심하고, 도덕적인 청렴성을 강하게 나타냈다 하더라도, 이들은 사막 교부들을 통해 동양의 종교에서 얻은 신비주의에 성경적인 원리들을 혼합시키려고 시도했다.

 

나도 한때는 모든 종교가 하나라는 교리를 가르치는 어떤 혼합 영성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가? 내가 믿는 종교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것을 명백하게 오류라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보호하려는 그 누구도 혼합 영성주의자는 없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바울은 이 다른 신들이 하나님이 아님을 알았기에 행14:11~16을 말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고, 오직 그분만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다른 종교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힌두교와 불교의 카르마, 그리고 이슬람의 복종은, 아무리 좋게 봐도, 무익하고 허망한 인간의 노력일 뿐이다. 우리는 관상을 권유하는 책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축소하거나 실제로 정죄하는 수많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지난 수 세기 동안 기독교는 거의 법률적인 용어로 제시되어 왔다. 마치 신과의 상거래, 담합인 듯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와 신 사이의 틈을 매워야 한다. 이것이 다 비즈니스다. 우리는 이런 기독교를 치워 버릴 수 있다. 법률적인 은유는 다른 세대인들에게는 도움이 됐었을 수도 있다. 좋다. 도움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한 번 이런 식으로 굳게 자리 잡게 되자, 오늘날까지 이렇게 됐다. 우리는 이런 기독교를 버려야 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우리 앞에 있는 복음서의 전체 문맥에서 한두 구절을 뽑아내, 그것들을 합당한 해석과 의미 너머로까지 늘였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구절은 기독교인 외에는 누구도 신에게 이를 수 없다고 잘라 말할 때, 혹은 “구원받아야”하는 필요를 역설할 때 쓰인다. 우리가 알기로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성모께서 앞으로 몇십 년 안에 그분의 추수를 단행하실 때, 근본주의라는 쭉정이는 새로운 자의식이라는 알곡과 분리가 될 것이고, 한 구석으로 치워 놓아 버릴 것이다.

 

혼합 영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한 종교에 국한하는 개념에 대단히 혐오감을 나타낸다. 한 성공회 주교는 다음과 같은 경멸을 나타냈다.

배타주의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이 사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희망이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신에게서 우리가 구출받아야 하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배타주의의 신은 편협하고, 가혹하며, 맹목적이다. 이 신은 기독교 밖의 사람들의 고매함과 개인적인 거룩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 신은 영적 거장들인 모세, 싯다르타(부처), 무함마드 그리고 간디의 삶에 부모와 같은 살가운 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신에게는 영예, 영광, 예배 혹은 찬미를 돌릴 가치가 없다. 이 신은 종교 계파로 깊게 골이 생긴 이 세상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한다. 세상은 평화와 화해를 애절히 찾고 있다.(마카엘 잉함)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말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이방종교의 신비주의)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1). 관상 운동은 더 이상 로마 가톨릭교회와 주류 교단에만 갇혀 있지 않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좀 더 깊은 방법을 찾으려는 진지한 열망을 지닌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내가 분류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영성을 깊이 공부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는 오순절주의부터 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 기독교 전체를 기분 나쁘게 뒤덮고 있다. 오직 분별하여 성경적으로 바로 서 있는 기독교인들만이 관상 기도 운동의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분별력의 부족 혹은 성경의 왜곡은 관상하는 기독교인을 만들 수 있다. 아니 이런 복음주의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를 새로운 신비주의 패러다임으로 교묘하게 옮겨 놓는 일에 관련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면 아마 놀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4 장 복음주의의 변종

 

리처드 포스터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관상 기도의 학교에 초급생으로 들어가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깊이

 

포스터는 레노바레라 불리는 조직의 대표이다. 레노바레는 ‘갱신’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그 목표는 복음주의적인 교회에 영적 성장을 위한 ‘실용적인 전략’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믿음에 대한 진술은 본질상 매우 복음적이다. 그의 책들이 왜 수많은 고학력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는지 납득이 간다. 반면, 포스터는 신비주의적인 내재신론 신관으로 흐르는 수련을 부인할 수 없게 보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포스터는 관상 기도의 미덕과 유익에 대해 머튼을 당당하게 인용한다. 포스터는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책 혹은 설교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해력과 빛을 주신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포스터가 관상적인 영성의 본보기라고 말하는 신비가들의 진술을 들어보자.

* 인류라는 가족의 심령은 성령이다- 바실 패닝턴

* 신이 온 세상 안에 게심을 안다.- 노리치의 줄리안

* 내가 사랑하는 신은 높은 산, 완만한 계곡의 숲,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강물이다.- 십자가의 요한

* 여기(관상 기도의 순간) 모든 것이 신이다. 신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 기용 부인

 

요점은 이것이다. 이 신비가들의 침묵이나 포스터의 침묵은 같은 것이다. 이 신비가들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따르라고 한다. 신비가들은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이룬 자들이다.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원하면, 신비가들이 지킨 침묵으로 당신도 들어가야 한다.

포스터가 침묵이라 하는 것은 외형적인 침묵이 아니다. 그는 저서 ‘기도: 마음의 진정한 집을 찾아서’에서 호흡기도를 권장한다. 단어 하나 혹은 짧은 문구를 택해서 호흡과 함께 반복하는 것이 호흡 기도다. 이것은 전형적인 관상적 신비주의다. “기독교 명상은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시도다.” 관상 기도와 내재신론은 장갑을 낀 손 마냥 함께 간다.

 

기도의 목적은 마음을 단어 하나 혹은 한 구절에 묶음으로써 신비한 황홀경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여러 교회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인정된 자”(딤후2:15)가 되라고 권고했고, “항상--기도함”(살후1;11)은 마음과 지성 두 가지 모두를 써서 하나님께 아뢰는 일이라고 했다. 포스터는 한 주제가 아니라 한 생각에 초점을 맞춘다. 기도는 한 영적 주제에 대한 연속된 생각이다. 오로지 한 생각에 마음을 고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진정한 묵상 그리고 기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간단한 논리로 보아도 단어들의 반복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면, 묵상 중에 나타나는 이 빛은 무엇이며, 왜 빛 안에 신성의 흔적을 넣으려고 하는가?

 

세미나

 

“머튼은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려고 했습니다!” 포스터는 머튼의 신념에 깊이 공감한다. 머튼의 말이다. “나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나는 불교도만큼 선해지고자 한다.” 머튼은 관상 기도에서 불교의 각성을 발견했다. 리처드 포스터는 머튼의 신비 기도에 대해 신선한 언어를 동원해 이렇게 쓰고 있다. “토머스 머튼은 20세기 그 어떤 인물보다도 기도의 생활을 널리 알리고 이해시킨 인물이다.” 포스터는 머튼의 책 ‘관상 기도’를 ‘필독서’로 꼽는다. “머튼은 지금도 수많은 남녀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머튼의 책들이 “영적 생할에 더 깊이 들어가길 갈구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담고 있다고 극찬한다. “동양으로 향한 그의 여정에서 불교의 잔에서 흠뻑 마신”이란 표현은 바로 머튼을 두고 한 말이다.

 

왜 자타 공인의 뉴에이지 지지자들이 포스터의 책을 팔고 권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포스터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자신이 하는 침묵 기도를 알아본다. 뉴에이지 지지자들은 침묵이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고 있다. 다음에 나오는 포스터의 권유가 무슨 뜻인지 그들은 안다.

몸, 마음 그리고 영의 모든 번잡함은 마음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길은 임하심이 일어나기에 앞서 중지된 동작이 되어야 한다.

 

포스터가 진지하고 선의를 지닌 것은 인정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전통에 이끌렸다. 관상 기도 수련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에 호소할 때 포스터가 뽑을 수 있는 구절은 시편 62:1 뿐이다. 이 구절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한 신성한 단어 혹은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생각을 뛰어 넘게 된다는 암시는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어떤 포스터 옹호자는 포스터가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다메섹 길 위에서 경험한 바로 그것, 즉 하나님의 임재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기도문 혹은 호흡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행동이셨다. 바울이 이 경험을 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본문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바울은 여러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결코 어떤 수련 방법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바울은 다양한 영적 선물에 대해 말했지만, 이 선물은 가르칠 수 있는 일련의 기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에게 주신 것이다.

 

포스터는 성경으로 자신의 신비주의를 변호할 수 없다. 포스터가 다음과 같은 말로 청중을 가르치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영적인 삶의 훈련을 우리에게 주셨다.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변혁시킨다.

 

이 입장에 대해서는 솔로몬의 경고를 들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포스터는 기독교 진영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기도: 마음의 진정한 집을 찾아서’는 1993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실시한 투표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서적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책은 놀랍게도 유명한 뉴에이지 신봉자 앨런 거일리가 자신의 책 ‘기도의 기적’에서 추천하는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독자들이 “성경 외에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친” 세 권의 책 중 하나로 뽑은 것의 하나가 저 유명한 ‘훈령의 즐거움’이라고 보도했다. 그 최신판 뒤표지에는 이 책이 지난 20년 동안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동양과 기독교의 신비주의(관상 기도)는 모두 먼저 마음을 비운 후 채우려고 한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 마음은 그저 비우기 위해 비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성, 범(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 알라, 아인 조프(유대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무한) 등과 같은 열망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존슨은 이러한 관상 기도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관상기도란, 소박하게 말해서, 생각과 감정을 정지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기도를 말한다. 이러한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을 바르게 하고, 인도하고, 또한 이끄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다.

 

브레넌 매닝

 

매닝은 관상 기도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관상 기도 방법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놓치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그는 패닝턴의 방법(‘기도의 중심’)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깊고 살아 있는 관계로 가는 기도의 길”을 제공한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관상 기도가 하나님과 더 깊은 삶으로 안내하는가? 필립 얀시는 이런 말로 매닝을 보증하고 있다. “나는 브레넌 메닝을 은혜의 학교에서 나의 영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는 분이라 여긴다.”

 

누구의 손을 잡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손을 잡음”이라는 그의 책의 장에서 말한다.

관상 기도에 대한 한 콘퍼런스가 진행되는 동안, 토머스 머튼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어떻게 하면 최고로 도울 수 있는가?” 머튼은 명쾌하게 답했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하나님과 연합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관상 기도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의 떠오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머튼은 여기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자신의 순진한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매닝이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손”을 잡으라고 할 때, 기독교인들이 잡고 있는 손은 머튼이 말하는 신의 손이다! 매닝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그리피스는 머튼처럼, “자신의 기도를 더 깊이 있게 해 줄 수 있는 동양 종교에서 길을 찾는다.”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 동양 종교의 점증하는 중요성”을 보고 있다.

 

미국의 바뀐 영성 추세

 

리처드 포스터와 브레넌 매닝 이 두 사람은 자신의 베스트셀러와 세미나로 복음주의자에게 영향을 계속 끼쳐 왔다. 그들의 저서들 중 최소한 한 권이라도 미국의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을만큼 개연성이 높다. 이 두 저자의 치솟은 인기는,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두 가지 주요한 사회적 조류 탓으로 보인다.

미국인의 영성을 사로잡은 첫 번째 추세는, 전에는 진기하고 이상하게 조차 여겨졌던 것을 찾아보려는 의욕이다. 특별히 기독교적 묵상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 그렇다. 많은 사람이 첨단의 영성을 맛보려는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건조한 지성주의와 창백한 제도 지상주의의 단조로움을 뛰어넘는 영적 경험을 찾고 있다. 이 구도자들은 영적인 전환과 혁신을 약속하는 선전에 쉽게 넘어간다.

 

두 번째 추세는, 우리의 현대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 응급처치 의식이다. 과거 세대의 사람들은 삶의 좌절을 참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결과를 보증해 주는 확실한 점근 방안을 찾는 경향이 짙다. 우리 시대 자체는 실용주의에 강하게 의존한다. 더 이상 진리는 하나님이 진리라 말씀하신 것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듯해 보이는 것(실용적인것)에 따라 결정된다.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결정하도록 하는 질문은 “이것이 나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줄 것인가?”이다. 기독교인들인 우리는 좋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5:21)”.

 

간격 메우기

 

포스터와 매닝의 옹호자들과 경배자들이 가장 흔하게 내놓는 반대 의견은, 이 두 사람이 정말로 동양적인 신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초점과 관심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시바 혹은 붓다가 아니라 예수에게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수련 방법은 동양적이라 하더라도 가르침은 서구적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정당한 방어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틸덴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 신비주의의 흐름(관상기도)은 극동의 영성으로 이어지는 서구의 교량이다.”

 

이 말은 의도와는 관계 없이, 동양과 수행 방법을 공유하는 서구의 신비주의가 동양적인 영성의 개념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여정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서구식 요가를 하고 만트라를 기도하면,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신비경에 빠진다. 이 황홀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서구의 영적 세계를 향해 열면, 결국은 똑같은 귀신의 세계 혹은 동양인들이 말하는 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를 귀신의 영역에 열면, 온 세상이 하나요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이 신으로 보이는 지점, 곧 내재신론의 세계라는 의식 상태로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돌입한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내재신론을 받아들이면, 복음은 그 의미와 중요성을 잃는다. 순진무구한 “예수 기도”로 시작했지만, 이것은 복음의 거절이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주 잊는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다. 그 영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령으로 움직이고 그분을 예배하는 영들이었다. 이 영들은 어떻게 영적으로 긍정적으로 보이는지,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 영들은 속이는 임무를 수행한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막13:22),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11:14) 속인다. 왜 하나님이 성령과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주셔서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간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 사람의 전통(매닝과 포스터가 이미 이렇게 한 것처럼)으로 넘어 들어갈 때, 우리는 위험천만한 곳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시애틀 제일장로교회의 전 담임목사인 로드니 롬니 박사는 뉴에이지 기독교인이다. 그가 관상기도를 하는 중에 자신에게 무엇이 왔는지 매우 솔직하게 드러낸다. “지혜의 근원”과 교통하던 중 그 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네가 이 하나됨을 전파하길 원한다. 자, 세상 앞에 이것을 들고 일어나라. 연합과 함께함의 부름을 들으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하나됨의 증언은 지금 존재하는 어떤 장애물도 결국에는 파괴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영은 귀신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하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 영은 이렇게 선언했다. “침묵이 저기 있다. 나는 저기서 일한다.” 이 말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일하지 않으신다. 귀신들이 침묵 속에서 일한다. 뉴에이지 신봉자는 자신을 인도하는 영이 이렇게 밝히 드러내 주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전심전력하여 마음을 쏟는 자들과 더불어 일한다. 우리 영의 움직임을 느끼는 소박하고 진실한 자들과 함께 일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들에게 있는 현재의 신념 체계라는 맥락 안에서 일한다.

 

여기 “전심전력하여 마음을 쏟는”이라는 말은 단어 반복 혹은 호흡 초점을 통해 생각을 정지하고 내면의 정신적 침묵으로 들어간 자들을 의미한다. 매닝은 ‘예수의 사명’에서 생각을 어떻게 정지시키는지 가르친다.

신앙의 첫 단계는 기도의 순간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지하는 것이다.

관상적인 영성은 의식 변화의 필요를 강조한다--우리는 현실을 다르게 봐야 한다.

단 하나의 신성한 말을 선택하라--신성한 말을 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자주 반복하라.

하나님의 큰 침묵으로 들어가라. 침묵 안에 홀로 거하라.

내면의 잡음은 모두 가라앉을 것이며, 사랑의 목소리만이 들릴 것이다.

 

매닝과 포스터의 신비주의 영적 가계도를 그린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맨 꼭대기에 인도, 그 다음에 알렉산드리아. 그 다음에 사막 교부들, 그 다음에 토머스 머튼 그리고 매닝과 포스터, 이제 이들을 통해 다른 많은 사람들, 그리고 당신.

원래 이 가계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맨 꼭대기에 삼위일체 하나님, 그 다음에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당신. 아주 간단하다. 그리고 기억하라! 이것이 이 논쟁에서 결정적인 요소다. 시편에 풍부하게 나오는 성경적인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고를 멈추게 하기는커녕, 우리의 전 사고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윌리엄 섀넌이 한 다음의 말은 머튼을 인용한 것인데 씻을 수 없는 혐의를 제공한다.

관상의 경험은 별개 존재의 합일도 아니고, 별개 존재의 융합도 아니다. 그 반대다.

분리됐던 존재들이 하나님이신 온 세상과 모든 사물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섀넌은 본질상 한 큰 정체, 즉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라기 보다는 샤머니즘에 훨씬 어울린다. 관상기도 운동을 둘러싸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라고 교계에 도전한다. 관상 기도가 뉴에이지 신비론 그리고 동양의 신비 사상과 가지고 있는 연결 고리를 보라. 한 작가가 정서적으로 감동을 주고, 진실하며, 성경적인 용어를 쓴다는 것이 반드시 건전하고 성경적인 진리를 옹호하고 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좋은 예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의 예찬이다. 마리아 숭배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정감이 가고 경건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리아 숭배가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만하거나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포스터와 매닝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관상 기도는 성경적인가, 아니면 영적인 반역이며 한낱 전통인가? 매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키팅의 책들을 추천하고 있다.

이런 경험(신적인 합일)을 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기독교 영적 지도자들은 동양의 교사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온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사실 키팅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 기도라는 결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힌두교와 불교에게 가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터는 머튼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고후5:19)을 거절하는 불교도와 수피교도들과 영적인 친족 관계를 맺고 있는데도, 머튼에게로 향할 수 있는가? 난처해도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여기에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관상 기도 학교에 가입’하거나, 침묵 중에 들려오는 ‘사랑의 음성'을 듣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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