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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2005年 12月 12日字로 해남신문 편집국 박영자부장이 저술·발간한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현대사』책자 목록중 오홍탁선생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제1장 1930년대 전남운동협의회사건(11쪽 ~ 60쪽)
<목차> - 전남최대 조직사건 -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한계 - 새로운 운동방식 채택 - 조직선설의 핵심인물들 - 전남운동협의회 발각 이후 -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운동 - 전남운동협의회 중심에 선 마을들 - 항일운동의 구심 북평면과 완도군 - 1930년대 전남운동 이끈 김홍배·김정수 -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그후
- 새로운 운동방식 채택 (24쪽 표) [표] 전남운동협의회 조직도 - 산이면 지부 : 오홍탁
- 조직건설의 핵심 인물들 (28쪽 표) [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구속자 명단 - 성명;오홍탁 / 나이;24 / 직업;농업 / 본적 및 주거지;전남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401번지
- 전남운동협의회 발각 이후 5) 산이면 상공리 (44쪽 19째줄 ~ 47쪽 17째줄) 산이면 상공 마을은 북평 이진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의 중심에 선 마을이었다. 이 마을이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되게 된 데는 이 마을 출신인 오임탁, 오홍탁과 관련이 깊다. 이 사건으로 1년형을 선고받았던 오임탁과 오홍탁은 마을에 있었던 사립강습소에서 북평 출신 박채민으로부터 독립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1920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은 해남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 1920년 북평면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마을단위 노농회 창립내용에 노동자·농민계급의 해방 내용 등을 담고 있어 1920년대 이미 해남에도 사회주의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부터 해남에 들어오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코민테른 12월 테제와 맞물려 일본 유학파들과 인텔리들이 '대중속으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현장으로 투입해 오면서 급격히 확산돼 나간다. 또한 1920년대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계급운동이 구호적, 감흥적 경향이 있었다면 30년대 운동은 실지 현장 속에서 그것을 구현하고 실천력을 담보하는 운동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가운데 산이면 상공리도 있었던 것이다. 산이면 상공리에 사회주의 사상을 띤 항일운동이 전파된 것은 북평 출신 박채민으로 부터다. 북평면의 교사였던 박채민은 상공리에 들어와 사립 강습소에서 동복 오씨 청년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홍탁과 오임탁이다. 1946년 11월 해남추수봉기를 실질적으로 이끈 상공 출신 오장록도 박채민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홍탁은 전남운동협의회 회원이자 현직 경찰이라는 두 얼굴 때문에 조선일보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는 등 당시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혁명적 농민운동에 참여해 상공리에 독서회를 조직하고 소작쟁의 운동을 지도했었는데, 비밀을 탐지하고 동지들과 연락을 할 목적으로 1933년 9월 순사시험에 응시, 12월 강진경찰서로 발령이 났었다. 그는 강진과 산이 상공을 오가며 강진경찰서에서는 모범 경관으로, 고향에서는 모범 청년으로 신임을 받으며 암암리에 동지 포섭과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던 인물로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 산이면지부 책임자로 전남운동협의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상공리 야학원 교사였던 오임탁도 박채민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1932년 10월부터 1934년 3월말까지 수회에 걸쳐 야학생도 외 수명에게 지금의 현실을 폭로하고 사회주의국가 실현에 노력할 것을 강조하는 등 상공리를 기점으로 근동지역 사상전파에 노력했다. 또한 오홍탁과 오임탁은 1932년 11월 상공산에서 산이면 금호출신인 박한배와 회합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갱생계를 조직해 그 계원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전파하자는 등의 내용을 협의한다. 북평면 출신 박채민의 영향을 받은 오임탁과 오홍탁은 당시 인텔리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상공리 마을사람들은 적색농민조합 즉 혁명적 농민조합에 가입하게 되고 이러한 인연으로 상공마을은 해남 근·현대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산이면 상공마을이 전남운동협의회 사건과 인연을 맺게 된 데에는 오임탁과 오홍탁이라는 인물의 영향이 직접적이었지만 이곳 마을이 동복 오씨 동족촌이라는 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상공마을 동복 오씨들은 이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일제에 항거하고 농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살았던 상공사람들도 같은 문중 사람이자 인텔리인 이들의 지도를 반일운동의 맥락에서 따랐을 것이고 오임탁과 오홍탁도 같은 집안 사람들이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쉽게 조직을 꾸릴 수 있었을 것이다. 1930년대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산이면 상공마을은 해방이후 미군정에 반발해 일어난 11월추수봉기의 중심마을로 떠오른다. 11월추수봉기는 미군정의 농업정책 실패와 친일 경찰 및 관료들을 그대로 재기용한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다. 해남 화원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추수봉기 중심 인물은 산이 상공출신 오장록과 계곡 방춘 출신 김정수였다. 물론 산이면 상공마을 사람들도 추수봉기에 일제히 일어난다. 일제하에서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했던 혁명적 농민조합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던 이 마을 사람들은 일제하의 반일운동의 연장선 속에서 미군정의 농업정책을 바라봤고 비판했다. 1930년대 혁명적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오임탁과 오홍탁도 11월추수봉기의 중심에 섰고 특히 당시 해남 농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1월추수봉기를 선두에서 이끈 오장록이 이 마을 출신이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오임탁과 오홍탁을 비롯한 산이 상공마을 주민들은 해방 이후 보도연맹원에 가입돼 진도 갈매기섬에서 집단 처형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 1930년대 전남운동 이끈 김홍배·김정수 2) 같은 사건으로 조직 발각 (55쪽 6째줄 ~ 12째줄) 그러나 농민들을 조직하기 위해 해남에서 활동했던 같은 조직원 박한배가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으로 보아 김정수도 해남지역에서 일어났던 농민운동의 흐름을 읽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한배는 산이면 금호도 출신으로 상공 출신인 오홍탁과 갱생계를 조직하는 등 전남운동협의회와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박한배를 통해 해남에서 적색농민조합을 구성하려했던 김정수로서는 해남지역의 운동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제4장 진도 갈매기섬(해남보도연맹사건) ; (111쪽 ~ 182쪽)
<목차> 1. 숨겨진 진실 2. 갈매기섬의 진실 3. 공론화
2. 갈매기섬의 진실 - 국민보도연맹이란 1) 해남 보도연맹의 성격 (138쪽 3째줄 ~ 20째줄) 일본에서 반일운동을 전개하다 발각돼 구속경력이 있는 오장록과 광주학생운동 이후 유인물을 살포해 구속됐고 이후 목포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다시 구속된 김정수가 11월추수봉기를 주도했다. 또한 1932년 해남 북평 이진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남운동협의회사건 때 경찰 신분으로 밝혀져 세간의 이목을 받았던 오홍탁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오장록처럼 봉기를 주도한 인물들은 사살되거나 구속됐고 경찰의 손길을 벗어난 주모자급들은 산으로 올라가 지리산 빨치산과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지역에 남아있던 시위 가담 농민들은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돼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며 6·25가 발생하자 각 면별로 소집돼 갈매기섬에서 학살된다. 해남의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역사적 배경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산이면 상공리 희생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11월추수봉기에는 산이면 상공리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오장록과 오홍탁, 오임탁 등에 의해서다. 이들은 일제시대 농민의 이익 옹호와 일제에 항거할 목적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벌였고 해방 후에도 해남농민운동의 주요인물로 참여해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미군정의 잘못된 농업정책과 일제시대 조선인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친일관료와 친일경찰 청산을 요구하며 11월추수봉기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제7장 해방 전후 사회운동 관련 인물(241쪽 ~ 262쪽)
<목차> - 김홍배 - 오홍탁 - 오장록 - 김정수
(248쪽 ~ 250쪽) 오 홍 탁 / 산이 상공출신 / (1913 ~ 1950) 오홍탁은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401번지 양지마을 출신으로 경찰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에 현직 경찰로서 적색농민운동을 주도해 전국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이 사건을 소개한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는 한 면을 할애 할 만큼 오홍탁과 관련된 적색농민조합 건설위원회의 사건과 그를 소개했었다. 조선일보 1934년 9월 7일자 호외에는 '순사로 재직하면서 적색농민조합 멤버로 활약 / 학생시절 독서회의 조직자, 서내에서는 모범경관'이라는 표제를 달고 그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사건에 관계된 인물로서 가장 주목을 끄는 사람은 현직 경관으로 결사의 이면에서 활약하다가 탄로, 당국자는 물론 일반사회도 놀라게 했다는 내용으로 강진경찰서에 근무했던 오홍탁을 적고 있다. 이어 조선일보에는 '오홍탁은 산이면 상공출신으로 해남농업실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재학중에는 독서회라는 사회과학연구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를 연구하였고 졸업후에는 각 촌에 독서회를 만들고 소작쟁의 등을 지도했다. 또한 경찰계에 들어가서 비밀을 탐지하는 동시에 동지들과 연락활동을 하려고 소화 8년 당시 주요언론이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호외를 발행하고 몇 달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전남운동협의회 및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발각 사건은 당시 사회를 들끓게 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적색농민조합운동은 1930년대 농촌지역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일체의 합법적인 운동이 봉쇄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때의 독립운동은 비합법적으로 전개되었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앞에 20년대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왔던 많은 명망가들이 친일의 길을 선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30년대 독립운동은 비합법, 비타협 투쟁을 선택한 사회주의 세력들에 의해 전개된 면이 강했다. 1930년대는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적색농민조합과 적색노동조합이 전국에 걸쳐 조직되었다. 이러한 여파로 해남에서도 북평 이진 김홍배를 중심으로 한 적색농민조합 운동이 일어났고 이 조직은 타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광범위했고 활동내용이 대중적이었다. 김홍배와 오홍탁을 비롯한 적색농민조합 관련자들은 명망가가 아닌 1930년대 민중의 진출을 직시하며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청년활동가들이었다. 그리고 회원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 조직이 존재했던 마을의 경우 대부분의 농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을 정도로 농민들의 호응이 높았다. 그래서 사건이 적발되었을 때 검거된 숫자만 해도 558명에 이르렀다. 산이면 지부 책임자로 활약했던 오홍탁은 이 사건의 실질적인 주도자인 북평면 이진 출신의 김홍배 등과 함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전국민이 바라던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오홍탁은 첨예한 좌우익 대립속에 또다시 구속이 되고 목포지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공주형무소를 거쳐 김천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6·25 발발직후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보도연맹원으로 가입돼 갈매기섬에서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오인록씨(산이면 상공)의 증언 내용이다.
1964년 화산면과 진도 사이 무인도로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로 밝은 사회를 꿈꾸었을 그는 해방 후 5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환한 세상을 맛보지 못하고 오롯이 자신의 무덤도 갖지 못한 채 흙속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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