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紙]·붓[筆]·먹[墨]·벼루[硯] 등 옛날 서방이나 서재에 없어서는 안 되는 4가지 기구를 의인화해 쓴 말.
호치후(好侯)·관성후(管城侯:붓)·송자후(松滋侯:먹)·즉묵후(卽墨侯:벼루)와 같이 벼슬이름을 붙여 문방4후(文房四侯)라고도 하며 문방4보(文房四寶)라고도 한다. 가장 유명한 4보로는 각 명산지의 이름을 딴 안휘 경현의 선지(宣紙), 흡현의 휘묵(徽墨), 절강 오흥의 호필(湖筆), 광동 고요현의 단연(端硯)을 든다. 북송 소이간(蘇易簡)의 〈문방사보〉는 지필묵연의 여러 종류와 원류·고사·제조법·문학작품 등에 대해서 지보·필보·묵보·연보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후한 105년 채륜에 의해 제지술이 발명된 이래 중국의 종이는 원료·용도·생산지에 따라 크기·지질·색깔·이름 등을 달리해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문방에서는 선지·화선지·옥판선지(玉版宣紙) 외에도 화려한 색깔로 염색하고 판화로 여러 가지 문양을 찍은 시전(詩箋)이 애용되었다. 한국에 종이가 전래된 것은 왕인 박사가 285년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353년 왕희지가 잠견지(蠶繭紙:高麗紙)에 〈난정서〉를 썼다는 기록을 통해 200년경으로 추측된다. 그후 고구려의 담징이 610년 제지술과 조묵법(造墨法)을 일본에 전한 기록과 751년 석가탑 탑신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당시의 우수한 제지술을 증명해준다. 조선시대에는 수요가 급증해 창의문(彰義門) 밖에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했고 충청도의 마골지(麻骨紙), 전라도의 고정지(藁精紙), 경상도의 모절지(節紙) 같은 특수지의 진상 의무가 민간과 사찰에 부과되기도 했다. 한국의 종이는 지질이 좋고 질기기는 하나 서화에는 적당하지 않아 주로 중국산 종이가 사용되었다.
붓의 사용은 중국 은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나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붓은 진(秦)의 몽염(蒙恬)이 나무 붓대에 사슴털과 양털로 붓촉을 만든 창호(蒼毫)이다. 한국에서도 경상남도 의창군(지금의 창원시) 다호리의 철기시대 목곽분에서 5자루의 붓이 발굴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공조에서 관장해 붓을 생산했으나 중국만큼 발달하지는 못해 상류층에서는 거의 중국에서 수입된 붓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 가장 유명하다.
먹은 위진대(魏晋代)에 옻과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든 둥근 형태의 묵환(墨丸)에서 비롯되었다. 그뒤 조묵법이 발달해 기름의 그을음으로 만든 유연묵(油烟墨), 소나무 그을음과 사슴의 아교로 만든 송연묵(松烟墨), 유연에 사향을 섞어 금박을 입힌 용향묵(龍香墨), 먹똥과 응어리가 안 생긴다는 청묵(淸墨) 등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연묵과 송연묵이 제조, 사용되었으며 평안도 양덕과 황해도 해주의 먹이 유명했는데 서울의 먹골(지금의 묵정동)에서도 생산되었다. 또한 해주 먹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벼루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상고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나 진대(晋代)에 묵환과 함께 사용된 요심연(凹心硯)이 본격적인 벼루라 할 수 있다. 벼루는 벼루돌[硯石]에 의해 그 질이 좌우되는데 중국에서는 단계연(端溪硯)이 가장 좋으며, 한국에서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의 남포석과 자강도 위원군의 청석이 유명하다. 석연(石硯) 이외에 가야와 백제의 도연(陶硯)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귀면각(鬼面脚)에 인화무늬[印花紋]가 장식된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형태·조각장식·문양 등이 다양해지고 문인취향의 시구(詩句)가 곁들여지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에서 전해진 지필묵연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 이르면 송 이래의 문방취미의 유행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고 우리의 생활양식과 미감이 반영되어 발전했다.
제1장 『붓』
서화(書畵)에 사용하는 도구.
문방4우(文房四友)의 하나이며, 짐승의 털을 모아 나무관으로 고정시킨 것이다. 진(晉)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 博物志〉에는 BC 3세기에 몽염(蒙恬)이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문헌분석과 출토유물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은대(殷代)의 갑골(甲骨) 가운데 붓으로 쓴 듯한 것이 출토되었고, 갑골문과 금문(金文) 가운데 붓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들이 있고, 신석기대말인 용산(龍山)과 앙소(仰韶)의 채색토기에 붓이 아니면 묘사할 수 없는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2500년 이전부터 붓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으로는 서사(書寫)가 시작된 때부터 붓이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붓은 중국 후난 성[湖南省] 창사[長沙]의 묘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것으로 필통 속에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붓의 형태는 오늘날과 달리 탄력 있는 가는 나무 끝을 가른 다음 거기에 토끼털을 끼워 실로 묶었다. 한국에서는 1932년 평양 정백리(貞柏里) 제121호분에서 털부분만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에 심을 넣고 주위를 털로 싼 것으로 중국의 쥐옌[居延]에서 출토된 BC 1세기의 붓과 비슷하다. 1988년 경상남도 창원 다호리(多戶里)에서 완전한 형태의 붓 5자루가 발견되었다.
붓은 손으로 잡는 부분인 축(軸), 글씨를 쓰는 부분인 수(穗), 뚜껑부분인 초()로 이루어졌다. 축과 뚜껑은 대개 나무로 만들지만 옥·금·상아·대모·화각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수의 재료는 주로 토끼털·양털·사슴털을 사용하며 여우털·쥐털·족제비털·살쾡이털 등도 사용한다. 가장 좋은 것은 토끼털이며 드물게 대나무를 잘게 잘라 만든 것과 풀로 만든 것도 있다. 붓의 종류는 형태로 분류하면 장봉(長鋒:털의 길이가 지름의 7배 이상인 것)·중봉(中鋒)·단봉(短鋒:털의 길이가 지름의 4배 이하인 것)·작두필(雀頭筆:털길이가 짧아서 참새머리 같은 것) 등으로 나눈다. 털의 종류로는 황모필(黃毛筆:족제비털로 만든 붓)·초필(草筆)·백필(白筆:양털로 만든 붓)·녹모필(鹿毛筆:사슴털로 만든 붓) 등으로 분류한다. 한국에서는 황모필이 가장 유명해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제2장『종이』
셀룰로오스 섬유를 물에서 건져 철사 체에 말려 돗자리 또는 펠트 천의 형태로 만든 것.
종이는 105년경에 중국 후한(後漢)의 채윤(蔡倫)이 처음 만들었다. 751년에는 중앙 아시아, 793년에는 바그다드에 전파되었으며, 14세기에는 유럽 여러 지역에 종이공장이 있었다. 1450년경에 인쇄기가 발명되자 종이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19세기초에 나무와 다른 식물성 펄프가 종이제조를 위한 주요 섬유공급원으로 넝마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1798년에 니콜라스 루이스 로베르가 최초의 초지기를 만들었다. 움직이는 체 벨트를 이용해 틀 또는 형틀을 체 바닥과 함께 펄프 통에 담가 1번에 1장씩 종이를 떠냈다. 몇 년 후 헨리와 실리 푸어드리니어 형제가 로베르의 기계를 개량했으며, 1809년에 존 디킨슨이 최초의 원압제지기를 발명했다.
종이제조 과정의 거의 모든 단계가 고도로 기계화되었지만 기초처리과정은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먼저 종이 펄프 또는 제지원료를 만들기 위해 섬유질을 분리해서 물에 담근다. 그 다음 체로 건져 섬유질을 1장의 얇은 종이 형태로 만들고, 그 섬유질을 압착·응축해서 물기를 거의 짜낸다. 남은 물기는 말려서 제거하며 마른 섬유질은 더 압착한 다음 용도에 따라 다른 물질을 입히거나 스며들게 한다.
종이의 등급과 종류의 차이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사용하는 섬유질의 종류로서 기계로 가공한 목재 펄프용 톱밥, 기계처리나 주로 아황산염·소다·황산염으로 화학처리한 섬유질 또는 2가지를 혼합한 방법을 통해 생산한 섬유질이 있다. 둘째, 펄프에 첨가하는 물질인데 주로 표백·착색하고 도토(陶土)를 바르는 데 물질이 첨가된다. 이중 도토 바르기는 잉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다. 셋째, 무게를 비롯한 종이를 만드는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종이를 처리하는 물리적·화학적 방법이 있다. 나무가 종이제조를 위한 주요섬유질 공급원이 되었지만, 가장 질기고 변하지 않는 종이를 제조하는 데는 지금도 넝마섬유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신문 용지를 비롯한 재생폐지와 마분지도 주요한 섬유질 공급원이다. 종이제조에 사용되는 다른 섬유질로는 짚·바가서(사탕수수 가루 찌꺼기)·아프리카나래새·대나무·아마·대마·황마·양마가 있다. 어떤 종이, 특히 특수 종이는 합성섬유로 만든다.
기본중량으로 불리는 단위 면적당 무게 또는 밀도는 연(連 : 지금은 보통 500장)으로 측정한다. 또한 종이는 두께 또는 밀도로 측정하기도 한다. 종이의 질김과 튼튼함은 섬유질의 결합력과 종이의 구성·구조뿐 아니라 섬유질의 질김과 길이 같은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종이의 질을 결정하는 시각적인 특성에는 밝기·색깔·불투명도·광택이 있다. 종이는 등급에 따라 최고급 종이인 본드지로부터 도서용지, 브리스틀지, 목재, 펄프 용지, 신문 용지, 크라프트지, 마분지, 그리고 최저급 용지인 위생용지가 있다. 우리나라에 종이가 처음 들어온 것은 6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625년경 일본에 제지술을 전파한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후 삼국시대의 제지 상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영의 조지소(造紙所)에서 종이를 생산했다.
제3장『먹』
붓글씨에 사용하는 문방구.
문방사우(文方四友)의 하나이며, 고형체로서 벼루에 갈아서 액체상태로 만들어 사용한다. 먹은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가지고 만드는 유연묵(油煙墨)과 송진을 태워서 만드는 송연묵(松煙墨)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금속활자로 인쇄할 때 사용하고 후자는 목판인쇄에 사용한다. 먹의 형태는 초기에는 둥글거나 원주형(圓柱形)이었으며 점차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먹 위에 그림이나 문자를 새겨 장식한 것들도 있다. 먹은 후한(後漢)의 위탄(韋誕)이 발명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동안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한(漢)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은대(殷代)의 갑골(甲骨) 가운데 검거나 붉은 액체를 사용한 것이 출토되어 BC 2500년 이전에 먹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으로도 위탄 이전의 책에서 먹에 관한 기록이 발견된다. 이때 사용한 먹은 석묵(石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지금과 같이 탄소의 분말을 이용하여 만든 것은 한대 이후부터이다. 한국의 먹 가운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일본의 쇼쇼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의 먹 2점이다. 이것은 모두 배 모양이며 각각 먹 위에 "新羅楊家上墨", "新羅武家上墨"이란 글씨가 압인(押印)되어 있어 신라시대에 무가와 양가에서 좋은 먹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고구려에서 당에 송연묵을 보냈다는 기록이 중국의 〈철경록 輟耕錄〉에 보이며, 고구려 고분에서도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은 삼국시대에 좋은 먹이 생산되고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들이다. 그후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먹이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양덕(楊德)과 해주(海州)의 먹이 예로부터 가장 유명하다.
제4장『벼루』
먹을 갈아 먹물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
문방사우(文房四友) 가운데 하나이다. 먹을 가는 부분은 연당(硯堂)·연홍(硯泓)이라고 하고, 먹물이 모이는 오목한 곳은 묵지(墨池)·연지(硯池)라고 한다. 그 형태는 원형부터 4각형·6각형·8각형·12각형 또는 물건의 형태를 본떠 만든 금연(琴硯)·풍자연(風字硯) 등 다양하며, 크기도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다. 재료로는 돌·옥·수정·도(陶)·자(磁)·철·금동·은·대나무·조개껍질 등이 사용되는데 대개는 돌을 사용한다. 돌은 석질(石質)이 아름답고 연지의 물이 10일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인류가 벼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대(殷代)의 갑골(甲骨)에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쓴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어떠한 형태이든지 먹물을 만들 수 있는 도구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중국 상하이[上海] 박물관에 원시시대의 벼루로 추정되는 것이 소장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후베이 성[湖北省] 육현(陸縣)에서 발견된 것으로 BC 167년경 제작된 것이다.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벼루가 제작된 것은 한대부터이며, 동작대(銅雀臺)의 페허에서 발견된 것과 낙랑고분에서 발견된 석연(石硯)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도연(陶硯: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인데, 원형의 연면에 연지가 돌려져 있고 5개의 다리가 있다. 중국에서는 당대(唐代)부터 단계(端溪)에서 나는 것이 유명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남포연(藍浦硯)과 위원연(渭原硯)이 가장 유명하다.
참고내용 (연적)
[연적]
벼루에 먹을 갈 때 사용할 물을 담아두는 용기.
수적(水滴)·수구(水)·옥구여(玉餘)·수주(水注)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이래 벼루와 함께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적은 사대부들의 한묵정취(翰墨情趣)로 인해 조선시대에 특히 발달했다. 연적은 일반적으로 연상(硯床) 위에 놓고 주로 실용적 목적으로 사용했지만 비교적 큰 것은 서재의 문갑이나 사방탁자 위에 얹어놓고 바라보는 완상품으로도 애호되었다. 연적에는 보통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하나는 물이 나오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물을 담는 곳이다. 형태가 매우 다양하여 동자·주전자·무릎·용·개구리·원숭이·오리·연봉오리·복숭아·반달 모양 등으로 만들어졌다. 연적은 도기를 사용해 만든 문방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예가 많이 남아 있는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국보 제74호)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구형수주(靑磁龜形水注:보물 제452호)는 대표적인 예이다.
한지의 관하여
[한지]
닥나무껍질 등의 섬유를 원료로 하여 한국 고유의 제조법으로 만든 종이.
[개요]
종이는 수제지(手製紙)와 기계지(機械紙)로 나눌 수 있는데 기계지는 보통 우리가 쓰는 종이를 말하며 양지(洋紙)라고 한다. 한지는 한국에서 손으로 뜬 종이로서 중국의 수제지인 화지(華紙)나 일본의 수제지인 화지(和紙)와 구별하여 지칭한 것이다. 옛날의 계림지(鷄林紙)·삼한지(三韓紙)·고려지(高麗紙)·조선지(朝鮮紙)에서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명칭이 한지로 바뀐 것이다.
[한지의 전래]
종이는 대략 BC 2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며 1986년 감숙성(甘肅省) 천수시(天水市) 팡마탄(放馬灘)에서 BC 179~141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종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종이는 마지(麻紙)로 품질이 매우 좋아서 그 이전에 이미 종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채륜(蔡倫)이 어망과 마넝마 및 수피(樹皮)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뒤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 종이나 제지술이 전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의 접근방법을 통해 그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3세기말 백제의 왕인(王仁)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이로 된 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610년(영양왕 21)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종이·먹·채색·맷돌을 전할 때 종이와 함께 제지술도 전수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기록에 의해 우리나라에 종이가 들어온 하한시기와 당시 우리나라에 제지술의 존재여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둘째, 4세기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경과 함께 제지술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사경(寫經)을 많이 보시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평양 부근에서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채협총(彩塚)에서 칠통과 함께 종이뭉치가 출토되었고, 평양 대동강가에서 고구려시대의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이 발견되어 늦어도 2~7세기 사이에 매우 발전된 제지술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우리가 한지의 대명사로 쓰고 있는 '닥지'라는 말에서 종이의 전래시기를 살펴볼 수 있다. 닥은 한지의 주원료로 한자로 표기하면 '저'(楮)인데 중국에서는 BC 2세기부터 AD 2세기까지 닥으로 읽혀졌다. 그러므로 '楮'가 닥이라고 읽혀졌던 시기에 우리나라에 종이 원료인 닥과 함께 제지술이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후 3, 4세기의 음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4세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종이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2~4세기에 종이와 제지술이 전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제조법]
현재 사용하는 방법은 2~4세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중국적인 제지방법이 우리의 기호에 맞게 변형된 것인데 한지의 제작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원료를 채취하는데 닥의 경우는 11월에 잘라 쪄서 껍질을 벗긴다. 이를 흑피라 하는데 이 흑피를 물에 불려 검은 껍질을 벗기면 백피가 된다. 이 백피를 말렸다가 필요할 때 잿물로 삶아 깨끗한 물에 씻는다. 요즘은 잿물 대신 가성소다(NaOH)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이 과정은 순수 셀룰로오스를 얻기 위한 것으로 잘 삶아서 깨끗이 씻어야만 좋은 품질의 종이가 될 수 있으며,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 다음으로 티를 고르는 작업을 거치고, 기호에 따라 섬유를 개울가나 눈 위에서 자연표백하는데 최근에는 화학약품을 사용해 표백한다.
다음은 섬유를 콜로이드화하는 과정으로 섬유 사이의 긴밀한 결합을 위해 방망이로 두드리는데 이를 고해(叩解)라고 하며, 요즘에는 비터를 사용한다. 다음 이 섬유를 지통에 넣고 섬유의 약 45배 되는 물을 붓고 잘 저은 다음 닥풀, 일명 황촉규(黃蜀葵)를 넣어 대나무로 만든 발로 뜬다. 뜬 종이는 판 위에 놓고 돌로 눌러 물을 뺀 다음 나무판에 붙여 건조시키기도 한다. 요즘은 철판·스테인리스강 등의 판에 불을 떼서 건조시킨다. 그밖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쌀가루나 돌가루 등을 발라 다듬이질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도침(搗砧)이라 한다. 두꺼운 종이나 여러 겹의 종이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완성된다.
[특징]
한지의 특징은 두껍고 질기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종이나 문헌을 보면 신라·고려·조선 시대에는 두꺼운 것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진귀하게 여겨졌던 신라의 백추지(白紙) 혹은 경면지(鏡面紙) 등도 긴 섬유의 종이를 몇 겹으로 붙여서 이를 두드려 광택을 낸 것이다. 백추지는 두드려 만든 하얀 종이라는 의미이며, 경면지는 두드려 거울처럼 빛나게 한 종이라는 뜻이다. 제조법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섬유를 잘게 갈지 않고 두드려 만들면 두껍고 질긴 종이가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질긴 것이 요구되는 우산·부채·책표지 등의 용도에 우리나라의 종이가 인기가 있었고, 그림이나 글씨에는 두드려서 광택이 나는 것을 즐겨 사용했으며 송(宋)의 미불(米), 명(明)의 동기창(董其昌), 청(淸)의 강희제(康熙帝) 등은 한지를 즐겨 쓰고 상찬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니혼쇼키〉에 610년 담징이 전해주었다고 기록된 맷돌은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며 이것은 종이를 만드는 방법이 우리의 기호와 원료조건에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래 초기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중국 제지술의 모방단계였다. 섬유를 두드려서 만들었으며, 주원료는 마와 닥이었다. 기록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두껍고 광택이 있는 종이였다. 당(唐)의 병균(秉鈞)은 〈문방사고도설 文房肆攷圖說〉 권3에서 우리나라의 종이는 마치 비단과 같아서 견지(繭紙)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백추지의 추()는 도침을 나타내는 '槌'·' '상통하며, 도침을 하면 종이가 매끄럽고 부드러워지며 치밀해져 좋은 종이가 된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기술뿐만 아니라 〈니혼쇼키〉에 기록된 것처럼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드는 중국의 기술도 사용되었다. 즉 일본에 제지술을 전해준 7세기 전후에 우리의 기호에 맞는 독자적인 방법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고려시대는 앞 시기의 기술을 발전시켜나간 발전기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은 거의 변함이 없지만 더욱 좋은 종이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원료를 사용했음을 분석 결과 알 수 있다. 이때는 불경 등을 필사하는 데 필요한 두꺼운 급가공 종이를 많이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종이로는 감지(紺紙)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한지 제지술의 완성기로, 국영 제지공장이며 기관인 조지서(造紙暑)를 설치해 종이의 규격을 통일시키고 원료를 다양화했으며 기술을 발전시켰다. 닥이 아닌 율무·버드나무·소나무·창포 등을 사용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원료와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가공기술이 매우 발전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종이가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기술자와 원료의 부족으로 한지는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말기에는 두꺼운 종이만 선호하면서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고, 기계가 도입되어 기계지가 대량생산되면서 점차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날의 한지는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면 일반적으로 거칠다.
[한지의 종류]
한지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 현재까지 약 230여 종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같은 재료와 두께, 같은 크기의 종류가 용도나 산지에 따라 각각 다르게 불렸기 때문에,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종류가 다른 것은 아니다. 종이를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료에 따라 저지(楮紙)·죽지(竹紙)·마지(麻紙)·송엽지(松葉紙)·상지(桑紙)·의이지(薏苡紙)·유목지(柳木紙)·노화지(盧花紙)·고정지(藁精紙)·포절지(浦節紙)·순왜지(純倭紙)·잡초지(雜草紙)·태지(苔紙) 등, 둘째, 용도에 따라 공사지(公事紙)·관교지(官敎紙)·주지(奏紙)·피봉지(皮封紙)·봉서지(封書紙)·부본지(副本紙)·자문지(咨文紙)·표지(表紙)·저화지(楮貨紙)·세화지(歲貨紙)·시지(試紙)·호적지(戶籍紙)·형지안지(形止案紙)·도배지(塗褙紙)·불경지(佛經紙)·인경지(印經紙)·수화지(手畵紙)·낙폭지(落幅紙) 등, 셋째, 산지에 따라 연산지(連山紙)·평강지(平康紙)·전주지(全州紙)·남원지(南原紙) 등, 넷째, 형태에 따라 주지(周紙)·백권지(白卷紙)·첩지(帖紙)·시축지(詩軸紙)·대지(大紙)·소지(小紙)·척지(尺紙)·중지(中紙)·후백지(厚白紙)·박지(薄紙)·선익지(蟬瀷紙)·경면지(鏡面紙) 등, 다섯째, 가공방법에 따라 도련지(搗練紙)·주지(注紙)·금분지(金粉紙)·황지(黃紙)·청지(靑紙)·청자지(靑磁紙)·홍지(紅紙)·자지(紫紙)·취지(翠紙) 등, 그밖에 상화지(霜花紙)·설화지(雪花紙)·백로지(白鷺紙)·견지(繭紙)·상지(上紙)·대호지(大好紙)·파고지(破古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밖에 원료와 용도가 합해져 붙여진 이름으로 상용마지(常用麻紙)·저상지(楮常紙) 등이 있으며, 가공한 종이를 용도에 따라 붙인 상용황지(常用黃紙) 등도 있다.
[용도]
한지는 현대와 같이 여러 가지 지식전달매체가 없던 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서사 재료였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서적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중요한 용도 역시 전적(典籍)이었다. 따라서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해지지 않는 두꺼운 종이가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종이의 용도는 종이연[紙鳶]으로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 문헌을 보면 불경을 인출하기 위해 많은 종이가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와 같이 각종 용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태종대에 중국에 보내는 자문지(咨文紙)의 확보와 저화(楮貨)의 규격을 일정하게 하고, 원료의 확보와 제지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영 제지공장이자 관서인 조관지를 설치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책뿐만 아니라 각종 관공문서·창호(窓戶)·꽃·종이돈[楮貨]과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한지의 질긴 특성 때문에 부채·우산 등에도 많이 사용되어 중국의 호평을 받았으며, 부의지(賻儀紙)로도 중국에 많이 보내졌다. 조선시대 이후 벽지로도 사용했으며, 종이를 꼬아 생활용기나 장식품을 만들었는데 이를 지승공예(紙繩工藝)라고 했다. 지승공예는 사대부들이 취미 삼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 공예품은 미적 감각이 뛰어났으며 그 형태도 바구니·가방·상·물병·지갑 등 다양하다. 오늘날에는 서화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며 특별한 풍취를 낸 서간지도 유통되고 있다. 질기고 부드러우며 탄력성과 번짐성이 있어서 판화지로도 적당하다. 더욱이 보존성이 뛰어나 작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뛰어난 재료이다. 한지는 기계지보다 우수하여 50배나 긴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지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서예의관하여
[서예]
동양의 독특한 필기도구인 붓을 사용하여 글씨를 심미적으로 서사(書寫)한 것으로 조선시대까지 서(書)로 불렸으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서도(書道)로 잠시 지칭되다가 8·15해방 이후 독립된 예술분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서예로 부르기 시작했다.
[서체]
쓰는 방법에 따라 한자(漢字)의 경우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隸書)·전서(篆書) 등의 서체가 있고, 한글에는 궁체(宮體) 등이 있다. 글씨에 관한 이론이나 저술은 서체별 필세론(筆勢論)을 비롯하여 품등(品等)·감상·수장에 대한 내용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서법은 집필법과 운필법이 핵심을 이루었다. 글씨의 기본결구, 점·선·획의 비례, 균형, 조화 등을 통해 독특한 조형미·율동미·공간미 등을 추구했으나 옛 대가들의 법도와 서풍을 따르는 것이 보편화되어 법첩(法帖)의 성행과 더불어 독창성보다는 전통성이 중시되었다.
[역사]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기원은 한자의 시초인 은대(殷代) 안양기(安陽期)의 갑골문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모필에 의한 서사체의 예술성 추구는 후한대(後漢代)부터 본격화되었으며, 남북조시대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등에 의해 서풍의 전형이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때에 한자가 전래되었으나 서예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한사군(漢四郡)을 통해 한대의 문화가 유입되면서부터이다(→ 한국의 미술). 삼국시대의 서예는 금석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고구려는 위예법(魏隸法)에 동진의 해법을 가미한 예해혼합풍(隸楷混合風)이 성행했던 듯하며, 특히 광개토대왕비(414)의 서체는 질박하고 근엄한 특색과 함께 웅장한 기상이 담겨 있어 당시 중국에서도 보기 힘든 명품으로 꼽힌다. 백제의 서예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왕희지체를 연상시키는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의 남조풍(南朝風)이 근간을 이루었으며, 말기에는 방정하고 힘이 있는 북조풍이 가미되기도 했다. 신라의 서예는 고구려와 같이 북조풍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었으며, 진흥왕 때 세워진 순수비의 서체는 단중하며 북비(北碑)의 일등 서품과 비교될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보다 다양하고 활기찬 발전을 보였는데, 특히 신라의 왕희지로까지 지칭되었던 김생(金生)은 왕희지체와 안진경체(顔眞卿體) 등을 융합하여 개성이 뚜렷한 새로운 서풍을 창안했다. 이러한 김생체는 고려 후기 때 이규보(李奎報)에 의해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가되기도 했다. 8세기경까지는 왕희지체가 주류를 이루면서 김생체가 완성되었던 데 비해 9세기 무렵부터는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쓰이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로 계승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서예는 문사들의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정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사를 전업으로 하는 서학박사(書學博士)를 비롯한 전문직 이원(吏員)의 양성 등으로 크게 발전했다. 고려 초기에는 앞 시기의 서풍을 계승하여 자획과 결구가 모두 방정하고 굳건한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특히 비문 글씨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후 11세기 전반경에는 우세남체(虞世南體)를 가미하면서 점차 우미수려한 필체로 변모되다가 중기에 이르러 문운의 극성기를 맞으면서 문화적 난만성을 반영하는 왕희지체가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고려시대 최고의 서가로 손꼽혔던 탄연은 왕희지체에 토대를 두고 안진경체와 사경풍(寫經風)의 필법을 가미하여 전아유려하면서도 힘이 있는 새로운 서풍을 창출하고 당대는 물론 무신집권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려 후기에는 서예가 일반회화와 함께 지식층의 심성양성과 교양적 기능의 하나로 널리 인식되면서 보다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특히 이규보는 서예를 천지음양의 배합이라는 우주적 윤리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는 등 회화의 창작이론과 같다고 인식했으며, 〈동국제현서결평론서 東國諸賢書訣評論書〉를 통해 우리나라 명필들을 신(神)·묘(妙)·절(絶)의 3품으로 나누어 평하고 그 가치를 논함으로써 서예이론과 서예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서풍은 최선(崔詵)의 〈용수각개창기 龍壽閣開創記〉와 김효인(金孝印)의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등을 통해 볼 때 앞 시기 탄연체의 영향이 지속되면서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안진경체의 장중한 분위기가 살아나는 경향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기에 서예는 원종대부터 한문학을 비롯한 시서화의 전반적인 성장에 수반되어 더욱 확산·심화되었으며, 서풍도 원과의 밀접한 문화교류를 통해 조맹부(趙孟)의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다. 서예에서 진(晉)·당으로의 복고를 주장했던 조맹부의 송설체는 자유롭고 분방한 송대 서풍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바르고 아름다운 독특한 서체로서 연경(燕京)의 만권당(萬卷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당시 고려·원과의 서화교섭을 따라 국내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송설체는 이 시기를 통해 전개되어 이제현(李齊賢)·이암(李)·공민왕 등의 명가를 배출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이암의 명성이 가장 두드러졌으며 그를 중심으로 송설체가 정착되어 조선 초기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서예는 고려 말기에 수용한 송설체가 일종의 국서체로서 크게 풍미했으며, 안평대군 이용(李瑢)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문서화에 모두 능했던 그는 송설체를 조맹부보다 더 수려하고 청경하게 다루어 명나라에서도 그를 당대 제일의 서가로 손꼽았다. 균제미 넘치는 그의 이러한 서체는 강희안(姜希顔)·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서거정(徐居正)·성임(成任) 등의 추종자를 통해 크게 풍미했다. 그리고 그가 실각한 이후에도 계승되어 16세기 전반경에는 성수침(成守琛)과 이황(李滉) 등에 의해 건중한 맛이 가미되기도 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예는 사자관(寫字官) 출신인 한호(韓濩)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선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임진왜란중에 외교문서를 도맡아 써서 중국인들에게까지 절찬을 받았던 그는 왕희지체에 조선화된 송설체를 가미하여 단정하고 정려한 석봉체(石峰體)를 이룩하고 당대의 서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호가 왕명을 받들어 쓴 해서 천자문이 1587년 판각되어 전국에 반포됨으로써 글씨 학습의 교과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는 주자(朱子) 이전의 원시유학을 지향했던 허목(許穆)이 서법 또한 복고를 신념으로 하여 고문전(古文篆)이란 새로운 서체를 창안했는데, 이것은 후대의 남인계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에는 이숙(李淑)에 의해 왕희지의 진체(晉體)에 미불(米)의 필의를 가미한 이른바 동국진체(東國眞體)가 출현하여 이 서체가 윤두서(尹斗緖)와 윤순(尹淳)을 거쳐 이광사(李匡師)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특히 이광사는 윤순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된 명대의 문징명체(文徵明體)를 가미하여 자기풍의 원교체(員嶠體)를 이룩하는 한편 진한 이래의 고비(古碑)를 새롭게 인식하고 예법(隸法)을 익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서론(書論)에 있어서도 역리(易理)에 바탕을 두고 개진된 이서의 〈필결 筆訣〉을 본받아 보다 더 방대한 체제를 갖춘 〈원교서결 員嶠書訣〉 전후 양편을 저술하여 동국진체의 이론적 체계를 정리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예는 18세기 말기의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을 통해 소개된 청대 고증학파의 신서학 경향이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추사체(秋史體)로 완성되어 크게 유행했다. 김정희는 처음에 안진경체과 동기창체(董其昌體)에 토대를 두었으나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前漢隸)에 두고 이 서체를 해서와 행서 등에 응용하여 청나라의 비학파(碑學派)들도 염원하던 이상적인 새로운 양식을 창안했다. 조형성과 예술성에서 뛰어났던 그의 이러한 추사체는 신헌(申櫶)·이하응(李昰應)·서상우(徐相雨)·조희룡(趙熙龍)·이상적(李尙迪)·허유(許維)·전기(田琦)·오경석(吳慶錫)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을 통해 일세를 풍미했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시서화 교양문화가 잔존했으며 김윤식(金允植)·김가진(金嘉鎭)·윤용구(尹用求)·박영효(朴永孝)·이완용(李完用) 등의 문인서가들이 활동했다. 이 시기를 통해 김규진(金圭鎭)·오세창(吳世昌)·정대유(丁大有)·현채(玄采)·김돈희(金敦熙) 등 직접적인 서예가가 출현하여 전문적인 서예계가 형성되었고, 주로 서화협회전(약칭 협전)과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의 서부(書部)를 통해 작품활동을 했다. 근대적인 전문서예계의 형성은 8·15해방 이후 보다 활성화·다양화되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서예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떡손 또는 병형(餠型)이라고도 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찍어내는 데 쓰인다. 떡을 찍을 때 손으로 잡고 찍어내므로 '떡손'이라고도 부른다.
떡살은 만든 재료에 따라 나무떡살·사기떡살의 2가지가 있다. 나무떡살은 주로 소나무·참나무·박달나무 등을 쓰는데 보통 1자 정도로 긴 것이 특징이다. 사기떡살은 둥근 것이 대부분이며 보통 5~11㎝ 정도이다. 사기떡살은 백자(白磁)가 많고 특히 궁중에서 쓰던 떡살은 매우 고급스러운 것들이 많다. 문양은 주로 연꽃·국화·매화·석류 등의 꽃무늬이며 간혹 학무늬나 수복(壽福)·원희(圓喜) 등의 글씨 문양을 쓰기도 한다. 꽃 문양에는 사실적인 문양도 있지만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꾸민 것도 많다. 글씨는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주로 썼다. 떡을 찍는 방법은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도장을 누르듯 찍는다. 떡이 어느 정도 굳으면 문양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떡살은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사서 썼다. 조선 말기 떡집에서는 여러 가지 떡살을 갖추었고 양반 집에서도 웬만한 것은 갖추고 있었지만, 근래 일반 가정에서는 별로 갖추고 있지 않다.
[지게]
곡물·나무·비료 등 사람의 힘으로 나를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운반하는 연장.
지게의 구조는 지게몸체, 지겟작대기, 발채로 되어 있는데, 배낭을 메듯이 두 어깨에 지게를 짊어지고, 지게를 세울 때에는 지겟작대기로 비스듬이 받쳐놓는다. 부스러기 짐을 나를 때에는 발채를 지게 위에 얹어 사용한다. 지게몸체는 가지가 달린 자연목 2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벌려 나란히 세우고, 그 사이에 3~4개의 세장을 끼우고 탕개로 조여서 고정시켜 놓았다. 아래위로 질빵을 걸어서 어깨에 메도록 했으며, 등이 닿는 부분은 짚으로 짠 등태를 달았다. 지게는 한국의 전통적 농가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력에 의한 운반용 연장으로, 1970년대까지는 한 농가당 적어도 1~2개는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경운기가 등장하고, 농지정리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옹기]
근대·현대의 개념으로 무유(無釉) 또는 시유(施釉)를 한 도기질(陶器質) 그릇의 총칭.
원래는 이와 같은 질적인 구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릇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저장용 큰 항아리를 말한다. 옹(甕)이 큰 항아리를 가리키는 최초의 자료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대옹(大甕)에 음각된 '십구입옹'(十口入瓮)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도자기를 '陶' 또는 '瓦'로 표현했으며 '瓮'은 그릇의 종류를 의미했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그 개념이 변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도자기 제작소를 도기소(陶器所)와 자기소(磁器所)로 구분한 반면, 〈경국대전〉에는 제작자를 와장(瓦匠)과 사기장(沙器匠)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 옹장을 황옹장(黃瓮匠)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瓮'의 개념이 사기(磁器質)가 아닌 옹기(陶器質)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근대에 들어오면 도자기의 생산체계가 자기와 옹기로 양분되면서 자기를 제외한 토기·오지·질그릇·옹기 등을 통틀어 옹기라고 한다. 옹기는 제작방법에서 자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성형기법은 초기 철기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타날법(打捏法)이며 유약을 씌우는 경우에는 잿물[灰釉]을 사용한다. 가마는 전통적인 통가마[登窯]이며 1번만 번조하여 완성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자기제작소는 외래의 기술이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기술이 사라졌지만 옹기의 경우는 전통이 잘 보존되어왔다. 그러나 근래에 등장한 플라스틱·스테인리스 등과 같은 대체재료에 의해 그 수요가 감소되고 있다.
(1) 화로 : 추운 겨울 날에 방 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불을 담아 사용.
(2) 반짇고리 : 작은 천, 바늘과 실등 바느질 도구를 담는데 사용.
(3) 주판 : 간단한 수를 계산하는데 사용.
(4) 다듬잇돌과 방망이 : 옷감의 구김살을 펴고, 풀기가 고르게 배도록 하는데 사용.
(5) 맷돌 : 곡식을 잘게 가는데 사용.
(6) 나막신 : 비가 올 때 주로 신었던 신발.
(7) 갓 : 머리에 쓰던 모자로써, 신분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다.
(8) 부채 : 날씨가 더울 때 부치면 시원한 바람이 나옴.
(9) 족두리 : 시집가는 여자들이 머리를 장식하는데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